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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용 연보 (1952년~2012년)
1952년 경북 의성 출생
1980년 부산 MBC 창사기념 작품 공모 입선
1981년 MBC 5천만 원 고료 방송원작소설 공모 입선
1985년 제5회 1천만 원 고료 <소설문학상> 공모에 장편소설 「청맹과니들의 노래」 당선
1986년 한국방송 60주년 기념 4천만 원 고료 미니시리즈 모집에 3부작 「그 일몰」 입선
1987년 제20회 문학사상 신인상 수상
| 저서 |
장편소설 『청맹과니들의 노래』-소설문학사, 『불매』-문학사상사, 『명命』-현암사,
『쫄병전선』-글사랑, 『기氣』-글사랑, 『대평원大平原의 황제皇帝』 - 한국문학사
『오늘은 숙제 끝』-현일사, 『이화에 월백하거든』-현암사,
창작집 『공단동 128번지』-현암사, 꽁트집 『니만 알고 있그래이』-작가정신,
전작장편 『금자金尺』-한국문학사, 『격암유록』3권, 『가위바위보』3권 등
풍운아 작가 고故 김수용에 대한 추억
박 종 해
내가 김수용 작가를 처음 만난 것은 1981년 봄에, 고 서상연 시인이 경영 하던부산일보 지사인 것으로 기억된다. 그 사무실은 동헌에서 내려와서 농 협 맞은편에 있었다.
서상연 시인의 소개로 그를 만났는데, 한눈에 그는 생활에 찌들려 초췌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가 문학 지망생이라기에 만나자마자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서상연 시인과 나에게는 그가 10년 아래인 나이였지만, 셋이 어울려 식사 도 같이 하면서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그 당시 그는 막노동, 식당일 등 매 우 어렵게 지내고 있었다.
그해 가을에, 서상연 시인이 태화루터 길 건너편에 조그마한 사무실을 내 어 출판사 간판을 걸고 그로 하여금 경영케 하였다. 그 다음해인 1982년에 공업로타리에서 신정1동 사무소 쪽으로 200여 미터 되는 곳에 서상연 시인 의 땅이 있어서, 가건물을 지어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변방시동인지 창간호가 1982년 4월 10일에 출간되었다.
1983년 여름쯤으로 기억되는데, 김수용 작가가 북구 송정동에 있는 나의 집에 놀러왔다. 그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지하 쪽방인데 생활이 말이 아니 며 도저히 글을 쓸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고 하소했다. 나의 집은 1000평 이나 되는 고가古家인데, 행랑채, 사랑채, 안채, 정각채가 있어서, 정각채는 연못이 있고, 방과 대청마루가 큰 독립된 가옥이며, 조용해서 그가 글쓰기 엔 쾌적한 곳이었다. 그래서 그가 이곳에 살도록 해달라기에 나는 술김에 쾌히 승낙하게 되었다. 김수용 작가는 나의 집 정각채에서 밤을 새워가며 작품생활을 했다.
1984년 8월 30일 성남동 울산초등학교 건너편에 사무실을 내어 처용출 판사의 간판을 걸었는데 서상연 시인이 지원하여 주었다. 그해 겨울 내가 울산문협회장이 되었는데 그는 사무국장을 맡아, 문협사무실을 처용출판사 와 겸용하였다.
그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최종선까지 올라가 낙방하였다. 실 의와 좌절로 폭음하며, 돈벌이에 나서겠다고 결심하면서 한동안 절필할 때 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재기하여, 1985년 제5회 소설문학상 1000만원 고료 공 모에서 「청맹과니들의 노래」가 당선되어, 그는 일약 전국에 알려진 소설가 가 되었다. 그당시 1000만원은 큰돈이었다.
그 작품은 TV에 방영되었으며, 나의 집이 김수용의 문학산실로 신문과 방송에 나오기도 했다. 그 후 그는 신들린 듯 밤을 새워 장, 단편의 소설을 쏟아 내었다. 그는 모든 작가들의 선망의 대상이며 극히 어려운 등용문인 문학사상 신 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울산 MBC 방송국에 근무하게 되어 생활의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우봉리사람들」, 「월남아줌마」, 「목신의 땅」등의 장, 단편이 발 표되었으며 특히 장편 「불매」는 울산의 쇠부리에 관한 역사를 조명하고, 제 철의 자료를 발굴하는데 기념비적 소설이 되었다. 1988년 「이화에 월백하 거든」과 「공단동 128번지」등의 소설은 한국 최초의 공해에 관한 소설로 특 기할 만한 것이었다. 그 후 1993년 「대평원의 황제 1,2,3권」은 장안의 지가 를 올리게 되었다.
「명命」, 「기氣」, 「격암유록」등 장편을 출간한 후 그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천 착하는 듯하더니, 그의 문학적 기질인 기행奇行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는 울산시청의 문장사로 근무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곧 그만두었다. 그 는 생활이 좀 안정되는 듯하더니, 느닷없이 시의원에 출마하였다. 그때만 해도 재력이 대단한 사람이 출마하는 시의원을 그는 무일푼으로 혼탁한 금 권 선거에 반항하듯이 기행에 가까운 선거운동을 하여 울산의 화제가 되었 다. 그때만 해도 유권자들은 술과 밥과 돈을 뿌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고 방식에 젖어 있었는데, 무일푼의 김수용 작가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돈키 호테처럼 공명선거를 부르짖으며 혼자 뛰어다녔다.
어느 날, 그는 금권선거 에 환멸을 느끼며, 공명선거를 몸소 실천한다는 뜻으로 그의 선거 사무실 2 층에서 뛰어 내렸다. 갈빗대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이 사 실은 전국 5대 신문에 공명선거의 실천자란 내용으로 크게 보도되었다. 그의 기행은 점점 심화되더니, 직장도 그만두고 스님이 되어 절간을 떠돌 기도 하였으나, 어느 독지가의 후원으로 서울근교에 절을 세운다고 했다. 불사를 건립하려다가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하여 자금을 몽땅 잃어버렸다.
