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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 13. 지혜로운 제자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마태복음 10장 16절입니다.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전해드릴 말씀은 제자도 열세 번째로 제목은 “지혜로운 제자도”입니다.
오늘은 좀 현실적인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제자로서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살아갈 때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가 어떤 것인지를 성경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제자가 하는 일을 네 가지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한 몸 공동체인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는 구제와 양육이고 밖에 나가서는 전도와 활용입니다. 전도 대상자에게는 전도를 하지만 전도 대상자가 아닌 경우에는 가능한 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인간관계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활용하게 되는데 오늘은 이 전도와 활용의 현장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지혜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성경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양같은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서 만나게 되는 자들은 이리와 같은 자들이기 때문에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뱀 같이 지혜롭다는 것이 과연 어떤 지혜를 말씀하신 것인지를 깨닫는 것은 우리가 제자도를 행하는 데에 있어서 절대적인 전제가 됩니다.
서구 주류 기독교와 신학의 큰 오류 중 하나는 성경의 계시를 선악의 대결로 보았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것이 서구 기독교가 빠진 가장 큰 함정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서구 기독교의 모든 오류가 이 함정 안에 다 들어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양은 선한 존재이고 이리는 악한 존재라는 개념이지요. 그런데 그 시각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엄청난 오류가 생기게 됩니다.
마가복음 10장 17절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달려와서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르자마자 예수님이 단번에 그 청년을 쳐내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라고 하셨지요. 그 말씀의 의미는 너는 나에 대해 선하다 악하다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악을 판단할 기준을 갖지 못한 자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선하신 분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오류라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계시는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악체계와 인간의 선악체계의 대결입니다. 더 좁혀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간의 선함의 충돌에 대한 계시입니다.
그런데 서구 신학이 이 부자 청년처럼 헬라 철학, 즉 헬라 세속 문화의 선악 체계를 가지고 하나님은 선하시고 이 세상은 악하다고 규정하고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엄청난 오류가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선하시고 세상은 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선악 체계를 기반으로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간은 악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서구 신학은 부자 청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선악 체계를 기반으로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간은 악하다고 해석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선악 체계와 충돌하는 인간의 선악 체계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니 서구 신학의 수많은 오류가 여기서부터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제자도를 행할 때, 즉 전도 또는 활용을 할 때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선악 체계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는 인간의 악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과 충돌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19절에서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이 핍박을 받게 되는 이유는 제자들은 선하고 세상은 악하기 때문이 아니고 제자들의 선과 세상의 선이 충돌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분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들의 분노는 저들의 입장에서는 의로운 분노가 됩니다.
이 시스템 간의 충돌을 보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뱀 같은 지혜의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며칠 전에 뉴스앤조이에서 길희성 원장이라는 분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예일대에서 신학 석사, 그리고 하버드 대학에서 비교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서울대 교수를 하고 서강대에서 20년 간 불교학을 강의한 종교학자인데 크리스찬입니다. 그런데 2005년에 “보살 예수”라는 책을 내놓으면서 자신이 종교다원주의자임을 밝혔다고 합니다. 이 분이 예일대와 하버드에서 공부한 것이 불교입니다. 종교학 차원에서 접근을 한 것이겠지요. 그러니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겠어요. 참 부럽지요. 그 좋은 머리에 그 많은 공부를 했는데 눈까지 열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분이 지금 60대 중반이신데 서강대에서 은퇴를 하시고 심도학사라는 사설 교육 기관을 강화도에 만들었답니다. 제가 읽은 기사가 비록 짧은 기사이긴 했지만 인터뷰에서 불교와 기독교에 대해 종교 다원주의적인 입장을 피력했습니다. 즉 정상에 오르는 길은 다양하다고 하면서 기독교와 불교가 모두 윤리로 귀결되는 것이니 서로 배척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 중에 제 눈에 번쩍 띈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대승불교를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서 상좌부 불교인 초기 불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반대다. 이천 년이 넘는 대승불교의 역사를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소승 불교라는 이름은 대승 불교 쪽에서 비하시키려고 붙인 이름이고 원래 명칭은 상좌부 불교지요. 이 상좌부 불교를 타락시킨 것이 대승 불교입니다. 그 대표적인 오류가 정토사상입니다. 이 정토사상의 핵심이 극락왕생인데 초기 불교에는 없었던 개념입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윤회 안에서 영겁을 빙빙 돌든가 아니면 해탈해서 윤회를 벗어나든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극락이라는 개념 자체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승 불교가 생기면서 정토사상을 새로 만들어서 끼워 넣은 것입니다. 정토사상의 대표적인 염불이 바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입니다.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 귀의합니다”라는 뜻의 기도문이지요.
