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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一世 東襄大帝紀
제11세 동양대제기
원문출처 ;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07.pdf
帝,初號東川大王,諱位宮亦作憂位居,小字曰郊彘,山上大帝之長子也.母,香部小后,酒桶村主椽翁之女也.状皃雅秀,愛人下士,且有勇力善騎射好武術,新練兵士.有東明大志,喜怒不形,侍女誤[覆]肉羹于御衣則但問其無傷爾手而已.于后欲試其量,乘其出外剪其爱馬之鬣,則敀而見之以手撫鬣曰“馬無鬣甚可憐.”上下莫不稱其寬仁大度.然,好畋獵築宮室浸女色,事征伐內外多事以是少之.
제는 초호初號가 동천대왕東川大王이었고, 휘諱는 위궁位宮1) 또는 우위거憂位居이었으며, 아명小字은 교체郊彘로, 산상대제山上大帝의 맏아들이며, 모친 향부소후香部小后2)는 주통촌주酒桶村主 연椽노인翁3)의 딸이다. 외모와 얼굴이 우아하며 출중하고, 백성들과 하급관리下士들을 아꼈으며, 게다가 용력勇力이 있고 기사騎射에 뛰어나고 무술武術을 좋아하여 병사兵士들을 새로이 조련하였다. 동명東明의 큰 뜻이 있고, 즐거움과 노여움을 티내지 않아서, 시녀가 잘못하여 고깃국을 어의에 엎질렀어도 단지 ‘네 손은 다치지 않았느냐’고 물을 뿐이었음에, 우于후가 그의 도량度量을 가늠해보려고 제께서 밖으로 나가셨음을 틈타서 애마의 갈기를 잘라놓았던 즉, 돌아와서 그 모습을 보시고 손으로 말의 갈기를 어루만지며 이르시길 “말이 갈기가 없음이 심히 가련하구먼.”이라 하셨으니, 아랫사람들이나 윗사람들이나 제께서 너그럽고 인자하시며 도량이 크심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사냥畋獵을 즐기고 궁실宮室을 지어 여색女色에 빠지기도 하였으며, 정벌征伐을 일삼다가 나라 안팎에 많은 일들이 있었음에 이로써 뜸하여졌었다.
1) 現傳三國詐記엔 山上王의 諱로 나옴.
2) 后女
3) 椽栢
○元年丁未,夏五月七日夜,山上大帝以癰潰之證崩于金川宮.于皇后急召太子,行祥于殯.召太輔穆登左輔于目右輔尙齊國相高優婁中畏大夫明臨息夫,入內殿,行太子卽位禮,宝令十九.羽林百僚舉燎山呼.東将明矣. 夏六月,以明臨息夫女鳣氏爲皇后,號皇林宮.于后為金川太后.香部小后為酒桶[太]4)后,賜姓椽氏. 秋七月,葬大行[于]5)山上陵,立廟于艮嶺. 于目太輔,尙齊左輔,息夫右輔兼摂政大王,高優婁國相. 九月,前太輔靑山公穆登薨,年七十五,度婁孫也. 新羅,奈解(三二)6),二月,巡其西南郡邑考績,三月還,以海飡康善為伊飡. 作詩惱(思內樂). 百濟,仇首(一四),三月雹,四月大旱,仇首親禱東明庙乃雨. 群臣請復役大角宮,許之.先是,山上為鳣后採斑玉作此宮,因不豫而停之.至是復營,上與皇后親督之.飾以宝玉香木,圍以花鳥走泳,極其奢侈.
○원년정미(CE227), 하5월 이렛날 밤에 산상대제山上大帝가 종창으로 몸이 문드러져서 (서도의) 금천궁金川宮7)에서 죽자, 우于황후가 급히 태자를 불러 빈궁에서 상제喪祭(服祭)를 올렸으며, 태보 목등穆登, 좌보 우목于目, 우보 상제尙齊, 국상 고우루高優婁, 중외대부 명림식부明臨息夫를 불러 내전으로 들여서 태자의 즉위예식을 치렀더니, 보령 열아홉이었다. 우림과 백료들이 횃불을 치켜들고 만세를 부르니, 동쪽하늘이 곧 밝아왔다. 하6월, 명림식부의 딸 전鳣씨를 황후로 올려서 황림궁皇林宮으로 삼고, 우于후를 금천金川태후로 삼았으며, 향부香部소후를 주통酒桶태후로 삼고 연椽씨 성姓을 내렸다. 추7월, 대행을 산상릉山上陵에 장사하고 간령艮嶺8)에 사당을 세웠으며, 우목을 태보, 상제를 좌보, 식부를 우보 겸 섭정대왕, 고우루를 국상으로 삼았다. 9월, 이전의 태보 청산공靑山公 목등穆登이 75세에 죽었다. 목도루度婁의 손자였다. 신라新羅는 내해奈解[32년]가, 2월에 그 나라 서남쪽 군읍郡邑들을 순시하여 길쌈하는 것을 살피고 3월에 돌아가서, 해찬海飡9) 강선康善10)을 이찬伊飡으로 삼았고, 뇌惱(사내락)라는 시를 읊었다. 백제百濟는 구수仇首 14년으로 3월에 우박이 내리고 4월이 크게 가물었다. 구수가 손수 동명사당東明庙에 빌고서야 비가 내렸다. 군신群臣들이 (환도에) 대각궁大角宮11)짓기를 계속하길 청하여, 허락하였다. 애초에 산상山上이 명림전鳣후를 위하여 무늬 옥을 캐서 이 궁궐을 짓다가12) 환후를 얻어 위독해져서 멈췄었는데, 이제 와서 계속한 것이었다. 상이 황후와 함께 친히 독려하여, 보옥과 향목으로 치장하고 꽃들로 둘러쳐서 새들이 달리고 헤엄쳤더니, 그 사치가 극에 달하였다.
4) 異本은 “香部小后為酒桶太后,賜姓椽氏."이다.
5) 異本은 “葬大行于山上陵."이다.
6) 異本은 “新羅,奈解(三二)"이다.
7) 西都
8) 斷層으로 이뤄진 고개?
9) 三國史記엔 波珍飡
10) 三國史記엔 康萱
11) ☞皇林陽原間鴨宮,在西都之境?在丸都之境?
12) ☞山上大帝紀 29年을사(CE225).☞大角宮이 鴨宮이란 말인가?
○二年戊申,春二月,上[與]13)皇后酒桶后于術妃(皇后母)如卒本,謁東明庙告卽位.三月還御大角宮,受百官朝賀,大赦天下. 三月14),以金川后為皇太后摂政王.以息夫為國公,于術為國太妃,加其奴婢庄園. 秋八月,雷雨.上如酒桶宮,洗皇子奢勾.十七朔而生故奢,月如勾而生故曰勾.上極愛之,珍宝多與之. 遼東,公孫恭為其兄子淵所擒.淵自稱太守而代領其衆. ○2년무신(CE228), 봄2월, 상이 황후・주통酒桶후・우술于術비(황후모)와 함께 졸본卒本으로 가서 동명東明사당을 알현하고 즉위했음을 고하였으며, 3월에 (환도)대각궁大角宮15)으로 환어하여 조당에서 백관들의 하례를 받고 온 나라에 대사령을 내렸다. 3월, 금천金川후16)를 황태후・섭정왕摂政王으로 삼았다. 식부息夫를 국공國公으로 삼고, 우술을 국태비로 삼아서, 노비와 장원을 늘려주었다. 추8월, 뇌우가 있었다. 상이 주통궁酒桶宮으로 가서 황자 사구奢勾를 씻어주었다. 17삭(17달)만에 낳아서 사奢17)라 하고18) 그날의 달 모양이 갈고리를 닮아서 구勾라 하였으며, 상이 그를 지극히 아껴서 많은 진보를 그에게 주었다. 요동遼東에선 공손공公孫恭19)이 형의 아들인 공손연淵에 의해 갇혔다. 공손연淵이 태수太守를 자칭하고20) 대신하여 그 무리들을 다스렸다.
13) 異本은 “上與皇后...”이다.
14) 或是 五月?
15) 在丸都
16) 금천태후
17) (10달을) 넘쳤다.
18) ☞非東川子.
19) 帶方國
20) ☞帶方國은 王國이 아닌 郡國정도이었음.
●三年己酉,春正月,皇太后姊虎川宮妃薨,年七十.虎,初為發岐妻,後為乙巴素妻.有脅力能騎射,発岐之乱,大義絶夫.以扶社功,封妃.國有大政,依三輔例収議. 朱妃生子朱元. 二月,鱣皇后生勝公主于大角宮. 三月,親練士卒於內城之原,與皇太后謁山上陵. 于目薨,尙齊太輔,米何左輔. 羅,奈觧[三四]21),四月,虵鳴南庫三日.九月,地震.十月,大雪五尺. 濟,仇首(一六),十月畋于寒泉.十一月,大疫.末曷入寇牛谷界.仇首率三百精兵赴救,遇其伏兵而敗.末曷大掠人物牛羊而去.仇首以為縱曷而怨我. 吳主孫權稱帝,遷都建業.
