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 사망 | 1750년 ~ 180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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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이칭 : 차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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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밀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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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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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박제가는 1750년(영조 26)에 태어나 1805년(순조 5)에 타계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차수(次修) · 재선(在先) · 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 · 정유(貞蕤) · 위항도인(葦杭道人)이다. 율(栗)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승지 평(坪)이다. 소년 시절부터 시 · 서 · 화에 뛰어나 문명을 떨쳐 19세를 전후해 박지원(朴趾源)을 비롯한 이덕무(李德懋) · 유득공(柳得恭) 등 서울에 사는 북학파들과 교유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이덕무 · 유득공 ·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어 문명을 청나라에까지 떨쳤다. 3년간 규장각 내 · 외직에 근무하면서 여기에 비장된 서적들을 마음껏 읽고, 정조를 비롯한 국내의 저명한 학자들과 깊이 사귀면서 왕명을 받아 많은 책을 교정, 간행하기도 하였다.
1801년(순조 1)에는 사은사 윤행임(尹行恁)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네 번째 연행 길에 올랐다. 그러나 돌아오자마자 동남성문의 흉서 사건 주모자인 윤가기(尹可基)와 사돈으로서 이 사건에 혐의가 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805년에 풀려났으나 곧 병으로 죽었다.
2) 학문활동
1778년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 · 반정균(潘庭筠) 등의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돌아온 뒤 청나라에서 보고들은 것을 정리해 『북학의(北學議)』 내 · 외편을 저술하였다. 내편에서는 생활 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 · 사회 제도의 모순점과 개혁 방안을 다루었다. 북학을 내세운 그의 개혁관의 주요 골자는 신분적인 차별을 타파하고 상공업을 장려해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나라의 선진적인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급선무인 것으로 보았다.
박제가는 시 · 그림 · 글씨에도 뛰어난 재질을 보여, 청대 『사고전서(四庫全書)』 계열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대련형식(對聯形式)을 수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글씨는 예서풍을 띠고 있으며 조선 말기의 서풍과 추사체의 형성에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구양순(歐陽詢)과 동기창(董其昌)풍의 행서도 잘 썼으며 필적이 굳세고 활달하면서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그림은 간결한 필치와 맑고 옅은 채색에 운치와 문기(文氣)가 짙게 풍기는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풍의 산수 · 인물화와 생동감이 넘치는 꿩 · 고기 그림을 잘 그렸다.
현재 박제가의 문집은 간행된 것은 없고 사본(寫本)만이 전해진다. 사본은 시집과 문집이 따로 있으며, 모두 필사자와 필사시기는 알 수 없다. 시집으로는 『정유각집(貞蕤閣集)』 2종(국립중앙도서관장본 : 古3644-27, 규장각장본 : 奎5588)이 있고, 문집으로는 『정유각문집(貞蕤閣文集)』(규장각장본 : 古複3428-828)이 있다. 시집 2종은 전체 5책 중 일부만 남은 영본(零本)이다. 국립중앙도서관장본 『정유각집』은 3책이며, 시 560여제가 실려 있다.
3) 새로운 조선을 제시한, 북학의
북학의는 1778년(정조 2) 실학자 박제가(朴齊家)가 청나라의 풍속과 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와서 그 견문한 바를 쓴 책으로 2권 1책이다. ‘북학의’에서 ‘북학’이란 『맹자』에 나온 말로 중국을 선진 문명국으로 인정하고 겸손하게 배운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저자는 청년 시절부터 시인으로서도 유명해 연경(燕京)에까지 명성을 날렸다. 박제가는 채제공(蔡濟恭)의 호의적인 배려로 연경행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그 동안 자신이 연구한 것을 실제로 관찰, 비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3개월의 청나라 여행 및 1개월여의 연경 시찰로 그 동안 자신이 연구한 것과 연경에서 직접 본 경험적 사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더해 쓴 북학론이 바로 이 책이다.
내외편 각 1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의 내편은 거(車) · 선(船) · 성(城) · 벽(枓) · 와(瓦) · 옹(甕) · 단(簞) · 궁실(宮室) · 창호(窓戶) · 계체(階恂) · 도로(道路) · 교량(橋梁) · 축목(畜牧) · 우(牛) · 마(馬) · 여(驢) · 안(鞍) · 조(槽) · 시정(市井) · 상고(商賈) · 은(銀) · 전(錢) · 철(鐵) · 재목(材木) · 여복(女服) · 장희(場戱) · 한어(漢語) · 역(譯) · 약(藥) · 장(醬) · 인(印) · 전(氈) · 당보(塘報) · 지(紙) · 궁(弓) · 총시(銃矢) · 척(尺) · 문방지구(文房之具) · 고동서화(古董書怜) 등 30항목으로 되어 있다.