정토사상에서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피안에 이르는 것을 염원으로 삼은 부처들입니다. 따라서 그 염불을 하게 되면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의 염원에 힘입어서 불자들이 정토로, 즉 극락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건 좀 심하게 말하자면 불교가 아니에요. 윤회냐 해탈이냐 외에는 없는 것이 불교지요.
왜 이런 아이디어가 나왔을까요? 바로 기복신앙입니다. 서구 기독교가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 해석한 것과 똑같은 방향입니다. 신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는 개념이지요. 어떻게 그렇게 똑같을까요? 사람이 똑같으니까 똑같지요.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기사에 댓글을 달았습니다. 3일 간에 걸쳐서 네 개의 댓글을 짤막짤막하게 달았는데 그 요지는 “기독교와 불교가 복을 누리며 살자는 기복신앙과 사람답게 살자는 휴머니즘의 유혹에서 제발 벗어나서 불교는 대승 불교를 폐기하고 상좌부 불교로 돌아가고 기독교는 기복적 기독교와 윤리도덕적 기독교를 버리고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자. 불교는 개개인이 해탈해서 열반에 이르는 쪽으로 빨리 돌아가고 기독교는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사는 쪽으로 빨리 돌아가야지 왜 부처님의 가호를 받아 극락왕생한다는 엉뚱한 생각들을 하고 있으며 왜 하나님의 은혜로 내세에 천당 간다는 생각들만 하고 있느냐? 양쪽의 진리가 각각 제시하는 현실의 참된 과제를 직시하자”였습니다.
그랬다가 제가 오늘 새벽에 꿈을 꾸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3층짜리 교회 건물을 인수하게 되었는데 거의 거저줍다시피 하는 좋은 조건이어서 입주를 하고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3주 후에 그 교회 사람들이 다시 나타나더니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왜 이러나 하고 보았더니 아직 잔금을 치르기 전이었는데 결국 우리가 건넨 계약금을 갈취하는 것이 이 사람들의 목적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시비가 붙게 되었고 결국 우리가 철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계약금은 빼앗겼지요. 그런 꿈을 꾸면서 오늘 새벽에 잠에서 깼어요. 그리고는 얼른 컴퓨터를 켜서 그 댓글들을 다 지웠습니다.
어떤 마음의 감동이 저에게 왔냐 하면, 이건 지금 쓰기 시작한 책과도 관계가 되는데, 우리의 사명이 새로운 종교개혁인데 그 사명 감당의 과정에서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뱀처럼 지혜로운 지혜가 필요한 것이지요. 저는 그 꿈이 하도 생생해서 다각도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 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다각도로 생각해 본 결과 속도 조절을 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요.
이번에 쓰는 책의 제목이 “새로운 피조물과 하나님의 나라”인데 소제목이 “가톨릭과 개신교가 잃어버린 현세 구원을 찾아서”입니다. 물론 제가 가톨릭과 개신교 전체를 비난하려는 목적으로 책을 쓰려는 것은 아니지만 논리의 전개상 반드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비판하게 되어 있지요. 따라서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고 결론짓고 그 댓글부터 모두 지웠습니다. 전반적인 진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지혜를 간구해야겠다는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한 주간 동안 지혜로운 제자도 설교를 준비하고 있던 차에 오늘 아침에 그 일까지 겪으면서 ‘아! 오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에게 뱀 같은 지혜를 요구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책은 계속 써나가겠지만 발간은 뒤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정집사님께 먼저 말씀드렸었는데 이 책을 우리 공동체가 공동 집필을 하는 쪽으로 진행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오늘 아침에 더욱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론과 실제가 균형을 맞춘 책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지요. 실제보다 이론이 너무 앞서 나가게 되면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따라서 이론을 입증하는 실제 사례들이 가능한 한 많이 수록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공고한 도덕주의 기독교와 휴머니즘 기독교의 성을 깨뜨리는 일이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지요. 여러 가지가 오늘 아침에 정리가 됐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스템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 동안 성경에서 많이 보아 왔는데 그 시스템을 오늘은 좀 다른 표현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물론 신학적인 표현입니다. 널리 알려진 표현이고 우리 다 잘 아는 표현이지만 설교에서는 처음 쓰는 표현인데 God-centric이냐 human-centric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human-centric의 대표적인 사상이 바로 휴머니즘이지요.