●3년기유(CE229), 춘정월, 황태후22)의 언니 호천궁비虎川宮妃가 나이 70에 죽었다. 호천虎은 처음엔 발기發岐의 처였다가 후에 을파소乙巴素의 처가 되었었다. 남을 압도하는 힘이 있고 기사騎射도 잘하였으며, 발기發岐가 난을 일으키자, 큰 뜻으로 지아비를 버렸고, 부사扶社의 공23)으로 비妃로 봉함을 받았으며, 나라에 큰 일이 생기면 3보들을 시켜서 의견을 견주어서 모으게 하였었다. 주朱비가 아들 주원朱元을 낳았다. 2월, 전鱣황후가 (환도)대각궁大角宮에서 승勝공주를 낳았다. 3월, 친히 (환도)내성內城24) 벌판에서 군사들을 조련하고, 황태후와 함께 산상릉山上陵을 참배하였다. 우목于目이 죽어, 상제尙齊를 태보, 미하米何를 좌보로 삼았다. 신라羅는 내해 34년으로, 4월에 남쪽창고에서 뱀이 3일을 울더니, 9월엔 지진이 일고, 10월엔 많은 눈이 내려 다섯 자나 쌓였다. 백제濟는 구수仇首 16년으로, 10월에 한천寒泉25)에서 사냥하고서, 11월에 돌림병이 크게 돌았다. 말갈末曷이 우곡牛谷경계로 침입하여, 구수가 정병 300을 이끌고 도우러 가다가 복병을 만나서 패하였다. 말갈이 사람과 재물 및 소와 양을 대거 노략하여 물러갔다. 구수는 말갈을 풀어놓은 때문이라며 우리를 원망하였다. 오왕吳王 손권孫權이 칭제하고, 건업建業으로 천도하였다.
21) 異本은 “奈觧(三四),四月,虵鳴南庫三日”이다.
22) 金川太后・攝政王
23) 政變을 막아서 社稷을 도운 功
24) 이 內城은 國 즉 都城의 內城으로 丸都城의 內城이다. 國內 땅 國內城이자 尉那岩城인 北都에서 西南方으로 멀리 떨어진 密都로 쓰였던 桓那古都之境의 都城의 內城이다. 三國詐記의 國內城 즉 丸都는 北都가 아니었으며 主都城도 아니었다. 三國詐記는 高句麗의 都城들마저 제대로 적어놓지 못하였거나, 高句麗歷史와 疆域을 歪曲・縮小하기 위하여 都城들의 숫자마저 숨겼음이다.
25) 冷泉?
○四年庚戌,春正月,親習兵馬于中川之原. 二月,改後宮八部為六儀.香部藥部曰內儀,丹部浴部曰丹儀,饍部曰厨儀,茗部醞部曰茶儀,道部曰淑儀.又加珍玩宝藏之后,卽古藏部也,謂宝儀.以后母于術為內儀小后,亦曰香后. 秋七月,國相髙優婁以疾薨.以左部于台於漱代之,乃皇后之兄也,香后之子也.俊厚容物,有大臣風,然貪財好色,頗缺人望.太輔于目難之而退,尙齊太輔,息夫左輔,湏古太子右輔,乙大非中畏大夫.時,于太后與[酒桶后不睦]26),酒桶后出居狐川行宮.大非子素介為行宮仙人. 羅,奈觧(三五),三月,奈解殂.伐休孫助賁立.父,骨正.母,玉帽,金仇道之女也.其妻阿爾兮,奈觧女也.奈觧臨終遺言以婿爲子,國人乃立助賁.身長美儀,采臨事明断,咸稱之.伊飡連忠掌軍國事.七月,謁始祖庙.
○4년경술(CE230), 춘정월, 중천원中川之原27)에서 친히 병마兵馬28)를 익혔다. 2월, 후궁들과 8부八部를 6의六儀로 바꿨다. 향부香部・약부藥部를 내의內儀로, 단부丹部・욕부浴部를 단의丹儀로, 선부饍部를 주의廚儀로, 명부茗部・온부醞部를 다의茶儀로, 도부道部는 숙의淑儀로 하였다. 또한 옥구슬・노리개・보물들을 갈무리하는 후后를 두었으니, 곧 옛 장부藏部이었고, 보의宝儀라 하였다. 황후后의 어미 우술于術을 내의소후內儀小后로 삼고, 향후香后라고도 하였다. 추7월, 국상 고우루高優婁가 병으로 죽었다. 좌부左部29)우태于台 명림어수於漱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황후30)의 오빠이며 향후香后31)의 아들로, 재주 있고 후덕하며 용물容物32)은 대신大臣의 기풍이 있었으나 재물財을 탐하고 여색色을 밝혀서 꽤나 인망을 잃었다. 태보 우목于目이 그를 감당하기 어려워서 물러나매, 상제尙齊를 태보, 식부息夫를 좌보, 회고湏古태자를 우보, 을대비乙大非를 중외대부로 삼았다. 이때, 우于태후가 주통酒桶태후와 사이가 좋지 않으매, 주통태후가 호천狐川행궁으로 나가서 살고, 을대비大非 아들 을소개素介가 행궁선인이었다.
신라羅는 내해奈解 35년으로, 3월에 내해가 죽고, 벌휴伐休의 손자 조분助賁이 보위에 오르니, 아비는 골정骨正, 어미는 옥모玉帽로 김구도金仇道의 딸, 처는 내해奈解의 딸이었다. 내해가 죽음에 임박하여 유언으로 사위를 아들로 삼고, 국인國人들33)이 조분을 보위에 세웠다. 키가 크고 외모가 훤칠하며 사람을 채용하여 일을 맡김이 명확 단호하여, 모두가 칭송하였다. 이찬 연충連忠이 군국지사軍國之事34)를 관장하였다. 7월에 시조사당을 배알하였다.
26) 異本에 “時,于太后與酒桶后不睦,酒桶后出居狐川行宮.”로 되어 있어서, 異本을 따랐다.
27) 箕丘 則 黃龍故地 東部之境으로 黃龍國故地의 東部
28) 兵士・軍馬・武器를 써서 戰爭하는 모든 것
29) 東部 즉 順奴部의 于台
30) 明臨鱣
31) 明臨息夫의 妻였던 于術
32) 儒學四物,則修身・齊家・治國・平天下
33)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 朝廷 사람들, 또는 帝王의 血族들
34) 國政之事과 軍政之事
●五年辛亥,春正月,錦林公主薨.新大之女,息夫之母,年八十,有賢德,上下稱之,葬于質山. 夏四月,鱣皇后生鵂公主. 羅助賁(二),七月,以伊飡于老爲大将軍,討甘文,拔之.以其地為郡. 濟仇首(一八),四月,雹如栗,鳥雀中者死. 魏以公孫淵為遼東太守車騎将軍,襲我玄菟城.命右衛将軍朱希擊破之.
●5년신해(CE231), 춘정월, 금림錦林공주가 죽었다. 신대新大제의 딸이며, 명림식부息夫의 어미로, 나이 80이었다. 현명하고 덕이 있어서, 상・하 사람들이 그녀를 칭송하였다. 질산質山35)에 장사했다. 하4월, 전鱣황후가 휴鵂공주를 낳았다. 신라羅는 조분助賁 2년으로, 7월에 이찬 우로于老로 대장군을 삼아, 감문甘文국을 쳐서 빼앗고,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다. 백제濟는 구수仇首 18년으로, 4월에 밤톨만한 우박이 내렸고, 그것을 맞은 큰새鳥들과 참새雀들이 죽었다. 위魏가 공손연公孫淵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거기장군車騎將軍을 삼아서 우리 현도성玄菟城을 기습하여36), 우위장군右衛將軍37) 주희朱希에게 명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35) 黑河・紅河間 和林格尒 平原 (右玉)의 '鉄山[zishan]'之境?
36) ☞車騎軍이 올 수 있는 큰 길목에 玄菟城이 있었음.
37) 西方을 防衛하는 將軍
●六年壬子,春正月,大閱五部衛士于內城之原. 二月,于太后薦蘇太爲內儀,太讒預物非上子.上乃疎鱣皇后,命出居淨宮,八十日以復后.后作八十曲而悲之. 三月,孫權遣周賀,渡海潛通公孫淵.淵以宿舒孫宗等入吳,稱献貂皮達馬. 太輔尙齊以女事免,乙大昆代之. 羅,助賁(三),四月,倭猝至圍金城.助賁躬戦,破之,追斬千余級. 十月,畋于虎川以慰酒桶后.
●6년임자(CE232), 춘정월, 5부五部의 위사衛士38)들을 (환도성) 내성內城 벌판에서 대대적으로 사열하였다. 2월, 우于태후가 소태蘇太를 천거하여 내의內儀로 삼았더니, 소태太가 참소하기를 예물預物이 상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여39), 상이 전鱣황후를 소원히 하고 명하여 정궁淨宮으로 나가서 살게 하였다가 80일이 지나서 후위后位를 복원해주었다. 후后는 80곡을 지어서 이를 서글퍼하였다. 3월, 손권孫權이 주하周賀를 보내서 배로 물海을 건너 공손연公孫淵과 밀통하매40), 공손연淵이 숙서宿舒‧손종孫宗을 오吳로 들여보내 칭송하고 초피貂皮41)와 달마達馬42)를 바쳤다. 태보 상제尙齊가 딸의 일로 면직되어, 을대곤乙大昆으로 대신하였다. 신라羅는 조분助賁 3년으로, 4월에 왜倭43)가 갑자기 쳐들어와서 금성金城을 포위하였다. 조분이 몸소 싸워서 물리쳤고, 추격하여 천여 급을 베었다. 10월, 호천虎川에서 사냥하여 주통酒桶태후를 위로하였다.
38) 大闕・陵廟・官衙・軍營 등을 지키는 將校
39) 其實은 鱣氏所生 山上子임.
40) ☞孫權과 公孫淵은 河南省北部의 東流黃河로 隔하여 있었을 것임.
41) 담비의 털가죽
42) 체형이 특이한 (작은) 말이거나, 새끼 양과 말
43) 東南接?
●七年癸丑,春三月,鱣皇后生獜公主于大角宮.上命罷皇后宮仙人悪后生女,后為之不食.時,人為后歌生女難. 秋九月,孫權遣秦旦黃彊,來朝,言“所獻金宝珍帶,為淵所奪.不勝死罪.”上嘉其遠來,賜以酒食,使皂衣尙越等護送其國,賜權貂皮鶡鷄皮等曰“淵之為人反覆,不可信.”追後聞之則“淵果殺權使張彌許晏等,傳首于魏.魏封淵大司馬楽浪公,以力士為使授詔欲擊.淵知其謀,盛設兵威以帶衛受冊,魏以是含之.” 羅,助賁(四),四月,大風飛屋瓦.五月,倭寇東邊.七月,于老與倭戦于沙道,乘風縱火焚舟.賊赴水死盡.是謂嫂河大戰. 左輔米何薨,息夫代之,穆能右輔.
