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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량의 거병소식이 알려지자, 진나라에 가장 극렬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옛 초나라 사람들은 너나없이 봉기군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장강(현재 양자강)을 건널때는 진영이라는 사람이 2만명의 병력과 함께 합류하였으며, 회수를 건널때는 무장세력인 경포가 합류하였다.
또 거소(현재 안휘성)지역에서는 각종병법은 물론 지략과 처세술에 통달한 범증을 만났다. 범증은 70세에 불과한 한 명의 노인이었지만 항상 초나라 부흥을 꿈꾸고 있었으며, 이후 항우가 서초패왕이 되기까지 군사(軍師)로써 타고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그는 항량을 만나자, 진승(陳勝)·오광(吳廣) 난이 실패한 이유는 성급하게 초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라고 역설하고, 옛 초지역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초나라 왕조를 부활 시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강조하였다.
항량은 범증의 의견을 받아들여 옛 초왕실의 인물 중 한명을 초회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 시기 시황제의 공사현장에 동원될 인부 인솔 담당자였던 유방(劉邦)이, 시황제의 죽음과 함께 인부들이 모두 흩어져 버리자 100여명의 인원을 데리고 항량의 진영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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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승와 오광의 군대를 격파한 진나라 장한의 군대와 일전을 벌이는 일만 남았다. 사실 진나라 마지막 명장인 장한의 군대만 격파하면, 진나라를 무너뜨리는 일은 시간 문제에 불과하였다.
항량이 이끄는 군대는 기세좋게 산동성지역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항량은 자신이 이룬 성과에 고무된 나머지,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얻으려 하였다. 그 결과 병력을 둘로 나누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였고, 항우와 유방이 거느린 부대와 지나치게 간격이 넓어지고 말았다.
항량이 거느린 부대가 둘로 나뉘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장한의 군대는, 최대한 빠른시간안에 그들을 포위하고 말았다. 항량은 산동성에 있는 정도에서 농성하며 지원군을 오기를 기다리고자 하였지만, 농성전에 익숙치 못했던 그는 성의 방어태세를 다소 느슨하게 하였다. 이에 비해 노련한 장한은 한밤중에 몰래 병력을 성안으로 침투시켜 성문을 별다른 피해도 없이 여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일단 성문이 열리자, 대부분 휴식과 수면을 취하고 있던 항량의 군대는 일시에 밀어닥치는 장한의 군대를 막을 수가 없었다. 전군을 전멸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항량역시 전사하고 말았다.
숙부의 패전소식에 분노한 항우는 즉각적인 반격을 원하였지만, 그의 즉흥적이고 과격한 성격을 우려한 초회왕은 송의에게 임명하였다.
송의는 모든 변수를 검토한 후 신중하게 작전을 전개하는 전략가였다. 성격이 급한 항우와는 자연스럽게 마찰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송의는 장한의 군대와 조나라 부흥군이 서로 싸워 지칠대를 기다려야 한다며 한달이상이나 진지사수만을 고집하였다 .
송의의 전략이 전혀 틀렸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문제는 송의가 전투를 가급적 피하면서 손쉬운 승리만을 얻고자 하는데 있었다.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짐은 물론 군량까지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항우는 송의를 단칼에 참해버렸고, 이 소식을 접한 초회왕은 항우를 상장군에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그리고 상장군에 오르자 마자 항우는 더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진의 주력군이 있는 거록(중국 하북성(河北省))으로 진격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그가 거느린 총 병력은 7만여 명, 30만명에 이르는 장한의 군대와는, 숫적으로나 병장기 면에서 절대 열세였다. 더구나 장한은 요소요소제 산성을 구축하고, 산성과 산성사이에는 용도(勇道)라고 하는 흙담을 쌓아 연결시켰다. 그리고 각종 병법이나 전략을 섭렵한 이들에게는 이 용도를 돌파하는 계책을 생각하는 일은 대단히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최고의 지략가인 범증조차 현재의 전략으로는 도저히 돌파할 수 없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하지만 항우는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감이 차 있었다.
"인간이 만든것이면, 인간이 깨뜨리지 못할리가 없소. 나는 싸우면서 깨드리겠소."
때로는 지나치게 많은 생각이 스스로의 발을 묶을 수가 있다. 항우가 생각한 계책은 오직 하나 필사의 정신만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리하여 항우는 황하강을 건너자 마자, 타고온 배를 모조리 침몰시키고 괴력의 힘을 이용하여 가마솥을 때려 부셔 버렸다. 어차피 3일내에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모두 전멸할 수 밖에 없으니, 더이상의 식량이나 돌아갈 궁리를 한다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항우의 모습을 본 혈기왕성한 젊은 장수들 역시 솥을 깨며 필사의 의지를 다졌다. 그리고 항우의 선봉장인 경포는 3만의 손봉대만을 이끌고 맹렬한 기세로 용도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진군역시 이처럼 무모하게 돌진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방어태세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였다. 더구나 지형적으로도 좁은 병목지역이라, 숫적우위만으로는 경포가 거느린 부대를 포위하기 힘들었다.
결국 경포가 이끈 선봉대는 용도를 돌파하였다. 진군은 이 진지를 회복하기 위해 몇차례나 병력을 보냈지만 그때마다 경포는 보기좋게 물리치며 진나라가 힘들게 구축한 진지를 완전히 무력화 시켰다.
한편 항우는 언덕지역을 점령하고 진군의 본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진나라의 장수 중 최고의 맹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소각(蘇角)이 용도를 회복하기 위해 본대를 이끌고 왔다.
언덕위에서 지켜보던 항우는 주저없이 소각이 이끈 진군을 향해 돌진해 갔다. 특히 추라는 이름을 붙인 말위에서 병사를 지휘하던 항우는 가장 선두자리에 있었다. 언덕위에서 항우가 이끈 부대가 일시에 쏟아져 내리자, 진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순간 항우는 진군의 진영을 돌파하여 단 일합에 소각의 수습을 베어버렸다.
소각이 목이 떨어지자 진군은 일시에 혼란에 빠졌고, 기회를 노리던 범증이 수비병력을 이끌고 기습적인 공세를 가하였다. 여기에 경포까지 공세에 가담함으로써, 진군은 완벽하게 괴멸당하고 말았다.
진의 상장군 왕리가 사로잡힘으로써, 거록의 전투는 항우군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으며, 그가 포로로 잡은 병력만도 10만에 이르렀다.
이 거록의 전투로 인해 항우는 전국쟁패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었으며, 그의 이름은 삽시간에 중국전역으로 알려졌고, 그가 타고 다니던 말도 오추마라 하여 항우못지않은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거록의 승리는 단순하지만 예리하였던 전술과, 구태적인 병법을 넘는 필사의 의지와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서초패왕 항우 2- 진나라의 멸망과 갈려진 중국
기원전 209년 현재 중국 강소성 지역에서 초나라의 부흥과 진나라 타도를 목표로 일어났던 항량은, 기원전208년 초회왕을 옹립하고 강소성과 산동성 일대를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진의 장한에게 패해 항량이 전사하자, 항우가 상장군이 되어 장한이 거느린 주력군을 거록지방에서 격파함으로써 전체적인 승기를 잡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장한의 군대가 높은 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항전하자, 전쟁은 차츰 장기전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항우가 거느린 초군이 진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항우가 진의 주력군을 격파하기 위해 서북방향에 있는 조나라 지역으로 진격하고 있었다면, 유방은 진의 도읍인 함양을 향해 서진하고 있었다.
진의 핵심적인 전력이 항우가 이끈 초군에게 포위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도읍을 지키는 병력은 허술하고 나약한 상태였다. 특히 항우가 싸워 이기는 것을 특기로 하였다면, 유방은 노련한 설득과 협상의 전문가였다.
유방은 단 2만의 병력으로 함량을 향해 출발하였지만, 각종 처세술과 계책을 두루섭렵한 장량이란 인물이 합세함으로써 전력이 급격히 상승하였다.
그리고 장량은 적은 병력으로 무리하게 전투를 벌이기 보다는, 뇌물로 매수하거나 항복을 권유하는 방법으로 주요지역을 점령해 나갔다.
