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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해방과 태극도
세계대전의 종결로 식민통치에 신음하던 약소국들은 일제히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고 조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한다는 일본 천황의 발표가 라디오를 통하여 전국으로 방송되었다. 드디어 해방의 그날이 온 것이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시내로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고 환호하며 거리는 감격으로 일렁거렸다.
그리고 흥분한 사람들은 그 동안 조선인들을 악랄하게 괴롭혔던 주재소, 면사무소 일본인 관저 등으로 우르르 몰려가서 건물을 두드려 부수고 벚꽃나무는 베어내고 눈에 띄는 일본인들을 모조리 폭행하는 등 억눌리고 시달렸던 응어리를 풀어내고 있었다.
패전을 갑자기 맞게 된 왜인들은 제 목숨 하나 보존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려둔 채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실제로 처음에는 왜인들이 가져갈 수 있는 짐은 궤짝 하나로 허용되었다가 곧 륙색 하나로 제한되어 왜인들은 배낭 하나만 달랑 매고 물러갔으니 전경에서 이른 대로 왜인들은 일을 마치고 가며 품삯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왜인들의 세상이 끝나고 36년 만에 비로소 암흑천지가 대명천지가 된 것이다.
전경에 보면 식민통치 30~40년 사이에 조선이 해방될 것임을 암시한 대목이 나온다.
상제께서 어느 날 벽력표를 땅에 묻고 나서 종도들에게 “모두들 제각기 흩어져서 돌아가라. 십년 후에 다시 만나리라. 십 년도 십 년이요. 이십 년도 십 년이요. 삼십 년도 십 년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누가 여쭈기를 “사십 년은 십 년이 아니 오니까.” 이에 상제께서 “사십년도 십 년이나 그것을 넘지는 않으리라”고 말씀 하시고 모두 돌려보내시니라. 상제께서는 오직 광찬 만을 데리고 며칠 더 머무시더니 광찬에게 돈 백 냥을 주시면서 “네가 먼저 만경(萬頃)에 가서 나의 통지를 기다리라” 이르셨도다.
―전경 공사 1장 22절
도주께서 1925년 무극도를 창도하신 10년 되시던 해인 1935년에 무극도를 해산하셨다.
일본이 종교단체 해산령을 내리니 도주는 전국 각지의 종도들을 모으고 인덕도수와 잠복도수를 말씀하시며 “그대들은 포덕하여 제민하였도다. 각자는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 처자를 공양하되 찾을 날을 기다리라.” 이 선포 후에 도장은 일본 총독부에 기증되니 도주께서는 고향인 회문리로 돌아가셨도다.
― 전경 교운 2장 43절
상제께서 보신공사는 무극도의 해산을 의미한다. 그리고 10년 후에 다시 만나리라 하셨으니 1945년이 된다. 그리고 40년은 넘지 않는다 하셨으니 1945년은 한일합방 된 지 36년 되는 해로 해방을 맞이한 것은 40년을 넘지 않았던 것이다.
무극도수가 36년 만에 끝이 나고, 무극의 일을 하러 들어온 일본은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용직이 을유년 七월 이튿날 회룡재를 찾고 초나흗날에 떠나려고 도주를 뵈옵더니 도주께서 며칠 더 묵어가라고 만류하시니라. 그가 초 여샛날에 다시 떠나려고 하니 도주께서 “오늘 무슨 큰 일이 일어나고 도수가 바꿔지리라”고 말씀을 하시니 이용직은 그 까닭을 의심하니라. 다시 도주께서 “이제 두려워 말라. 다녀오도록 하라”고 이르시고 그를 떠나보내니 일본이 망하고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도다.
― 전경 교운 2장 46절
(1945년이 을유년(乙酉年)이며 8월 15일은 음력으로 7월 7일이었다. 음력 7월 7일 발표된 일본천황의 항복 방송은 녹음된 방송이었으며, 도주께서는 그 전에 이미 일본이 항복할 것을 아시고 계셨음을 의미한다.)
조선의 독립은 곧 천지도수(天地度數)가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상제께서 물샐틈없이 짜놓으신 공사대로 도수가 전개되며 한반도를 덮고 있던 무극(无極)의 상징인 일장기(日章旗)가 걷히고, 태극(太極)의 상징인 태극기가 온 강산을 뒤덮게 되었던 것이다.
도주께서도 상제께서 짜놓으신 도수대로 이제 세상이 무극도수에서 태극도수로 바뀌게 됨을 온 천하에 알리셨다. ‘태극(太極)이 기동(機動)하니 만유군생(萬有群生)의 근원(根源)이 태극’에 있음을 밝히신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는 진리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다 여기에 순응해야 살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도 분명히 밝히셨다.
이와같이 하시기를 삼일(三日)째 되던 날은 도주께서 큰 소리로 “태극(太極)이 기동(機動)하니 만물(萬物)이 자시자생(資始資生)이로다.” 하시고 조용히 독언(獨言)하시기를 “인(仁)아 네가 이제 태극(太極) 앞에 고개 숙였으니 네 이름자(字)의 덕(德)으로 명(命)은 유지되리라.” 하시니라.
― 태극진경 제4장 42절
(여기서 인(仁)은 당시 일본 천황 히로히또(裕仁)의 이름이며 도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는 1989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는 태아(胎兒)가 열 달이면 세상에 나오는 이치와 같아 무극도 해산 10년 만의 일이었다. 무극도 해산 이후 10년 만에, 해방의 감격으로 온 나라가 술렁거리던 1945년 도주께서는 다시 세상에 나오셨으며 이번에는 태극도를 창도하셨으니 도세(道勢)는 무극도 시절보다 더 커졌다. 해방의 바로 그날 도주께서는 회룡재에 계셨으며 아침에 회룡재에 태극기를 걸게 하시고 공부를 계속하셨다.
이제 무극도 시절에 관공서에 매달려 있던 일장기는 내려오고 대신 태극기가 창공에 나부끼게 되었으니 바로 태극도수가 태동(胎動)함을 이르는 것이다. 즉 무극도수를 상징하는 일장기(日章旗)가 내려오고 태극도수를 표징하는 태극기(太極旗)가 이 강토에 날리니 해방도수를 만나 태극(太極)이 기동(機動)하여 합덕(合德)과 조화(造化)를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태극기 중앙의 원은 무극이고 원내의 청·홍은 음양이니 곧 태극의 표징이라, 무극에서 태극이 나오는 이치인 것이다.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말하길 무극이 태극(无極而 太極)이라하였고, 태극에서 양의(兩義)가 나오고 양의에서 사상(四象)이 나오고 사상에서 팔괘(八卦)가 나오니 곧 만유군생(萬有群生)의 근본이 바로 태극인 것이다.
태극기는 바로 도의 기(旗)가 되는 셈이었으니 도주께서는 도명(道名)도 태극도(太極道)로 하신 것이다.
해방과 동시에 태극기(太極旗)가 날리고, 또한 태극도(太極道)가 창도(創道)되었으니 이는 곧 구천상제께서 보신 공사에 의하여 발현되는 천지 도수의 커다란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전의 귀국선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전세가 한창 어려워져 가고 있던 시기인 1943년 훗날 창도주(創道主) 조정산(趙鼎山)으로부터 유명(遺命)으로 종통을 이어받게 될 도전(都典) 박우당(朴牛堂)께서 일본으로 가시는 역사가 있었다.
도전 박우당께서는 정사년(丁巳年, 1917년) 11월 30일 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 박(朴)씨 가문에서 탄강하시니 존호가 우당(牛堂)이시고 존휘가 한경(漢慶)이시다.