●7년계축(CE233), 춘3월, 전鱣황후가 대각궁大角宮에서 린獜공주를 낳으매, 상이 명을 내려 황후궁의 선인仙人을 파면해서 황후가 딸을 낳은 것을 싫어하매, 황후는 그를 위해 [또는, 그것을 생각하고] 먹기를 그만두었고, 그 시절 사람들은 황후를 위해 ‘딸 낳은 이의 어려움'을 노래하였다. 추9월, 손권孫權이 진단秦旦과 황강黃彊을 보내 입조하여 아뢰길 “바치려던 금보진대金宝珍帶를 공손연淵에게 빼앗겨서, 죽을죄를 면할 길 없습니다.”라 하니, 상이 멀리서 찾아왔음을 기뻐하며 술과 음식을 내려주고, 조의皁衣 상월尙越 등을 시켜서 그들의 나라로 호송護送하여 주었으며, 손권權에겐 초피貂皮와 갈계피鶡鷄皮 등을 내려주고 이르길 “공손연淵은 사람됨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여 믿을 바 못된다.”고 하였다. 추후에 들은 즉, 공손연은 손권의 사신 장미張彌・허안許晏 등을 죽여서 그 목을 위魏로 보냈고, 위魏는 공손연淵에게 대사마大司馬・락랑공樂浪公을 봉하고 력사力士를 사신으로 삼아 보내서 (공손연을) 격살하라고 조칙하였더니, 공손연淵은 그 음모를 알아차리고 병사들을 성대히 늘어세워서 위엄을 보이며 책명冊命받는 곳을 둘러쌌으며, 위魏는 이리되자 입을 다물었다. 신라羅는 조분왕4년 4월에 큰바람에 집과 기왓장이 날렸고, 5월엔 왜倭가 동변東邊을 도적질하여, 7월에 우로于老가 왜와 사도沙道성에서 싸웠다45). 바람을 힘입어 불을 질러서 거룻배舟들을 태워버리니, 왜적들은 물로 뛰어들어서 죽어 없어졌다. 이를 수하대전嫂河大戰46)이라 한다. 좌보 미하米何가 죽어서, 식부息夫로 그를 대신하고, 목능穆能을 우보로 삼았다.
45) 沙道는 沙峴 隣近?
46) 嫂河는 山東省 南東邊 沭河?
○八年甲寅,春正月,宴吳使于大角宮. 謁酒桶后于狐[川]47).時,后生女方乙. 夏四月,曹叡遣使来,献兵書宝劍玉床等,請共滅公孫淵而討吳. 太輔乙大昆薨,年七十.大昆,以巴素之長子.立朝五十年,有大臣之風,不以公混私,决大事治大獄,多有力焉.然,巴素沒,継娶虎川生子,未免聚麀之恥,可勝歎哉.尙齊復相. 秋九月,于太后崩,葬于山上陵側.植松七重,以遮其面. 濟主仇首殂,在位二十一年.其子沙伴立幼.肖古弟古爾廢沙伴而自立. 冬十月,上迎酒桶太后于狐川入居.于太后崩,所緫執政事.於是,椽氏兄弟驟登樞以代于氏朱氏.國人歎外戚沙麓之患,而莫可,奈何.時,酒后春秋四十六,而胖强如少女,連生私子.上不能禁,皆封為列王公主. 朱妃生子朱國.
○8년경인(CE234), 춘정월, 오吳의 사신에게 대각궁大角宮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주통酒桶후를 호천狐川48)으로 찾아뵈었다. 이때, 주통후가 딸 방을方乙을 낳았다. 하4월, 조예曹叡49)가 사신을 보내 찾아와서 병서兵書・보검宝劍・옥상玉床 등을 바치고, 함께 공손연公孫淵을 멸하고 오吳도 토벌하자고 청하였다. 태보 을대곤乙大昆이 나이 70에 죽었다. 을대곤大昆은 을파소巴素의 장자로, 조정에 자리한지 50년에 대신의 기풍이 있었고, 공公과 사私를 혼동하지 않았으며, 큰 정사를 처결하고 큰 옥사를 다스림에 힘쓴 것도 많았다. 허나, 을파소가 죽자 호천虎川을 이어서 취하여 아들을 낳으매, 취우지치聚麀之恥50)를 면치 못하였으니, 한탄할 일이었다. 상제尙齊가 재상자리에 복귀하였다. 추9월에 우于태후가 죽어, 산상릉山上陵 곁에 장사하고, 소나무 일곱 겹을 심어서 그 겉을 가렸다. 백제濟 임금 구수仇首가 재위21년에 죽었다. 그 아들 사반沙伴이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르자, 초고肖古의 동생 고이古爾가 사반을 폐위하고 자신이 보위에 올랐다. 동10월, 상이 호천狐川에 있던 주통酒桶태후를 맞이하여 들어와 기거하게 하였더니, 우于태후가 죽자, (주통이) 모든 정사를 틀어쥐었고, 이에 연椽씨 형제들이 갑자기 대신大臣자리에 올라 우于씨와 주朱씨를 대신하였다. 나라사람國人들이 외척外戚들의 사록지환沙麓之患51)을 한탄하였으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니 어찌하겠는가! 이때, 주통酒 후는 나이가 마흔 여섯에 태반이 젊은 여인처럼 튼튼하여 계속 사생자식私生子들을 낳아댔고, 상은 이를 금하지 못하고 모두를 왕과 공주로 봉하였다. 주朱비가 아들 주국朱國을 낳았다.
47) 本傳・異本에 모두 [川]字가 없으나, 以後의 記錄을 參照하여 [川]字를 삽입한다.
48) 桑幹河의 支流인 壺流河?
49) 魏,曹操孫
50) 帝王의 女人 등을 通淫하는 부끄러운 일.
51) 外戚의 跋扈에 의한 憂患.
●九年乙卯,春正月,詔曰“孝者,人之大本也.朕為民父母,不自垂範.何以治民,噫.我母后,自誕朕躬,累遭艱難辛苦到此.思念其情,可不矜憐.朕以天下養此一人,俾無遺感.凢我臣民體此大旨,如有長生不老神仙之薬補氣甦元之術可延母壽者,進于太后.冝加爵賞功.”命有司選民孝母者三十七人,賜宴于太后宮. 夏四月,鱣皇后生桷公主于[大]52)角宮,上怒削后邑龍岩桓那之地而出居淨宮,以內儀小后桶公主為皇后. 羅,助賁(六),正月,東巡郡國,撫恤其民.
●9년을유(CE235), 춘정월, 조서를 내려 이르길 “효孝는 사람의 큰 근본인데, 짐은 백성들의 부모가 되어서도 몸소 모범을 보이지 못하였으니, 어찌 백성들을 다스리겠소, 한탄스럽소! 내 모후께선 짐을 낳으신 이래로 여러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으시며 오늘에 이르셨으니, 그 정을 생각하면, 어찌 가련하셨다고 아니 할 수 있겠소. 짐은 천하를 바쳐서라도 이 분을 돌보아서 유감스러움을 남기고 싶지 않소이다. 나의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은 이 큰 뜻을 헤아려 주시오. 장생불로長生不老하는 선약仙藥이거나 기운氣運을 보補하여 젊음을 되찾아줄 재주거나 모친의 생명을 늘여주는 무엇이라도 태후53)께 바치면, 작위를 얹어주고 그 공에 상을 내릴 것이오.”라 하였고, 관리에게 명하여 어미에게 효도하는 백성 37인을 가려내서 태후 궁에서 잔치를 벌여주었다. 하4월, 전鱣황후가 대각궁大角宮에서 각桷공주를 낳았더니54), 상이 노하여 황후의 목읍沐邑인 룡암龍岩・환나桓那 땅을 삭탈하고 정궁淨宮으로 나가살게 하고서, 내의소후內儀小后 통桶공주를 황후로 삼았다. 신라羅 조분助賁(6년)이 정월에 동쪽 군국郡國55)들을 순시하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구휼하였다.
52) 本傳엔 六角宮이나, 異本과 前後의 記錄으로 보아 大角宮이 옳다.
53) 酒桶太后
54) 또 딸을 낳았으니,
55)邑國보다 地位가 높은 마을들. 또는 國人이나 功臣들에게 封한 郡・國..
○十年丙辰,春二月,孫權使胡衛来謁請和.辞意甚慢,禮物且薄,上怒謂胡衛,曰“爾王事淵甚厚,而何事朕甚薄乎.”衛曰“禮数因風波入海,辞意與淵相同.”上曰“年前旦彊绐朕.汝復爾邪.”命下獄治之.太輔息夫與疾入諫,乃置玄菟监之.衛逃走為淵所殺.其徒周仙年少能通吾語,為朱通家臣.太輔穆臣亦諫而免. 夏五月,上観稼于西郊,親採種麥. 桶皇后[恃]56)寵自恣,上復召鱣后入宮.鱣上書哀乞,曰“臣妾身多水氣.恐又生女,不敢再配聖躬.”上曰“朕夢見先帝責我曰‘女勝於子,無爭位之危.’朕今覺之.其[勿]57)虞而入.” 索頭,涉眞殂,應鹿立. 朱妃生洙公主. 羅助賁(七),二月,取骨火國為郡.以其主阿音夫為奴客,賜宅庄,安之.時,朝廷以萬一之備,割竹嶺以南之地築城池故,助賁知勢不得已而停北拒而南下者也. 濟古爾(三),十月,獵西海大島,手射鹿四十.