휴머니즘은 라틴어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말인데 후마니타스는 인간적인 것의 모두를 다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모든 문화권에서,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이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인간성 회복입니다. 사람답게 살자는 것이지요. 인간을 최고의 가치로 놓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이라든가 인권이라든가 하는 여러 가지가 나오게 되지요. 그래서 인간답지 못한 자들을 반성하게 하고 또 교육시키면서 점점 인간다운 자, 사람다운 자로 변해가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human-centric입니다. 인간 중심주의이고 인본주의고 휴머니즘이지요.
그런데 이 휴머니즘에 왜 불교와 기독교가 다 빨려들어 갔느냐? 인간이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이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이 휴머니즘이 엄청난 괴력을 발휘합니다. 길희성 박사님 인터뷰 기사에 제가 쓴 댓글이 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가공할 힘 휴머니즘이여!” 기독교든 불교든 모두 다 빨아들이는 겁니다.
우리가 양의 정체성을 지니고 전도나 활용을 위해 이리의 정체성을 가진 자들에게 다가갈 때에는 이리의 정체성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효율적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지요. 따라서 이리의 정체성은 어떤 것이고 이리들이 모여 있는 사회는 어떤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는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human-centric입니다. 인간 중심주의지요.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고 콘스탄틴 기독교인들도 만나게 되지요. 세상 사람들의 human-centric은 오히려 단순합니다. 자기 또는 자기들 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이든 이타적이든 아니면 공동체 지향적이든 그 본질은 모두가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콘스탄틴 기독교인들은 좀 복잡합니다. God-centric으로 포장된 human-centric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human-centric을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이제부터 휴머니즘 기독교와 도덕주의 기독교를 놓고 God-centric과 human-centric을 비교하면서 human-centric의 실체를 해부해보려고 합니다. 휴머니즘 기독교부터 보겠습니다. 휴머니즘 기독교는 God-centric일까요, 아니면 human-centric일까요?
Humanism Christianity, 즉 휴머니즘 기독교라는 말은 상당히 일찍 등장했습니다. 그것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싹이 나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20세기 중반 본회퍼 목사 이후의 일이지만 이 Humanism Christianity라는 개념은 이미 14세기에 등장했습니다. 13세기에 유럽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휴머니즘의 개념이 정립되는데 바로 기독교 쪽에서 반응이 나왔던 것이지요.
휴머니즘이 등장하는 순간 일부 기독교인들이 거기서 영감을 받습니다. ‘아! 성경 말씀의 진리가 바로 저 휴머니즘이 아닐까? 하나님이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고 또 그토록 사랑하시니 인간이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휴머니즘에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는 개념을 슬쩍 끼워 넣습니다. 성경의 약속은 인간답지 못한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킴으로써 인간다운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이지요. 생각 좀 한다는 사람들은 모두 그쪽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길희성 박사님처럼 말이지요. 휴머니즘 기독교의 목적은 결국 사람다움, 인간다움, 즉 휴머니즘 자체가 되어버리지요.
그렇다면 전통적인 도덕주의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신본주의, 즉 God-centric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보수 기독교에는 지금도 인본주의에 대항해 신본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학자들 중에도 많아요.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신본주의는 사실은 God-centric이 아니고 God-centric으로 포장된 교회 우상주의입니다. 교회 제도와 교회 시스템을 인간보다 높은 곳에 설정하고 그것을 God-centric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교회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유럽 중세시대를 암흑시대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인간보다 교회를 더 높은 곳에 위치시킨 자들이 권력까지 쥐고 있었으니 암흑시대라고 부를 만하지요.
인간보다 교회를 위에 놓고 God-centric이라고 주장하면서 현실의 삶은 오히려 human-centric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도덕주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God-centric의 실체입니다. 다들 공감하시지요? 예전에 그런 신앙생활을 모두들 하셨으니 아마 공감하실 겁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더 혼란스러운 가치관과 변덕스러운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 중 핵심적인 부분 한 곳을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로마서 7장 1절부터 4절 말씀에 대한 강해입니다. 우선 본문을 봉독하겠습니다.
(롬 7:1-4)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이 본문에 대한 로이드 존스의 강해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 중 다섯 번째 항목인데 모두 네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잘 들어 보세요. 아주 재미있습니다.
