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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촌처럼 지내야 하는 나라 中國 2(Zhongguo 중궈, China)
長江(Changjiang)을 거슬러 오르면서 ② ; 항저우(抗州), 쑤저우(蘇州), 黃山, 張家界
厚堂 고 광 창
1. 항저우(抗州 Hangzhou)
옛날부터 중국에는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항저우(抗州),쑤저우(蘇州)‘’(上有天堂 下有抗•蘇‘)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데 그 만큼 아름다운 곳이 이곳 항저우다. 중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4대 美人중 한 명인 ‘西施’라는 미인이 이곳 항저우 출신이고 이 호수의 아름다움이 ‘서시’를 닮았다고 해서 호수 이름에 西자를 넣어 시후(西湖 서호)라고 이름 지었다고 하고 중국에는 ‘시후(西湖)’라는 이름을 지닌 호수가 36개 있는데 모두 항저우 시후를 흉내 낸 것이라고 한다. 중국 돈 1위안짜리 뒷면에 시후(西湖) 十景의 하나인 三潭印月(달밝은 밤 호수에 비친 달이 3개로 나뉘어 보였다는 전설)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항저우는 上海에서 180㎞ 떨어져 자동차로 2시간 남짓 걸렸다. 현재 저장(浙江)성의 성도(省都)이고 50년간 남송(南宋)의 수도로서 수년 동안 중국 남부지방의 중심지였다. 시후(西湖 )는 길이가 3㎞이고 폭은 3㎞에 약간 못 미칠 정도(넓이 6.5㎢)로 매우 큰 호수다. 호수는 바이디(白提)와 쑤디(蘇提)로 불리는 두 개의 둑길이 호수를 갈라놓고 있는데 넓은 둑길에는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의 모습이 아름답고 시후(西湖) 10景과 역사 유적 등 볼거리가 많았다. 당나라 때 시인이고 행정 관료인 白居易와 송나라 때 시인이고 화가이며, 음식요리사인 蘇東坡의 姓을 따서 둑길 이름을 白堤, 蘇堤라 지었다고 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 동파육(東坡肉)도 소동파가 개발한 음식이라고 한다. 섬 가운데에 구산(孤山 고산)섬이 있는데 이 섬 안에 박물관, 공원, 차관(茶館), 정원이 있다. 이 정원은 옛날 황제가 사용한 별장이었다고 한다. 이곳 항저우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시후(西湖)의 아름다움 때문에 詩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는 묵객(墨客)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둑길을 따라 시후 주변을 둘러보는데 3시간 이상 걸렸다. 우리들도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재능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진만 몇 장 찍어 가지고 올 수 밖에 없어 좀 아쉬웠다.
항저우는 사철 내내 관광객 행렬이 끊이지 않고 주말과 휴일이면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이탈리아 탐험가이고 ‘동방견문록’ 저자로 유명한 ‘마르코 폴로’가 13세기에 이 도시를 통과했는데 그는 이곳을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곳 중의 하나’라고 묘사했다고 한다.
이곳에 쌀이 많이 나기 때문에 이 쌀을 베이징(北京)으로 운반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베이징까지 남북을 관통하는 人工 운하인, 京抗 운하(北京-抗州)를 만들었다. ‘隋’나라 때 시작하여 ‘당’ ‘송’을 거쳐 ‘원’나라 때 완성했다고 하는데 당시 길이는 1,795㎞이었지만 지금 남아있는 운하의 길이가 1,515㎞ 라고 한다.(우리 한반도 남북 길이는 1,000㎞)
중국 宋나라 역사 공부를 좀 해보기로 한다. 카이펑에 있던 宋(黃河유역)나라가 東만주 유목민인 여진족에게 패하자 宋나라 10대 왕이었던 고종이 남쪽인 抗州로 내려와 1127년 ‘乾炎’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다. 이게 후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南宋(長江유역)이고 고종이 남송 의 초대 왕이다. 고종은 문화 창달에도 힘쓰는 한편 軍士방면도 중시하여 騎馬兵을 만들기 위해 티베트의 말(馬)과 송나라의 茶를 맞바꾸는 茶馬古道를 만들기도 했다. 고종 이후 왕들도 군사력 증강에 힘을 기울였고 1234년 몽골과 손잡고 여진족의 나라인 金(黃河 유역)나라를 멸망시켰다. 북송이 망한지 100년 만에 원수를 갚은 셈이다. 남송은 150여년 동안 중국 남부 지방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1250년 징기스칸 부대가 쳐들어 왔을 때 남송이 거칠게 저항하자 물러갔고, 1259년 징기스칸의 손자이고 4대 왕인 ‘몽케 칸’이 다시 쳐들어 왔으나 쓰촨성 전투에서 몽케 칸이 사망하자 몽골군이 잠시 철수하기도 했다. 이렇게 끈질기게 몽골군에 저항하면서 버텼지만 1276년 결국 ‘몽케 칸’의 동생 쿠빌라이 군대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남송의 152년간의 역사는 끝을 맺었다. 그러나 북송 167년을 합하면 한 왕조가 319년간 지속된 셈이다. 중국에서는 한 왕조가 300년을 넘긴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宋’나라 대단한 나라다.