○10년병진(CE236), 춘2월, 손권孫權의 사신 호위胡衛가 찾아와서 배알하며 화친을 청하였는데, 그 언사가 심히 방자하고 예물 또한 야박하여, 상이 화를 내며 호위에게 이르길 “너희 왕은 공손연淵을 섬김에는 심히 후하였다. 그런데 어찌 짐을 섬김에는 심히 야박한가?”라 하였더니, 호위衛가 아뢰길 “예물禮数(禮物)은 풍파로 인하여 물에 빠뜨렸고, 문맥의 뜻은 공손연에게 함과 서로 동일합니다.”라 하매, 상이 명하길 “지난해엔 진단旦과 황강彊이 나를 속이더니, 너도 다시 그러는가?”라 하고 옥에 가둬 다스리게 하니, 태보 식부息夫가 병든 몸으로 들어와 말려서, 그를 현도玄菟에 안치해서 지키게 하였다. 호위衛는 도주하다 공손연淵에게 잡혀죽었다.58) 그의 무리 주선周仙은 나이도 어린데 우리말에 능하여, 주통朱通의 가신家臣이 되었다가, 태보 목신穆臣이 역시 말려서, 풀려났다. 하5월, 상이 서쪽교외에서 농사를 살피고 친히 보리종자種麥를 거두었다. 통桶황후가 총애를 믿고 스스로 방자하여, 상이 다시 전鱣후를 불러서 입궁하게 하였더니, 전鱣후가 글을 올려 애걸하여 아뢰길 “소첩은 몸에 수기水氣(陰氣)59)가 많아서 또 딸을 낳을까 두렵습니다. 감히 다시금 성상을 짝할 수 없겠습니다.”라 하매, 상이 이르길 “짐이 꿈에 선제를 뵈었는데, 나를 책망하며 이르시길 ‘딸이 아들보다 낫다. 제위를 다툴 위험이 없느니.’라고 하셨소. 이제 짐도 그걸 깨달았으니, 걱정 말고 들어오시오.”라 하였다. 색두索頭에선 섭진涉眞이 죽고, 응록應鹿이 보위에 올랐다. 주朱비가 수洙공주를 낳았다. 신라羅는 조분助賁(7년)이 2월에 골화국骨火國을 취하여 군郡으로 만들고, 그곳 임금 아음부阿音夫를 노객으로 삼고 집과 땅을 주어서 편안히 살게 하였다. 이때, (고구리) 조정이 만일의 대비책으로 죽령이남竹嶺以南 땅을 빼앗아서 성城을 쌓고 물구덩이池를 만들었던 까닭에, 조분助賁이 세력이 부득이함을 깨달아 북쪽에 항거하길 그만두고 남쪽으로 내려간 것이라60). 백제濟에선 고이古爾(3년)가 10월에 서해西海 큰 섬에서 사냥하여, 손수 사슴 40마리를 쏘아서 잡았다61).
56) 本傳엔 特字로 筆寫되었으나, 意味上으로 異本의 恃字가 適合하다.
57) 本傳은 物字로 筆寫하였다가 고치지 않았고, 異本은 勿字로 되어있다.
58) 三國史記는 추7월에 胡衛의 목을 베어 魏에 전했다고 적어서, 高句麗가 마치 魏에게 事大라도 하였듯이 적었다.
59) 腎臟經絡의 陰氣
60) 新羅가 河北省 中東部地域을 포기함;. 次大13年戊戌(CE158) 이래로 78年 동안 차지하였던 竹嶺以南지경-疆域北邊-을 中川大帝5年(壬申,CE252)까지 잃게 된다.
61) 百濟가 東北流하던 漢水 즉 古黃河西方을 차지한 후의 西海; 山東省 西邊의 東平湖 則 巨野澤・南陽湖・獨山湖・昭陽湖・微山湖 中의 一島? 濮陽市之境
○十一年丁巳,春三月,鱣皇后生獐公主,泣而不食.上亦泣. 劉昕鮮于嗣吳林等侵帶方楽浪等小國,與淵表裡.淵自稱燕王而驕傲.上乃遣使如魏,議討淵之計.魏使毋丘儉為幽州刺使,與鮮卑烏桓等,屯遼隊徵淵.淵出擊破之.毋欲再戦,而大雨十日遼水大漲故,恐有失而引還右北平.我軍乘虗襲取玄菟西地百余里. 太輔穆臣薨. 羅有蝗災. 七月,太輔尙齊薨,年七十七.息夫代之,能左輔.
○11년정사(CE237), 춘3월, 전鱣황후가 장獐공주를 낳아놓고 눈물을 흘리며 먹기를 피하매, 상 또한 눈물을 흘렸다. 류흔劉昕62)・선우사鮮于嗣63)・오림吳林64) 등이 대방帶方・락랑樂浪 등 소국小國(郡邑)들을 침략하여 공손연淵과 표리表裏가 되매, 공손연淵이 연燕왕을 자칭하고 교만하며 거드름을 피웠다. 상이 사신을 위魏로 보내서 함께 공손연淵을 토벌할 계획을 상의하였다.65) 위魏가 무구검毋丘儉66)을 유주자사幽州刺使로 삼아 선비鮮卑・오환烏桓등과 함께 요수遼隊[遼隧]에 진을 치고 공손연淵을 징치懲治하게 하였더니, 공손연淵이 나와서 이를 격파하였다. 무구검毋은 다시금 싸우려 하였다가 큰비 열흘에 요수遼水67)가 넘실대자 패할까 겁내고 우북평右北平68)으로 물러났다. 우리군대가 그 허를 틈타서 현도玄菟69) 서쪽 100여 리를 습격하여 차지하였다. 태보 목신穆臣이 죽었다. 신라羅에 황충 피해가 심하였다. 7월, 태보 상제尙齊가 77살에 죽어, 명림식부息夫가 그를 대신하게 하고, 목능能을 좌보로 삼았다.
62) 帶方太守(後漢? 自稱?)
63) 樂浪太守(後漢? 自稱?)
64) 部從事(後漢?)
65)三國詐記엔 去頭截尾하고 “遣使如魏賀改年號.是景初元年也. 위에 사신을 보내서 위가 연호를 바꾼 것을 축하하였다. 이때가 경초원년이다.”라고 황당하게 변조되어 적혀있다.
66)所謂 毌丘儉 즉 貫丘儉
67)청장서원 또는 탁장북원
68)霍太山 東北隣의 北平鎭
69)旧玄菟故地, 山西省 북부 쯤?
○十二年戊午,春正月,大雪五日. 太輔息夫妻玉陽公主薨,後二日息夫亦薨,年七十.息夫有渠父之風,勤儉自守戒子女,能直諫常言太后于政,人以為賢相.上與鳣皇后臨吊,葬以大王之禮. 以穆萇女蚕爲內儀小后.萇,能之子也. 司馬懿遣使來,請共滅淵賊.乃命朱希為注簿大加,引五千兵出南蘇,觀望聲援.八月,滅淵,懿背約驕傲,上怒絶之. 濟,古爾(五),正月,設壇祀天地,用鼓吹.二月,畋于釜山五旬乃返.四月,震王宮門柱,黃竜自其門飛出.
○12년무오(CE238), 춘정월, 많은 눈이 닷새를 내렸다. 태보 식부息夫의 처 옥양玉陽공주가 죽었고, 이틀 후에 식부도 나이 70에 죽었다. 명림식부는 우두머리 관장官長의 기풍이 있고, 근검하여 자신을 지키고 자녀를 가르쳤으며, 직간直諫하길 잘 하고 늘 태후에게 정사政事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더니, 사람들이 현명한 재상으로 여겼었다. 상이 전鳣황후와 함께 친히 임석하여 조문하고, 대왕의 예로 장사하였다. 목장穆萇의 딸 목잠蚕으로 내의소후內儀小后를 삼았다. 목장萇은 목능能의 아들이다. 사마의司馬懿70)가 사신을 보내 찾아와서, 함께 공손연淵71)을 토멸하길 청하매, 주희朱希에게 명하길 주부대가注簿大加가 되어 5천 군대를 이끌고 남소南蘇72)로 출병해서 관망觀望하여 성원聲援하게 하였더니73), 8월에 공손연淵을 멸한 사마의懿가 약속을 저버리고 교만・방자함에, 상이 노하여 사마의懿와 통교通交하길 끊었다74). 백제濟는 고이古爾(5년)가 정월에 제단을 쌓고 천지天地에 제사하며 북과 나발을 사용하더니75) 2월엔 부산釜山76)에서 50일이나 봄 사냥을 하고 돌아갔는데, 4월엔 왕궁 문기둥에 벼락이 떨어졌고 그곳에서 누런 룡龍이 날아 나왔다77).
70)時,在屯有 則 屯留以南.
71)曹魏名將, 晉武帝司馬炎祖父, 諡號宣帝.
72)勾茶古都, (1)석가장 서린 南佐鎭? (2)潞城 長治 사이의 南垂?
73)三國史記엔 “魏太傅司馬宣王率衆討公孫淵,王遣主簿大加將兵千人助之.”라고 그 내용이 축소되어 적혀있다.
74)☞公孫氏의 遼東帶方國이 滅亡하자, 魏와의 관계가 다시금 꼬였다.
75)☞天子로서의 行爲임. 즉, 百濟가 天子國 즉 帝國을 宣言한 것이라.
☞植民史學과 그 亞流 講壇史學들은 百濟는 古爾王 시절에 이르러서야 王國의 面貌를 갖추었다고들 主張하지만,
이때 이미 帝國을 稱하였다는 기록이다.
76)黃河北邊河南省・山西省・河北省間之境?
77)☞누런색의 용오름현상?