그 후 그는 폭음과 방랑으로 건강이 극심하게 악화되었으나 그의 지인인 경 주 복원사 영운스님의 간호로 건강이 다소 회복되었다. 그 후 그는 가정에 돌아왔으나 약물을 잘못 복용하여 울산요양원에서 요양생활을 하다가 2012년에 타계하였다.
그는 소설문학과 문학사상으로 문단에 화려하게 등단하였으나 집필생활 은 7, 8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세월에 다른 작가들이 평생에 걸쳐 쓸 만한 작품량을 쏟아 놓고 갔다. 그가 출판사를 계속하였더라면, 지금쯤은 이름 있는 건실한 출판사 하나 가 울산에 있었을 텐데, 그리고 그가 시청에 문장사로 근무하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며 작품에 전념하였다면 대작가가 되어 전국에 명성을 떨쳤을 텐 데. 너무 아쉽기만 하다.
그는 왜 안착하지 못하고 그토록 방황하며 기행으로 떠돌았던가. 그의 일 생은 그의 소설 명命처럼 본래부터 그런 운명에 놓였던 것일까. 아니면 자기 스스로 제 운명을 만들어 간 것일까. 풍운아와 같은 그의 일생이 주마등 같이 눈앞을 스쳐간다.
대표작 /동빼기
엉겁결에 브레이크는 밟았지만 손님의 아래 위를 잽싸게 훑고 난 기사는 어수선하던 간밤의 꿈자리부터 생각한다. 마음 같아서는 모른 척하고 달려버리면 좋겠는데 주제에 독심술이라도 익혔는지 허벌허벌 차도로 기어 들어와서 두 팔을 쫙 벌리는 자세부터가 심 상치 않다. 쯧, 하고 혀를 차면서 기사는 문득 까마득하게 잊었던 속담 한 토막을 떠 올리고 쓰게 웃는다. ‘문둥이 죽이고….’ 보는 눈들이나 없다면야 좀 귀찮기는 하겠지만 잠시 인도에 내려서 태질 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병신 택시 타는 것이 무슨 그리 큰 구경거리가 되는 지 행인 대여섯이 고개를 길게 빼고 걸음을 멈추고 있으니, 승차 거부로 스 티커라도 한 장 떼이고 나면 아내의 소원인 냉장고는커녕 당장 저녁의 사납 금이 문제다.
끼니때마다 시어빠진 김치타령을 반찬 삼던 아내의 쪼글쪼글한 얼굴과, 임산부처럼 하루가 다르게 배가 나오는 사장의 개기름 흐르는 얼굴이 겹쳐 어른거리는 것을 지우기라도 하는 듯이 기사는 담배 한 대를 달아 물고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상반신을 모로 눕혀 뒷문을 열어 준다. “니미럴….” 들으라고 가래와 함께 속을 뱉었으나 손님은 청각에도 이상이 있는지 차 체를 손바닥으로 짚으며 두꺼비처럼 엉금엉금 열린 문을 향해 기어 오느라 고 여념이 없다. ‘열대여섯?’ 같잖은 손님의 나이를 어림해 보던 기사는 금방 짐작이 빗나갔음을 깨닫 고 피식, 웃고 만다. 상고머리에 원체 왜소한 체구여서 그렇지 유리창을 통해서 본 손님의 이 마에는 주름이 제법이고 손바닥만 한 얼굴에 붙은 코는 산맥처럼 우뚝하다. 사람은 틀림없는데 자꾸만 목각인형처럼 느껴지는 것은 살점이라고는 잡 히지 않을 것 같은 야윈 팔 끝에 달린 커다란 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거미발처럼 차창을 더듬어 오는 손님의 손을 보며 기사는 어릴 때 시골에 서 보았던 못 쓰는 대나무 갈퀴가 비를 맞아 뻐드러진 것과 흡사하다고 생 각한다. 도무지 지게가 맞지 않던 등허리를 핑계하며 소 판 돈을 움켜잡았던 십 년 전의 손 떨림이 생생하게 가슴에 와 닿는데 손님의 요란한 승차는 기사 의 추억마지 짓이겨 놓는다. 나름대로 무척 많은 연습을 했던지 손님은 등허리를 돌려 뒷좌석에 발딱 드러눕는다. 아니 누웠다고 판단했을 때는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싼 채 차창 밖에서 버둥거리던 발을 차 안으로 끌어들여서 천장에 딱 고정시키고, 옆으 로 한 번 더 넘어지고는 망가진 오뚝이처럼 독심술이 어설프게 상반신을 일으켜 세운 다음이다. “이내감이다.” 다섯 음절을 뱉는데, 1분이 좋이 걸린 까닭은 손님의 혀가 구실을 못한다 는 사실도 덤으로 알게 해 주었지만 수많은 취객들을 실어 나른 덕분으로 기사는 손님의 목적지가 시내라는 것을 판단한다. 기사는 물고 있던 담배꽁초를 차창 밖으로 퉤 뱉어내고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는다. 그 바람에 손님의 갈퀴 같은 손이 허공에 두어 번 그림을 그린 다. 기사는 생각한다. 행선지가 인적이 드문 곳이라면 으슥한 곳에 끄집어 내 려놓고 실컷 두드려 주리라던 애초의 계획을 고쳐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심 심하면 급브레이크를 밟기로…. 룸미러로 힐끗 훔쳐보니 갈고리 같은 손가락이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잡 고 있다. 기사는 핸들을 잡고 십 년 만에 진짜 임자 만났다는 생각과 함께 갑자기 뒤가 마려워서 견딜 수 없다. ‘으음.’ 다행히 손님이 차를 세운다. 두 다리가 온전한 사람 같다면야 오 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값 한다고 차 를 탄 모양인데, 과연 이 손님에겐 차비나 있을는지 기사는 그것이 궁금하 다. 무임승차로 고발이라도 해 버리고 싶지만 기분 찾다가는 파출소까지 움 직이는 휘발유 값만 더 손해날 것이 뻔하다. 뺨을 서너 차례 올려줄까, 아니면 엉덩이라도 씹어 차 버릴까, 망설이고 있는데 목소리라고도 할 수 없고 콧소리는 더욱 아닌 야릇한 소리가 덜미를 잡는다.