“복음은 율법을 폐기하지 않고 세우고 완성시키는 일을 합니다.
1) 구원의 전체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다 지키게 되었고 지켜야 할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새 언약을 누리고 있습니다.
3)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4)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우리로 율법을 지키며 살 수 있게 해주기 위함이며 하나님께 대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똑같지요? 똑같습니다. 뭐가 다를까요? 내용이 다릅니다. 사랑이 다르고 열매가 다릅니다. 논리의 구조, 즉 형식 논리는 우리와 똑같지만 그 내용이 다른 것이지요. 로이드 존스가 말하는 네 가지는 형식논리는 God-centric이지만 내용은 human-centric이에요. 우리가 밖에 나가서 제자도를 행할 때 만나게 되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런 콘스탄틴 기독교인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휴머니즘 기독교나 도덕주의 기독교보다 못할까요? 세상 사람들은 더 정의롭습니다. 서구 신학보다 서구 철학이 훨씬 더 깊이가 깊습니다. 인간에 대한 연구도 서구 철학이 훨씬 더 깊이 있게 되어 있고 법체계 윤리도덕체계 모든 것이 신학보다 뛰어납니다. 진짜 전문가들은 헬라 철학자들이에요. 마치 요즘 심리학이니 상담학이니 이런 것을 기독교가 세상 학문에서 빌려오는데 진짜 전문가는 세상 심리학자이고 상담도 세상 사람들이 정말 깊이 있는 상담을 합니다. 기독교 인사들은 그 세상의 전문가들을 흉내 내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철학과 가치체계에 대한 것과 선과 악에 대한 개념과 법체계, 윤리도덕과 휴머니즘 모든 것이 세상 사람들이 전문가에요. 기독교인들은 그걸 빌려다가 이용하는 비전문가들입니다. 그건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신학자들이 철학자들 쫓아가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요즘 한참 유행하고 있는 과정신학요? 과정신학이 요즘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데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을 빌려다가 어떻게 해보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휴머니즘은 세상 사람들의 지혜입니다. 르네상스로부터 18세기 말까지 거의 사오백 년을 집적해온 서양 철학이 삶의 현장에서 폭발한 것이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운 프랑스 대혁명입니다. 오랜 동안 엄청난 천재들이 동원되면서 발전해온 사상이 휴머니즘입니다. 그것을 기독교가 탁 잡은 거지요. 그래서 억지로 성경에다가 끼워 맞추어서 나온 것이 휴머니즘 기독교인데 이 일을 한 사람들이 전문가냐? 뭐 어느 정도는 전문가겠지만 진짜 전문가는 세상 철학자들입니다.
미국의 휴머니스트 철학자들이 발표한 것이 제가 몇 번 말씀드렸던 휴머니스트 메니페스토, 즉 휴머니스트 선언입니다. 거기서 1장이 “이 우주는 창조된 것이 아니고 저절로 생겨난 것이다”입니다. 신에 대한 부인부터 시작합니다. 그 사람들이 왜 1장에 굳이 그런 말을 넣었을까요? 휴머니즘 흉내를 내는 기독교인들을 떨쳐버리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자꾸 졸졸 따라오거든요. “같이 놀자. 우리도 사실은 너희와 생각이 비슷해” 하면서 자꾸 따라 나오니까 한 칼에 쳐내버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휴머니즘 기독교는 휴머니즘의 변형된 아류라는 것을 알거든요. 그래서 기독교를 아예 접근도 못하게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걸 모르고 계속 휴머니즘을 짝사랑하면서 쫓아가지요.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그런 전문가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과 만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예요. 논리체계와 정의체계와 법체계, 윤리도덕과 휴머니즘의 진짜 전문가들을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겁니다. 자신들을 선하다고 확신하고 또 세상 기준으로는 웬만한 기독교인들보다 더 선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의 기준으로는 기독교인들보다 더 정의롭게 사는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가 나가게 되는 겁니다.