●十三年己未,春正月,宴宗室公卿之老母于太后宮,親率伶人奏歌舞滑稽以慰太后. 親練軍士于西川. 羅使至献玉石,求竹嶺之地.不許. 濟,自正月不雨,至五月而雨. 魏,曹叡死.司馬懿執政.
●13년기미(CE239), 춘정월, 종실과 공경들의 노모들에게 태후 궁에서 잔치를 베풀고, 상이 친히 악공과 광대들을 이끌어 악기를 타서 노래하며 춤추고 익살도 부려서 태후를 위무하였다. 친히 서천西川78)에서 군대를 조련하였다. 신라羅사신이 찾아와서 옥돌을 바치고, 죽령竹嶺땅을 달라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백제濟에선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5월이 되어서야 비가 내렸다. 위魏에선 조예曹叡가 죽고, 사마의司馬懿가 정사를 거머쥐었다.
78)箕丘以西之地. 五臺山及沙河或磁河最上流之境?
●十四年庚申,春正月,多雪,猪獐之獲甚多. 行先農祭于內城北郊. 二月,鳣皇后生亀公主,上泣.三月,太后生屈太子,上喜.太后笑曰“人言陛下喜怒不形.近頗異前,泣女而喜弟.何也.”上曰“于太后生時,未甞弛念.今頗放心.是,臣之短也,當改之.” 帶方人弓遵自稱魏太守,略邊通羅倭,生梗甚多.命於灌率韓臣智䓁擊殺之. 濟,古爾(七)侵羅西邊.四月,以眞忠為左将,委其內外兵馬.七月,大閱于石川,有﨎鴈起於川上.古爾射之,皆中,自以為神,而人以為不吉. 冬十二月,然弗宮奉禮椽葉生子若友.上夢見白龍入然弗太子之懷,心常異之.至是,白龍果現于溫湯而若友生.葉,况之女.其母尊公主,上之胞妹也,時年十四.上大喜之,親幸溫湯賜衣,以駙馬椽况爲中畏大夫,以慰太后之心.况,太后之姪,尙太后之女.于太后時,全家避于壅口,至是始大赫.
●14년경신(CE240), 춘정월, 눈이 많이 내려서, 돼지猪와 노루獐를 잡은 것이 엄청 많았다. (환도)내성內城의 북쪽교외北郊에서 선농제先農祭78)를 지냈다. 2월엔 전鳣황후가 귀龜공주를 낳으매 상이 눈물을 흘렸고, 3월엔 주통태후가 굴屈태자를 낳으매 상이 기뻐하였더니, 태후가 웃으며 이르길 “남들이 폐하는 기쁘거나 노여워도 표내지 않으신다 하였는데, 근래엔 이전과 꽤나 다르시오이다. 딸 낳으니 눈물 흘리고, 남동생을 낳으니 웃으셨으니, 무슨 까닭이시오?”라 하니, 상이 아뢰길 “우于태후가 살아있을 땐 생각이 느슨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좀 방심하였습니다. 신의 잘못입니다. 응당 고치겠습니다.”라 답하였다. 대방帶方사람 궁준弓遵이 위魏의 태수를 자칭하며 변방을 침략하고 신라羅 및 왜倭와 소통하매, 근심거리가 많아져서, 어관於灌에게 명하여 한韓(馬韓)땅 신지臣智 등을 이끌고 나가서 이를 쳐 죽이게 하였다79). 백제濟는 고이古爾(7년)가 신라羅의 서쪽변방을 치고, 4월엔 진충眞忠을 좌장군左将으로 삼아서 내외병마의 일을 맡기더니, 7월엔 석천石川80)에서 임금이 친히 군대를 사열하는데, 석천 곁에서 기러기鴈 한 쌍이 날아올랐다. 고이古爾가 이를 쏘았고, 모두가 맞았더니, 스스로는 이를 신조神助로 여겼으나, 남들은 이를 불길한 것으로 여겼다. 동12월, 연불궁然弗宮봉례奉禮81) 연엽椽葉이 아들 약우若友를 낳았다. 상이 꿈에 백룡白龍이 연불然弗태자 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 늘 이상히 여겨왔는데, 지금에 이르러 백룡이 과연 온탕溫湯에 나타났고 약우가 태어났다. 연엽葉은 연황况의 딸이고, 그 어미는 상의 동복여동생 존尊공주이며, 이때 나이 열 넷이었다. 상이 이를 크게 기뻐하며 친히 온탕으로 행차하여 옷을 하사하고, 부마 연황椽况을 중외대부로 삼아서, 태후의 마음을 위안하였다. 연황况은 상尙태후의 딸인 주통태후의 조카이다. 우于태후가 힘쓰던 시절엔 가족 모두가 옹구壅口82)로 피해가서 살았고,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처지가) 크게 바뀐 것이었다.
78)每年 農事始作에 앞서 帝王이 神農氏와 后稷氏에게 올리는 祭祀로 親耕勸農 行事도 함께 行하였던 듯; 高麗朝와 近世朝鮮朝엔 東郊에서 先農祭를 지낸 듯...
79)☞이 시절의 倭・新羅・馬韓・伯濟는 모두 西土 河南省・安徽省 以東地域에 있었다?
80)河北省 衡水古道上 南宮市之境?
81)즉 小后
82)薊縣의 北隣인 中營村之境? 또는 이의 北方인 黃崖關城지경?
●十五年辛酉,春正月,太后不豫,廢朝,錄囚,親行祈禱,命祀天壇地神名山大川.三月,快差,大宴椽氏明臨氏之族. 夏五月,上與太后皇后然弗太子如卒本,謁庙陵告王孫,觀麥田行鳩祭.秋八月,封葉氏為然弗太子妃,賜金銀轎綵段無数.以尊公主為內儀小后,加其田宅奴婢. 朱妃生洛公主.
●15년신유(CE241), 춘정월, 태후가 위독하여 조정을 폐하고 죄수들을 다시 살폈으며 친히 신명神明께 빌었고, 명을 내려서 천단天壇・지신地神・명산名山・대천大川에 제사하였다. 3월, 태후가 쾌차하여, 연椽씨와 명림明臨씨 족당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었다. 하5월, 상이 태후・황후・연불然弗태자와 함께 졸본卒本으로 가서 사당83)과 무덤84)을 배알하고 왕손王孫85)이 생겼음을 고하였으며, 보리밭을 둘러보고 (보리종자를 물어온) 비둘기에게 제사하였다. 추8월, 연엽葉씨를 연불태자비로 봉하고, 금과 은으로 꾸민 바퀴달린 가마와 채단을 헤아릴 수 없이 하사하였다. 존尊공주86)를 내의소후로 높여주고, 전택과 노비를 더하여 주었다. 주朱비가 락洛공주를 낳았다.
83)龍山의 東明神廟 즉 芻牟祠堂
84)龍山의 東明陵 즉 芻牟陵
85)若友
86)상의 동복여동생으로 연엽의 생모이다
○十六年壬戌,春正月,左輔穆能以病免. 夏五月,上親率五道将軍方丑湏古朱希絃穆萇䓁,引兵十万,攻西安平,拔之.是爲安平大戦.初,懿拔遼東而移其主力于此,欲東.至是,其設破壞,生口珍寶皆敀于我. 時,左輔穆能養[疾]87)城南,與大評得来,力疾入諫,曰“窮兵則引禍,不如養力而待時.”上苦其不退,曰“國老只可養疾撫孫,可也.何預征伐如是耶.”命進肉羹而飮之.能不飮,曰“小臣亦皇家之裔.安可使陛下陷危而不諫.如欲出兵,請殺臣.”上怒謂蚕后,曰“汝祖苦我.”蚕恐失寵,强能而出.能疾劇而薨,家人不敢葬.上自安平敀,大宴君臣,曰“如此快事,恨不得與穆老同.”上與蚕后親葬能以國公太輔之禮,曰“汝祖雖不知事,忠則忠矣.”時,蚕后最有寵生皇子故,明臨氏椽氏䓁頗有妬色. 羅,助賁(一三),年登.其古陀郡生嘉禾. 濟,古爾(九),二月,開稻田于南澤.四月,古爾以其叔父質為右輔.質忠[毅]謀,事無失.七月,古爾出西門觀射. 秋七月,柵新長者烏凌進麥米八千石,賜安平美女二人,加爵小皂衣村評者. 鲜卑紫蒙索頭䓁遣使献美女良馬,稱臣請婚.上皆撫慰以禮,乃開報聘之路.