“하비.” 어른 주먹만 한 머리통은 스프링 모가지를 한 목각인형의 머리처럼 기분 내키는 대로 흔들거리고 있지만 바지주머니가 목표인 듯한 손놀림은 비교 적 정확하다. 마치 새치를 뽑듯 갑자기 주머니에서 쑥 뽑아 올린 손님의 주먹을 보고 난 기사는 눈을 껌벅거리며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확인한다. 미꾸라지를 거머쥐듯 움켜잡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 자온 지폐도 지폐지 만, 끌려 나오다가 주머니 입구에서 멈칫한 고액권들이 한눈에 보아도 십만 원이 훨씬 넘을 것 같기 때문이다. 손님은 마치 경품 뽑기를 하는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마냥 다른 한 손의 엄지와 집게손가락을 새 부리처럼 벌려서 용케 오천 원 권 한 장을 집어 들 고 기사의 코앞에 흔든다. 기사는 받는다. 미터기를 볼 필요도 없이 기본요금이니 거스름을 준비하는데 손님은 벌 써 승차를 할 때의 반대 순서로 땅에 내려서고 있다. “잔돈….” 기사는 손에 집히는 대로 지폐 서너 장을 흔들어 보이자 손님은 호주머니 밖으로 빠져 나온 돈을 쑤셔 넣으면서 비교적 분명한 발음을 한다. “팁이야.” 기사는 둔탁한 물건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현기증을 느낀다. 어지럼증을 잊기 위한 발작처럼 기사는 문을 쾅, 닫고 어금니를 사려 물 면서 결심한다. “까짓 인생….” 그날 저녁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기사네 셋방에서는 떠드는 소리와 함께 모처럼 고기 굽는 냄새가 창궐한다. 기사 아내가 볼일도 없는 부엌에 자주 들락거리는 것으로 보아 벌써 남편
에게 선물 받은 영양크림의 용량보다 더 많은 수분을 눈물로 짜내고도 자꾸 만 흘러내리는 콧물을 주체치 못하는 모양이고, 분명 제 아비가 틀림없건만 옹기종기한 아이 새끼들은 마치 거액 현상금이 걸린 지명 수배자 사진을 구 경하듯 제 애비 얼굴을 힐끔거리며 졸린 눈을 비비고 있다. 틀림없이 약속을 지킬 테니까 자라고 그만큼 일렀는데도 눈을 감으면 행 여 꿈결에라도 아버지가 몰고 나가는 택시의 엔진소리가 들릴세라 기어코 뜬눈으로 밤을 밝힐 기세들이다.
진작 공원에라도 종종 데리고 갈 걸 그랬다고 후회하며 기사는 입이 찢어 져라 하품을 한다. 정작 이튿날 기사네 단칸 셋방에는 해가 산에서 한 발이나 자라도록 코고 는 소리만 요란하다. 기사 마누라만 새벽같이 잠이 깨어 엉덩이도 돌릴 틈이 없는 부엌에서 미 꾸라지처럼 잽싸게 돌아다니며 김밥 속 넣을 나물 데쳐 놓고, 젖은 손으로 김을 굽다가 장조림 타는 냄새에 화들짝 놀라며 곤로 심지를 낮춘다. 기사는 이왕이면 택시로 가자고 허세를 부리지만 막내는 업고 끝에서 둘 째는 안는다고 하더라도 정원 초과다. 못 이기는 척하고 아내가 이끄는 대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기사는 무거운 걸음을 옮긴다. 일요일에도 바쁜 사람은 여전히 바쁜지 다행 버스는 한산하다. 빈 좌석을 찾아서 아이들이 인기척에 놀란 메뚜기처럼 흩어지는 것이 무척 고맙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영락없이 난민촌의 유아원에 서 탈출한 아이들 같다. 식도로 뜨거운 기운이 역류해 오는 것을 느끼면서 기사는 차창 밖으로 시 선을 던진다. 종일 돌아다니며 ‘아다리’ 찾기에만 정신을 쏟았지, 언제 계절이 가고 오
는지도 몰랐더니 보신탕집의 낡은 깃발은 삼복을 기념이라도 하듯 펄럭이 고 있다. “이맘때면 수박서리를 다닌다고 밤이슬도 무던히 밟고 다녔제….” 시집 같은 건 안 가겠다더니 벌써 사위를 본다는 뒷집 분숙이의 얼굴이 새삼스럽게 어른거리는데 다행히 버스가 좀 거칠게 정차를 k는 바람에 기 사는 아내가 앉아 있는 승강구를 향해 고개를 돌리다가 그만 빳빳 얼어붙고 만다. 안내양이 등허리를 떠밀어 버스 안으로 쑤셔 넣는 승객은 틀림없는 어제 의 그 손님이다. 아니 이제는 기사도 돈을 주고 차를 탄 손님의 입장이니까 그 녀석이다. 녀석은 꼬꾸라질 듯하다가 용케 의자를 거머잡고 운전석 가까 이로 간다. 빈자리도 없는데 왜 저러나, 하는 의아심과 함께 기사는 원인도 분명하지 않은 쾌감을 껌처럼 야금야금 즐기고 있는데, 뜻밖에도 한 손으로 버스의 쇠기둥을 움켜잡은 녀석의 허리가 승객들을 향해 거의 직각으로 구부려진 다. “온님 어러문 대다이 제옹 암이다. 아는 어어서 오아마미로 벙인임이다. 불앙이 앵강 아이고 안푼만 오태 주이면 대다이 감마 함이다.” 녀석은 남이야 알아들었거나 말거나 제 할 말을 마치고 다시 한 번 고개 를 끄덕해 보인다. 별 인종이 다 있군, 하는 듯한 표정으로 구경을 하고 있던 앞자리의 여자 손님이 코앞에 불쑥 들이댄 녀석의 손을 보고 뱀을 보듯 놀란다. 기사는 뚫어져라 녀석의 얼굴에 시선을 박고 있지만 녀석은 내 알 바 없 다는 듯 흔들거리며 뒷자리로 건너온다. 아낙들과 처녀 두엇이 무슨 몹쓸 물건을 버리듯이 동전 한 닢씩을 녀석의 손바닥 위에 던져주고 얼른 외면을 한다.