다시 서론으로 잠깐 돌아왔는데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 콘스탄틴 기독교인을 만났을 때와 세상 사람을 만났을 때를 구분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콘스탄틴 기독교인을 만났을 때 우리가 전도를 할 수도 있고 활용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에게 전도를 할 것인가 아니면 활용을 할 것인가를 우리가 그때그때 지혜롭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많은 경우에 성령의 인도를 받고 신탁을 받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콘스탄틴 기독교인들을 만나는 상황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대교인들에게 의해서 핍박을 당한 상황과 상당히 비슷한 구도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동족인 유대교인들에 의해서 버림을 받고 핍박을 받으셨고 제자들도 스데반이나 사도 바울과 같은 경우 유대인들에 의해 순교를 당하기도 하고 많은 핍박을 받았지요. 이 상황이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콘스탄틴 기독교의 교리, 성경 해석, 도그마에 의해서 공격을 받게 되지요. 이 경우에 우리의 대처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순교까지 당하는 적극적인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우리도 콘스탄틴 기독교와 다를 것이 없는 양 하면서 그들을 활용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이 고린도전서 9장 19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먼저 21절까지 봉독합니다.
(고전 9:19-21)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교인에게는 유대교인인 것처럼 위장해서 접근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인 것처럼 위장해서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것이지요. 무엇을 위해서? 19절에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단 한 사람에게라도 더 새 생명을 주려고 온갖 위장술을 다 동원한다는 말씀입니다. 22절과 23절을 봉독합니다.
(고전 9:22-23)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면서 사명을 감당합니다. 굳이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human-centric의 가치체계와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의 부딪힘이라면 굳이 변신을 할 필요가 없지요. 설득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 다른 선과 선의 부딪힘이기 때문에 위장술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제가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를 하나님의 역사라고 감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만약 사오십 년 전에 은혜를 받았다면 콘스탄틴 기독교의 종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때만 해도 거기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지요.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무조건 기존 교단에 들어가야 하고 무조건 기존 교단의 도그마에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 외에는 길이 없었어요. 아니면 이단아로 그냥 매장되고 말지요. 백 년 전이었으면 화형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것이 이렇게 변한 것이지요. 정말 하나님의 역사라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지혜롭게만 대처를 하면 사도 바울처럼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면서 별 탈 없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로마서 13장 1절에서 5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롬 13:1-5)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굉장히 알쏭달쏭한 말씀이지요? 이 말씀을 악용하는 것이 독재국가의 기독교입니다. 박정희 때나 전두환 때 설교자들 입에서 많이 나왔던 성경 구절이지요. “이 말씀을 봐라! 유신독재라니! 말도 안 된다. 하나님이 세우신 유신 정부이고 5공화국이다!” 이 말씀을 참 많이들 사용했지요. 신학자들이 이 오류를 해결을 못합니다. 몇 달 전에 한완상 박사님이 설교하신 설교문을 보았는데 이 분이 우리와 비슷하게 이 말씀을 보시는 것을 보고 참 반가웠습니다.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아직 어린 로마교회 교인들이 경거망동하다가 교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봐 설득하느라고 이 말씀을 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3절을 보시지요.
(롬 13:3)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여기서 관원이란 로마 제국의 관리들이니 이 말씀은 로마 제국의 선악관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메시지와 완전히 모순되는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로마 관원들이 가진 선을 진정한 선이라고 규정하는 것처럼 되어 있어요. 완전히 모순됩니다. 이 말씀은 아직 어린 로마교회 교인들을 회유하려는 목적으로 한 것입니다. 세상 권력에 함부로 맞서지 말라는 것이지요. 위장하라는 이야기까지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위장하라는 이야기는 안 하고 오히려 세상 선에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설득합니다. 이 부분은 로마교회 교인들이 성장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로마교회 교인들을 말하자면 속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로마 관원들이 선하다고 하는 것이 진짜 선이니까 저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도록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한완상 박사님이 같은 시각으로, 같은 논리로 이 부분을 해석하셔서 제가 참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한완상 박사님은 민주화 운동을 하신 분이니까 독재 정권과 민주세력 간의 갈등 차원으로 보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지요. 독재냐 민주냐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선과 하나님의 선의 충돌의 현장으로 봅니다. 이 충돌 현장을 직접 성경에서 두 곳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향유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26장이지요? 우리가 여러 번 본 곳이지만 오늘의 주제인 “지혜로운 제자도”에 초점을 맞추어서 다시 보려고 합니다. 이 서로 다른 선의 충돌이라는 것을 현장에서 더 명확히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25장에서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린 자를 돌보아준 휴머니스트는 양이고 제대로 돌보아주지 않은 자는 염소로 규정하시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말씀을 하시고 나서 마지막 4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양과 염소의 비유만 보면 휴머니스트를 의인으로 규정하시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향유 사건이 벌어집니다. 마태복음 26장 6절과 7절을 봉독합니다.