○16년임술(CE242), 춘정월, 좌보 목능穆能이 병病으로 물러났다. 하5월, 상이 친히 방축方丑・회고湏古・주희朱希・현絃・목장穆萇 등 5도장군五道將軍들을 지휘하여 십만 병력을 이끌고 서안평西安平88)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이것이 안평대전安平大戰이다89). 애초에 사마의懿가 요동遼東을 빼앗고 이곳에다 자기 주력主力을 옮겨놓아 동쪽을 도모하려 하였는데, 이제 그 설비가 파괴되었고, 백성들과 진보가 모두 우리 것이 되었다. 이때, 좌보 목능이 성남城南90)에서 병을 요양하다가, 대평자大評 득래得來와 함께 있는 힘을 다해 부지런히 들어와서 말리며 아뢰길 “병력이 궁해지면 화를 불러들이게 되니, 힘을 키우며 때를 기다림만 못합니다.”라 하였다. 상이 그가 물러서지 않음을 고심하며 이르길 “국로께선 요양하시며 손자나 토닥거리실 일이지, 어찌 이처럼 정벌에 끼어드십니까?”라 하고서 고깃국을 올리게 하여 마시게 하였으나, 목능能이 고깃국은 마시지 않고서 아뢰길 “소신 또한 황가의 후예인데, 어찌 폐하로 하여금 위험에 빠지시도록 말리지 않아야겠습니까? 출병하실 것 같으면, 청컨대 신을 죽여주시오!”라 하니, 상은 화가 치밀어서 잠蚕후에게 이르길 “당신 할아비가 나를 괴롭히고 있소!”라 하였고, 잠蚕후가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 목능能을 억지로 나가게 하였다. 이에 목능能이 병이 극심해져 죽었으나, 집안사람들은 감히 장사를 치르지 못하였다. 상이 안평安平91)땅에서 돌아와 군신들에게 큰 잔치를 벌여주며 이르길 “이 같이 좋은 일에 목穆씨 노인이 함께하지 못함이 안타깝소이다.”라 하였다. 상이 잠蚕후와 함께 친히 목능穆能을 국공·태보의 예로 장사하고 이르길 “당신 할아비는 비록 섬길 줄은 몰랐어도, 충성은 충성이었소.”라 하였다. 때에, 잠蚕후가 총애를 최고로 많이 받아서 황자를 낳았더니, 그런 까닭에 명림明臨씨와 연椽씨의 얼굴은 꽤나 시기하는 낯빛이었다. 신라羅(조분13년)에선 곡식이 잘 여물었고, 고타군古陀郡에선 좋은 벼가 생겨났다. 백제濟(고이9년)에선 2월에 남녘 습지에서 처음으로 벼농사를 시작하였고, 4월에 고이古爾가 숙부 질質을 우보로 삼았더니, 질質이 충의로써 일을 꾀하여 실패함이 없었다. 7월엔 고이가 서문바깥으로 나가서 활쏘기를 보았다. 추7월, 책신柵新의 우두머리 오릉烏凌이 보리쌀麥米 8천석을 가져왔다. 안평미녀 둘을 하사하고 작은 조의촌의 평자評者 작위를 주었다. 선비鮮卑들인 자몽紫蒙92)과 색두索頭93) 등이 사신들을 보내와서 미녀와 좋은 말을 바치고, 칭신하며 청혼하였다. 상이 이들 모두를 예의를 차려 위무하였으며, 이에 보빙報聘94)길을 열어주었다.
87)本傳의 養城南이 異本엔 養疾城南이어, 異本을 따른다.
88)三國史記 高句麗本紀에선 西安平을 遼東西安平으로 기록하였다.
89)☞魏와 山西省 東南部에서 本格的 爭覇 始作.
90)都城南隣? 또는 河北省 沙河最上流 ‘阜平’南隣의 城南庄?
91)임금은 安平에서 駐屯・指揮하고, 五道將軍들은 西安平에서 싸운 듯하다.
92)南方鮮卑, 慕容・宇文・段氏
93)北方鮮卑, 拓拔氏
94)上國이 下國을 答訪하거나 下國의 使臣들이 上國으로 들어오는 外交行爲.
●十七年癸亥,春正月,立然弗太子為正胤,以葉氏為正胤妃,尊公主為正胤淑儀.明臨鳣皇后為天宮大皇后,還龍岩[桓]95)那狐川之地為湯沐.時,鳣后生[楝]96)太子,故上爱后殊甚,寵復如舊. 以勝公主為[奢]97)句妻. 桶公主生于漱女五斗于西川離宮.是爲西川帝爱后五斗星后也.初,西川鯉宅女夢[得大黑蠎,以為不吉,欲祓于巫.桶聞之,以橡米五斗買其夢]98)得娠,故曰五斗. 古爾正月設壇祀天地山川,上曰“古爾欺人孤兒,天其歃歟.”鱣后曰“至誠則感天.何愧於前而棄於後.”上曰“善.” 倭献美女錦緞,而請假路攻新羅.不許.
●17년계해(CE243), 춘정월, 연불然弗태자를 정윤正胤으로 삼고, 엽葉씨를 정윤비로 삼았으며, 존尊공주를 정윤숙의로 삼았다. 명림전明臨鳣황후를 천궁대황후로 삼고 룡암龍岩・환나桓那・호천狐川 땅을 돌려줘서 탕목으로 삼게 하였다. 이때, 전鳣후가 연楝태자를 낳았고, 그런 까닭에 상이 후를 아낌이 유별나게도 지극하여, 총애가 옛날과 같아졌다. 승勝공주를 사구奢句의 처로 삼았다. 통桶공주가 우수于漱의 딸 오두五斗를 서천西川별궁에서 낳았다. 이 오두五斗가 훗날에 서천제西川帝의 애후愛后 오두성후五斗星后가 된다. 애초에 서천西川 리택鯉宅의 딸이 꿈에 [크고 검은 이무기蠎를 만났음에, 불길하다는 생각이 들어 무당을 찾아가서 푸닥거릴 하고자 하였더니, 통桶공주가 이를 듣고 상수리알갱이橡米 닷 되五斗를 주고 그 꿈을 사서] 잉태하였다하여 오두五斗라 하였다. 고이古爾가 정월에 제단을 쌓고서 천지산천에 제사하였음에, 상이 이르길 “고이古爾가 사람들을 속이고서 아이99)를 저버렸는데, 하늘이 자알〜도 받아 마시시겠다.”라 하매, 전鳣후가 아뢰길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하는 법입니다. 어찌 앞서 한 일이 부끄럽다하여 뒷일까지 모르는 체 하겠습니까?”라 하였더니, 상이 “그렇긴 하오이다.”라 하였다. 왜倭가 미녀와 비단을 바치고 신라新羅를 칠 길을 빌려주길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100).
95)本傳과 異本엔 柤이나, 本傳과 異本의 九年乙酉(CE235)夏四月 기록을 따른다.
96)本傳과 異本 모두 棟 또는 楝으로 읽을 수 있으나, 楝으로 보겠다.
97)本傳은 句라하였으나, 異本의 奢句를 따른다.
98)本傳 筆寫에 빠뜨린 것을, 異本을 따르며 揷入한다.
99)幼年에 百濟임금이 된 沙伴
100)이 倭는 當時에 高句麗 뭍이나 물을 지나야만 新羅 땅을 밟을 수 있는 倭일 것이어서, 高句麗와 新羅 및 倭들의 疆域을 徹底하게 硏究해야 할 것이다. 芻牟鏡 속의 慕潄帝紀 末端에 기록된 “東伐于山,倭人来服.西攻白熊,沃沮稱臣,黃竜来賓,楽浪為子.”란 節句를 반드시 참조해야 할 것임.
●十八年甲子,春三月,微行至酒桶村,見採薪女淵氏之美,納于後宮為宝儀奉禮.群臣諫之,不聽.上欲知臣民之隱宻,徃徃微行于公卿胥吏之家眷其妻女.又訪民戶亦然,故衆望蔚然. 七月,毋丘儉入寇玄菟.上将步騎二万,逆擊于沸流水上,大破之,斬首三千余級.是謂沸水大戰. 羅,助賁(一五),正月,以伊飡于老為舒弗邯兼知兵馬事,以我割其竹岺以南之地為短.此,本樂浪卒本之地,皆是我土也.羅濟之浸蝕此壤,盖因邦家西進,誠極可憎之事也.
●18년갑자(CE244), 춘3월, 미행하여 주통촌酒桶村에 이르러서 땔나무를 하는 연淵씨의 미모를 보더니 후궁으로 맞아들여 보의봉례宝儀奉禮로 삼았다. 신하들이 말려도, 듣지 않은 것이다. 상은 신하들과 백성들의 은밀한 것들이 알고 싶어서, 왕왕 공경이나 서리의 집들을 방문하여 그들의 처와 딸을 둘러보았고, 백성들의 집 역시 그리하였더니, 많은 이들이 자신도 피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7월, 무구검毋丘儉이 현도玄菟101)를 침입해 노략하매, 상이 보기步騎 2만을 거느려 비류수沸流水102) 곁(위쪽)에서 되받아쳐 크게 이기고 3천여 급을 베었다. 이를 비수대전沸水大戰103)이라 한다. 신라羅 조분助賁(15년)이 정월에 이찬 우로于老를 서불한舒弗邯 겸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삼더니, 우리가 그네의 죽령竹岺104)이남을 빼앗은 것이 오래가지 못할 것[또는, 잘못한 것]이라 하였다. 이 땅은 본시 락랑樂浪105)과 졸본卒本의 땅이라서 모두가 우리의 땅인데도, 신라羅와 백제濟가 이 땅을 갉아먹은 것은 개략 우리나라邦家106)가 서진西進함으로 인한 것이었으니, 진실로 극히 가증스러워 할 일이었다.
101)玄菟 則 山西城 西北方之境
102)潮白河 上流의 湯河之境
103)則 沸流水大戰
104)現今天津市西南方之境
105)北夫余와 高句麗 大武神帝 以前의 崔氏 樂浪國. 非漢四郡樂浪郡.
106)高句麗. 我國이라 하지 않고 我邦이라 함은 高句麗가 大國임을 뜻함이다.
○十九年乙丑,春,巡東海觀魚于達明淵,微行至九極村,納其長者女麥氏.顔色絶美容儀端雅窈窕.上大可之,以為茶儀尙禮,賜田宅奴婢爵其兄弟. 朱妃生朱玉太子. 冬十月,命穆萇朱全,伐羅長岺蛙峴,取之.于老敗走馬頭柵,躬燒柴火慰其傷卒.朱全欲追之,萇曰“知止則無殆.窮狗莫逐.”于老之燒,卒正欲見窮而欲反,無墮其計可也.
