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천면 장기리 423번지 창촌마을의 위천초등학교 어귀에 있다. 조선조 초에 영계 유환(劉懽)이 지어 유영(遊泳)하던 곳이다.
그 후 수백 년 세월에 대를 이어 후손들이 중수하였다.
규모는 목조건물로 와가 3칸이다.
갈천 임훈 역양 정유명 시 원운에 가로되
乎在瀯溪叟(호재영계수) 偸閑臥小丁(투한와소정)
吟詩未作聳(음시미작용) 擧酒眼生靑(거주안생청)
池柳光風㓉(지유광풍활) 庭悟霽月明(정오제월명)
林泉無限景(임천무한경) 慰我傲時情(위아오시정)
영계 좋아 사시는 어른이시여 / 소정에 한가히 누어 계시는 구나 /
읊조림에 잠기시면 지그시 눈 감으셨고 / 술잔을 드신 후 생기 더욱 푸르러라 /
못가의 실버들 광풍에 흔들리고 / 뜰 앞에 오동은 제월에 밝더라 /
임천의 한없는 경치가 / 내 마음을 더욱 즐겁게 위로하네.
영계 유환은 서기 1337년생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 광정대부밀직사사 겸 대사헌을 지냈다. 조선조 초에 수차에 걸쳐 와의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고려왕조를 기리며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다가 세상을 떠났다. 전원에 그의 신도비가 있다.
영사정기 역문
내가 서북지방으로 고려의 선죽교에 이르렀으니 선죽교는 곧 정문충(포은 정몽주)이 순절한 곳이다. 지금까지 도피의 흔적이 반근착절(얽히고 설켜 해결하기 어려움)로 남아 있어서 격동에 우러러 강개하여 누구나 눈물을 흘리지 않고 돌아오는 이가 없으며, 영남으로 내려와 일선 땅에 이르러 금오산을 바라보니 이 산은 이르기를 길충절(야은 길재)이 은둔생활을 하던 곳이다. 대나무 줄기 푸르고 빽빽하여 방황하고 손뼉을 치며 스스로 알지도 못하게 한숨을 쉬고 오게 된다. 또 남으로 내려와 감음(感陰)에 이르러서 영사정에 오르고 보니 이 정자는 영계 유선생이 자정(숨어살며 의리를 지킴)하던 곳이다. 아! 공이 고려조에서 도헌(대사헌)으로 나라의 운명이 다하는 날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영남으로 돌아와 금원산 아래에 은거하면서 마음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기로 맹세하매 오륜삼강이 우주를 떠 괴일만하고 지조는 별과 달같이 밝고 삼엄하였다.
이 정자를 건축하고 산수의 아름다움 속에서 종적을 감추고 암석의 기록함에 회포를 부치고 처음 일을 변개하지 않고서 남은 해를 마치었으니 예전에 이른바 천년 아래에 고상한 벗이라 함이 공의 이름이 아니겠는가.
공부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덕은 외롭지 않으나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하시었으니 이 정자에서 두어마장 쯤 가면 달암이 있으니 역시 이참판 인데 그 부인 김씨로 더불어 칠일을 주려서 돌아간 돌이다. 지금에 이르러 백기(몇백년)를 지내도록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이달암이니”하고 있으니 공이 이공의 집에 사위로서 뜻이 같고 의리가 합함으로 일찍이 그 정자에 명을 지어 이르되 “일생을 두중간에서 공경으로 전인의 닦아옴에 복종하여 삼가 오관을 지키고 깊이 삼휴를 생각하였으며 백의를 입은 자가 서로 도와서 계술한다.” 하였으니 전인이 닦던 오관과 삼휴는 모두 옛날의 절의를 숭상하던 사람이고 백의자라는 사람은 곧 이달암을 이른 것이다.
슬프다. 공이 돌아간 후 몇 백년 만에 아무 마을에서 정동계와 같은 절의가 있었고 또 의사와 충신이 있어서 우뚝하고 빛났으니 모두 이 영사정에서 시발점이 되었었다. 영사정의 시의(난리를 당하여 의리를 취함)가 크다 하겠다.
아! 백의(위에 보였음)의 풍도를 들은 자는 완악한 사람도 염치가 있고 게으른 사람도 서게 된다 하였으니 이정자에 올라서 이 명사의 구절을 외운다면 진실로 한말의 창자에 피가 끓어남이 있어서 어찌 격앙하고 강개 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그러나 우리 유공과 같은 충의는 실상 정포은이나 길야은으로 더불어 상하가 백중이 될만 한데 후세에 있어서 현달과 어둠의 사이가 있는 자는 어찌함인가? 우리 유공과 같은 철석심장이 아직까지 씻어버린 것처럼 없어지지 않았다가 조금 후일을 기다리어 밝아질 것인가?
대개 산봉우리가 웅장하게 빼어난 것이며 수석이 맑고 깨끗한 것이며 노을과 구름이 아득하게 피어오르며 화초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며 새들이 위아래에서 지저귀고 있음은 역력하게 모두 이 정자에 경치를 폭주하고 있으나 실상은 모두 영사정의 의리가 아니므로 한 가지도 부쳐서 말하지 않고 다만 이르기를 「정자의 뜰에는 추운겨울을 지탱하는 소나무와 늙지 않는 암석이 있으니 후세 사람들이 여기에 이르게 되면 대강 선생의 기질과 다못 풍도를 볼 수 있으리라」고 운운하였다. 한 고을에 반남 박종구는 기문을 지음
화화나무가 너무 멋져 지나는 길에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