그리고 일단 한 곳이 무너지자 다른 곳도 연쇄적으로 무너져 갔으며, 도읍 함양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함곡관을 지날 떄에는, 그곳을 지키는 병사가 단 한명도 없었다.
진의 마지막 황제 자영은 전횡을 휘두르던 환관 조고를 살해 한 후, 성문밖까지 나가 항복하며 옥쇄를 바치고 목숨을 구걸하였다. 항우가 치열하게 혈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 유방은 단 한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함양을 점령, 제 3황제 자영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진시황제가 창업한 진제국을 15년만에 멸망시켜 버린 것이다.
그러나 혈전끝에 장한에게 항복을 받아낸 항우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는 진나라의 군대를 격파해가며 함곡관에 도착했을 때야, 이미 두달전인 BC207년 10월 유방의 군대가 함량을 점령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분노한 항우는 단 하루만에 유방군이 지키고 있던 함곡관을 돌파 홍문이라는 곳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유방군은 이래저래 병력을 보강하여 10만여 명에 이르렀지만, 항우군은 40만에 이르렀으며 전투력역시 비교이상이었다.
항우군과의 정면대결은 전멸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방은 항우의 진영을 찾아가 사과를 청한 후 어렵사리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것을 홍문의 모임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부터 항우는 수많은 실수를 하기 시작하였다. 항우의 군사 범증은 유방의 야심을 익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유방이 항우진영에 찾아왔을 때 그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이미 사과를 하고 함양을 넘겨주기로 한 유방을 해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판단 하여 유방을 놓아주었을 뿐 아니라, 유방이 거느리고있던 병력에 대해서도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함양을 점령한 이후 항우의 처사는 더욱 무원칙 적이었다. 유방은 옛 정을 생각하여 놓아주었으면서도, 이미 항복하여 아무힘이 없던 제삼황제 자영은 끝내 살해하고 말았다.
자영뿐 아니라 함양에서의 살육과 약탈 방화행위는 극에 달하였다. 물론 이 같은 일은 함양을 기반으로 삼던 옛 진나라 추종세력을 멸살하는 효과를 가져오긴 하였으나, 문제는 모든 오명을 항우가 뒤집어 쓰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특히 항복한 장한의 군대는 모조리 생매장시켰으면서도, 장한을 비롯한 사마흔 동예등 항복한 진의 장군에게는 함양을 삼등분 하여 삼진왕에 봉하였다.
항우가 정말 관용의 정신을 발휘아였다면, 차라리 장한을 참수하고 항복한 병사들에 대해서는 관용을 배푸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무원칙적인 논공행상으로 인해, 아래로는 민중들의 신뢰를 잃어버렸고 위로는 함양의 막대한 부를 노리고 있던 귀족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항우가 조금만 더 범증의 말에 귀 기울이고 대의를 생각하였다면, 함량을 불태우고 약탈할 것이 아니라 그곳에 축적된 막대한 재화를 바탕으로 군대를 강화시키고 나아가 중국통일의 기반으로 삼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경포를 비롯한 9명의 무장들에게 각각 땅을 분봉하여 줌으로써, 전력이 분산되었을 뿐더러 그들이 훗날 유방에세 포섭되어 버리는 악순한을 격게 된다.
항우는 떠나기 전 함양궁이나 아방궁을 비롯한, 진시황제에 의해 건립된 모든 주요 건물을 남김없이 불태웠다. 그때문에 화재는 3일이 지나도록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흙으로 비져 그 당시에는 전혀 가치가 없었던 진시황제 병마용만이 무사히 남아 있는 정도 였다.
항우는 그렇게 중국통일의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 오직 고향으로의 낭만적이고 화려한 귀환만을 서둘렀다.
고향으로 가던 길에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항우를 향해 말했다.
"세상에서 초나라 사람들은 원숭이에게 관을 씌운 꼴로, 머리를 쓸 줄 모른다더니 그말이 틀린 말이 아니군..."
물론 항우는 그 사람을 단숨에 처형해 버렸다. 중국을 통일할 기회를 저버린 항우앞으로 다가올 세상은, 혼탁함과 비정함 그리고 이해관계에 따라 배신과 야합이 판을치는 혼돈의 시대였다.
서초패왕 항우 3 중국양분의 두 주역
기원전 208년 초군을 이끈 항우가 거록지역에서 진나라의 핵심전력인 장한의 군대를 격파한 것에 힘입어, BC207년에 유방은 진의 도읍 함양에 무혈입성하였다. 그리고 유방이 거느린 군이 함양에 들어오자, 진의 제 3황제 자영은 그해 10월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진은 멸망하였다.
그러나 진의 주력군을 격파하고 사실상 진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항우였다. 또한 당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으며, 가장 많은 제후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사람역시 항우였다. 항우는 유방을 함양지방에서 축출하고, 자영을 살해하는등 실질적으로 함양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항우는 장한을 비롯한 옛 진나라 장수들에게 함양땅을 분봉해 주고, 초나라로의 귀향만을 서두름으로써 중국을 통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BC 206년 초나라로 돌아온 항우는 가장 먼저, 초회왕을 의제로 격상시켰다. 이것은 곧 자신을 비롯한 분봉을 받은 주요장수들이 왕이 뒤기위한 절차였다. 대표적으로 유방은 한왕에 봉해졌으며 경포는 회남왕에 봉해졌으며, 항우는 서초의 패왕에 봉해졌다. 항우가 서초패왕에 임명되자, 사실상 왕중왕이 되었으며 의제는 명분상의 황제로 전락하였다.
그런데 항우는 여기서 일생일대의 최악의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아무리 명분상의 황제라도 황제는 황제였던 것이다.
항우가 실제로 그러한 명령을 내렸는지 역사적으로 분명하진 않지만, 조의제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것은 항우가 역심을 품고 조의제를 살해하였다고 보기에 충분하였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은 한왕유방이었다.
항우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많았지만, 특히 당시에는 척박한 외곽이였던 촉지방이었지만 관중의 한 지역이라하여, 그곳을 분봉받은 유방은 가장 큰 불만이었다.
하지만 항우의 군대 맛설만한 전력이 못되었던 유방은 3만정도의 군대만을 모아 신속하게 봉지로 향하였다. 그러나 촉지방은 중원으로 진출하기도 힘든지역이었지만, 중원에서 공략하기도 어려운 지역이었다. 먼 후일 일이지만 유비가 제갈량의 천하삼분계책에 따라 이곳을 바탕으로 촉한을 세운것도 이러한 특수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왕유방은 즉각 전열을 정비하고 관중지역을 차례차레 점령해 가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평정한 곳은 장한이 옹왕으로 봉해진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미 항우군에게 패하여 항복했던 장한은 예전의 장한이 아니었다. 일단 장한이 패퇴하자, 진나라의 도읍 함양까지는 거칠 것도 없었다.
더구나 항우가 함양입성시 저질렀던 약탈과 방화 살육행위 때문에, 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귀족들이 대단히 많았다는 것도 한왕에게 유리하였다.
그렇다면 한왕 유방이 이처럼 관중지역을 장악하고 있을 때 항우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공교롭게도 항우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제나라의 전영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리고 항우로서는 관중지방의 유방보다는 제나라가 보다 직접적으로 초나라에 위협적이었으므로, 일단 제나라의 반란부터 진압해야 되었다. 여기에 항우의 선봉장역할을 하였던 경포역시 비협조적으로 나오며 4천명만을 증원해 주었다.
경포는구강왕으로 봉해지긴 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경포와 같은 우호세력마저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제나라와의 전쟁은 점점 장기전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항우의 군대가 발목을 잡혀있는 2년동안, 유방은 동진에 동진을 거듭하여 기원전205년에는 낙양(落陽)성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초의제의 살해소식을 접한 한왕은 즉시 조의제에 대한 추도식을 열고, 역적 항우를 친다는 명목으로 각 제후들에 대해 총동원령을 내렸다.