기사 아내도 진작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던지 백동전 한 닢을 녀석의 손바 닥 위에 얹어주고는 끌끌 혀를 찬다. “감마 함이다.” 녀석은 기사 아내에게도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 이번에는 기사 앞으로 온다. 기사는 안주머니의 지갑을 더듬어 지폐를 헤아리다가 그만 둔다. 어제 아 니면 오늘 둘 중 하나는 분명 잘못 본 것이 틀림없다고 기사는 생각한다. 수금이 끝났는지 녀석은 승강구로 돌아와 바닥에 짐짝처럼 퍼질러 앉는 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릴 모양이다. 차가 멎었지만 녀석은 다음 정류장에도, 기사네 가족들이 내려야 할 그 다음 정류장에도 내리지 않는다. 안 내리고 뭘 꾸물거리느냐고 성화인 아내에게 기사는 거짓말을 한다. 회 사에 깜빡 잊고 온 것이 있는데 종점까지 갔다가 금방 되돌아오마, 하고 안 내양에게 발차를 재촉한다. 드디어 녀석이 일어선다. 예측이 빗나간 것을 섭섭해 하며 얼른 녀석을 따라 내렸지만 기사의 정신은 극도로 혼란해진다. 녀석이 하차를 한 지점이 되돌아오는 차를 받아 타기에도 무엇다고 그렇다고 무슨 보잘 것이 있는 곳 도 아니다. 기사는 담배 한 대를 달아 물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녀석의 목적지는 신흥 주택단지의 조성으로 곧 철거가 된다는 무허가 건 물들의 지붕들이 누더기를 방불케 하는 포장 동네인 모양이다. 작업복 주머 니에서 돈 나온다고 하듯이 겉보기에는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포장 동네에도 돈은 지천이란 소문을 귀 가진 사람은 다 듣고 있는 사실이다. 이 허허벌판에 주택단진가 황금요강인가가 계획된 바람에 배추 한 포기 제대로 못 가꾸어 먹던 땅 팔아 떼 부자 되고, 공사판 인부들 상대로 술 팔 아 수지 맞추고, 말썽 없이 물러나라고 미리 듬뿍 쥐어 준 철거 보상비를 간수할 곳이 없어서 밥맛 안 난다는 사람들만 모여 하는 동네가 바로 이 마을 이란 소문이다. ‘애비 잘 만나….” 기사는 죄 없는 녀석의 조상을 들먹이며 발길을 바꾸려다 말고 녀석이 문 을 열고 들어간 술집 간판을 멍하니 올려 본다. ‘주제에 술까지 하나?’ 병신 술 마시는 꼴 구경하자고 가족들을 따돌린 것을 생각하니 막걸리 생 각이 간절하다. 두 평이 채 못 될 것 같은 홀 안을 휘둘러보면서 기사는 입맛이 확 달아나 는 것을 느낀다. 시어 터진 김치 냄새와 함께 등받이가 날아가 버린 의자에 걸맞도록 땟국이 꾀죄죄한 탁자 위에는 누가 마시다 두고 갔는지 어질러진 술잔들이 그대로 있고, 파리 떼가 잔치를 벌이고 있다.
주인도 안 보이기에 그냥 나가버릴까 하다가 기사는 정신을 번쩍 차린다. 금방이 술집에 들어 온 녀석이 간 곳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기 때 문이다. 화장실에라도 갔나 하고 의문을 달아보던 생각은 금방 고쳐진다. 왁자지 껄한 소리가 흘러 들어오는 곳으로 쪽문이 반쯤 열려 있고 기사는 쪽문을 밀면서 자라처럼 고개를 길게 빼고 함성이 터진 곳을 찾는다. 녀석은 마치 어느 나라의 귀빈이 비행기 트랩을 내리듯이 두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무리를 향해 흔들거리며 걸어가고 있었고 열대여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제각기 독특한 인사로 녀석을 환영한다. “야 임마. 빨리 온나. 안 그래도 홀애비 친정 간 옆집 마누라 기다리듯 니 기다렸다.” 멕시코풍의 밀짚모자를 쓴 청년이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녀석을 부축하러 오면서 뱉은 말은 마당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비닐천막이 들먹거릴 만큼 요란한 웃음을 터져 나오게 했으나 똥 싼 꼬락서니로 엉거주춤 서 있는 기사를 발견한 사람들은 마치 돌멩이 맞은 무논의 개구리처럼 일시에 웃음을 뚝 그친다. 웃음을 거둔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적의가 번쩍인다. 기사는 머리만 긁적거리며 서 있다. “어떻게 왔소?” 팔뚝에 ‘一心’ 이라고 문신을 넣은 건장한 중년이 웃옷을 팔에 꿰면서 자 리에서 일어선다. 그제야 기사는 이들이 무엇인가 남의 눈을 꺼리는 짓을 하고 있었다고 판 단한다. 바닥에는 멍석이 깔려 있고 주위에 널려 있는 겨우 엉덩이만 올려 놓을 수 있는 걸상들이 수상하기만 밀도살 현장치고는 관람석이 걸맞지 않 고, 밀주를 나눠 마신 자리라면 술잔이 없다. “저, 그냥….” 기사는 말끝을 흐린다. “이 양반이, 당신 뭐 하는 사람이오?” 주눅이 든 기사의 목소리에서 자신을 얻은 듯 문신의 사나이는 제법 야무 지게 다그친다. “아, 예. 나는 운전숩니다.” 기사가 운전 면허증이 든 수첩까지 내보이자 문신의 사내 목소리가 한결 풀어진다. “에이, 이 양반아. 놀러 왔으면 진작 놀러 왔다고 할 일이지 애 떨어질 뻔 했잖소. 어쨌든 오늘 또 새 선수가 한 사람 도전을 해 오시는 모양인데 운전 수고 차장이고 현금만 가져 오면 모두 오라이야. 이건 돈 놓고 돈 먹기가 아 니라 어디까지나 실력 대 실력이거든. 하하하….” 문신 사나이의 너털웃음을 신호로 막혔던 긴장감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