청년시절의 도전께서는 나라를 잃은 설움에 만주 일대를 유력하고 계셨는데,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집으로 오셨다가 1943년 징용(徵用)으로 일본에 건너가셔서 2년 후인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어 귀국하셨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은 병사 및 군사시설 확충을 할 인력이 절대 부족 하였고, 이것을 조선인으로 충당할 것을 결의하고 징병(徵兵)과 징용(徵用)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 총독부의 ‘국가 총동원법’에 의해 박우당 도전께서는일본 아우모리현(靑森懸) 미사와 비행장으로 징용을 가게 되었고, 2년이 지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귀국선에 오르게 되었다.
이 귀국선은 일본 해군함 우키시마(浮島)호로써 1945년 8월 22일 아우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으로 향하던 중 8월 24일 일본 마이즈루만 근처에서 원인 모를 폭탄이 배안에서 폭발하여 귀국선은 침몰하였고, 이로 인하여 귀국선에 올랐던 수천명에 달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대부분 사망하였다. 그러나 당시 박한경은 거북이 등에 의지하여 현해탄을 떠돌던 중 다행히 민간인 어선에 구출되어 이후 무사히 부산항으로 귀국하시게 되었다.
3·1 만세운동이 도주님께서 만주 봉천으로부터 고국으로 귀국하시고 하느님이 되신 것을 환영하는 만세운동이었던 것처럼,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삼천리강토에 태극기가 휘날리면서 만세 물결이 일어난 것은 바로 도전 박우당께서 고국으로 무사히 귀국하심을 환영한 만세 물결이라 하겠다.
그리고 도전 박우당께서는 귀국하신 이듬해 30세 되시던 병술년(丙戌年, 1946년) 정월에 이모 집에 세배 갔다가 이종사촌에게 도(道)를 전해 듣고 진법주의 주문(呪文)이 이상하여 알아보려고 태극도(太極道)에 입도(入道) 하셨다.
시두 손님과 천자국(天子國)
도전 박우당께서 태극도에 입도하신 해인 1946년에 훗날 도전(都典) 박우당으로부터 유업(遺業)을 받으신 상도(上嶋) 박성구(朴成九)께서 탄생하였다. 이것은 상제께서 광구천하의 뜻을 가지신 을미년(1895년)에 상제의 뒤를 이을 도주께서 탄강한 것이나, 도주께서 만주 봉천에서 상제의 삼계대순(三界大巡)의 진리를 감오득도 하시던 해인 정사년(1917년)에 도전 박우당께서 탄강하신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상도(上嶋) 박성구(朴成九)는 강증산 성사께서 『전경(典經)』 행록 4장 8절에서,
이튿날 밤에 상제께서 덕겸으로 하여금 담뱃대의 진을 쑤셔 내되 한번 잡아 놓치지 말고 뽑아서 문밖으로 버리게 하시니 그는 말씀하신 대로 진을 바깥에 버리자 온 마을의 개가 일시에 짖는도다. 덕겸이 신기하게 느껴 “어찌 개가 일제히 짖나이까”라고 여쭈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대신명(大神明)이 오는 까닭이니라.” 그가 “무슨 신명이니까”고 여쭈니 상제께서 “시두 손님이니 천자국(天子國)이라야 이 신명이 들어 오나니라”고 일러주셨도다.
라고 하신대로 1946년 11월 11일에 병술생(丙戌生) 개띠로 탄생하셨다.
그리고 상도 박성구께서는 해방 후 조선을 찾아온 시두(천연두)에 걸려 이후 얼굴에 시두자국이 남아있게 되셨다.
또한 담뱃대는 오행의 기운을 모두 가지고 있다. 대는 목(木), 부리는 금(金), 담뱃불은 화(火), 재는 토(土), 진은 수(水)의 기운이다. 즉 목(木), 금(金), 화(火), 토(土) 기운이 모여서 진을 만드는데, 이는 수(水) 기운을 형성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후천 정역이 중앙에 ‘1·6 水’가 자리하고 동쪽에 ‘4·9 金’, 서쪽에 ‘3·8木, 남쪽에 ‘5·10 土’, 북쪽에 ‘2·7 火’가 자리하는 것과 같은 형상이다. 그러므로 담뱃대는 후천 정역을 표현한다.
진은 진(眞)이고 진법(眞法)을 말한다. 진을 뽑아 문밖으로 버린다는 것은 ‘1·6 水’ 기운을 가진 대두목에 의해 진법(眞法)이 나와서 세계만방으로 펼쳐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개가 일시에 짖는다’ 함은 이 진법(眞法)을 내는 대신명(大神明)이신 대두목께서 ‘개띠’로 오심을 말씀함인데, 상도 박성구는 도전 박우당께서 태극도에 입문하시던 해인 1946년 병술생(丙戌生) ‘개띠’로 오셨다.
또한 ‘대신명(大神明)이 천자국(天子國)에 오신다’ 함은, 천자(天子)는 하느님의 뜻이므로, 하느님 계신 나라에 오신다는 말씀이다.
도전 박우당께서는 하느님, 즉 천자님이시므로 천자(天子)를 모시기 위해 오시는 대신명은 시두(侍頭)손님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상제께서 공사로써 예시해 주셨다.
이와 같이 태극이 기동하는 도수에 맞추어 오선위기의 주인이 먼저 정해지는 것이니, 도주님으로부터 종통을 계승할 도전 박우당께서 고국으로 돌아와 태극도에 입문을 하시고, 이때를 맞추어 장차 1만2천 도통군자를 이끌어갈 대두목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주인이 정해지고 나면 나머지 바둑을 둘 신선이 바둑판을 대하고 자리를 해야 하니 북한은 소련이 남한은 미국이 들어와 세계대세의 판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신탁통치와 국토의 분단
해방이 되어 삼천리 강토를 태극기와 만세로 뒤덮었던 그 날의 감격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해방과 함께 미국과 소련이 진주하여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이 나뉘어 신탁통치(信託統治)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태극도수가 도래되고 태극이 기동하니 세계판도의 중심이 되는 한국은 중앙의 태극모양으로 음양이 나누어지는 형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해(1945년) 추석(秋夕) 치성(致誠) 후(後)에 하명(下命)하시기를 “천하대세(天下大勢)는 오늘 이 일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삼계(三界)가 모두 태극(太極)의 원리(原理)로 음양(陰陽)이 기동(機動)하리니 근역강산(槿域江山)이 그 중심핵(中心核)이 되느니라. 그러나 호사(好事)에는 마(魔)가 많아 단절(斷切)과 분열(分裂)이 자심(滋甚)할 조짐(兆朕)도 있으니 도인(道人)들에게 무극무단(无極無斷)에 치우치지 않는 합덕(合德)과 조화(調化)로 잘 교화(敎化)하여 좋은 날을 보고 살도록 인도(引導)하라.” 하시니라.
― 태극진경 제4장 53절)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도 우리나라는 바로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없었다. 그것은 한반도에 남아 있던 일본군의 무장(武裝)을 해제(解除)시키기 위해 38도선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자 한반도 내에 있는 잔류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여 다시 무력행사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연합국의 대표 격으로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온 것이었다. 이것은 나중에 반영구적인 분단의 씨앗이 되었다.
1945년 9월 2일 당시 일본점령군 최고 사령관이자 극동통(極東通)으로 잘 알려진 맥아더는 ‘일반명령 1호’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한반도 내의 일본군 무장해제는 38도선을 기준으로 남(南)은 미군이, 북(北)은 소련이 맡기로 처음 공식화되었다. 아마 이것은 미·소 양국의 수뇌들에 의해 포츠담회담에서 비공식 합의가 이루어진 것임에 분명한 것이었다.
9월 5일 인천을 통해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 사령관 맥아더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이 포고문의 내용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영토는 나의 관할 아래에 있다”고 주장하며 “정부 및 공공기관은 그 기능을 계속 실행할 것이며 공공의 안녕을 문란하게 한 자는 엄중처리하겠다”는 일종의 협박이 담긴 경고였다.