3월 봄이 되자 한왕이 거느린 병력은 총 56만으로 늘어나 있었다. 이번에는 아무리 항우라고 하여도, 제나라와 오랫동안 전투로 지쳐있었기 때문에 절대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모두의 예측이었다.
또 한왕 유방이 대병을 거느리고 4월 초의 도읍 팽성(彭城)에 도착할 때 까지 아무런 저항조차 받지 않았다. 그만큼 초나라 전력대부분이 제나라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동원되었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한편 산동성 성양을 포위하고 있던 항우는, 팽성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항우는 더이상 한군에 대한 공격을 미룰 수 없었다. 하지만 항우는 성양의 포위를 유지하기 위해 주력군 대부분을 남겨둘 수 밖에 없었기에, 자신은 단 3만명만의 정예병력을 이끌고 팽성으로 향하였다. 누가 보아도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불가능이 가능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도읍까지 점령한 한군은, 항우가 거느린 초군의 병력이 3만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지나치게 무방비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3만의 병력으로 공격한들 팽성을 점령한 56만의 병력에 대해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란 마음이 누구에게나 들었다. 그리하여 한군은 모두가 먹고 마시며 약탈하고 폭행을 일삼는 등, 팽성안에서 승리감에 도취된체 군기강이 완전히 흩어지고 말았다.
반면 항우는 예전 숙부였던 항량이 진나라에 당했던 전법을 그대로 썼다. 야음을 틈타 성벽을 오른 후, 아무런 피해없이 성문을 연 것이다. 그리고 초군이 성안에 진입할 때 조차, 대부분의 한군은 하루종일 유흥을 즐긴 탓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이처럼 군기강이 무너진 다음에야 승부는 더이상 숫자에 좌우될 수 없었다.
팽성안은 전쟁터가 아니라, 일방적인 대학살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그 학살은 새벽부터 날이 밝을때까지 지속되었으며, 달아나기에 급급한 한군을 추격하여 죽이고 또 죽였다. 그리하여 한군의 사망자는 무려 20만명에 육박하였다. 유방은 이 전투에서 얼마나 극심하게 패하였는지, 그의 아버지와 부인 여후마저 항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심지어 유방은 항우가 거느린 초군이 추격해 오자 자식마저 버리고 달아나려 하였다. 마침 유방을 호위하던 하후영이 만류하여 자식만은 구하여 탈출할 수 있었다.
한왕 유방은 초군의 추격을 뿌리치기 힘들자, 이번에는 구강왕 경포를 포섭하여 초군의 추격을 뿌리치고자 하였다.
한왕은 구강왕 경포가 항우의 농공행상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 항우나 제나라 반란을 토벌하러 갈 당시 단 4천명만을 증파아였다는 것은 협상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경포를 포섭하기 위해 간 수하라는 책사역시 패왕유방이 제나라를 평정한 다음목표는 경포가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초군의 추격속도를 늦춰주는 정도의 역할을 하면 한왕으로부터 보다 많은 봉지를 하사 받을 것이라 하였다.
물론 패왕 항우는 경포의 군대역시 격파하였지만, 패왕에게 격파당한 무장세력과 제후들은 모두 유방쪽에 붙기 시작하였다. 결국 항우는 승리하면 할 수록 더 많은 적들을 만들고 만 것이다.
이 한번의 패배로 유방은 10년간이나 절대 열세를 면할 수 없었지만, 문제는 항우에게는 정치적 포용능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즉 스스로 너무도 막강하였기에 싸움을 벌이면 언제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고, 그것이 수많은 적을 만들게 하였다. 반면 유방은 특유의 협상력을 바탕으로 각지에 세력을 갖추고 있던 수많은 제후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 나갔다. 유방은 관중의 풍부한 물자를 바탕으로 형양지역에서 방어전을 펼치며 천하양분의 대세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서초패왕 항우 5 - 엇갈린 두 영웅의 명암 |
서초패왕 항우 5 - 전설이 되다
서초패왕 항우는, 무예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보다 뛰어났지만, 문예에 있어서는 그리 독보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던 여인 우희가 자결할 당시, 즉흥적으로 읊조렸다는 시는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다.
진시황제가 말년에 회계산을 시찰하고 있었을때, 그 모습을 보며 '머지 않아 내가 반드시 저 자리에 오리리라'던 소년장사 항우
항우는 장성하여 숙부였던 항량을 따라 진제국 타도하고 초나라를 재건하기위한 대장정에 앞장서게 된다.
그런데 항량이 이끌던 초군이 진제국을 이끌던 장한의 30만 대군에 패하여 전사하자, 스스로 상장군에 올라 7만의 군대만으로 거록에서 장한의 군대를 완파하고 만다.
이 거록의 전투에서 애마 추를 타고 적진을 유린하는 항우의 모습은 모든 제후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으며, 이후 진의 어떠한 장수도 항우를 막지 못하였다. 그의 명성은 중국 전역으로 퍼졌고 그가 지나간 곳엔 진제국 병사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항우는 기원전 207년 12월 두달이나 먼저 관중에 입성한 한고조 유방을 축출한 후, 관중지방을 점령 진 제 3황제 자영을 살해한 후 대규모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다. 더욱이 당시 중국 경제력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관중지방을 항복한 적장 장한등에게 관중을 줌으로써 중국통일의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렸다. 또한 관중지방을 차지하려 하였던 다른 제후와 장수들의 큰 불만을 사게 되었고 진제국 추종자들의 원망조차 감수해야 되었다.
여기에 기원전 205년 초의제까지 살해함으로 인해, 한고조에게 역적을 토벌한다는 대의명분을 제공해 주고 말았다.
그로부터 패왕 항우와 한고조의 전국쟁패는 약 5년간 지속된다. 하지만 주력군이 홍강을 사이에 두고 장기전으로 흘러가면서 후방 보급과 병참선의 견고함을 내세운 한군이 점차 우세해 지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막강한 군대도 보급없이는 버틸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경포나 한신같은 맹장조차 항우를 배신하여 유방에게로 가고, 또 범증은 항우와의 잦은 다툼 끝에 결별하고 말았다.
이제 그는 홀로 전방과 후방을 오가며 힘겹게 싸워야만 했다.
싸울때 마다 승리하였지만 승리할 때 마다, 그의 지지세력과 병사 수는 줄어 들었다. 중국 땅의 수많은 제후들은, 강인한 영웅 항우보다는 타협에 능한 유방을 선택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항우는 기원전 203년 유방과 천하를 양분하기로 약속하고 , 인질로 잡고 있던 유방의 아내와 아버지를 돌려 보냈다.
그러나 천하통일에 비한다면 양국간의 약속은 가벼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기원전 202년부터는 유방은 즉시 항우의 뒤를 쫓기 시작하였고, 항우에겐 더이상의 증원군이 없었다.
항우가 퇴각할 때 초군의 총 병력은 10만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그 병력만으로 30만이나 되는 한신의 군대를 격파하고, 또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한나라의 군대와도 대적해야 되었다.
해하( 垓下중국 안휘성)라는 곳에 까지 퇴각하였을 때 남은 병력은처음부터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8백명의 초군과 항우의 애마인 추,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 우희뿐이었다.
그런데 한군은 초군을 심리적으로 자극하기 위해 초나라의 옛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흘러 나오자, 곧 초군은 사기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모두들 한나라에 투항한 초나라 병사가 저렇게까지 많았던가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일컬어 사면초가라고 하지만, 이 고사성어의 유래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극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던 항우도 심적 동요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무엇인가 특단의 대책이 없다면 이대로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리고 이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을 때, 갑자기 우희의 자결소식이 들려온다. 그녀가 왜 죽음을 선택하였는지 정확한 동기는 알 수 없지만, 창과 검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한 여인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거기까지가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죽어서라도 항우를 따르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려 하였을 것이다. 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만큼 퇴각속도도 느려질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자기자식마저 버리려 했던 무정한 아버지 한고조 유방과는 다른 점이었다.
비록 대항하고 배신한 대상에게는 참혹하리만치 잔인한 면이 있었지만, 자신을 따르는 장수들에게는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똑같이 나누어 주며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던 것이 항우의 진면목이었던 것이다.