이곳 항저우는 청나라 시대의 건축 양식을 재현해 놓은 ‘河坊街(허팡제)’ 거리에서 옛 중국의 면모와 소소한 볼거리를 볼 수 있어서 중국 7대 古代도시에 들어간다고 한다. 동물원에는 보호 종인 만주 호랑이가 있고, 실크 박물관에서는 비단 견본은 물론 비단 제작의 역사와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湖水 남서쪽 龍井 지방에서 재배되는 롱징(龍井 용정)녹차는 중국에서도 유명한 명차(名茶)에 속한다.
중국 역사상 가장 문화 활동이 활발했던 시기는 唐代와 宋代인데 宋나라때 주자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도자기 제조기술까지 전수되어 우리나라 학문 및 문화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와 무역 거래도 왕성했는데 당시 침몰되었던 배에서 송나라 도자기가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地名에 들어있는 ‘抗’자는 ‘저항하다’ ‘겨루다’의 뜻이 담긴 글자인데 이곳이 南宋의 수도일 때 몽골에 20년 이상 끈질기게 저항했던 일이 있었고 우리나라 임시 정부가 上海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이곳에서 5년 동안 일본에 저항했던 일이 있었던 곳이라 ‘抗’자의 의미가 새롭게 느껴진다. 上海로 되돌아갈 버스 시간 때문에 이곳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차를 타고 오면서 보니까 이곳 도로 표지판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舊址’(옛터)란 글씨가 씌여 있다. 다시 한 번 중국 정부에 감사한 마음 표하고 싶다.
이곳 특선 요리는 시후 추위(西湖酷魚 생선요리)와 소동파가 개발했다는 동포 러우(東坡肉 돼지고기) 등이다.
2. 쑤저우(蘇州 Suzhou)
장쑤(江蘇)성 남단 長江의 삼각주 평원에 자리한 쑤저우(蘇州)는 장쑤(江蘇)성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 上海 바로 옆에 있어 上海 생활권에 속해 있었다.
이곳은 사주지부(絲綢之府), 즉 ‘비단의 도시’라 불리 울 정도로 견직물 산업이 활성화되어 예로부터 부유한 상업도시였고 또 원림지도(園林之都)라 불리는 정원의 도시였으며,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 할 만큼 쌀과 생선이 많아 살기 좋은 곳이라 일컬어지는 곳이었다.
쑤저우(蘇州)는 2,500년의 역사를 지닌 長江 유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庭園과 水路가 어울리는 축복받는 휴양지인 쑤저우(蘇州)는 京抗운하가 도시를 종횡으로 흐르고 있어 ‘동양의 베니스’라 불리 운다. 隋나라 때 대운하가 완공되자 쑤저우는 무역 상 전략적 위치가 되었다. 대운하 때문에 육지, 長江, 바다의 세 곳에서 産物이 모여들게 되자 곡물 하역 장소와 창고가 번창하여 상인들이 들 끌었다고 하며 이런 호황은 宋나라 때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元’나라 때 운하 운영이 일시 중단 되었다. 운하는 위쪽에서는 황허의 물을 넣고 남쪽에서는 장강의 물을 넣는데 가운데 부분의 지형이 높아 배가 운하를 지날 때 갑문을 몇 차례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이 운하를 이용하지 않고 바닷길을 이용한 적이 있었다. 이때 쑤저우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명나라 때부터 다시 운하 운영이 재개되어 명•청시대 또다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다시 蘇生하다는 뜻을 지닌 地名 쑤저우(蘇州)에 와 닿는 이야기다.
市의 성벽은 해자(垓子)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구조로 6개의 문(남북에 하나씩, 동서에 둘씩)이 있다. 남북으로 6개, 동서로 14개의 水路는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나뉘어져 맑은 물이 시내를 교차하며 흐른다. 큰 수로는 배가 드나들 정도로 크고 수로 위로는 사람과 차가 다니는 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이 시내에는 크고 작은 정원이 100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그중 유명한 정원은 졸정원(拙政園), 창랑정(滄浪亭), 망사원(網師園) 등이고, 넓이는 1~5헥타르(1ha는 3,000평) 정도 되는데 모두 입장료를 받고 있었고 관람객들이 줄지어 있었다. ‘拙政園’? 이름이 특이해서 알아보니 ‘졸열한 사람이 정치를 한다’(拙者之爲政)는 뜻이란다. 전성기 때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별장처럼 정원을 만들어 호화스럽게 살면서 정치하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비유했던 것 같다.