외편은 전(田) · 분(糞) · 상과(桑菓) · 농잠총론(農蠶總論) · 과거론(科擧論) · 북학변(北學辨) · 관론(官論) · 녹제(祿制) · 재부론(財賦論) · 통강남절강상박의(通江南浙江商舶議) · 병론(兵論) · 장론(葬論) · 존주론(尊周論) · 오행골진지의(五行汨陳之義) · 번지허행(樊遲許行) · 기천영명본어역농(祈天永命本於力農) · 재부론(財賦論) 등 17항목의 논설을 개진하였다.
“夫載籍極博, 理義無窮, 故不讀中國之書者, 自畫也, 謂天下盡胡也者, 誣人也, 中國固有陸 · 王之學, 而朱子之嫡傳自在也, 我國, 人說程朱, 國無異端, 士大夫不敢爲江西 · 餘姚之說者, 豈其道出於一而然歟, 驅之以科學, 束之以風氣, 不如是, 則身無所宴, 不得保其子孫焉耳, 此其所以反不如中國之大者也, 凡盡我國之長技, 不過爲中國之一物, 則其比方較計者, 已是不自量之甚者矣,”
대저 서적에 실린 것은 그 범위가 대단히 넓고 의미가 무궁하다. 그런 까닭에 중국 서적을 읽지 않는 자는 스스로 금을 긋는 것이고, 중국을 다 오랑캐라 하는 것은 남을 속이는 것이다. 중국에 비록 육상산이나 왕양명 같은 사람들의 학설이 있다고 해도 주자학의 적통(嫡統)은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나라는 사람마다 주자의 학설을 말할 뿐이며 나라 안에 이단(異端)이 없으므로 사대부는 감히 강서(江西)(육상산)나 여요(餘姚)(왕양명)의 학설을 말하지 못한다. 이것이 어찌 도가 하나에서 나와서 그런 것이겠는가? 과거(科擧)로 몰아대고 풍기(風氣)로 구속하니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몸이 편안하지 않고 그 자손마저 보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것이 중국의 큰 규모와 같게 되지 못하는 요인이 된다. 무릇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좋은 기예를 다 발휘해도 중국의 물건 하나에 불과할 터이니 서로 비교하려는 것은 이미 자신을 알지 못함이 심한 자이다.
(『북학의(北學議)-외편(外篇)』 북학변(北學辨)-)“余自燕還 國之人士踵門而請曰 願聞其俗 余作而曰 子不見夫中國之緞錦者乎 ··· (중략) ··· 其都邑城郭笙歌之繁華 虹橋綠樹殷殷訇訇之去來 宛如圖畵 其婦人皆古髻長衣 望之亭亭 不似今之短衣廣裳 猶襲蒙古也 皆茫然不信, 失所望而去, 以爲右袒於胡也 嗚呼 夫此人者 皆將與明此道 · 治此民者也 其固如此 宜今俗之不振也 朱子曰惟願識義理人多 余不可以不辨於玆”
내가 연경(燕京)에서 돌아오니 국내 사람들이 잇달아 와서 중국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중략) 그 도읍, 성곽, 음악의 번화함이며, 무지개다리, 푸른 숲 속에 은은하게 오가는 풍경은 완연히 그림과 같다. “부인네 머리 모습과 긴 저고리는 모두 옛날 제도 그대로이며 멀리서 바라보면 늘씬하여, 우리나라의 짧은 저고리와 폭넓은 치마가 아직도 몽골 제도를 이어받은 것과 같지 않다.”라고 하였더니 모두 허황하게 여겨 믿지 않았다. 평소에 생각하던 것과 아주 다르다는 듯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돌아가면서, “오랑캐를 비호한다.”라는 것이었다.
아아, 나를 찾아왔던 사람들은 모두가 장차 이 유학의 도를 밝히고 이 백성을 다스릴 사람들인데 그 고루함이 이와 같으니 오늘날 우리나라 풍속이 진흥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주자는 “의리를 아는 사람이 많기를 원할 뿐이다.” 하였는데, 그러므로 나도 이에 대해서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학의(北學議)-외편(外篇)』 북학변(北學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