우희의 희생으로 초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제 그들에게 더이상 삶과 죽음은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오직 항우가 가는 곳에 함께 있는 것이 전부였다. 항우는 단 8백의 병력으로 새벽을 틈타 수만명이 지키고 있었던 한군의 포위망을 보기좋게 돌파하였다.
하지만 수십겹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회수를 건넜을 때, 자신을 따르던 초군은 1백여명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동성(東城)이란 곳에 도착하였을 때 남은 병력은 28명이 전부였다. 추격해 오는 한군은 5천여 명, 이대로라면 곧 추격당하여 전멸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항우는 오히려 단 28명의 병력으로 반격을 시도하였다. 그의 전술은 28명을 4대로 나눈다음, 3개 지점에 집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항우가 직접 오추마를 타고 기습적인 돌격작전을 펼치니, 추격해 오던 한군은 일시에 무너졌다.
한군이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여 3개 지점에 있던 항우군을 각개격파하기 위해 병력을 셋으로 나눈 사이, 항우는 처음 출발하였던 지점을 향해 재차 돌격을 감행하였다.
병력이 재 집결 했을 때, 돌아오지 못한 사람은 단 두명뿐이었다. 항우는 이 한번의 돌격작전으로 인해, 추격을 뿌리칠 수 있는 상당한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오수만 건너면 고향땅에 들어 갈 수 있었다. 다만 강을 건널 수 있는 교통수단이 겨우 1~2명이 탈 수 있는 나룻배가 전부였다.
누군가는 남아서 추격병을 따돌리거나 시간을 벌어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도데체 누굴 남긴다는 말인가, 한명 한명이 마치 자신의 팔다리나 같은 동지들이었다.
이제 항우는 결심을 굳힌다.
그리고 오추마에서 내려 뱃사공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
"내가 처음 이강을 건넜을 때는 8천여 장병과 함께 였으나, 전부죽고 지금은 이정도 밖에 남지 않았으니 무슨 명목으로 고향에 돌아가겠소, 그저 이 말이나 죽이기 너무 아까우니 데려가시오,"
항우는 남은 26인의 용사와 함께 최후의 일전을 치루었다. 항우를 포함한 27인의 용사는 마치 한덩이리처럼 용맹하게 한군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한군은 추격병만 5천여 명, 일당백을 자랑하던 용사들도 한명 한명 차례 차례 죽기 시작하였고, 항우도 곳곳에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항우는 혼자 남게 되었다. 그리고 몸조차 가누기 힘들정도로 힘이 빠져나가서야 항우는 상대방의 장수가 다름아닌 고향친구 여마동임을 확인 하였다.
"여어, 여마동 아닌가? 그래도 고향 친구를 보게 되니 반갑군.내 목에 상금이 걸려 있으니 기왕이면 고향친구에게 주겠네"
기원전 202년 만 30세의 항우는 그렇게 목을 베어 자결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을 차지하기 위해 수백명이 한꺼번에 몰려서, 압사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그 시신은 다섯조각 났고, 여마동을 비롯해 그 시신을 차지한 다섯 장수들은 훗날 초나라 땅을 다섯등분하여 분봉받게 되었다. 하지만 갈려진 초나라는 두번다시 예전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훗날 오나라와 초나라 연합하여 반란을 꾀하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고 한다.
산을 뽑아 버릴 힘도
천하를 제압할 기백도
이제는 쓸모가 없어졌네,
때가 이롭지 못하니
추도 달리지 않는구나
추여 너머자 달리지 않으니
어쩌랴
우희여, 우희여, 그대를 위해 해줄 것은 없구나.
항우는 지고 유방은 승리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역량을 다해 싸우다가 진 것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또한 항우는 진제국의 강병들은 물론, 중국 각지 제후들의 주력군을 격파해 줌으로써, 이후 한고조가 중국을 재통일해 가는데 간접적으로나마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그래서일까 서초패왕 항우는 중국 역사상 가장 긴 여운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한고조와 패왕항우의 일전은 동양장기판의 유래가 되었고, 소설 초한지역시 이 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뿐 아니라 난세속에 피어난 항우와 우희의 사랑이야기는 중국의 대표적인 경극인 패왕별희로 남아있게 되었다.
역사는 결코 승자만의 것이 아니며 승자만을 기억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여, 시대를 풍미한 사람이라면...그리고 그의 삶이 역사의 생명을 불어 넣는 또하나의 핏줄기가 된다면...역사는 그사람을 반드시 기억 할 것이다.
발상의 전환 배수의 진으로 승리한 한신
불우하였던 젊은 시절
한신(韓信)은 중국 회음(淮陰)출신으로, 집안도 가난하였고 딱히 내세울만한 재주도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덩치가 남보다 컸고 항상 장검을 차고 다닐정도로 검술에는 능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날 한 불량배가 한신에게 시비를 걸며, 그 칼로 자기를 찔러보라며 그럴 용기가 없으면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라고 한다.
물론 한신은 단칼에 그를 능히 벨만한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갔다. 비록 다른 사람에게 겁쟁이라고 조랑받더라도, 쓸데없는 작은 시비에 사람목숨을 빼앗는 것보단 나았기 때문이었다.
훗날 한신은 공을 인정받아 초왕으로 봉해지지만, 초나라지역에서 일어난 반란과 관련하여 모함을 받고 회음후로 격하되었다.
따라서 그를 한 회음으로도 부른다. 회음후가 된 한신은 불만을 품고 BC 196년 반역을 꾀하였지만 끝내 참살당하였다.
불우한 청년시절을 보냈던 한신이지만, 결코 희망을 잃지 않으며 늘 마음 속으로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기에,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 위해 항량의 군대에 가담하게 되었다. 하지만 직책이 워낙 낮아 별다른 전공을 세울 기회도 없었고, 항우가 상장군에 있을 당시에도 여러가지 책략을 연구하여 올렸지만 채택되지도 못하였다.
생각다 못한 한신은 항우의 진영을 탈출하여 한고조의 진영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이곳에서도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지만, 한고조의 경호대장역할을 하며 몇번이나 목숨을 구해주었던 하우영의 눈에 들어 차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한고조로부터는 그리 인정을 받지 못하자, 어느날 군영에서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탈영병에 불과하였던 한신을 잡아들인 사람은, 유방에게서 천하최고의 공신으로 평가받던 소하였다. 그동안 수십명의 장군과 제후들이 이탈하였을 때도 전혀 동요하지 않던 소하가 직접 한신을 설득하기 위해 나섰던 것이다. 또한 소하는 한신과 같은 인물은 두번 다시 구할 수 없을 것이라며, 중국을 제패할 야망을 갖고 계시다면 한신과 같은 인물과 반드시 함께 해야 된다며 대장군직에 추천하였다.
평소에 소하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던 한고조였지만 반신반의하며 한신을 불러 그의 소견을 들어보기라도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항우와 유방 두명 모두를 장군으로 섬긴 일이 있던 한신은, 어느 누구보다도 그들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항우에 대하여, 그 위력은 한고조를 앞도하지만 부하들을 믿고 군대를 맡기지는 못하며 늘 겸손하고 자애로우면서도 막상 농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는 늘 망설인다고 하였다. 즉 장수로서는 출중하지만 중국전체를 쟁패하기엔 부족한 인물이라는 것이 그의 평가이다. 반면 유방에 대해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할 줄 알고, 욕심이 많은 인물이기에 제후의 탐욕을 헤아릴 줄 아는 것이 장점이라는 내용의 진언을 하였다. 따라서 관중지방의 민심을 장악하고 논공행상시 과감한 포상이나 분봉을 통해 제후와 협력해 나간다면 틀림없이 중국을 쟁패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말을 들은 한고조는 한신을 너무 늦게 알았다며, 곧바로 대장군직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그리고 한신은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한나라의 동진할 때에는 선봉장 역할을 다하였다. 또 초나라의 공격에 위해 위기에 빠졌을 때는, 초나라의 배후를 처 패왕 항우로 하여금 군대를 되돌리도록 만들었다. 이어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왕을 체포하는등 한고조의 관중장악에 1등 공신이 되었다.