실제로 미군은 서울로 진입하던 날 환영하는 군중을 향해 총격을 가하기도 하는 등 뭔가 주객(主客)이 전도된 느낌을 주었다. 이는 한국의 실정을 잘 모르고 행한 것이라고는 하였지만 어쨌든 미·소 양군에 의해서 당분간 군정(軍政)이 실시되었으며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미·소 양군에 의해 실시된 군정은 민족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소련군이 진주(進駐)한 북한에서는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정치활동이 전개되었으며 미군이 주둔했던 남한에서는 조선 총독부를 대신해서 미(美) 군정청(軍政廳)이 들어서게 되었고 이에 의해서 남한에는 새로운 서양의 정치제도와 사상 및 문화가 도입되었다. 이로써 민주주의 정치제도, 서양의 과학 정신,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 등이 따라 들어왔다.
당시만 해도 민주주의니, 자유주의니, 개인주의니 하는 것들은 우리 국민들에게 무척 생소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봉건적 사고에 젖어 있다가 개화기를 맞이하여 어느 날 갑자기 학교니 병원이니 신문이니 전화니 우편이니 하는 근대적 문화가 들이 닥쳤고, 일제시대에는 강권과 압제에 의해 착취와 수탈로 모진 설움만 당한 터라 조선 민족은 자유, 민주, 과학, 합리 등은 접해본 적이 없었다.
한편 조선이 해방되기 전에 여운형, 안재홍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 건국준비위원회는 일본이 패망하자 즉각 자발적인 조직체를 만들어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준비하였다.
또한 임시정부가 귀국한 후에 힘을 합쳐 독립국가를 이룩하자는 한국 민주당과 같은 세력이 나오기도 하였다.
특히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지사(獨立志士)들이 대거 귀국하자 이들 간에 건국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이 나와 정치 세력들 간에 대립과 갈등이 심하였고 당연히 사회적인 혼란을 초래하였다.
게다가 8·15 광복 이후 급등하는 물가와 쌀을 비롯한 생활필수품의 결핍 등으로 경제도 큰 혼란을 겪었다. 이는 국민의 일상생활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미군정은 남한의 실정에 어두웠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또 이 시기에는 좌익 및 공산주의자들의 세력과 우익 세력이 곳곳에서 충돌하여 유혈사태가 빚어지는 등 사회적 혼란과 불안이 극심하였다.
이렇게 한반도 전체가 해방의 감격과 함께 사회불안과 환란(患亂)의 열병(熱病)을 앓고 있던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상(外相)이 모였다. 이들은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열어 2차대전의 전후 처리를 협의하기 위한 것으로 한반도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회의에서 한국에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하고 한국을 향후 5년간 미·영·소·중의 신탁통치하에 둘 것을 결정하였다.
신탁통치란 독립할 능력이 없는 나라를 강대국이 일정기간 통치하는 것인데 이것은 국가의 주권이 외세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식민통치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므로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의 한반도 신탁통치 결정은 한국민에게 모욕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전국적으로 반대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반탁과 찬탁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광복되었지만 남·북한을 미·소 양군이 점령함으로써 통일정부의 수립이 요원하게 되었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을 5년 동안 미·영·소의 신탁통치하에 두기로 하고, 이를 위하여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가 곧 서울에서 열린다는 외신보도가 있었다. 독립정부의 수립을 갈망해온 전국민은 이에 분격, 좌우익을 막론하고 100여 개의 애국사회단체(愛國社會團體)와 정당의 이름으로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즉시 발표하였고, 이를 계기로 전국에서는 반탁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박헌영(朴憲永)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1946년 1월 4일 좌익진영은 그 태도를 돌변해서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나섰으며, 신탁통치문제는 ‘민주주의적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통해 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신탁통치에 대한 반응은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만식(曺晩植)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의 주도로 광범위한 반탁운동이 전개되었고, 공산주의자들도 반탁의 뜻을 명백히 하였다. 그러나 모스크바로부터 ‘삼상회의 결정은 소련이 앞장 서서 만든 것이므로 공산당은 절대 지지하라’는 지시가 있자 공산주의자들은 찬탁(贊託)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북한의 공산주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은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는 공동성명서를 잇달아 발표하였다.
소련은 그들의 점령지역 안의 모든 반탁 세력을 거세하여 북한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을 모스크바 협정 지지로 통일시키고 남한의 좌익진영도 찬탁하게 하여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에 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좌익계열의 찬탁을 분쇄하기 위해 민족진영단체들이 단결하여 거족적인 반탁운동을 전개, 시위·집회·언론 등을 통해 미소공동위원회에 항의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를 조직하였다.
결국 서울에서 열기로 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격렬한 반탁운동과 미·소의 의견대립으로 결렬되었다.
미·소의 대립은 이미 예견되어진 것으로 하필 한반도에서 이런 대결양상이 벌어진 것 말고는 별로 이상할 것도, 특기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미·소 공동 위원회가 추진하던 한반도 단일선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과 소련은 각기 남북한에서 별도의 정부를 세우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사실상의 정부를 세워 통치체제가 확립되었고 남한은 국제연합의 결정에 따라 1948년 5월10일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남한만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5·10선거에 의해서 구성된 제헌국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민주공화국 체제의 헌법을 제정하고,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하고 대한민국의 성립을 국내외에 알렸다.
이 때 김구, 김규식 등은 남한만의 선거로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남북의 분단이 영구화될 것을 우려하여 남북한이 협상을 통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그들의 노력은 미·소간의 냉전 체제하에서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모든 과정이 불과 2~3년 사이에 일어났다. 한반도의 주인인 우리 민족으로서는 어떻게 손써볼 겨를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세계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금의 상황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앞으로 한민족(韓民族)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짐작하지도 못한 채 어떻게 보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해방의 기쁨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더니 곧바로 나라가 두 동강이 나고 백성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가만히 눈뜨고 앉아서 당한 일이었다.
그것은 1950년에 벌어진 동족상잔의 6·25사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사회, 우리의 나라, 우리의 국권, 우리 민족에 관한 일들이 주인인 우리의 의사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갑자기 밀어닥친 격랑 속에 파묻혀 영문도 모르고 떠내려가는 형국이었다.
우리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어찌할 도리 없이 대세의 흐름을 멀뚱멀뚱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개화기부터 가만히 살펴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해 돋는 배달의 나라, 동방 예의의 나라에 어느 날 갑자기 섬나라 오랑캐에 불과하던 일본이 총과 포로 무장한 함대를 들이밀고 나타나지를 않나, 대국으로 섬겨왔던 청이 왜에게 주저앉지를 않나,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코쟁이들이 뭔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리를 지껄이며 대동강으로, 강화도로 침범하지를 않나, 어디 그 뿐인가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에게 문물을 배워 가던 왜가 하루아침에 고종을 협박하여 500년간 지속되어왔던 조선왕조가 문을 닫게 하고 조선을 합병했다고 하더니 상전 노릇을 하면서 조선인을 종처럼 부리질 않나, 어제는 일본이 물러가고 해방이 되었다고 온 나라가 만세를 부르고 하더니 오늘은 미국이니 소련이니 하는 나라의 군대가 시가지를 행군하면서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지를 않나, 거기다 갑자기 발발한 6·25사변과 남북분단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는 온통 황망한 가운데 빚어진 질곡의 세월이었다. 어질고 순박한 조선의 백성들이 겪어내기에는 너무도 벅찬 시련과 모진 고통이었다.
닭울음 소리로 하루가 시작되고 눈뜨면 논밭에 나가 일하고 마을 앞쪽 정자나무 아래에서는 동네의 노인들이 모여 장기를 두고 마을 한 켠에 있는 서당에서는 글을 읽는 아이들의 소리가 낭랑하게 울리고 냇가에서는 삼월이가 빨래하고 머슴은 언덕에서 소먹일 꼴을 베고 주인 나리의 호령소리와 기침소리가 중문 밖에 울려나오던 한가롭고 평화로우며 소박했던 우리네 삶.