온다. “이 어중이 새끼야. 동빼기 하는 눔은 간을 두 개 달고 댕기는 줄 아나? 곰 달고 오는 줄 알고 쓸개 터질 뻔했잖아.” 반소매의 익살에 폭소는 또 터지고, 남들이 웃는 동안 열심히 화제를 준 비한 듯한 쥐눈의 중년사내가 웃음이 끝나기를 기다려 입을 연다. “어중이 니 어제 저녁에 장가 다섯 번은 더 갔겠구나. 그 돈 했으면….” 기사는 불구가 어중이로 불리고 있음을 안다. 어중이의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지면서 말을 맞받는다. “아도 이에 아섯먼은 안대. 에번 앳어. 히히….” 어중이는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턱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손등으로 훔 친다. “저 새끼, 하여튼 물건 하나는 끝내 준다니까. 역전 골목 아이들이 어중 이 모시기를 보건소장보다 더 극진히 한다더구만.” 누가 한 마디 거들자 나도 입이 있다고 반소매가 말을 보탠다. “다 쓸 데 없는 소리들 말어. 어중이 물건이 좋아 사타구니 벌리나, 돈이 좋아 고쟁이 내리지. 히히….” 아무도 안 웃어주자 반소매는 어설프게 웃음을 거둔다. “어중이. 니 이 새끼, 오늘 또 빈손으로 왔제? 어제 딴 돈은 다 어쨌어?” 어중이는 주머니를 탁탁 치고 손을 흔들어 다 날려 보냈다는 시늉을 한 다. “하여튼 어중이 저눔의 새끼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가물치 콧구멍이라니 까. 미치네 미쳐. 우리사 장난삼아 오락삼아 하는 운동이니까 잃고 따 보았 자 돌고 도는 게 돈이지만 어중이 저눔의 새끼가 따간 돈은 역전 골목 기집 년들 고쟁이 속으로 다 들어가 버리니… 돈 안 갖고 왔으면 꺼져 버려, 이 새끼야. 니눔만 보면 갑오년 흉년에 먹은 보리쌀 알이 곤두선다.”
어중이는 아니라고 손을 흔들며 빈 걸상을 가리킨다. “우경왔어, 우경.” “볼 일 없다니까 새꺄. 어제도 구경한다더니 막판에는 싹 긁어가 놓고….” 반소매는 기어코 어중이를 몰아내야 체면이 서겠다는 눈치다. 어중이는 들은 척도 않고 자리에 가 앉고 문신의 사나이가 스텐 술잔을 쥐고 멍석 한 끝에 쭈그려 앉으면서 기사에게 수작을 건네온다. “어이, 운전수 양반, 한 판 놀아 볼려우?” 기사는 안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웃고 한 구석으로 비켜서는데 밀짚모자 를 쓴 청년이 웃옷을 벗고 나선다. “형님 상대라면 내가 한 판 어울립시다.” “나는 또 다른 선수가 나올까 봐 썹썹드라. 얼마 거노?” 문신의 사나이가 반가워한다. “손도 풀 겸 해장삼아 이백 원짜리로 시작합시다.” 맥고는 천원 권 두 장을 꺼내 놓는다. “에이, 하면 하고 말면 말지. 이백 원쓱 따서 어느 세월에 어제 잃은 본전 찾노. 나는 반 장만 놓을란다.” 문신의 사내는 오천 원권을 턱 놓는다. “평님. 초장부터 누구 기 죽일 일 있능교? 어제 꿈자리도 안 좋던데 누가 노리 감아라.” 맥고는 좌중을 돌아본다. “좋다. 저승 가는 놈 노자 보태는 셈치고 형님이 백 원 건다.” 객석에 앉아 있던 쥐눈이 천 원 내고 또 누가 천 원을 보탠다. “그래도 백 원이 모자라잖아.” “애가 언다.” 어중이의 손바닥에는 노랗고 하얀 동전들이 어지럽다.
“개새끼, 치워라. 차라리 문둥이 콧구멍에서 마늘을 빼 먹지.” 반소매가 질겁을 하지만 맥고는 호탕하다. “지천이고 철전이고 돈이면 오케다. 보태라. 그 대신 어중이 니 임마, 오 늘은 그 동전으로 밑천 만들어도 안붙여준다. 알았어?” “알았어.” 어중이는 매우 흡족한 표정이다. 기사는 그들이 벌이는 놀이가 ‘윷’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낸다. 흑백의 바 둑돌로 윷말이 준비되고 눈여겨보니 멍석 한 귀퉁이에는 윷판까지 그려져 있다. 다만 보통 윷놀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윷짝들이 겨우 엄지손가락 한 마디 크기만 한데 얼른 보아서는 배와 등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손때가 반 들거리고, 손으로 윷짝을 던져서 노는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종지에 담아 던지는 것이 다를 뿐 승부는 보통 윷과 똑같이 가리는 모양이다. 이 소꿉놀 이 같은 윷놀이를 이 지방에서는 ‘동빼기’라고 부른다는 것을 기사는 귀동냥 으로 안다. 첫 판은 맥고의 승리로 끝난다. 맥고는 처음에 내어놓은 이천 원의 갑절 인 사천 원을 셈해 가고, 천 원씩 응원을 하던 두 사람도 본전 말고도 멍석 위에 널린 지폐 한 장씩을 더 움켜쥔다. 어중이도 바람에 팔랑 날아가는 지폐 한 장을 나비 잡듯 움켜쥐고 동전들 을 긁어 온다. 저들 말마따나 신선한 경기로 보아주기에는 걸리는 액수가 점점 많아진다. 판돈이 이만 원, 이만 원에서 사 만원으로 되더니 드디어는 수표가 나오 고 진작 손을 턴 사람들은 집으로 돈을 가지러 가는데 어중이는 돌아앉아 무엇인가 부스럭거리고 있다. “저 새끼는 숨 쉬는 귀신이라니까. 어중이 가는 데만 따라가면 틀림없어. 야, 임마. 너 오늘은 얼마 줏었어?”