생사를 건 정형의 전투
이후 한신이 치른 전투는 수십차례가 넘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단 1만명의 군대로 조나라 20만의 대군을 격파한 정형의 싸움이었다.
이때 조나라의 이좌거는 왕족 성안군에게, 한신이 군대는 1만에 불과하며 천리길을 행군하여 달려오고 있기 때문에 3만명의 군사만 내어주면 기습작전을 펼쳐 보급로를 끊을테니 그 사이 총격을 하자는 계책을 내어 놓았다.
그러나 성안군은 광무군 이좌거의 계책을 무시하고 오직 수성전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이런 사실을 안 한신은 조나라의 군대를 맡고 있던 성안군이 그리 유능한 지휘관이 못 된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다만 워낙 숫적 열세에 있기 때문에, 성안군이 아무리 무능한 장군이라도 무력으로만 성을 탈환하기는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한신은 2천여 명을 매복시켜 성(城) 점령을 지시한 후, 자신이 직접 미끼가되어 조나라 주력을 성밖으로 끌어내 대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한신의 계획한 유인 작전은, 그 당시 금단의 전술로 평가되던 배수의 진이었다. 강을 앞에두고 싸우는 것이 전통적인 병법이었고, 또 상식적으로 퇴로를 어느정도 확보하고 싸우는 것이 정상적인 전술이었다.
하지만 한신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만약 적은 병력으로 도망갈 것 부터 생각하고 싸우다간 패할것이 분명하였다. 또 조나라군대를 성밖으로 유인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이기고 있다는 확신이 들게끔해야 되었다. 그럴려면 이쪽에서 의도적으로 헛점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과연 한신이 배수의 진을 치자 성안군은 즉각 대 병력을 이끌고 총공격에 나섰다. 그런데 뜻밖에 배수의 진은 한나라의 군사들에게 더이상 물러 설 곳이 없다는 사즉필생의 동기를 부여하였다.
만약 2천명의 병사들이 성을 점령하기 이전에 먼저 본대가 무너지면 돌이킬 수 없었겠지만, 필사의 전투력이 이 위험천만한 역발상의 작전을 가능케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뜻밖에 조나라 20만 대군은 1만도 안되는 한나라의 군대를 좀처럼 격파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성안군은 눈앞의 적에만 현혹되어 정작 중요한 성은 비워 놓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바로 한신의 파 놓은 유인책에 걸려 들고 만 것이다.
성이 점령당하고, 성위에 한나라의 기가 나부끼는 것을 본 조나라의 20만 대군은 갑자기 전의를 상실하며 우왕좌왕 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한신은 8천명의 군대로 역격하자 성을 점령하였던 2천명의 군대도 배후에서 들이치며 응원하였다. 이 한번의 전투로 인해 조나라 군대는 일거에 무너졌고 성안군 역시 전사하고 말았다.
이처럼 단숨에 조나라 군사를 격파한 한신이었지만, 자만하지 않고 사로잡힌 광무군에게 스승의 예로 대하였다. 만약 성안군이 광무군의 계책을 따랐다면 1만명의 군대로는 도저히 어찌 할 수 없었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광무군에게 정중하게 조언을 구하였다.
그러자 광무군은 지금현재 병력이 지쳐있기 때문에, 무리하게 전투를 강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 보다는 조나라의 민심을 살피고 연나라에 위력을 과시하여 항복하게 하는 방법이 낳을 것이라며, 일단 연나라가 항복하면 제나라 역시 항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한신은 비록 패장이지만 광무군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였다. 그 결과 연나라는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였고, 제나라는 한신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오기도 전에 한고조에게 투항의사를 밝히고 말았다.
이렇게보면 때로는 가장 큰 위기의 상황을 이용할 줄 아는 지해가 가장 큰 기회를 만든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일 줄 알고 받아 들일 수 있는 열린마음의 자세가, 그 위기를 극복 해 나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된 것이다.
토사구팽당한 한신의 최후
한신(韓信 ?∼BC 196)이 조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연나라를 항복시킨 여세를 몰아 제나라로 진격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한신이 이끈 총병력은 10만명이 되지 않았지만, 항우가 패왕으로 있던 초나라의 오랜 공격에 시달리고 있던 제나라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한고조의 사신으로 온 역생에게 항복의사를 밝혔다.
그리하여 한신은 제나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려고 하였다. 그 때 한신의 책사인 괴통은 역생이 항복을 받아내긴 하였지만, 한고조로부터 공격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은것은 아니라며, 한신이 힘들게 얻은 공로가 역생이라는 일개서생의 공로보다 더 적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하였다.
그 말을 들은 한신은 계속하여 제나라로의 진격에 더욱 속도를 가하게 되었다. 한편 역생에게 항복의사를 밝혔음에도 한나라의 군대가 계속 진격해오자, 제왕은 역생에게 속았다고 판단하고 그를 끓는 물에 삶아 죽여 버렸다.
그리고 급히 초나라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당시 한고조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초패왕 항우로서는, 동쪽에 자리잡고 있던 제나라와의 우호관계가 매우 절실한 상태였다. 따라서 초패왕은 용저에게 20만 대군을 주어 제나라를 돕게 하였다.
그리하여 한신의 제나라에 대한 원정은 사실상 초한전양상을 띄게 되었는데, 용저는 한신과 같은 지역출신으로 그가 불량배와 건달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갔던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신의 진면목을 몰랐던 용저는 그저 싸울 용기도 없는 겁쟁이 정도로 밖에 보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상대방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이 승부를 가르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한신은 유수라는 강 상류에 모래주머니로 댐을 만들게 한 후, 초나라 20만 대군을 유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패하면서 달아났지만, 그를 가볍게 여긴 용저는 충분히 전방의 사정을 살펴보지도 않은 체 너무도 쉽게 유인책에 걸려 들고 말았다. 그로인해 용저 자신도 참살되고 말았으며 절반이상의 병력이 전사하였다.
이 승리로 인해 한나라는 초나라에 병력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을 뿐더러, 한신은 제나라를 확고하게 점령할 수 있었다.
또한 한신은 제나라가 다시 초나라와 연합하는 것을 막기위해, 자신을 임시로나마 왕으로 봉해줄 것을 한고조에게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요청은 한신이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려는 것으로 보였고, 이때부터 한고조와의 사이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초패왕 항우와 접전중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불신을 드러낼 수 없었다.
오히려 한고조는 한신에게 정식으로 제왕을 봉해줌으로써,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한편 후방배후에 강력한 세력이 자리잡기 시작하자 초패왕도 한신과의 관계를 정상화 시킬 필요가 있게 되었다.
따라서 초패왕은 한신에게 무섭이라는 사신을 보내 화해를 요청하게 되었다. 무섭은 한고조에 대해 천하를 모두 갖기전에는 군사를 거두지 않을 끝없는 탐욕을 부리고 있다고 말하며, 오늘 초패왕이 지게되면 다음은 바로 한신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따라서 서로 싸울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여 중국을 삼분하여 갖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오늘날 이 같은 지위에 오른것은 모두 한고조가 알아준 덕분이었다며 무섭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무섭이 돌가간 뒤에도 괴통이 다시 나서서 제왕 한신을 설득하였다.
초패왕과 당시 한왕이었던 한고조는 서로 싸우가다 지쳐있기 때문에, 한신이 항복시킨 위,조,연,제의 땅을 합치면 충분히 중국 3분의 형세를 갖출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신은 한고조와의 의리와 옛정을 내세우며 중국 3분의 계책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괴통도 쉽게 물러서지 않으며 다음과 같이 설득해 나갔다.
"들짐승이 없어지면 사냥개는 쓸모 없게 되어 잡아먹는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또 용기와 지략이 군주를 떨게하는 자는 몸이 위태롭게 되고 공로가 천하를 뒤덮는 자는 상을 받지 못합니다.
장군은 한왕의 신하이면서도 군주를 벌벌 떨게 하는 위세를 가졌으며, 그 이름 또한 천하에 드날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장군께서는 이미 대단히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신 겁니다."