○19년을축(CE245), 봄, 동해東海107)를 순시하여 달명연達明淵에서 고기잡이를 돌아보고, 구극촌九極村으로 미행하여 구극촌장이란 이의 딸 맥麥씨를 거두었다. 얼굴이 기막히게 예쁘고 모습이 단정하고 아담하며 얌전하고 정숙하였다. 상이 그녀를 매우 좋게 여겨 다의상례茶儀尙禮108)로 삼고, 그 형제들에게 땅과 집과 노비를 하사하고 작위를 주었다. 주朱비가 주옥朱玉태자를 낳았다. 동10월, 목장穆萇과 주전朱全에게 명하여, 신라羅의 장령長岺109)과 와현蛙峴110)을 쳐서 빼앗았다111). 우로于老는 마두책馬頭柵112)으로 쫓겨나가 친히 섶을 불 놓아서 상한 병졸들을 위로하였고, 주전이 이들을 추격하려 하니, 목장이 말하길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고, 궁한 개는 쫓는 게 아니오이다.”라 하였다. 우로는 불 피우던 졸정卒正113)이 끝장을 보고 싶어서 반격하고자 하였어도 그 계책을 따르지 않았으니, 옳았다 할 것이다.
107)現今 天津市沿岸; 西都・丸都 基準 東海.
108)常時로 酒茶를 따르는 宮人
109)淄博市 長山鎭?
110)則 蛙山; 巨野 嘉祥間 臥龍山鎭?
111)三國史記 高句麗本紀 曰“出師侵新羅北邊”
112)嘉祥縣 薛仁貴墓 東南 馬集鄕?
113)兵卒의 우두머리
○[二十]114)年丙寅,春正月,詔曰“兵者國之元氣也.國家有事於南西,㴠養元氣.凢有勇義之士,通其一技一藝者,皆詣注簿試.才無欠一人.” 二月,鳣皇后生德公主. 秋八月,上與酒后葉妃麥妃䓁,閱兵于西川,而畋杜訥之原.忽聞毋賊迂囬而來,急于根䓁迎戦.我寡彼衆,且接其銳鋒,頗有難色.上乃抄鐵騎五千,衝其陣於梁口之西,大破之,獲其兵仗馬匹無数.上與酒后受俘.毋之大軍又至,于根戦死.毋方陣而前,勢如破竹.又聞南路失守,且挾后妃不得如意,乃引勁騎千余而退于鴨淥之原.朱全軍亦敗,死者萬人.上東遷壅口.十月,毋入都城,掠民收宝.上聞之,痛哭曰“恨不聽穆能之言.”麥妃請奔其鄕,乃至竹嶺,軍士殆盡. 東部于台宻友募士力戦.上間行入山谷中,聚散卒自衛.百姓素慕聖德,皆願死戦.王頎追兵與田民山尺相持.敵衆我寡,且無寸鐵,勢其危急.廚使紐由詐降饋頎,隱刀刺殺之,斬其幕将数人.賊大乱.上遂督民兵,大破頎衆.時,毋賊已退,穆萇来迎,上曰“朕不聽汝父之諫而至此.”追贈能太輔安國公得来大注簿.萇中畏大夫.萇,初娶山上女玉川公主.至是,又以上女術公主妻之,于術出也.追贈紐由為東部大使者,使其子多優継之.賜宻友巨谷靑木谷,賜屋句鴨淥杜訥河原. 朱妃多産謹守,故進封為皇后. 濟,古爾(一三),夏大旱無麥,毋賊之乱,楽浪劉茂帶方王遵亦自南入助毋.古爾乘其虗,襲二國,多掠邊民. 羅,助賁(一七),十月東南有白氣如匹練,十一月地震其都.
☯[20]년병인(CE246), 춘정월, 조서를 내려서 이르길 “병력兵力은 나라의 으뜸가는 힘이오. 나라 서남쪽에 일이 있어서, 으뜸가는 힘을 함양涵養코자 하니, 용감하고 의로운 사나이들과 기技와 예藝가 하나라도 능통한 이들 모두는 주부注簿를 뽑는 시험에 출두하시오. 재능 있고 흠결 없는 한 사람을 찾고 있소이다.”라 하였다. 2월, 전鳣황후가 덕德공주를 낳았다. 추8월, 상이 주酒후・연엽葉비・맥麥비 등과 함께 서천西川115)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두눌원杜訥之原에서 사냥하다가, 돌연 무毋적116)이 우회하여 쳐들어오고 있음을 듣고 우근于根 등을 채근하여 맞싸웠다. 우리는 수가 적고 저쪽은 수가 많은데다가 그들의 예봉을 맞닥뜨려서 자못 어려웠음에, 상이 철기鐵騎 5천을 추려서 그들 진영을 양구梁口서쪽에서 들이쳐서 크게 깨뜨리니, 획득한 병장기와 마필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상이 주酒후와 함께 포로를 접수하는데, 무구검毋의 대군大軍117)이 또 밀려옴에, 우근이 싸우다가 죽었다. 무구검이 방진方陣118)을 펼쳐서 전진하매 위세가 파죽이었고, 또한 남쪽 통로도 빼앗겼음을 듣자, 후비들까지 데리고 있는지라 상황이 녹녹하지 않아서, 굳센 기병 천여 기와 함께 압록원鴨淥之原119)으로 물러났다가, 주전朱全의 군대 역시 패하여 죽은 이가 만 명이나 되매, 상은 옹구壅口120)로 동천東遷하였다. 10월, 무구검毋이 도성都城121)으로 들어가서 백성들을 약탈하고 보물들을 챙겼다. 이 소식을 들은 상은 통곡하면서 목능穆能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한스러워 하매, 맥麥비가 자기 고향122)으로 피하기를 청하여, 죽령竹嶺123)으로 갔더니, 거의 모든 군사들을 잃었다. 동부우태 밀우密友가 무사들을 모아서 힘써 싸우고, 상이 산곡으로 숨어들어 흩어진 군졸들을 모아서 스스로를 지켰으며, 백성들은 평소에 상의 성덕을 흠모하였던지라 모두들 죽기로 싸우길 원하여, 왕기王頎의 추격군은 들판에서 농사하거나 산속에서 사는 사람들과 서로 대치하였다. 적은 수가 많고 우리는 수가 적을 뿐만 아니라 짧은 쇠토막寸鐵124)도 없어서 그 형세가 위태롭기 그지없었음에, 창간관리 뉴유紐由가 거짓으로 항복하고 음식으로 왕기頎를 대접하며 숨겼던 칼로 그를 찔러죽이고 여러 막장들의 목을 베었더니, 적들이 어지러워졌다. 이에, 상이 민병民兵125)을 독려하여 왕기頎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이때, 무毋적들은 이미 물러나 있었고, 목장穆萇이 와서 (상을) 맞이하매, 상이 이르길 “짐이 자네 부친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렇게 되었소.”라 하였다. 목능能을 태보・안국공安國公126)으로 득래得來를 대주부로 추증하고서, 목장萇을 중외대부로 삼았다. 목장萇은 애초에 산상山上의 딸 옥천玉川공주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지금 또 우술于術이 낳은 상의 딸 술術공주를 처로 삼게 되었다. 뉴유紐由에겐 동부대사자를 추증하고, 그 아들 다우多優로 하여금 그 자리를 잇게 하였으며, 밀우密友에게는 거곡巨谷127)과 청목곡靑木谷을 하사하고, 옥구屋句에겐 압록원鴨淥原128)과 두눌하원杜訥河原129)을 하사하였다.130) 주朱비를 자식을 많이 낳고 근신하여 자신을 지켰다 하여 황후로 봉하였다. 백제濟(고이13년)에선 여름이 가물어서 보리를 거두지 못하더니, 무毋적 난리 중에 락랑樂浪의 유무劉茂131)와 대방帶方의 왕준王遵132)이 남쪽에서 들어와서 무구검毋을 돕자, 고이古爾가 그 허를 틈타서 이 두 나라를 기습해 많은 수의 변방 백성을 노략하였다133). 신라羅(조분17년)에선 10월에 동남쪽에서 명주 필들을 펼쳐놓은 것 같은 ‘허연 기운134)’이 있었고, 11월에는 도읍에 지진이 있었다.
114)本傳과 異本 모두 十九年이라 하였지만, 二十年을 誤寫한 것이 確實하다.
115)在 杜訥 則 黃龍故地
116)毋丘儉
117)本陣
118)平原에서나 使用하는 陣法
119)則 汁水之原?
120)遵化‧薊縣間之境의 北隣으로 구석진 곳? 或 元時 所謂甕山泊也 則 昆明湖?
121)大角宮所在地인 丸都城
122)達明淵 隣近 九極村
123)☞三國史記曰“南沃沮”
124)약간의 兵力이나 兵仗器
125)또는, 百姓들과 兵士들
126)或,追封安國之境?
127)太谷?
128)懷來・宣化・涿鹿之境
129)渾源・陽原・淶源之境
130)☞三國史記엔 이에 해당하는 기록으로 “魏遣幽州刺史毋丘儉將萬人出玄菟來侵.王將步騎二萬人,逆戰於沸流水上敗之斬首三千餘級,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又敗之斬獲三千餘人.王謂諸將曰“魏之大兵反不如我之小兵.毋丘儉者魏之名將,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乃領鐵騎五千,進而擊之.儉爲方陣決死而戰,我軍大潰死者一萬八千餘人.王以一千餘騎奔鴨淥原.冬十月,儉攻陷丸都城屠之乃遣將軍王頎追王.王奔南沃沮至于竹嶺,軍士分散殆盡,唯東部密友獨在側......是役也,魏將到肅愼南界刻石紀功,又到丸都山銘不耐城而歸.初,其臣得來見王侵叛中國,數諫,王不從.得來嘆曰“立見此地,將生蓬蒿.”遂不食而死.毋丘儉令諸軍,不壞其墓,不伐其樹,得其妻子皆放遣之.[括地志云“不耐城卽國內城也,城累石爲之.”此卽丸都山與國內城相接.梁書“以司馬懿討公孫淵,王遣將襲西安平,毋丘儉來侵.通鑑“以得來諫王,爲王位宮時事.”誤也..