수천년 간 변화가 지극히 완만했던 우리 사회에 회오리바람 같은 변화가 불어 닥친 것이 불과 몇 년 동안이던가? 손꼽아 헤어보면 불과 40~50년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반세기도 되지 않은 짧은 세월동안 우리민족에게 닥친 불행과 비극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숨겨져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파도를 헤쳐 나가야 할 것인가?
그러나 조선민족은 타고난 심성(心性)이 착하고 예로부터 신명을 지극히 접대한 민족이라 20세기 지구의 낙후된 지역이 다 겪는 고통 속에서도 다시 살아날 길이 예정되어 있었으니 바로 도(道)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하느님이신 구천상제께서 세상 아무도 모르게 강세하여 터를 잡아준 민족인 것을 어느 누가 알겠는가? 조선민족에게 가해진 갖은 압제와 핍박들이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의 열매로 익어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도(道)에 있는 것이다.
바로 그 도를 펼치기 위하여 도주 조정산께서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불철주야로 수도와 포덕사업에 힘쓰시며 살신성인(殺身成仁)하고 계셨으니 태극도가 회문도장에서 창도된 이래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때를 같이 하여 1948년에 도장을 부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도주께서는 1948년 원단에 비로소 태극도(太極道)라는 도명(道名)을 세상에 공포하시고 부산(釜山)으로 이어(移御)하실 뜻을 밝히셨다.
이는 잠룡(潛龍) 도수에서 현룡(見龍) 도수로 다시 비룡(飛龍) 도수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잠룡은 씨앗을 땅에 묻고 태동하길 기다리는 무극도 해산시절이며, 현룡은 싹이 터 나오는 형상으로 해방에서 신탁통치 기간을 의미 한다. 떡잎이 둘로 나누어 졌지만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붙어있는 형태와 신탁통치기간은 일치하는 것이다. 비룡은 떡잎이 완전히 분리된 상태로 태극의 기동이 있게 되는 것이다. 태극의 기동은 음양이 일진일퇴(一進一退)하며 기동을 하는 것이니 6·25 사변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비룡도수가 임박하였다하는 것은 바로 이 태극의 기동도수가 임박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산으로 이어하심은 입금산(入金山)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전경에 보면 구천상제께서 “나를 보려거든 금산사로 오너라”고 하신 말씀과 일치하는 것이며 또한 앞으로 일어날 민족의 대환란에 대비한 것이기도 하다.
6·25사변
조선은 해방되었으나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실질적으로는 남북으로 나뉘어져 미국과 소련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은 급기야 조선반도에 또한번의 비극을 가져왔으니, 조선은 해방 5년 뒤에 일어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6·25사변에 의해 결국 국토가 분단되고, 두 개로 나뉘어진 남과 북은 서로 적대시하며 대치하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아 군비를 증강하면서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을 꾀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은 38도선을 일제히 넘어 남으로 진격해왔다. 병력과 장비가 열세하였던 국군은 부득이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하여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북한군의 YAK전투기는 서울 상공에 침입하여 김포비행장을 폭격하고, 시가에 기총소사(機銃掃射)를 하였다.
당시 국군은 노동절(5월 1일), 국회의원 선거(5월 30일), 북한의 평화공세 등 일련의 국내 여건을 전후하여 북한에 대한 경계태세가 이완된 상태였다.
특히 북한이 6월 들어 대대적으로 펼친 평화공세에 정세를 낙관한 나머지 그 동안의 비상경계령을 6월 23일 24시를 기해 해제하여 병력의 1/3 이상이 외출 중인 상태에서 기습공격을 받았다.
북한군은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수개의 특수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병력 11만 1000명과 1,610문의 각종 포, 그리고 280여 대의 전차 및 자주포 등을 제1선에 동시에 투입하였다. 북한군 제1군단은 서울을 목표로 일제히 남진하였다.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1·6사단은 제105전차여단의 제203전차연대와 제206기계화연대의 지원 하에 개성에서 서울로 공격하고, 주공부대인 북한군 제3·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은 각각 연천·철원 일대에서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공격해 왔다.
드디어 태극의 기동이 일어나 북한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도주께서는 1950년 원단에 6·25사변이 있을 것을 미리 아시고 앞으로 도인(道人)들이 가야 할 길을 일러주셨는데, 그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경인년(庚寅年, 1950년) 원조(元朝) 치성(致誠) 후(後)에 (옥황)상제(上帝)께서 임원(任員)들의 세배(歲拜)를 받으시고하명(下命)하시기를 “그동안 그대들의 성충갈력(誠忠竭力)으로 도인(道人)이 늘어나고 체제(體制)가 정립(定立)되었음을 치하(致賀)하노라. 그러나 호사(好事)에는 언제나 복마(伏魔)가 따르는 법이라. 금년(今年)에는 도내외(道內外)에서 몰아닥칠 환난(患難)의 고비를 넘기기가 극난(極難)할 남진원만북하회(南辰圓滿北河回) 대도역천탈겁회(大道與天脫劫灰)의 도수(度數)이므로 나는 이제부터 복중팔십년도수(腹中八十年度數)를 보리니 그대들은 도명(道命)의 지엄(至嚴)함을 각골명심(刻骨銘心)하라.” 하시고 다음 시를 외어주시니라.
금년초개태평양(今年初開太平洋)
마하외외중천거(摩訶巍巍中天踞)
평천정해기하일(平天定海其何日)
일만이천구치시(一萬二千驅馳時)
―태극진경 제5장 28절
│한시풀이│
금년에 처음으로 태평양을 열어
크게 높이 높이 뛰어나 중천에 걸터앉으니
하늘을 평정하고 바다를 평정할 날이 언제인가
일만 이천이 말을 몰아 달릴 때이다.
6·25사변으로 북한이 남침을 해오자 즉각 유엔에서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대한민국을 군사적으로 원조할 것을 결의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뉴질랜드, 필리핀, 터키 등 16개국의 군대를 한국에 파견했으며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맥아더가 임명되어 지휘봉을 잡았다. 그 후 같은 해 9월 16일 극비리에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었고 이를 계기로 전세(戰勢)는 반전(反轉)되기 시작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을 전환점으로 하여 전세를 반전시킨 유엔군은 패주하는 북한군을 추격,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였다. 10월에는 평양을 수복하고 동해안으로는 청진까지 중부에서는 초산 및 혜산진의 압록강까지 서부에서는 선천까지 북상,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하였다. 눈앞에 통일의 그날이 펼쳐지는 듯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중공군의 개입으로 12월에는 북한지역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38선이 돌파된 후인 1951년 1월 4일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서울을 철수하게 되어(1·4 후퇴) 전선은 현재의 휴전선 일대로 고착되었다. 서울을 일시 차지하기는 하였으나 공산군의 전력손실도 심하여 다시 38도선 이북으로 퇴각하였다. 이즈음 전선은 점차 교착(膠着)상태에 빠졌고 드디어 몇 차례의 휴전회담이 진행되어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되었다.
6·25동란은 한국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 중의 하나였다. 이로 인한 인명 피해는 남한만 해도 사망자 약 100만, 행방불명 20만, 부상자 25만에 달했고 북한군에 납치된 자가 10만 이상, 그 외에 수없이 발생한 전쟁고아(戰爭孤兒) 등 전쟁의 피해자는 수백만에 달했다. 물론 북한이 당한 피해도 막심하였다. 3년간의 동란으로 국토는 초토화되었으며 산업시설 및 도로·교량·건물 등 중요 기간 시설은 절반 이상이 파괴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세계 제2차 대전 때 투하된 폭탄의 양보다 더 많은 양의 폭탄이 투하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휴전협상에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산가족이 겪는 아픔과 남북간의 적대감정은 이런 물질적 피해보다도 훨씬 더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공사에 의한 것으로 장래에 더 잘되기 위한 일시적인 고통이었으니 그것은 휴전선의 모양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휴전선은 38도선을 기준으로 하여 동부전선에서는 북쪽으로 올라가고 서부전선에서는 남쪽으로 내려와 마치 태극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는 태극도 창도에 의한 태극도수의 기동이 시작되어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징인 것이다.