괴통이 이처럼 간언하자, 한신도 잠시 흔들렸다. 이에 괴통은 망설이고 있는 호랑이는 벌한마리만도 못하고 기회는 두 번 오지 않는다며 더욱 한신을 설득하는데 힘을 썼다. 그러나 한신은 끝내 괴통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늘 열린마음으로 다른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한신이었지만, 한고조와의 의리를 차마 저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신은 제왕의 권좌보다 의리를 선택하였고, 초나라를 배후에서 더욱 압박하는 한편 초패왕의 주력군과 지속적인 소모전끝에 결국 격파함으로서 기원전 202년 한고조가 중국을 재통일하는데 1등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한나라가 중국을 재패하자, 황제의 제위에 등극한 한고조는 제왕 한신을 느닷없이 초왕으로 임명하였다. 비록 초나라는 한나라에 패하였지만, 가장 극렬한 반한(漢)감정이 남아있는 지역이 아닌가?
이것은 사실상 한고조가 한신을 불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또 초나라지역에서 초나라 부흥운동이 얼마동안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그조차도 한신의 반란혐위로 덮어씌워졌다.
결국 한고조는 한신을 운몽이라는 큰 호수지역으로 송환하였다. 그러나 전혀 문책받을일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한신은, 한고조와 원한이 있엇지만 자신에게 투항하였던 종리매의 목을 베어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한고조로부터 반역의 혐위정도는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런데 체포당한 종리매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초왕 한신에게 따끔하게 충고한다.
"한왕의 비위나 맞추기 위해 나를 잡아가다니, 차라리 내 스스로 목을 내어 놓겠소, 하지만 내일은 당신 차례가 될 것이오."
그래고 한신은 한고조를 믿어 보기로 하며,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갔다. 그러나 한고조는 반역혐위로 한신을 체포 낙양성으로 압송하였다. 한신은 다행히 1등공신에 책봉되었기 때문에 사형은 면할 수 있었지만, 제후로 강등되었으며 이때부터 강한 불만을 품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신은 병을 핑계삼아 조정에 입조를 거부하다가, 거록의 태수 진희와 공모하여 반역을 꾀한 것으로 사기는 전하고 있다.
그리고 진희는 과연 한고조 제위 10년만에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발맞추어 한신도 죄수들을 풀어주어 궁궐을 장악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한신의 부하중 한명이 여태후에 보고하여 발각되었다고 한다. 당시 한고조는 진희가 일르킨 반역을 진압하기 위해 도읍밖으로 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여태후가 실권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여태후는 한고조의 명을 사칭하여 한신을 불러들이기로 하고, 진희가 이미 처형당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단독으로 반란을 성공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한 탓인지, 한신은 더이상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여태후가 꾸민 가짜 소환에 응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무 무장도 없이 혼자몸으로 입궐하고 말았다. 그것이 한신의 최후가 되었다. 한신은 참수되기 직전 '그 때 괴통의 말만 들었어도 ..'란 말을 하였다고 한다. 결국 천하삼분의 기회를 저버림으로서 토사구팽의 희생량이 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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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의 반역혐위에 대해서는 몇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우선 사마천의 저서인 사기는 분명 동양 최고의 고대 역사서임에는 분명하지만, 사마천의 개인 저술로 보이는 듯한 문장과 내용구성이 여러곳에서 발견된다.
가령 둘만의 은밀한 대화나 혼자 중얼거렸던 말, 그리고 모두가 죽어 더이상 내용을 전할 수 없었던 사건들도 간혹 등장하곤 한다. 물론 역사서술에 있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역사가의 관점도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사실과 사마천 개인 사관사이의 경계점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한신의 반란역시 마찬가지이다. 진희와 반란을 공모한지 10년이나 지나 진희가 단독으로 군사를 일으켰다는 점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정말 한신이 반란의사가 있었다면 10년이라는 세월은, 세력을 쌓고 군사를 키우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특히 연이나 제지방에서 한신에 대한 지지도는 한고조를 충분히 능가하였다.
그런데 10년동안 아무준비나 하고 있지 않다가, 진희가 반란을 일으키자 감옥의 죄수나 이용하여 반란을 획책하였다는 점도 신중하면서도 철저한 준비아래 일을 진행하던 한신의 평소성격과는 맞지 않는다.
또 이미 진희가 사형당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이미 그 칼날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예측정도는 못할리 없었다. 이런 여러면을 고려 할 때, 한신의 역모혐위는 그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사마천 역시 한고조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다소 왜곡된 사건의 전말을 비판없이 다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황실을 피로 물들인 여제 여태후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황제는 진나라의 시황제였지만, 실질적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중화문명의 기틀을 세운것은 한나라 고조였다.
그러나 한고조는 기원전 202년 한나라를 세운지 얼마지나지 않아,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대부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로인해 도읍 장안성은 물론 모든 내정이 여태후에 의해 장악되어갔다.
따라서 중국역사에서는 여태후를 단순한 황제의 부인이 아니라, 한나라를 실권통치한 여제로서 평가하는 성향이 매우 높다. 그런데 이처럼 한고조를 능가하는 권력을 차지하였던 여태후지만, 한 여인으로서 아니 한 인간으로서 무척이나 불행하고 외로운 일생을 살아야만 했다.
농사군의 딸에서 황제의 부인으로
한고조 유방은 요즘으로 말하면 향토예비군 단장정도의 직책을 맡고 있던 농민출신이었고, 여태후의 아버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관상을 볼 줄 알았던 것으로 보아 士(사)족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튼 여후의 아버지는 한고조의 관상만을 보고, 한명의 농민에 불과하였던 한고조에게 딸의 혼처를 정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농민에게 시집온 여태후였지만, 고달픈 농사일조차 오히혀 자랑으로 삼고 아버지가 예언한 한고조의 미래역시 의심하지 않았다.
한편 한고조는 패의 하급 관리로 임명되었다가, 죄를 지어 숨어지내야 할 형편에 있었는데 이 때 여태후는 남편 대신 옥고를 치뤄야만 했다.
그러나 여태후는 모진 학대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한고조의 은신처를 말하지 않아 죽음의 위기까지 몰리기도 하였다. 다행히 한고조와 친분이 있던 사람이 도움으로 사면되긴 하였지만, 확실히 그녀는 남다른 강인함과 인내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어려운 시절의 경험은, 한고조가 초패왕과 더불어 중국쟁패를 벌이는 동안, 수없이 닥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게 하였다.
심지어 그녀는 한고조가 기원전 205년 초패왕에게 패하여 2년간이나 인질로 있어야만 되었다. 그런데 한고조는 퇴각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탄 수레를 가볍게 하기 위해 두자녀를 몇번이고 버리려고 했던 일이 있었다.
비록 한고조의 경호무장이었던 하후영이 두 자녀를 구하여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훗날 이 사실을 알게된 여태후는 남편인 한고조를 불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중국황실을 피로 물들인 대 복수극의 서막이 되었다.
또 기원전 198년에는 친딸 노원공주를 흉노추장 모돈에게 시집보내 흉노국을 부마국으로 삼으려는 계책을 꾸미기도 하였다. 다행히 여태후가 밤낮으로 울고 애원하여 딸이 흉노족의 부인이 되는 것은 막았지만, 한고조에 대한 불신은 더욱 깊어갔다.
어머니로서의 모정과 여제로의 야망
기원전 197년 거록에 태수로 부임하였던 진희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번에도 한고조는 직접 전장에 나서야 했다. 그런데 한고조가 도성을 비운사이, 중국통일의 1등공신이었던 한신이 초왕에서 회음후로 격하된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획책하고 있었다.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던 여태후였지만, 반란세력으로부터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정치판에 끼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정치판에 뛰어들자 말자, 다소 우유부단하고 귀가 얇았던 한고조와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옛날 조, 위, 연, 제를 차례로 굴복시키고 초패왕의 군대를 격파한 최고의 전공자 한신을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잡아들여 참수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진희가 토벌되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후, 그것을 구실로 축하잔치에 참여케 하여 한신을 참수 한 것이다.