(마 26:6-7)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으니 조금 전 안 그래도 예수님으로부터 양과 염소의 비유를 들었던 제자들이 광분합니다. 8절과 9절입니다.
(마 26:8-9)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완전히 휴머니즘 기독교지요?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은 때이니 제자들이 자기들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human-centric의 가치 체계에 예수님의 양과 염소 비유까지 더해졌으니 의기양양해서 펄펄 뛰는 것이지요. “아니, 저런 어리석은 여자가 있나!”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10절에서 1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26:10-12)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제자들이 양과 염소의 비유에 근거해서 향유 옥합을 부은 여자를 비난하는 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거꾸로 정죄하십니다. 이 기이한 상황은 도대체 뭐냐는 거지요. 이것이 예수님의 선과 제자들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세상 선이 충돌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면 양과 염소의 비유는 도대체 무슨 의미로 말씀하신 것일까요? 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휴머니즘 기독교가 옳다고 주장하게 만든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 키는 25장 40절에 있습니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세상에 있는 불쌍한 자들이 아니고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안에서의 상황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안에서의 의로운 행위는 구제와 양육이지요. 그러나 당시 상황은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만 되었을 뿐 아직 임한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이 말하고 있는 가난한 자들이란 누구입니까? 유대교인들입니다. 외인들이지요. 외인들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개 돼지처럼 취급될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지요. 나가서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도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주장은, 그리고 양들로 비유된 의인들의 행동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후에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말씀들이 논리적으로 충돌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안에서의 삶에 대한 말씀과 밖에서의 삶에 대한 말씀으로 철저히 구분되어 있는 것이지요.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에 앞서서 예수님에게 향유가 부어져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향유 옥합을 부은 여자가 칭찬을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이어서 성령의 역사로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를 통과하면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지금은 향유가 부어지는 것이 중요하지 백 명이든 천 명이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사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장면이 바로 God-centric과 human-centric이 본격적으로 충돌하는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human-centric이고 예수님만이 God-centric이셨던 것이지요.
이 장면을 두고 human-centric이면서도 자신들을 God-centric이라고 스스로 속고 있는 교회우상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향유 옥합을 팔아서 아름다운 성전을 세워야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건축 헌금을 내야지!” 이렇게 되는 거지요. 자주 듣던 이야기지요? human-centric이면서 God-centric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위해 향유가 뿌려진 것인데 왜 지금 예배당 건축에 향유를 뿌리자고 주장하는지 참으로 답답한 일이지요. 교회우상주의 쪽의 주장들이 대개 그런 식입니다. 논리고 뭐고 없는 거지요.
한 곳만 더 보겠습니다. 우리가 밖에 나가서 전도를 할 때 세상 사람들이 가장 큰 무기로 들고 나오는 성경 말씀이 바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다들 잘 아시니까 누가복음 10장 25절만 우선 봉독합니다.
(눅 10: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고 물으시고 이어서 29절에 이 율법사가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29절입니다.
(눅 10: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여기서 논리의 흐름을 잘 보셔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데 자기 이웃을 누구까지로 규정해야 하는가가 율법사가 궁금해 했던 부분입니다. 유대인들 중 죄인인 세리와 창기들과 가까이 지내시는 예수님의 잘못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잘못 알려진 “강도 만난 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이 비유를 드시고 나서 36절에 이렇게 물으십니다.
(눅 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정답은 무엇일까요? “사마리아인이 이웃입니다”가 정답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보다 더 추악한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지만 앗수르 침공 이후 강제로 혼혈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의 복음, 즉 새 언약은 사마리아인까지도 형제자매가 되는 하나님의 나라 복음이기 때문에 율법사로 하여금 그것을 고백하게 하시려고 길게 비유를 드셨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율법사의 입에서 “사마리아인이 이웃입니다”라는 말이 절대 나올 수가 없지요. 그래서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에둘러서 대답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 넌 안 되겠다. 넌 불합격이다. 가서 그저 human-centric인 사마리아인처럼이나 살아라”, 즉 “그냥 휴머니스트로서나 살아라”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 비유의 의미를 설명하면 사람들이 당장 뭐라고 할까요? 제가 여러 번 들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슨 그런 황당한 소리를 하느냐. 아니 불쌍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냐.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이웃 사랑이라고 이렇게 자세히 비유까지 드시면서 말씀하셨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반응이 즉각 나옵니다. 백이면 백 이렇게 반응합니다. 실제로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을 비난할 때 이 비유를 자주 들고 나온다고 합니다. 이웃 사랑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이 자신들만 못하다며 비웃는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전도할 때 말문이 막히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로 38절부터 마리아와 마르다 사건이 이어집니다. 마르다가 투덜거리지요. “예수님. 나는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당신의 제자들을 공궤하느라고 이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선한 일을 하고 있는데 저 나쁜 내 동생 마리아를 좀 혼내주세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아니다. 네가 틀렸다. 마리아가 옳다”라고 하십니다.