누가 참견을 한다. 어중이는 얼른 지폐들을 감싸 쥐며 대답을 한다. “오금이야.” 조금이라는 어중이의 돈은 어설프게 거머쥐었을 망정 한 움큼이다. 기사 가 볼 때는 이십여 만원은 더 땄지 싶은, 안경을 낀 삼십대가 겨우 본전을 했다면서 자리를 털자 판은 시들해진다. 이길 뻔하다가 상대방의 억센 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오만 원을 잃은 쥐눈이 마음대로 안 되는 윷짝이 원망스럽다는 듯 혼자 연습을 해 보 더니 어중이를 향해 고개를 뺀다. “선수 없으면 어중이 너라도 붙어라. 할 수 있나. 담뱃값이라도 만들어야 지.” 어중이 말 떨어지기 바쁘게 검비검비 쥐눈의 맞은편 멍석 귀퉁이에 가 앉 는다. 어중이를 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윷짝 두 개로 순서를 결정한 다음 쥐눈부터 놀기 시작한다. 쥐눈은 ‘걸’이 나왔다. 흰 바둑돌이 ‘걸’밭에 가 앉는다. 어중이는 ‘도’다 기사가 보기에는 어중이의 불편한 다리가 윷을 놀기에는 멀쩡한 사람의 그것보다 열 갑절 편리하게 느껴진다. 다리가 성한 사람은 대변을 보는 자 세로 쭈그려 앉아야 하는데 어중이는 엉덩이를 땅에 깔고 두 다리를 쫙 벌 리니 무척 안정성이 있어 보인다. 중심 없이 흔들거리는 손이 흩어진 윷짝들을 주워 모으는데 약간 시간이 걸릴 뿐 애써 흔들지 않아도 윷짝들을 고루 섞는 구실을 한다. 어중이는 어 렵지 않게 십여 분에 이만 원을 움켜쥔다. 쥐눈이 약이 오르는지 만 원권 두 장을 꺼내 흔든다. “어이, 어중이. 곱 삼자. 됐나?” “그래.” 어중이는 승낙의 뜻으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상하로 끄덕거려야 할 머리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우습지만 기사는 웃음을 참고 마른 침을 꿀꺽 삼 킨다. 시작은 쥐눈이 다 이긴 윷이더니 어째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마지막 한 동 남은 말이 가다가 잡히고 가다가 잡히고 결국은 어중이가 제 몫까지 사 만 원을 거머쥔다. 쥐눈은 라이터를 넣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만 원권 두 장을 더 끄집어 내어 어중이 눈앞에 흔든다. “저 새끼는 이겨 놓고도 꼭 법대로 하자네. 좋아. 잠깐만 기다려.” 쥐눈이 금방 나갔다 오더니 나머지 이만 원을 채워놓는데 쥐눈이 차고 있 던 시계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시작된 판은 쥐눈의 승리가 확실하다. 어중이의 말들은 가뭄에 콩싹 나듯 여기저기에 어지러운데 쥐눈의 말은 넉 동이 합쳐서 ‘도’만 해도 날 수 있는 골문에 머물러 있다. 쥐눈은 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내 돈이 분명하다고 손부터 내민다. 구 경꾼들도 어중이에게 이번 판은 포기하라고 타이른다. 어중이는 돈 위에 퍼 질러 앉아 끝까지 놀지 않으면 돈을 못 주겠다고 고집한다. “저런 병신새끼는 관을 봐야 곡을 할 모양이지.” 쥐눈이 참으로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아예 종발과 함께 윷짝을 던진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다. 종지 안에 들어있던 윷짝 하나가 멍석 가운데 그 어놓은 선을 넘지 못하고 데구르르 구른다. 누가 발로 윷판을 얼른 차 넘기 지만 어중이는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벌써 입에 거품을 물고 있다. 쥐 눈도 낙판임을 인정한다. 어중이는 혼신의 힘과 정성을 다 해야 할 한 판 승부를 처음이나 조금도 다름없는 자세로 윷짝을 던진다. 모가 나온다. 사람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 킨다.