물론 고조가 진희의 반역을 토벌한 것은 그 이후였다. 도성으로 돌아온 한고조는 최대의 공헌자이자 정적이기도 하였던 한신을 그토록 쉽사리 제거한 여태후를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후는 한신뿐 아니라 반란을 획책하다 항복한 후, 연금상태에 있던 팽월을 주살하고 일족을 몰살하였다. 뿐만 아니라 팽월의 시신을 소금에 절여 경포에게 보냄으로써, 경포의 반란을 유도하였다.
팽월의 끔찍한 시신을 본 경포는 자신도 언젠간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른 불안감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과는 참담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한고조도 경포의 반란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빗나간 화살에 중상을 입고 건강이 악화되었다. 기원전 195년 53세의 나이로 죽음에 임박해 지자, 아직 젊은 여태후가 자신이 죽은 후 외척세력과 야합하여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잠정적으로 한나라의 조종이 유씨가 아닌 여씨로 바뀔 수도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고조는 그녀를 멀리함은 물론, 그녀와의 사이에서 나은 효혜제까지 불신하였다. 그대신 한고조는 애첩 척희가 나은 조왕 여의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원래 여자의 애원에 약했던 고조는 척희가 조왕을 태자로 바꿔달라고 하자, 많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하려 하였다. 하지만 여태후역시 여자가 아니었던가... 이번에는 여태후가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궐 바닥에 업드려 울며 호소하였다. 또 이미 내정깊은 곳까지 장악한 여씨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한고조는 여태후와 사이에서 나은 효혜제에게 황위를 물려 주었다. 그리고 척희에게는 "앞으로 여후가 당신의 주인이오"라는 말을 남겼다.
목숨이라도 건지기 위해서는 여태후를 주인으로 섬기고 아무런 불평불만을 나타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태후의 자리에 올라 섭정을 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은 바뀌었다.
가장 잔인한 복수극
여태후는 그녀와 그녀의 아들이 마땅이 누려야 할 황제와 태후의 자리를 위협한 척희에 대해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95년 한고조가 사망하자, 척희를 영항(永港)에 유폐시키고 말았다.
영항이란 원래 후궁들이 거처하던 여러개의 방으로 구성된 궁중 내 건물, 즉 후궁전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 여러개의 방에는 지하로 연결되어 후궁을 유폐시키고 문초하고 또 치죄하는 용도로 쓰이는 방도 있었다.
여태후는 우선 척희의 아름다운 머리결을 밀어버린 후 목에 쇠고리를 끼우고 죄수복으로 갈아 입혀 매일마다 절구질을 하는 노역을 시켰다.
하지만 여태후와는 달리 심성이 무척 착했던 효혜제는 조왕을 구해주기 위해 항상 숙식을 함께 하였다.
사실 여태후에게는 아무리 악독한 짓이라도 '자식을 위해서'라는 위안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에게서 지독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한고조에 이은 자식에 대한 배신감은 분노로 바뀌었고, 그 분노는 역사상 길이 남을 가장 잔혹한 복수극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효혜제가 사냥을 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망설이지 않고 조왕을 독살시켜 버렸다. 조왕 여의뿐 아니라, 회양왕 우, 양왕 회, 연왕 건등 한고조와 후궁사이에서 나은 아들들은 차례대로 암살당하였다
조왕을 독살시킨 다음대상은 자연 척희였다. 그러나 이 모든 복수극의 시발점은 척희였기에, 단순한 독살이나 사형으로는 만족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척희의 손발을 모두 잘라 목과 몸만 남긴 후 눈을 도려내고 귀를 자르고 약을 먹여 말을 못하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산송장이나 다름없었지만, 아직 생명이 붙어있는 척희를 변소 구덩이 속에 던져 넣은 후 '사람돼지'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잔혹한 모습을 친아들 효혜제에게 보도록 하였다. 원래 심성이 온순하였던 효혜제는, 거의 사람의 형체는 찾아 볼 수 없었던 그 물체가 지난날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던 척희라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에 빠졌다.
결국 효혜제는 척희의 끔찍한 모습을 본지 얼마되지 않아, 제위 7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효혜제는 정실부인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따라서 여태후는 자기 집안에 있던 미인한명을 들이게 되었고, 마침 아들을 출산하자 생모를 죽이고 정실부인이 낳은 태자처럼 꾸몄다.
사기에는 그에 대해 소제(少帝)라고만 나와있는데, 소제가 4~5세 무렵 억울하게 사사당한 생모의 소식을 접하자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했던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 어린 아이는 몰랐으리라, 바로 옆에서 보좌하던 궁녀와 환관역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던 여태후의 눈과 귀였다는 것을 ... 결국 소제는 척희가 강금되었던 영항에 유폐되었으며, 얼마 후 원인 모를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소제가 사망하자,효혜제의 후궁이 낳은 아들 유홍을 황위에 옹립시켰으며, 이때부터 여태후는 8년간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비록 명목상 유홍이 3대 황제였지만, 모든 병권과 요직이 여씨 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장악되었으며 그녀가 황제의 모든 권한을 대신하는 여제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모략으로 한왕조를 구한 진평
한고조는 초패왕과 양분하였던 천하를 통일한 후에도, 각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오랜기간동안 궁성을 비워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여태후(呂后 ?∼BC 180)는 한왕조 최고의공신은 한신을 척살하는등 내정을 장악하여 갔다.
오직 칼한자루와 세치혀 뿐
꾀를 잘 내어 일을 잘 이루게 하는 사람이나, 남을 도와 꾀를 내는 사람을 모사가(謀士家) 라고 한다. 그리고 아마도 진평만큼이나 모사가란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것이다.
진평(陳平 ?∼BC 178)은 결혼하기 전까지 형집에 신세를 질 정도로 별 볼일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형만은 남다른 총명함을 지닌 진평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아무리 농사일이 고되고 힘들어도 그의 교육비를 결코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는 여기에 불만을 털어놓던 아내와 파혼 할 정도로, 진평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진평의 능력을 남달리 눈여겨보던 장부라는 사람이 사위로 삼으면서부터,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는 비록 작은 마을일을 돌보는 정도의 역할이었지만, 언제나 일을 원할하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곧 사람들도 그를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의 출세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한 때 항우(項羽=초패왕)의 밑에서 각종 전공을 세우며 두각을 나타내기도 하였지만, 유방(項羽=한고조) 관중을 차지할 때 비밀스런 공모를 했다는 의심을 받고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그가 도망자의 신세였을 때, 그에게 있었던 것은 오직 칼한자루와 세치혀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역사를 바꿀만 하였다.
천하의 모사 진평
진평은 탁월한 달변으로 단숨에 한고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과연 천하의 모사'라는 극찬을 들었다. 그는 한고조밑에 들어가자 마자, 자신을 의심하고 배척했던 초패왕에 대해 공작을 시작하였다.
무력의 힘만으로 초패왕을 이기기 힘들다는 판단한 진평은, 각 귀족과 장수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거두어 들인 후, 그것을 이간공작과 허위사실 유포에 모두 썼다. 초패왕은 장수로서 더없이 용감무쌍하지만, 다소 즉흥적이고 의심이 많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간책과 반간계는 적중하여, 초패왕을 따르던 대부분의 장수들은 떠나가고 말았으며, 신뢰가 깨진 초군은 결국 장기전에서 한나라에게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빛나는 모략은 한고조가 흉노족을 토벌하러 갔다가, 오히려 흉노족에게 포위당하여 죽을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위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절세의 미인도를 그리게 한 후 흉노족 선우(=추장, 칸)의 부인에게 주며 선우에게 이 초상화에 그려진 여인을 바치고 싶다는 편지를 동봉하였다. 그런데 왜 흉노족 선우가 아니라, 그 부인에게 준 걸까...
그것은 여자의 질투심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선우의 부인은 그림을 보자, 이 여인이 온다면 선우의 관심과 마음을 뺴앗길 것을 두려워 하였다.
결국 선우의 부인은 그림을 숨기고, 선우에게 무리한 전쟁보다는 조공을 받는 실리를 취하자고 설득하여 회군하게 만들었다.