태극의 기동이란 청(靑)인 음과 홍(紅)인 양이 기동하여 일진일퇴(一進一退)하며 기동하는 것을 말한다. 해방후 신탁통치기간에는 음양이 나누어졌지만 기동은 일어나지 않았고, 6·25사변으로 통하여 기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먼저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태동하여 남으로 낙동강전선까지 밀고 내려왔으며, 다시 미국의 지원을 받은 남한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북으로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다. 그러나 소련을 훈수 두는 중공군이 개입하여 다시 1·4후퇴를 단행하여 전선은 삼팔선 부근에서 고착되었다. 일찍이 상제께서 예언하신 대로 ‘청일간의 두 번째 싸움’인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쫓겨 들어가거니와 그 끝에 호병(胡兵)이 들어오리라. 그러나 한강 이남에는 침범하지 못하리라’고 하신 대로 6·25동란 때 중공군의 갑작스런 참전(參戰)이 일어났고 그 결과 통일의 직전에서 후퇴하여 남하하였으나 서울을 넘겨주지는 않았다. 호병이란 중공군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후 1953년 7월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일어나고 한국은 국토의 허리에 완전한 태극 기동형상인 태극의 형태로 휴전선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6·25사변이 있은 후, 한국을 둘러싼 4대 강국(미·일·소·중)이 형성되었고 해방 이후 벌어진 일련의 일들이 우리 백성들의 의지와는 사뭇 다르게 작용하여, 자기들끼리 한반도를 서로 차지하기 위하여 남의 땅에 와서 싸우는 형국이니 다섯 신선 중 두 신선(미·소)이 6·25사변을 통하여 내기를 하고 두 신선(일·중)은 훈수를 두고 주인 신선(한국)은 수수방관하고 있는 형상이다.
한국은 중앙에서 태극모양을 형성하고 한국을 중심으로 사대강국이 대치된 상황은 마치 태극을 중심으로 사상이 배치된 한국의 국기인 태극기를 연상케 한다.
이로써 상제께서 말씀하신 오선위기의 대세는 이루어진 것이다.
상제께서 종도들을 데리고 계실 때 “현하 대세가 오선위기(五仙圍碁)와 같으니 두 신선이 판을 대하고 있느니라. 두 신선은 각기 훈수하는데 한 신선은 주인이라 어느 편을 훈수할 수 없어 수수 방관하고 다만 대접할 일만 맡았나니 연사에만 큰 흠이 없이 대접만 빠지지 아니하면 주인의 책임은 다한 것이로다. 바둑이 끝나면 판과 바둑돌은 주인에게 돌려지리니 옛날 한 고조(漢高祖)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으되 우리 나라는 좌상(座上)에서 득천하 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 전경 예시 28절
이로부터 세계의 정세는 냉전체제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사변 전후(前後)의 세계정세
대전의 참화(慘禍)를 뼈아프게 겪은 세계의 나라들은 세계평화를 유지하고 인권을 옹호하고 각국의 사회적·경제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1945년 10월에 국제연합(UN)이라는 국제적인 기구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특징적인 세계의 정세는 미국·소련·중국·일본이 세계의 4대 강국으로 대변되는 냉전체제가 등장한 세력판도이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제3세계의 등장일 것이다.
2차대전 후 소련은 공산 진영의 맹주로써 확실한 위치를 잡았다. 전후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등 동유럽의 여러 나라에 공산정권을 세워 위성국가로 만들고, 동독과 동베를린을 그 지배 하에 두어 거대한 세력권을 구축하였다. 소련은 이러한 공산권에 ‘철의 장막’을 드리우고 기회가 있는 대로 세력을 확대하려 하였다.
중국은 종전과 함께 맞이한 해방 이후에도 중대한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겨야 했다. 중일전쟁에 의해 이루어진 국공합작이 종전 후 다시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분리되어 5년여 간의 내전으로 돌입하면서, 바로 통일국가를 수립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결국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승리하였고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피신하여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여 중국에는 두 개의 체제가 병존하는 상황을 이루었다. 이후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 정부는 중국 본토를 장악하여 1949년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과의 우호를 공고히 하고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착수하였다. 토지혁명과 구시대의 인습을 타파하는 여러 차례의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제국주의 세력을 추방하였다. 이리하여 중국이 그토록 염원하였던 반봉건·반제국주의의 목표가 달성되면서, 인구 최대를 자랑하는 초유의 공산주의 국가가 아시아권에 등장하게 되었다.
한편 자유주의를 표방한 유럽 국가들은 대전후 해외에 있던 광대한 식민지를 잃게 되었다. 특히 영국은 식민지가 속속 독립하여 모든 면에서 국가의 쇠퇴가 현저해지고 국가의 위신 또한 떨어져 영락(零落)의 길을 가고 있었다. 19C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에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고 나더니 한낱 유럽의 변방에 위치한 초라한 섬나라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프랑스 역시 대전의 후유증으로 정치적인 혼란을 많이 겪었다. 극우(極右), 극좌(極左), 그리고 중도로 대표되는 군소정당의 난립 등으로 11년 간 19번이나 내각이 교체되는 결과를 빚었으며 경제적인 상태가 악화되고 국력 또한 쇠약해져 한 때 ‘유럽의 환자(患者)’가 되는 경우를 당하기도 하였다.
독일은 냉전체제의 극단적인 피해를 입었는데, 독일은 전국토가 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으며 결국 동독과 서독으로 분리되어 동·서 대립의 장을 연출하였다. 특히 독일 최대의 도시인 베를린은 1945년 독일의 패전과 더불어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의 공동점령지구가 되어, 서반부·중북부를 프랑스, 중앙부를 영국, 남부를 미국, 동반부를 소련이 관리하였다. 그런데 1948년 소련과 서방 3국의 행정상의 의견 차이가 극도로 벌어져, 이해 3월에 소련은 공동관리위원회(共同管理委員會)에서 탈퇴하고, 6월에는 서방 3개국의 점령 아래 있는 서부독일 지구와 서베를린을 잇는 모든 육상(陸上) 및 수상(水上)의 교통로를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서베를린 대륙봉쇄’가 시작되었다. 이 봉쇄로 베를린의 동·서 분할이 결정되었고, 서(西) 베를린은 ‘붉은 바다에 뜬 뭍의 고도(孤島)’가 되었다.
이때에 자유진영을 대표하는 미국을 비롯한 서유럽은 이에 대처하지 않을 수 없어 미국과 서유럽은 한 배를 탈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방대한 지원계획을 세우고 서유럽을 도와주기 시작하였다.
미국이 이렇게 서유럽에 막대한 지원을 할 수 있었던 자본의 기반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6·25사변이었다.
6·25사변으로 가장 덕을 많이 본 나라는 역시 미국일 것이다. 1차대전 때 부상하기 시작한 미국은 2차대전으로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미국의 경제는 2차대전으로 완전히 불황의 늪에서 빠져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대전으로 규모가 거대한 공룡처럼 커졌던 군수사업과 무기사업이 문제였다. 이 거대한 공룡은 2차대전 후 전투가 사라지자 곧 바로 불황의 늪으로 빠져 들었는데 이것이 미국 전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무척 컸다. 이때에 한국전(韓國戰)이 구세주(救世主)가 되었다. 1950~1953년에 벌어진 한국전은 한국인에게는 생살을 뜯어내고 뼈를 깎는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나 미국에게는 행운의 여신으로 작용했다.