마르다가 왜 틀렸습니까? 마르다가 악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까? 아니지요. 분명히 선한 일을 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존재가 변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옛 사람으로서 선한 행위를 한 것입니다. human-centric이지요. 마리아는 Jesus-centric, 즉 God-centric을 지향하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진리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누가 옳으냐? 마리아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함께 God-centric이 된 연후에 함께 선한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강도 만난 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도 human-centric의 삶을 강조하시는 것이 아니고 이웃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새롭게 선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새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에 기존의 유대 공동체는 해체되고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므로 율법에 근거한 유대 공동체를 스스로 부인하게 만들기 위해서 율법사 입에서 “사마리아인이 이웃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끔 하시려고 이 비유를 이렇게 길고 자세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새 언약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고 오로지 human-centric인 자로서 인간의 선이 발동해서 인간의 선한 행위를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예수님께서 모범적 인간으로 추천하신 것이라면 성경 전체의 계시와 모순됩니다. 그것을 명확히 하시기 위해서 마르다와 마리아 사건이 바로 이어서 계시된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 전체의 맥을 깨달은 사람은 마리아와 마르다 사건이 전혀 다른 곳에 기록되어 있어도 상관이 없겠지요. 그 모순을 즉각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런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에 바로 이어서 기록된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앞에서 본 양과 염소의 비유에 이어 향유 사건이 기록된 것처럼 말이지요.
이 두 장면이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human-centric과 God-centric이 충돌하는 장면들입니다. 그리고 이 장면이 우리가 제자도를 행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현장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지혜로워져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사도 바울만큼 지혜롭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면서 그때그때 저 사람을 전도할 것인가 활용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만약 전도를 한다면 내가 윤리도덕적인 크리스찬으로 변장을 할 것인가 휴머니즘적인 크리스찬으로 변장을 할 것인가, 아니면 맞받아쳐서 그 자리에서 순교하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 온갖 선택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온갖 테크닉이 우리 앞에 있어요. 그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를 그 자리에서 기도함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도 있고 우리가 깊이 깨달은 대로 그때그때 스스로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선악관 그리고 하나님의 가치관에 대해서도 정통해야 하지만 제자도 상에서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도 냉철하게 분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그 깊은 속까지 다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의 선악관과 가치관은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이기적인 human-centric, 이타적인 human-centric, 그리고 공동체적인 human-centric인데 이번에는 공동체적인 human-centric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윤리도덕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 사회에는 윤리도덕이 있습니다.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에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공동체의 기득권층이 고안을 해서 피지배인들에게 강제적으로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이 윤리도덕입니다. 오늘날은 민주화되었으니 과반을 차지한 다수가 고안을 합니다. 형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대개는 기득권층이 다수를 뒤에서 조종하지요.
윤리도덕에는 반드시 폭력이 수반됩니다. 이를 어기는 자에 대한 처벌이 따르는 것이지요. 이것이 휴머니즘과의 겉모습의 차이인데 본질적인 차이는 휴머니즘은 공동체 개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 공동체 개념만 있어요. 그에 비해 윤리도덕은 온갖 공동체가 다 각각의 윤리도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친구들 사이에도 그들만의 윤리도덕이 있습니다. 안 지키면 즉시 왕따를 당하지요. 그리고 노는 녀석들 사이의 윤리도덕과 범생이들 사이의 윤리도덕이 또 달라요. 직장에 가면 직장 윤리가 있고 가정마다 가정 윤리가 있습니다. 시집 가보십시오. 친정의 가정윤리와는 전혀 다른 시댁의 가정윤리가 사람을 질식시킵니다. 남자가 처갓집에 가도 겪게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처세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여러 다양한 윤리도덕이 서로 충돌하면서 나에게 지킬 것을 요구하고 매를 들었다가 칭찬을 했다가 하고 이쪽에서 칭찬받고 있는데 갑자기 저쪽에서 와서 나를 발로 걷어차는 등 별일이 다 일어나지요. 모든 인간은 그 와중에서 살아가는 대단한 존재들입니다.