즉, 위가 유주자사 무구검을 보내서 1만병을 이끌고 현도로 침공하여 왔다. 이에 왕이 보・기 2만인을 이끌고 비류수 곁에서 맞받아 싸워서 그들을 쳐부수고 3천여 수급을 베었으며, 다시금 군사를 이끌어 양맥곡에서 싸워서 또한 적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을 베거나 생포하였다. 왕이 제장들에게 이르길 “위의 대병이 오히려 우리의 적은 군사만도 못하다. 무구검이란 놈은 위의 명장이라 하지만, 오늘 그의 명줄이 내 손 안에 있소이다.”라 하고는 철기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그들을 쳤더니, 무구검이 방진을 치고 죽기로 싸워서, 아군이 크게 무너졌다. 죽은 이가 1만 8천여 명이어서, 왕은 1천여 기를 데리고 압록원으로 도주하였다. 동10월, 무구검이 환도성을 공략하여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도륙하고, 장군 왕기를 보내서 왕을 추격하자, 왕은 남옥저로 도주하여 죽령에 다다랐다. 군사들은 흩어져 거의 다 없어지고, 다만 동부의 밀우가 홀로 왕의 옆에......이 싸움에서 위의 장수가 숙신남쪽경계에 이르러서 돌에다가 전공을 새겨 기념하였고, 또한 환도산에 도착하여선 불내성이라 새겨놓고 돌아갔다. 예전에 왕의 신하 득래가 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여러 번 말렸으나, 왕이 듣지 않자, 득래는 탄식하며 “머지않아 이 땅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 하면서, 먹기를 마다하고 굶어죽었다. 위의 장수 무구검이 모든 군사들에게 명하여 그의 무덤을 헐지 말고 무덤의 나무도 베지 말라 하였으며, 그의 처자 모두를 찾아내서 풀어주게 하였다.[괄지지엔 “불내성이 곧 국내성이며, 그 성은 돌을 쌓아 만들어졌었다.”라 써 있다.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 양서에는 “사마의가 공손연을 치자, 왕이 장수를 보내서 서안평을 기습하였기에, 무구검이 쳐들어 온 것이다.”라고 써 있다. 통감은 “득래가 왕에게 간한 것은 왕 위궁 때이다.”라고 하였으나, 이는 틀린 기록이다].라고 적어서 비슷하나 차이가 있다. 김부식이 中國이란 용어를 사용했는지도 궁금한 사항이다.
131)曹魏樂浪太守
132)曹魏帶方太守. 或云弓遵.
133)당시 백제 북변이 산서성 남변 황하지경임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134)海溢?
○二十一年丁卯,春二月,移都平壤. 七月,太子妃葉氏生子逸友. 宝儀奉禮淵氏生淵太子. 羅,助賁(一八),五月,殂.或乘﨎魚而上天.母弟沾觧立.七月,沾觧謁其始祖廟,封父骨正為世神葛文王. 濟,古爾(一四),正月,祭天地於南壇.三月,眞忠右輔,直勿左将知兵馬事.
○21년정묘(CE247), 춘2월,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겼다135). 7월, 태자비 엽葉씨가 아들 일우逸友를 낳았다. 보의봉례 연淵씨가 연淵태자를 낳았다. 신라羅는 조분助賁(18년)이 5월에 죽었다. 혹은 쌍어雙魚를 타고 상천하였다 한다. 그 어미136)의 남동생 첨해沾觧137)가 보위에 올랐다. 7월에 첨해가 그들의 시조사당을 배알하고, 자기 아비 골정骨正을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138)에 봉하였다. 백제濟에선 고이古爾(14년)가 정월에 남쪽제단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하고139), 3월엔 진충眞忠을 우보로 삼고 직물直勿을 좌장군・지병마사로 삼았다.
135)☞平壤은 古朝鮮末期와 北夫余의 海城之境이며, 龍江隣近으로 沙河(下流)西方60里之境이고, 新羅北邊인 竹苓 北隣이다. 北京市朝陽隣近?
136)玉帽
137)沾觧는 助賁의 外三寸이란 말.
138)新羅爵位
139)帝國의 祭禮儀式
○二十二年戊辰,春二月,與新羅㝎界和親. 以葉氏為內儀小后,麥氏[為丹儀小后,淵氏為茶儀小后,貫那氏為宝儀小后,蚕氏]140)爲地宮大皇后.上遭變以来倦於政事,唯以遊獵浸色為事,命太子摂行政事.命要公主爲太子妃,酒后出也,年才十二. 秋七月,酒桶太后以暑痢崩,春秋六十.后,酒桶村長椽栢之女也.其母於氏夢見槐王持金尺入懷而生后.豐美有德,山上微行通之,生聖躬.及為爲太后,多乱政,事淫穢,頗失前望.葬于酒桶村,後合于東川陵.盖其遺志也. 朱后生子朱城太子. 九月,上畋于狐川,謁酒桶陵,有感而疾作,不能言而崩.葬于東川烏壤之岡.先是,上與酒后占此地.至是,同壙異室.淵后赴燒而殉,鳣皇后蚕皇后麥氏葉氏䓁皆欲赴火號泣擗踊,太子與桶公主要公主扶諸后救之.然,朝士後宮民女之殉于陵前者不絶,掩柴相連,人以為柴原.百姓歌之曰“多情天子化為龍,陵前掩柴總天花.”
○22년무진(CE248), 춘2월, 신라新羅와 경계를 정하고 화친하였다141). 연엽葉씨를 내의소후, 맥麥씨를 [단의소후, 연淵씨를 다의소후, 관나貫那씨를 보의소후, 잠蚕씨를] 지궁대황후로 삼았다. 상은 변變142)을 당한 이후로 정사가 권태로워하며 다만 유람하며 사냥하고 여색에 빠지길 일삼더니, 태자에게 명하여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게 하고, 요要공주에게 명하여 태자비로 삼았다. 요要공주는 주통酒후 소생으로 열 두 살이었다. 추7월, 주통酒桶후가 더위를 먹고 설사하다가 춘추 예순일곱에 죽었다. 후는 주통촌장酒桶村長 연백椽栢의 딸로, 어미 어於씨가 꿈에 괴왕槐王이 금척金尺을 가지고 품으로 들어옴을 보고서 후를 낳았다. 미색이 넘치고 덕스러워서, 산상山上이 미행하여 상통해서 성상을 낳았다. 태후가 되기에 이르자 정사를 많이 어지럽혔고 음란하길 일삼았더니, 이전에 받았던 인망을 자못 상실하였다. 주통촌에 장사하였다가, 후일에 동천릉東川陵에 합장하였다. 아마도 그의 유지遺志를 따랐음이라. 주朱후가 아들 주성朱城태자를 낳았다. 9월, 상이 호천狐川에서 사냥하고, 주통릉酒桶陵을 찾아갔다가, 감응하여 병이 들더니, 말도 못하게 되어서 죽었다. 동천東川의 오양烏壤쪽 산줄기에 장사하였다143). 이에 앞서, 상이 주酒후와 함께 이곳을 점지하였고, 지금 한 구덩이의 서로 다른 방을 가지게 되었다. 연淵후가 뛰쳐나가 불살라 죽고, 전鳣황후・잠蚕후・맥麥씨・연엽葉씨 등 모두가 불 속으로 들어가고자 울부짖으면서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매, 태자가 통桶공주・요要공주와 함께 모든 후后들144)을 붙잡아서 목숨을 건져냈다. 허나, 조정의 신하들 및 후궁들과 민간여자들이 무덤 앞에서 순사함이 끊이지 않아서, 싸리 섶으로 덮은 것이 끝이 없었더니, 사람들이 그곳을 시원柴原이라 하였고, 백성들이 이를 노래하길 “다정했던 천자가 용이 되니, 무덤 앞 싸리 섶 모두가 흰 눈밭과 같구나.”라 하였다.
140)本傳에 빠진 文句를 異本에서 옮겨 揷入한다.
141)竹苓以南之事와 蛙山・馬頭柵之事 關聯이었을 것
142)西安之境 曹魏의 河東堡壘인 西安平을 征伐하였다가, 魏將毋丘儉의 侵入을 當함.
143)狐川・東川・平壤・酒桶村은 서로가 아주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
144)皇后들과 小后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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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三年己酉,春正月, ... 大義絶夫以扶杜功 -> 大義絶夫以扶社功, 큰 뜻으로 지아비를 버렸고, 부두扶杜의 공으로 비妃로 봉함을 받았으며 -> 큰 뜻으로 지아비를 버렸고, 사직社稷을 도운 공으로 비妃로 봉함을 받았으며
(2) 濟... 十一月, ... 率三百精兵赴救過其伏兵而敗 -> 率三百精兵赴救遇其伏兵而敗, 정병 300을 이끌고 도우러 가다가 복병을 지나쳐서 패하였다. -> 정병 300을 이끌고 도우러 가다가 복병을 만나서 패하였다.
(3) 각주 26) 異本에 “時,于太后與酒桶朽不睦, -> “時,于太后與酒桶后不睦,
(4) 八年甲寅, ... 未免聚鹿之恥 -> 未免聚麀之恥, 취록지치聚鹿之恥를 면치 못하였으니 -> 취우지치聚麀之恥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5) 十年丙辰, ... 朕今覺之.其[勿]憂而入 -> 朕今覺之.其[勿]虞而入
(6) 羅助賁 ... 以其主阿音夫為老客 -> 以其主阿音夫為奴客
(7) 十六年壬戌, ... 濟,古爾(九), ... 質忠[㪟]謀,事無失 -> 質忠[毅]謀事無失, 질質이 충성으로써 힘써 정사를 돌보아서 일마다 실패함이 없었다. -> 질質이 충의忠毅로써 일을 꾀하니 실패함이 없었다.
(8) 각주 96) 本傳과 異本 모두 棟 또는 鍊으로 읽을 수 있으나, 鍊으로 보겠다. -> 本傳과 異本 모두 棟 또는 楝으로 읽을 수 있으나, 楝으로 보겠다.
아무리 해도 혼자는 완벽을 기하기 어렵군요...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