진평은 사람의 심리를 역이용하는 탁월한 모략의 기술이 있었던 것이다.
세치 혀로 여태후의 시대를 끝내다.
그리고 한고조가 반란진압중 입은 상처로 사망하자, 총애를 받던 척부인(戚夫人)과 그 아들 조왕여의(趙王如意)를 제거하였다.
이어 한고조의 자식중 유력한 경쟁자였던 회양왕 우(淮陽王友)·양왕 쾌(梁王快)·연왕 건(燕王建) 차례대로 제거 하는 등 절대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여태후의 아들 효혜제가 재위 7년 23세의 나이로 태자 없이 죽자, 후궁의 아들 소제 공(少帝恭)을 제위에 오르게 한 뒤 소제 공도 죽이고 같은 후궁의 아들 항산왕 홍(恒山王弘)을 옹립하는등 죽기전까지 섭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특히 여태후는 여동생까지 제후로 임명하는가 하면, 친족 여산을 상국에 올리고 도읍의 군권을 장악하여, 족벌체제를 구축하여 나갔다. 이대로라면 한왕조와 유씨에서 여씨로 바뀐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진평은 여씨 일족이 전횡을 저지르고 있을때도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효혜제가 살아있을 때는 그나마 승상으로서의 직무를 다하였지만,효혜제의 사망이후에는 오히려 주색에 빠지는 등 최대한 관심밖의 인물이 되려 하였다.
여태후가 살아있는 한, 어설픈 반정은 오히려 충신세력이 몰락을 제촉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태후가 아무리 절대권력을 잡았다고 해도 영원히 살수는 없다. 약10여 년의 황권통치 끝에 60대 중반의 나이로 옆구리 통증증상으로 사망하자 기회는 오고 있었다. 진평과 주발 유장등 한고조를 따르던 충신들도 여전히 건제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도읍의 군권은 여씨일족이 장악하고 있었고, 여산 여록등이 장군으로 있었다는점이 걸림돌이었다.
좀 더 확실하게 반정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여록이 군지휘권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해야 되었다.
하지만 여록은 집안의 배경으로 높은 자리에 올랐을 뿐, 군을 통괄지휘할 역량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그는 군업무보다는 유흥을 즐기는 인물이었고, 진평은 이 점을 이용하여 그를 쉽사리 꾀어 낼 수 있었다.
군을 지휘해야 될 여록이 자리를 비우자, 군권을 장악하는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비록 한고조는 사망하였지만, 중진급 이상의 장수들은 대부분 한고조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던 전우였다.
그들에게 타도여씨일족을 외치자 병사들은 일제히 창과 칼을 높이 들고 환호하였으며, 이후 여씨일족은 모조리 참살되거나 피살되어 버렸다.
그토록 견고하였던 여씨천하가, 한 사람의 모략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정통성과 민중의 지지없이 쌓아진 권력은, 그것이 아무리 단단하고 높아보여도 한 사람의 모략에도 무너질 만큼 허무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그런면에서 볼 때 진평은 단순히 영민한 모략이 아니라, 압제에 의한 권력의 헛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반정을 성공시켰다고 할 수 있다.
동서무역로를 개척한 장건
한무제 시절, 흉노(匈奴)제국은 다소 쇠퇴기로 접어들었지만, 군사력면에서는 여전히 한나라를 압도하고 있었다. 당시 흉노는 한나라뿐만 아니라 월지국과도 대립하고 있었는데, 한무제는 멀리있는 적과는 친교를 맺고 가까운 적부터 공격 한다는 원교근공책에 따라 월지국(月氏國)과 동맹을 맺기 위한 전략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월지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흉노국을 통과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즉 목숨을 건 여정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한무제는 이 임무를 수행할 자원자를 모집하였고, 그들 중에는 장건도 있었다.
그러나 장건은 흉노제국을 통과하던중 포로가 되고 말았으며, 그곳에서 10여년을 생활하였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흉노제국의 신임도 얻었으며, 또 아내도 얻으며 차츰 흉노생활에 동화되어 가는 듯 보였다. 그리하여 흉노국은 차츰 그에대한 감시를 소흘히 하게되었으며, 마침내 장건은 아내와 함께 흉노제국을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탈출한 방향은, 한나라로 가는 길의 정반대인 서쪽. 아직 한나라 사람은 어느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지만, 가장 경계가 소흘한 곳이었기 때문에 서쪽으로의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미지의 세계로 여행
장건 일행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간 끝에, 현재 중앙아시아 지역에 있는 대원국에 도착하였다. 대원국의 왕역시 흉노국의 압박에서 벗어나 한나라와 직접 교역하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건 일행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다. 그리고 대원국의 후원을 받은 장건은 강거(키르키즈)를 넘어 대월지(우주베크)에 이르렀다.
그런데 대월지는 비록 흉노제국의 침입으로 선대왕이 사망하긴 하였지만, 흉노제국에 복속된 이후 오랜기간 평화가 지속되자 한나라와의 연합에 소극적이었다.
그렇지만 장건은 대월지에서 1년간 머물며 충분한 정보와 두터운 신뢰를 얻었다. 대월지 역시 한나라와의 교류를 원하고 있음을 확인한 장건은, 마침내 한나라로의 귀한길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이 귀한길에도 흉노국의 포로가 되었다가, 흉노좌곡려왕의 내부반란을 틈타 다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BC 126년 한나라로 돌아온 장건은 한무제에게 대원과 대월지를 비롯해, 자신이 보고들은 경험을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장건의 보고를 받은 한무제는 중앙아시아및 인도, 그리고 동남아 지역까지 교역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흉노제국의 힘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고, 장건을 흉노제국 원정에 참여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흉노제국 원정에 있어서, 장건의 활약은 그리 뛰어나지 못하였다. 즉 그는 강인한 체력과 근성으로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모험가이긴 하였지만, 뛰어난 장교는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이광장군이 흉노제국과 전투를 벌일 때, 제때 합류하지 못하여 큰 패배를 불러일으킨 일도 있었다. 이때 처형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지만, 서쪽으로의 교역로를 개척한 공이 있어 속죄금을 물고 평민으로 강등되는것으로 그쳤다.
하지만 장건이 10년에 걸쳐 얻어온 북방과 서역에 대한 정보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흉노제국을 더욱 북쪽으로 밀어부치는데 성공한 한무제는 다시한번 서쪽 국가들과의 교역을 추진하기에 이르렀고, 이 임무를 완수할 사람은 역시 장건밖에 없었다.
동서의 무역길을 열다.
다시 중용된 장건은, 사막을 건너 오손(烏孫)국에 가게 되었다. 오손국은 대 대하국과 흉노국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에 불과하였지만, 오손국의 왕 곤막은 그 부친이 흉노의 침입으로 사망하는 등 원한이 깊었다.
그리하여 곤막은 한편으로는 흉노국의 비위를 마추면서도 다른한편으로는 군사력을 키워 기회를 엿보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오손국과의 연합만 성사된다면 중앙 아시아의 다른 여러나라와 연합하는 것도 더욱 쉽게 된다.
그런데 장건이 오손국에 도착할 무렵, 오손국은 곤막과 그 아들 대록 사이에서 내부 분열을 격고있었다. 곤막의 태자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면서 잠취라는 동생을 후계자로 지명하자, 가장 실력자인 대록이 이에 반발하여 오손국을 분열시켜 버린 것이었다.
비록 장건은 오손국과의 동맹을 체결하진 못하였지만, 이러한 오손국의 사정을 이용하여 한나라와의 우호관계를 성립시키는데 성공하였다.또한 장건은 서방각지에 부사(副使)를 파견하여 무역로를 개척하였다.
그리하여 곤막왕은 한나라와의 교역을 통하여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한나라 역시 오손국을 거점으로 삼아 서역과의 무역을 확대 할 수 있었다.
동양과 서양을 가로막았던 거대한 공간의 장벽이 장건에 의해 소통된 것이다. 이후 동서양의 교류는 더욱 촉진되었으니, 장건의 무역로 개척은 세계경제의 시발점이 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