아무도 윷짝을 주워주는 사람이 없자 어중이는 몸을 뒤틀며 자리에서 일 어나 잔뜩 취한 사람처럼 이리 비틀 저리 흔들 윷짝들을 모아온다. 또 던진 다. 또 모다. 쥐눈의 얼굴이 심한 화상을 입은 것처럼 찌그러진다. 관중석에서는 명치 를 맞은 듯한 가쁜 숨소리들이 들린다. ‘개’만 나오면 만사는 끝이라고 구경 꾼들이 모두 흥분하는데 어중이 혼자만 태연하다. “개다.” 누군가 막혔던 숨통이 트이듯 소리를 지른다. 멍석 옆에 놓여 있던 팔만 원을 어중이의 갈퀴 같은 손이 긁어 온다. 오줌 마려운 강아지 꼬락서니로 왔다 갔다 하던 쥐눈이 밖으로 나가버리 자 어중이는 엉덩이의 흙을 털고 나서 세수를 한다. 얼굴을 씻는다기보다는 아예 두 손으로 두들긴다는 것이 확실한 표현이라고 기사는 생각한다. 불과 한 시간 남짓 동안 어중이는 기사가 한 달 동안 일요일 토요일도 모 르고 뛴 수입보다도 더 많은 돈을 거뜬히 장만한 것이다. 수건을 찾다 없으니까 좌우 팔뚝으로 얼굴을 한 번씩 문지르고 나서 어중 이는 출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저 새끼 잡아.” 문신을 새긴 사나이의 호통에 그제야 잃었던 정신들이 돌아오는지 반소 매가 벌떡 일어서더니 병아리를 낚아채는 매처럼 어중이의 덜미를 가볍게 낚아챈다. “어딜 가? 이 병신 새끼야.” 땅바닥에 나뒹굴면서도 어중이는 돈이 든 바지주머니를 꽉 움켜잡고 고 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서 겨우 저를 못 가게 한 얼굴을 찾아낸다. “기분 나쁘게 이 새끼가 누굴 째려 봐!” 반소매의 발길이 한 번 더 날고 어중이는 피한다는 것이 되려 코를 내 주는 셈이 된다. 대낮이라서 어중이가 흘린 피는 솔공이를 통과한 햇살처럼 선명하다. 피 를 본 반소매는 이성을 잃어버리고 어중이를 마치 축구공 다루듯 한다. “치워.” 문신의 사나이가 반소매와 어깨를 젖혀놓고 움직이지 않는 어중이에게 한 마디를 뱉는다. “너 임마. 그 꼴꼴난 목숨이라도 타고난 명대로 살다 죽고 싶거든 끝장을 보고 가.” 침을 꿀꺽 삼킨 문신은 이번에는 꾼들을 향해 입을 연다. “너희들도 끝까지 해. 만약 ed전 한 닢이라도 남겨 가는 놈이 있으면 온 전한 몸으로 동빼기 종지 잡을 생각은 버려. 어중이 피 씻겨. 나부터 한다.” 문신이 오만 원권 자기앞 수표를 내놓는다. 지혈이 안 돼 아직도 피가 흐르는 어중이의 한쪽 콧구멍에 누가 담배 필 터를 까서 끼워주고 어중이는 다시 멍석 한 귀퉁이에 끌려가 앉혀진다. 반소매의 손이 어중이의 바지주머니를 더듬어 수표에 적힌 금액만큼 돈 을 끄집어내어 멍석 한가운데 수표와 함께 돌멩이로 눌러놓는다. 문신의 사나이가 승리를 한다. “한 번 더.” 문신의 사나이가 돈을 가지러 갈 생각은 않고 종지를 끌어당긴다. 어중이는 발길에 차인 옆구리와 허리가 결리는지 반소매가 다시 주머니 를 더듬어도 손은 엉뚱한 곳에 가 있다. 기사는 아무리 화폐 가치가 바닥에 가 있어도 돈 이십만 원을 골무짝만 한 나무 네 개가 싣고 왔다 갔다 하기에는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꽁초 에 입술이 데는 줄도 모르고 윷짝에 정신을 팔던 기사도 문득 한 판 놀고 싶 은 충동을 받는다. 그러나 참는다.
여유 있는 웃음까지 보이던 문신의 사나이가 손을 털며 담배를 찾는다. 역 전으로 어중이의 승리다. 몇 사람이 덤볐지만 결과는 문신의 사나이와 비슷 하다. 긴 여름해도 벌써 기웃거리고 배가 고픈지 어중이는 이제 가도 좋으냐는 표정으로 사람들의 눈치를 살핀다. “안 돼.” 역시 문신의 사나이다. “누가 현찰이든 수표든 있는 대로 다 털어놔 봐. 오늘은 끝장을 봐야지. 저 병신 새끼를 이대로 보낼 수 없어.” 문신의 사나이는 좌중을 둘러본다. 모두가 꽁초가 널린 땅바닥만 내려다 보고 있다. 문신의 사나이는 장승처럼 서 있는 기사를 발견한다. “참, 당신에게 돈이 있겠군. 이봐, 운전수 양반. 돈 있으면 당신이 한 판 어울려 봐.” “없소.” 기사는 자신이 생각해도 놀랄 만큼 큰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없어? 옳아, 이제 보니까 당신도 저 어중이 녀석과 한패로군.” 멕시코풍의 맥고가 팔짱을 끼고 나선다. “나는 택시를 몰고 있는 운전수일 뿐이오. 애매한 말 함부로 하지 마시 오.” “이 새끼야. 그럼 택시나 몰지. ×빤다고 동빼기 판에 왔어! 좋은 말로 할 때 털어놓지.” 멕시코가 슬며시 자세를 잡는다. 기사도 따라서 자세를 고친다. 남을 때 려 보기는 아이들 속 썩일 때 회초리 들어본 것이 전부이기는 해도 오늘만 큼은 머리가 터지도록 실컷 두드려 맞든지, 아니면 뼈가 부러지도록 누구를 두드려 패야 속이 후련해질 것 같다고 생각한다. 고무풍선처럼 금방 터질 듯한 긴장 사이로 문신이 끼어든다. “왜들 이래. 이봐요, 기사양반. 단돈 천 원이라도 좋으니 저 어중이를 한 번만 이겨 주시오. 우리는 저 병신 새끼에게 묘한 징크스가 있어서 안 돼. 당신이 만약에 돈을 잃어도 잃는 돈은 내가 책임져 줄 테니까. 동빼기 판에 나 굴러다니지만 나도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성질은 아니오. 당신이라도 이 겨줘야 멀쩡한 놈들 체면도 좀 서지 않겠소?” 경칩에 강물 풀리듯 기사의 눈이 풀리는 것을 보고 문신의 사나이가 등까 지 토닥거려 준다. 기사는 사지 멀쩡한 놈 체면이라는 말과 함께 오늘 쓰기로 했던 주머니 속의 삼만 원을 생각한다. “좋소.” 어중이는 다시 제 자리로 끌려가고 기사는 난생 처음 만져보는 동빼기 종 지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잡는다. “잠깐!” 문신의 사나이가 행동을 중지시킨다. “저 새끼 주머니에 든 것 전부 얼마야? 끄집어 내 봐.” 반소매가 멀거니 앉아 있는 어중이를 뒤에서 껴안아 일으켜 세우고 쥐눈 이 돈을 끄집어낸다. 수세미처럼 구겨진 지폐와 수표가 꾸역꾸역 쏟아져 나 온다. 쥐눈과 반소매가 한 장씩 한 장씩 편다. “사십이만 칠천 원인데?” “이만 칠천 원은 주머니에 넣어 줘. 사십만 원짜리다. 이 운전수 양반이 삼만 원 냈으니까 나머지는 내가 아도다. 잠깐 기다려. 돈 갖고 올 테니까.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돌아온 문신의 사나이는 돈다발을 어중이 돈 위에 포개 놓으면서 기사에게 한 마디 보탠다.