미국은 서구의 경제재건을 위해 적극적인 투자를 하였다. 즉 미국은 소련의 공산 세력이 침투할 수 있는 최후 방어선을 서부 유럽과 한국에 그어놓고 자유진영의 체제 사수를 위해 노력한 셈이었다.
일본의 경제성장
패전 후 극심한 경제적 침체기에 빠져 있던 일본에게 있어 6·25사변은 더 할 수 없는 호재였다. 일본을 한국전을 위한 병참기지로 활용한 미국은 6·25사변에 필요한 전쟁물자를 일본에서 현지 생산했던 것이다. 일본의 경제 재건은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원폭 투하로 만신창이가 되어 항복한 이후 한국의 전쟁(6·25사변)으로 경제가 회복되어 2차대전 전보다 더욱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일본, 그들은 조선을 개화시켜 근대적인 나라가 되도록 한 대가(代價)를 충분히 보상받은 셈이었다.
이후 서유럽과 일본 및 미국의 자본주의 경제는 발전을 거듭하여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발달된 경제력으로 ‘철의 장막(Iorn Curtain)’이라고 일컫는 공산진영의 나라들이 스스로 문호를 개방하게 만들었다.
공산주의를 좌초시킨 것은 자본주의에 의한 경제력이며 미국, 일본, 서유럽 등 자본주의 경제 발전을 가져오게 한 중요한 동인(動因)이 한국전에 있었으니 어떻게 보면 세계의 절반을 먹여 살린 것이 한국전(韓國戰)이며 나아가 공산 진영의 문을 열게 한 것도 한국전인 셈이니 참으로 묘(妙)하다 아니 할 수 없다.
이러한 한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4대 강국의 작용은 궁극에는 한국을 상등국으로 만들어 가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한국은 냉전체제 속에서 개혁과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세계에서 유례없는 급성장 및 고도 성장을 하게 된 것이다.
도주의 화천(化天)과 태극도의 변화
전쟁과 수복, 전후 복구 등으로 세상이 바쁘고 혼란스러운 동안 도주께서는 부산에서 난리통에도 불구하고 도수에 의한 공부와 포덕사업에 힘쓰시니 이는 일국(一國)의 운명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라 천(天)·지(地)·인(人) 삼계(三界)를 광구(匡救)하는 일인 까닭이다.
일찍이 일제시대에 도주께서는 조선총독부에 협조하여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에 동조할 것을 당부하는 전북지사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한 일은 그대들의 왕이 직접 와서 사정을 해도 불가하니 나의 이 말을 총독에게 전하라. 그러나 그대들도 언젠가는 나의 도가 진법(眞法)임을 깨닫고 수공(修工)해야 하리라”고 하신 바 있다.
도주께서 하시는 일은 어느 한 사람의 복(福)이나 빌고 선(善)이나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선천에서 후천으로 넘어가는 우주의 대변혁시기에 후천의 새 세상을 열고 전 인류와 신명을 광구하여 함께 후천 복록(福祿)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다.
또한 도(道)는 불변의 진리이지만 도수는 구천상제님의 천지공사에 의한 것이므로 때가 되면 자연히 변하는 것이다. 태극이 기동하였으니 이제는 음양(陰陽)의 합덕(合德)과 조화(調和)가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에 무성히 자라서 가을이 되면 추수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서 겨울이 오면 갈무리하는 것이 도수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로 태극 또한 도수가 차면 마냥 태극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조화가 일어나 새로운 탈바꿈이 필요한 것이니 이를 두고 옛 선인들은 도즉변(道則變)이라 하였다. 무극과 태극의 도수가 끝나고 새로운 도수로 변화하니 도주(道主)의 화천(化天)은 바로 이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1958년 무술년 조정산께서 15세의 나이로 봉천명하시어 만주에서 도를 공부하신 이래 50년 째 되는 이 해에 도주 조정산께서 도의 운영 전반에 관한 일을 박우당에게 맡기고 화천(化天)하시었다. 이로써 인신(人身)을 벗고 옥황상제의 위(位)로 가신 도주의 뒤를 이어 박우당 도전께서 태극도를 맡아 십여 년 간 통솔하시었다.
도주께서 다음해 2월 하순경에 최고 간부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박한경을 도전으로 임명하니 그는 총도전이니라. 종전의 시봉 도전과는 다르니라”고 분부를 내리셨다.
― 전경 교운 2장 64절
도주께서 정유년 11월 21일 자시부터 무술년 3월 3일까지 도장에서 불면 불휴하고 백일도수를 마치시니라. 5일에 심히 괴로워 하시므로 한의사와 양의사를 불러왔으되 “때가 이미 늦었도다”고 이르시니라. 도주께서 이튿날 미시에 간부 전원을 문 밖에 시립케 한 후 도전 박한경을 가까이 하고 도전의 머리에 손을 얹고 도의 운영 전반을 맡도록 분부를 내리고 “오십년 공부 종필(五十年工夫終畢)이며 지기금지 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금년이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문 밖을 향하여 “도적놈”을 세 번 부르시더니 화천하시니라. 무술년 3월 6일 미시(未時)요 양력으로 1958년 4월 24일이요. 수는 64세로다.
― 전경 교운 2장 66절
도전(都典) 박우당(朴牛堂)께서는 도주님으로부터 총도전 임명을 받고, 유명(遺命)으로 도 운영 전반을 맡을 것을 명받고 종통을 계승하시었다. 그리고 도전 박우당께서는 태극도에서 개혁을 단행하였다. 고등공민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학교를 세워 도인자녀들이 학업을 할 수 있도록 하였고, 지금까지 얽매였던 관습에서 벗어나 머리, 복장등을 자율화 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영에 불만을 느낀 임원들의 반대에 부딪쳐 갖은 고초를 겪게 되셨다.
그런데 바로 이시기는 사회적으로도 4·19혁명, 5·16혁명 등이 일어난 시기이다.
4·19와 5·16 그리고 국운의 상승
해방, 신탁통치, 정부수립 그리고 6·25동란, 휴전, 그리고 복구 등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정치적 행보는 순탄치 않았다.
우선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국민들과 민주주의를 운영해본 적이 없는 정부지도자들은 공산군의 남침(南侵)을 경험한 터라 반공(反共)을 국시로 하여 공산군의 침투를 막는 일을 최우선으로 놓았다.
그리하여 정부에서 취한 조처들은 정치적으로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정상적인 정치활동을 억압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즉 반공을 부르짖으며 독재정치로 흐르는 폐단을 낳았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에 도전하는 일은 모조리 반정부적이고 반체제적인 활동으로 간주했고,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워 정치적 활동을 제한하고 자기 자신은 장기 집권을 노려 온갖 술수를 다 부리며 부패정치로의 길을 걸었다.
이승만 정권은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 세력이 우세한 국회에서 자신의 대통령 재당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自由黨)을 창당하고 계엄령을 선포, 반대파 국회의원을 감금하는 등 변칙적 방법을 동원하여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로 개정하고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
또한 1954년에는 자신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종신대통령제 개헌안을 발의, 국회에서 1표 부족으로 부결되었는데, 사사오입(四捨五入)의 해석논리를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번복, 통과시킴으로써 1956년 대통령에 3선되었다.
그리고 1958년 12월 차기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하고 경제시책은 빈곤한데다 특정재벌에 대한 특혜를 주어 국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1960년 3월 15일 여당과 정부가 전국적·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한 결과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이제 국민들은 더이상 이승만 정권의 독단을 용서하지 않았다.
마침내 4·19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4·19 혁명은 1960년의 정·부통령을 뽑기 위해 실시된 3월 15일의 선거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자유당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하여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하자 선거 당일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규탄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의거가 마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 시위군중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그런데 오히려 정부에서는 이 시위의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이 있었다고 발표하여 시민들의 반감(反感)을 산 데다 며칠 후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자 국민의 분노는 더욱 고조되었다.