윤리도덕은 각각의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구하느라고 만들어 낸 테크닉입니다. 따라서 윤리도덕은 당짓기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휴머니즘에 비해 상대적으로 악한 기능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휴머니즘이 더 그럴 듯하게 보이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휴머니즘도 결정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기는 윤리도덕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리석다는 점이지요. 휴머니즘은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마치 휴머니즘이 유토피아를 만들어 주는 해결책인 양 온 인류가 속고 있는 것뿐이에요. “나는 세상의 밥이 되고 싶다.” 가톨릭 추기경 김수환 씨가 한 이 말이 휴머니즘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말인데 밥을 주면 인간의 문제가 해결됩니까? 절대 안 되지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근원은 죽음의 문제와 소외의 문제입니다. 이 죽음의 문제와 소외의 문제는 그 사람의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 동일하게 모든 인류가 가지고 있는 것인데 휴머니즘은 이 문제를 건드리지도 못합니다. 쓸데없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가지고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것이지요. 진리로부터 말입니다.
향유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세상에 이런 잔인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가난한 자가 보이면 당장 무슨 수를 쓰던 밥을 주어야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제자들이 아마 말은 못하고 속으로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을 것 같아요. 오병이어의 현장에서는 그래서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기도 했지요. 지난주에 말씀드린 부분입니다.
human-centric과 God-centric의 차이는 결국 선의 차이입니다. 선한 목적이 무엇이고 선한 행동이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서 동원하는 선한 방법이 무엇인가의 차이지요.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선과 선의 문제인 것입니다. 선의 문제에서 human-centric과 God-centric이 본질적으로 충돌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동일한 선악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까요? 요즘 세계 인구가 70억인데 이 세상에는 70억 개의 선악관이 있습니다. 70억 개의 가치관이 있어요. 우리가 이것 또한 잘 알아야 합니다. 한 부모 밑의 다섯 형제도 결국 다 다른 소리를 합니다. 사이가 원만할 때에는 다섯 형제가 의좋은 다섯 형제지만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일이 닥치면 다섯 형제가 서로 다른 주장을 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선악관이 제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엇이 옳으냐? 나에게 유리한 것이 옳다!
human-centric의 선악관과 가치관을 크게 분류하면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 공동체적이냐의 세 가지로 분류되지만 세세히 들어가면 이 세상에는 70억 가지의 선악관과 가치관이 있습니다. 70억 가지의 정의 체계가 있어요. 그것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아! 이 사람은 70억 가지 선악관 중에 이러한 선악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구나’를 정확히 판단하고 그 사람을 전도할 것인가 활용할 것인가부터 정확하게 구분하고 그 이후 그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사명의 감당을 위해서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무조건 악하다고 보면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보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가이사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아마추어이고 그 사람들이 전문가라는 것을 정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속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을 보시자마자 그 속을 간파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 개개인의 속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제자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 그렇게 성장시키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사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지혜로운 제자도에 우리가 한 발 한 발 다가서고 있는 것을 매일같이 확인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성찬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우리가 먹고 마실 때에 우리에게 지혜의 눈을 한 층 더 열어주실 줄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을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지혜를 나날이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깊이 알게 하시고 동시에 세상 사람들도 더욱 깊이 알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에게 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으니 저희들이 기도할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뱀처럼 지혜로운 지혜를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일을 이루실 줄을 믿사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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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년여동안 다원및 인본을 넘나들면서 길교수의 제자의 글을 탐독했었습니다.오늘 이 글을 읽고 많은것을 깨닫게 되네요.감사합니다!
그러셨군요.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새로운 길이 있습니다. 함께 열심히 달려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보이지 않는 전쟁을 위해 출사표를 던지는 느낌입니다^^ 오늘 말씀은 더욱더 왠지 마음이 아립(?)니다^^;;
예레미야님의 마음이 아리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고 이렇게 저렇게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
예전에 올렸던 찬양 최용덕님의 '우리가 걷는 이길은'의 가사처럼 일반적인 길이아닌 본문 말씀의 내용처럼 치열한 영적전투임을 상상하니까 갑자기 마음이 싱숭생숭 해졌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뱀처럼 지혜롭게 대해야 할 상대들이 매우 가까운 사람들이기에 더욱더 마음이 그러했나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마음이 인간적인 정이 아닌 그분들의 영혼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마음이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