“운전수 양반. 윷은 힘으로 노는 게 아니오. 편안한 마음으로 만사는 하 늘에 맡기고 한 판 놀아보시오. 당신이 실패해도 나는 말 한 마디 할 사람이 아니니까 안심하고 노시오.” 문신의 사나이는 꾼들에게 담배 한 개비씩 돌리고 술까지 시킨다. 무표정 하던 어중이도 포개놓은 지폐의 부피를 보고는 눈빛이 달라진다. “아도 아이다, 안 잔만 옴 주이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어중이의 말은 더 덤벙거린다. 어중이는 누군가가 가져다 준 사이다를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전부 토해 놓는다. 기사도 술잔을 내려놓고 마주 앉는다. 기사의 눈에는 어 중이 만났던 첫날 녀석이 던져주고 가던 오천 원 권 지폐가 확대되어 투우 를 흥분케 하는 붉은 천처럼 펄럭거린다. 기사는 억지로 가슴을 누르고 조용히 어중이를 노려본다. “아!” 기사는 가벼운 신음과 함께 고개를 가로젓는다. 개인택시를 갖게 된 기쁨에 골목에서 나오던 행인을 미처 못 보고 받아버 렸던 날, 그때 숨 거두기 직전의 피해자 얼굴이 어중이의 얼굴과 너무나 흡 사했기 때문이다. 기사는 번번이 낙방이다. 제대로 던져도 어중이의 말이 겅중겅중 뛰어가 는 준마라면 기사의 윷말은 발굽이 병에 걸린 조랑말 걸음이다. 기사는 거 의 무의식적으로 윷짝들을 담아 던지고 문신의 이마에도 땀이 짙게 배어 나 온다. 이제는 끝장이다. 기적이나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어중이의 승리가 분 명하다. 어중이는 방글거린다. “당인은 앙대오, 안애. 앙대오. 애가 애판 악방해 주까?” 당신 같은 풋내기는 아예 상대가 안 되니까 내가 세 번 낙판해 주겠다는 어중이의 기고만장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중이는 누가 보아도 고의 를 짐작할 만큼 일부러 낙방을 해버린다. “안~판.” 흔들거리는 팔을 겨우 쳐들어 억지로 펴 보이는 어중이의 손가락 하나가 전봇대만큼 커다랗다고 기사는 생각한다. 기사는 아예 눈을 감고 윷짝들을 담아 던진다. 환호가 터진다. 아마 윷이 나 모가 나온 것이라고 기사는 생각한다. 누군가가 종지에 넣어 준 윷짝을 또 던진다. 더 큰 환호가 터진다. 기사는 그만 궁금함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뜬다. 모가 두 번이다. 추격 거리를 바 짝 좁히기는 했지만 윷이 나와 주든지 모가 두 번 더 나와야 이긴다고 기사 는 말판을 읽는다. 기사는 윷딱들을 담아 들고 어중이를 본다. 어중이의 얼굴이 굳음병에 걸 린 누에처럼 경직되어 있다고 기사는 생각한다. “저런.” “에이구.” 누군가의 입에서 장탄식이 터져 나온다. 기적이 일어나는가, 했는데 기사 의 행운은 두 모 도로 그치고 만다. 어중이가 윷짝들을 정리한다. 종지를 든 어중이는 처음으로 시간을 끌고 있다. “빨리 해. 이 병신 새끼야.” 보나마나한 결과를 두고 쥐눈이 짜증을 낸다. “우 번.” 어중이의 이상야릇한 고함소리와 함께 던져진 윷은 또 낙판이다. 미리 예 고를 했으므로 어중이의 고의임은 누구나 안다. 기사는 윷이고 나발이고 다 팽개치고 어중이를 질근질근 밟아 죽여 버리
고 싶은 충동을 받는다. 문신의 얼굴은 기사보다도 더 참혹하게 일그러진다. “끝까지 해 보시오.” 기사는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늘 아침 버스에 올라 자기 코앞에 손을 내밀던 어중이를 떠올린다. ‘걸’이 나왔지만 어중이의 말을 잡지는 못한다. 어중이는 다시 윷짝들을 집어 모은다. 종지를 들고 이번에는 더 오래 시간을 끌고 있다. “꼴값하네. 병신새끼. 빨리 안 놀 거야?” 쥐눈이 오히려 갑갑함을 견디지 못해 씨근거린다. “에~번.” 어중이의 목소리가 벼락을 내리는 천둥소리보다 더 크다고 생각한다. 기 사는 종아리가 물 먹은 모래성처럼 흐물흐물 허물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붕을 떠받친 기둥을 잡고 기사가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어중이고 동빼기고 기사에게는 이제 아무런 관심도 없다.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이 양반 동빼기 놀다가 어디 가노?” 멕시코가 달려 와 팔을 끌어당긴다. “당신 혼자 문제가 아니야. 한 번만 더 던져. 사리가 나오든지 ‘걸’을 못 내 면 약도 없어.” 기사는 문신의 사나이가 쥐어 준 동빼기 종지와 함께 윷짝을 팽개치듯 던 져버린다. “이야! 걸이다, 걸!” 기사는 터지는 함성을 들으며 한바탕 통곡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 한다. “애가 졌음이다. 이에 아도 앱니까?”
어중이도 기둥을 잡고 비틀비틀 일어선다. 기사의 시선이 저절로 어중이가 앉았던 자리에 가 못이 박힌다. 어중이가 퍼질러 앉았던 자리는 솥뚜껑만큼 질펀하게 젖어 있다. “오줌을 쌌군.” 누군가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딴 귀로 흘리고 기사는 천천히 돌아선다. 손톱만큼 남아있던 긴 여름해가 그제야 꼴깍 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