시위대에서 앞장을 섰던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경찰이 쏜 것이 분명한 최루탄을 눈에 정통으로 맞아 죽은 상태로 마산 앞바다에서 떠올랐던 것이다.
이에 격노한 마산 시민들이 3·15의거를 일으켰고 이것이 도화선(導火線)이 되어 전국으로 불길이 번져나갔다. 드디어 4월 19일에는 격분한 시민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에 나섰지만 시위는 가라앉지 않고 연일 계속되었다. 마침내 이승만은 대통령을 사임했고 자유당 정권도 무너졌다.
4·19혁명은 학생과 시민이 주체가 되어 독재자를 무너뜨린 민주혁명으로 전 세계에 우리 민족의 역량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자유당 독재는 무너지고 혁명 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과도정부가 구성되었다. 과도정부는 총선거를 실시하여 새로 국회를 구성하고 국회에서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하고 장면을 국무총리로 하는 새 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새 내각은 당내 분열이 심하였고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고 발전을 시킬 만한 역량이 없었다. 다양한 요구를 한꺼번에 분출하는 사회에는 무질서와 혼란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차에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소장파 군부 세력이 사회적 무질서와 혼란을 구실로 군사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군사혁명은 초기에 미8군사령관 C.B.매그루더, 야전군사령관 이한림(李翰林)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혔지만,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張勉)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의 묵인 등에 의하여 성공하였다.
이로써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재편하여 3년간의 군정통치에 착수하였다. 군정기간 중 군사혁명 세력은 ‘특수범죄(반혁명, 반국가행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 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 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을 조직한 후 대통령제 복귀와 기본권 제한, 국회에 대한 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시행하였다.
1963년 말 대통령 선거에 의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정희는 군사정부에 의해 추진된 주요 과제들을 대부분 그대로 실천하려 하였다. 이것이 제 3공화국이다. 박정희 정부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의 권력 구조를 바탕으로 국정을 운용하였으므로 독재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조국 근대화의 실현을 국정의 주요 목표로 삼아 급속한 경제성장(經濟成長)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다.
경제개발정책은 그 시대의 당면과제이자 최고의 목표요, 지향점이었다. 일제시대 때부터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겪던 때라 배부르도록 밥 한번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민들의 여망에 부응(副應)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정희는 경제개발에 초점을 맞춘 강력한 정책들을 시행하였고 그 결과 성공했다.
이것은 조선을 상등국으로 만들기 위해 상제님께서 처결하신 천지공사에 의해 나타나는 결과였다.
도전 박우당께서 태극도를 개혁하자 사회에도 4·19혁명, 5·16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와같이 도수의 변화에 따라 도(道)의 모습도 변하고 사회도 따라서 변해 나가는 것이다.
또한 그당시 경제개발정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수출입국(輸出立國)’이었다. 수출입국이란 우리나라는 삼면(三面)이 바다로 둘러싸인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으므로 해양으로 진출하기도 쉬우며, 부존자원이 빈약하여 수출에 의지해서 경제를 세워야 한다는 경제개발의 기조가 되는 정책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미리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셔서 미리 짜놓은 도수에 의함이니 수출을 견인차(牽引車)로 하여 경제를 세우려는 이 정책 역시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경』에는 이 사실에 대한 상제님의 말씀이 언급되어 있다.
상제께서 하루는 종도들에게 “진묵(震默)이 천상에 올라가서 온갖 묘법을 배워 내려 인세에 그것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김봉곡(金鳳谷)에게 참혹히 죽은 후에 원(寃)을 품고 동양의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화 계발에 역사하였나니라. 이제 그를 해원시켜 고국(故國)으로 데려와서 선경(仙境) 건설에 역사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 전경 권지 2장 37절
상제께서 매양 뱃소리를 내시기에 종도들이 그 연유를 여쭈니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우리 나라를 상등국으로 만들기 위해 서양신명을 불러와야 할지니 이제 배에 실어 오는 화물표에 따라 넘어오게 됨으로 그러하노라”고 하셨도다.
― 전경 예시 29절
상제께서 계묘년에 종도 김형렬과 그 외 종도들에게 이르시니라. “조선 신명을 서양에 건너보내어 역사를 일으키리니 이 뒤로는 외인들이 주인이 없는 빈집 들듯 하리라. 그러나 그 신명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제 집의 일을 제가 다시 주장하리라.”
― 전경 예시 25절
조선을 상등국으로 만들어 후천선경의 중심으로 세우기 위해 실제로 일을 하는 신명들은 진묵이 서양으로 거느리고 간 도통신과 이마두에 의해 서양으로 건너가 산업혁명을 일으킨 문명신, 그리고 상제의 명을 받고 서양에 가서 역사하던 조선신명들이다. 이들 신명이 한국으로 넘어와 국민들과 한 마음 한 뜻으로 함께 일을 하여 한국이 전후(戰後)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낼 것임을 알려주신 말씀이다. 그렇게 하여 대한민국의 국운이 상승일로에 서면서 동시에 천하의 대세가 돌려 잡힐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경제개발 정책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된 것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였다. 이승만 정부는 7개년 계획으로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장면 내각에서 5개년 계획으로 수정되었다.
광복 직후 신탁통치에 의해 분단 아닌 분단의 상황이 되자 남한의 경제는 정상적인 발전을 할 수 없었다. 남한은 농업과 경공업 중심이고 지하자원과 중공업은 북한에 편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전을 도모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체제를 피하여 북한에서 밀려드는 월남민(越南民)으로 남한의 인구까지 급증하여 실업률과 식량부족의 정도가 심각했다. 또한 6·25전쟁으로 대한민국이 입은 경제적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특히 경인지방에 밀집되어 있던 섬유공업과 인쇄공업의 시설이 공습으로 거의 다 파괴되었고, 전쟁비용 조달을 위한 막대한 재정지출로 인하여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었고, 물가 폭등과 물자 부족이 겹쳐 국민생활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히 전쟁으로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한 터라 식량난이 심하여 미국의 구호식량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시절에 빵의 원료가 되는 옥수수가루 등이 국내로 많이 들어왔다. 당시 원조된 밀가루 및 옥수수가루 푸대에 그려진, 양쪽의 손목 부분에 태극기와 성조기가 그려져 있고 두 손이 악수를 하고 있는 그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처음에 정부는 외국의 원조 등에 힘입어 제분·제당 공업과 섬유공업을 성장시켰고, 이후 시멘트와 비료 등의 생산도 늘어났다.
그러나 소비재 산업이 급성장한 데 비하여 기계공업이나 중공업은 형편없었고 사회 기간 산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취약한 경제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다.
경제개발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5·16군사혁명 후 제 3공화국이 들어선 후부터이며 그 때부터 본격적인 실천이 이루어졌다.
1960년대에 추진된 1,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는 기간산업(基幹産業)의 육성과 경공업의 신장에 주력하였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년)의 주요 골자는 전력·석탄의 에너지원(源)과 기간산업을 확충하고 사회간접자본을 충실히 하여 경제개발의 토대를 형성하는 것이었으며 그 밖에 농업 생산력을 확대하고 농업소득을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이 시기에는 경제성장률 7.8%로 목표를 상회하였으며 1인당 국민 총생산은 83달러에서 125달러로 증가되었다.
제2차 경제개발에서는(1967~1971년) 식량 자급화와 산림녹화, 화학·철강·기계 공업의 건설에 의한 산업의 고도화, 국민 소득의 비약적 증대, 기술수준과 생산성의 향상에 그 목표를 두었다. 그러나 목표달성을 위한 자본이 문제였다. 산업시설이라고는 일제시대에 건설된 것밖에 없는데다가 전쟁으로 그것마저 다 부서졌는데 국내에 무슨 자본이 있어 경제건설을 할 것인가? 해결방법은 차관 밖에 없었다. 국내자본을 할 수 있는 한 끌어 모으고 그 나머지는 차관에 의존해야 했다. 그래서 한국전으로 경제가 부흥한 일본과 경제대국인 미국 등에서 돈을 빌렸다. 그 때 마침 월남전(1960~1975년)이 벌어졌고, 미국의 요청으로 8년간에 걸친 파병(1964~1973년)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전재(戰災) 복구를 위한 공병 부대인 ‘비둘기부대’가 파견되었고, 뒤이어 1965년 한국전에 참전한 우방국에 대한 보답이라는 명분 아래 공산 베트남군을 떨게 했던 전투부대인 ‘청룡부대’와 ‘맹호부대’가 파견되어 주월 한국군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또한 1966년에는 ‘백마부대’ 등의 부대가 월남으로 파견되었다.
전쟁(戰爭) 특수(特需)로 한국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는 경제성장률이 9.6%였으며 수출 주도형의 체제가 확립되어 수출 또한 그 양이 급격히 늘었다.
제3차 경제개발(1972~1976년)의 목표는 중화학 공업의 육성에 초점을 맞추고 안정적 균형을 이루는데 두었다. 이 시기에는 ‘닉슨독트린’, ‘오일쇼크’ 등 어려운 고비가 많았으나 외자도입의 급증, 중동(中東) 건설 경기 등으로 난국을 극복하여 연평균 9.7%의 성장률을 유지하였다.
제4차 경제개발(1977~1981년)은 그동안의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에서 탈피하여 성장은 물론 형평(衡平)에도 힘을 기울여 형평 증진과 기술혁신을 목표로 하였다.
그런데 박정희 정부에 의해 추진된 정책 중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이 ‘새마을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
그 동안의 경제는 괄목한 만한 성장을 이루었으나 도시 위주의 발전에 국한되어 농어촌은 아직 소득이 영세하였고 전근대적이며 낙후되어 있었다. 이에 박정희 정부가 강력하게 농어촌을 근대화시키기 위해 발족한 것이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는 농촌 재건 운동이다.
박정희 정부는 1971년 전국 3만 3,267개 행정리동(行政里洞)에 시멘트 335포대씩 균일하게 무상 지원하여 각 마을마다 하고 싶은 사업을 자율적으로 하도록 하였다.
결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 첫째는 정부가 무상 공급한 시멘트로 부락민들이 자체 노력과 자체 자금을 투입하여 마을이 필요로 하는 숙원사업을 해낸 경우였고, 둘째는 시멘트의 무상공급을 받았지만 뚜렷한 사업을 하지 못한 경우였다.
정부는 반응이 있는 1만 6,600개 부락에 대하여 또다시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t씩을 무상공급하면서 자발적인 협동노력을 장려하였다. 무조건 일률적으로 퍼 주는 방식이 아니라 주민들 스스로 노력하게 하여 노력에 따라 지원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쟁적·선별적 방식으로 점화(點火)된 새마을사업은 정부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단순한 농촌개발사업이 아니라 공장·도시·직장 등 한국사회 전체의 근대화운동으로 확대·발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새마을운동은 정신적으로 근면·자조·협동을 생활화시켰으며, 정부는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우수한 지도자들을 포상하며 동시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으니, 새마을운동은 그야말로 관·민 합동으로 이루어낸 개가였다. 또한 새마을운동은 대통령의 절대적인 후원과 우수한 남녀 새마을지도자의 헌신적인 노력, 그리고 공무원과 행정부의 지원이라는 3자의 연합이 핵을 이루면서 추진된 국민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은 초기에는 단순한 농가의 소득증대운동이었지만 이것을 통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면서부터는 도시·직장·공장에까지 확산되어 근면·자조·협동을 생활화하는 의식개혁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운동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선진국대열에 꼭 진입해야 한다는 의지를 국민들에게 강하게 심어준 정부 주도하의 국민적 근대화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초기의 농촌개발사업에서 출발했던 새마을운동은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엄청난 물량적·정신적 성과를 얻어가면서 점차 비농촌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새마을운동은 물량적인 건설사업을 넘어 1970년대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뒤에서 받들어 준 정신적인 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새마을운동’은 ‘잘 살기운동’이였으며 효과적인 시행으로 한국의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새마을운동은 1969년의 3선 개헌, 1971년의 대통령선거와 비상사태선포, 그리고 1972년의 유신헌법 통과와 같은 권위주의 정권의 형성과정에서 진행되었으며 새마을운동의 본격적 전개가 유신체제와 더불어 진행되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보통 관(官)주도적인 사업이나 위로부터의 개혁은 정권이 민심(民心)을 잃으면 퇴색하기 마련이다. 일을 하는 당사자인 국민들이 외면하는데 무슨 재주로 일이 이루어지겠는가? 그래서 예로부터 민심(民心)을 천심(天心)이라 하였다.
21C에 이른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권 말기의 권력누수 현상을 생각해보라. 정권이 바뀔 즈음에는 정부에서 월급을 타먹는 공직자 및 관료들도 기강이 해이해지고 느슨해져 시간만 때우는 판인데 일반 국민들이 무슨 힘이 나서 운동을 하겠는가?
새마을운동이 일어난 것은 시기적으로 박정희 정권이 독재화의 길로 접어 들 무렵이었다. 3선 개헌 등으로 민주주의가 쇠락하고 독재정치의 위험이 경고되는 시점에서 벌어진 ‘새마을운동’이 이토록 범국민적인 근대화운동으로 불붙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한민국 국민들이 무식해서 독재정치를 하거나 말거나 잘살게만 해준다면 무조건 호응할 정도로 어리석었단 말인가? 아니다.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것이 아닌 것이다. 대한민국은 양질의 인력 이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 하나하나가 교육열이 높고, 부모는 갖은 고생을 해도 자식은 고등교육을 받게 하려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래서 비록 생활하는 형편이 어려워도 교육 수준이 높았다. 생활은 낮아도 의식은 높았다는 얘기이다. 이런 국민들을 기만(欺瞞)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삼천만의 인구가 다 무식해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 통한 것이 아니라 이는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해서 국민들로 하여금 가슴에 품은 열망이 끓어오르게 한 것이었다.
특히 1972년에 유신개헌이 단행되었을 때에는 각계각층의 반대 시위와 집회가 잇따랐으며 그 진압방법 또한 혹독했다. 언론은 통제되었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국민들 모두가 억제되고 두려워했던 무서운 세상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새마을운동의 열기는 식지 않고 오히려 이 시기에 더욱 타올랐다. 상식적인 눈으로만 보아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정치는 뒤숭숭하고 사회는 불안정했다.
이러한 사회 상황에서 한 번 지펴진 불이 꺼지지 않고 더욱 활화산(活火山)처럼 타올랐다는 것은 거의 기적(奇蹟)에 가까운 일이었다. 바로 이것이 신명의 역사(役事)임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신명(神明)의 역사가 없고서야 어찌 이런 기현상(奇現象)이 가능하겠는가?
진묵을 비롯한 도통신명이 함께 일을 하니 범국민적인 ‘잘살기운동’의 열풍이 식지 않았던 것이며 또한 대단한 성과(成果)를 이루어냈던 것이다.
국민들의 노력과 신명들의 역사가 함께 어우러져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경제개발과 함께 국토개발이 추진되어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하여 각종의 고속도로망이 확충되어 전국이 1일 생활권으로 묶이게 되었으며 세계에서 주목 받는 신흥 공업국으로 부상하였으며 국민의 생활수준도 괄목할 만큼 향상되었다.
경제규모는 엄청나게 확대되어 국민총생산량과 무역규모에서 세계 10위권에 진입하기에 이르렀다. 1인당 국민 총생산량은 1962년 87달러에서 1995년에는 1만 달러를 돌파하였다. 수출도 5,500달러에서 120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산업구조도 선진국형으로 전환되어 농·어업의 비중이 크게 낮아지고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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