이곳 정원의 특징은 바위와 물이다. 정원에는 꽃이나 분수는 하나도 없고 이끼와 모래, 바위로만 이루어져 자연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깨끗한 물이 흐르는 수로를 따라 한가롭게 걷고 있으니 여기가 천당 같은 느낌이 든다. 중국에서 회자되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 ‘하늘엔 천당, 땅에는 쑤저우(소주)와 항저우(항주)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정말 아름다운 정원과 깨끗한 물로 대변되는 중국 남방의 대표적 도시였다. 쑤저우와 항저우가 모두 ’물‘하고 관련된 지역인 것으로 보아 물이 지상 낙원의 필수조건임을 알 수 있다. 중국 사람들 소원은 産物이 풍부한 쑤저우에서 낳고 자란 다음 말년은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항저우에서 살고 싶다고 한단다.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은 모두 성벽 밖에 있어서 정원 쪽은 깊은 山中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조용했다. 성벽 밖 시 중심지인 중천호반광장(中天湖畔廣場)에는 ‘홍대포차’ ‘홍대입구’라는 식당 간판이 있었다. 아마 서울 홍대 거리를 연상케 하는 것 같았다. 그 바로 옆에는 ‘도시 어부’란 이름의 횟집이 있어서 들어가 보니 벽면에 붙여진 글씨가 모두 우리 한글이어서 여기가 중국 땅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메뉴 판을 보니 대구탕, 회덮밥, 상추(깻잎)쌈 등이 있어서 이걸 주문해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또 바로 옆에는 ‘한국 수퍼’란 이름의 가게도 있었다. 이 부근 아파트에 한국인들이 모여 살고 있어서 이곳을 ‘한인 타운’이라고 부른단다.
이곳에도 한인 타운이? ‘우리 민족이 참 대단한 민족이다’ 는 생각이 들었다.
3. 황산(黃山)
黃山은 봉우리가 하나인 산이 아니라 면적은 152㎢ (우리 나라 한라산 국립공원 133㎢), 둘레는 120㎞이며, 1,000m가 넘는 산봉우리가 72봉, 골짜기가 24개나 되는 큰 산을 아울러 부르는 이름이 ‘黃山’이다.
중국 5대 名山중의 하나이고 중국 10대 관광지 중의 하나이며 1990년 UNESCO가 세계자연유산•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곳이다. 중국에는 ‘5岳을 보고나면 다른 산은 볼 필요가 없고 황산을 보고나면 5岳도 볼 필요가 없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황산의 아름다움이 중국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말인 것 같다. 황산에 오면 ‘畵家는 붓을 들고 詩人은 펜을 들게 되어있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황산의 3대 절경은 奇松(기이한 소나무 迎客宋), 奇巖怪石, 雲海 등인데 이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더해 준단다.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奇巖怪石이 많은 산을 名山이라 한다. 백두산보다 금강산에 기암괴석이 많고, 무등산보다 영암 월출산에 기암괴석이 더 많아 월출산이 무둥산 보다 먼저 국립공원이 되었다고 한다.
황산을 향해 출발하던 날 아침 上海 숙소 주인장이 기차표를 주면서 황산 산속에 숙소가 여러 개 있지만 미리 예약해 놓아야 하기 때문에 내가 이곳 여행사를 통해 전화로 예약해 놓았으니 그곳을 찾아가라고 하면서 숙소 이름이 적힌 메모지를 준다. 메모지에는 ‘北海賓館’ 四人 上海 彩虹旅行社‘라 쓰여 있다. 아침에 일출 구경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라는 말도 덧붙인다. 산속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거기까지 챙겨주는 숙소 주인장의 뜨거운 동포애를 느끼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우리가 탄 차는 연좌(軟座 롼쭤, 푹신한 의자 차)차로 중국에서 인기 있는 여행지에서 운행되며 2~3일 전에 예매해야 한단다. 上海에서 처음 출발할 때는 빈 좌석이 몇 군데 있었는데 항저우(抗州)에 오니 좌석이 모두 차 버린다. 항저우에서 등산가방을 짊어진 두 청년이 탔는데 바로 우리 뒷좌석에 앉았다. 우리가 처음 황산에 가는데 가이드 좀 해 주라고 부탁했더니 쾌히 승낙한다. 두 사람 모두 영어가 능숙했다. 그들은 몇 차례 황산을 가 보았다면서 우리하고 함께 가자고 친절을 베푼다. 뜻밖에 좋은 가이드 겸 동행자를 만났다. 차를 타고 오면서 대화를 해보니 항저우 사범대학 체육과 3학년이고 여행이 취미라서 이곳저곳을 다닌다고 했다. 우리도 교직에 있다가 퇴직했다고 하니 한결 자세를 가다듬어 더 공손하게 대해주었다. 오늘 저녁 숙소를 정했느냐고 묻길래 아직 못 정했다고 하니까 지금 가서는 숙소를 정하기 어려울 거라고 한다. 여름철 성수기라 여행사에서 이미 예약을 다 해버렸을 거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차역 부근에 숙소를 정하려고 했는데 젊은이들 이야기는 달랐다. 기차역에서 내리면 황산 바로 밑 마을까지 80㎞ 쯤 되는데 버스로 1시간 이상 걸리고 또 아침 6시 30분부터 케이블카가 운행되는데 지금과 같은 성수기에 늦게 가면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어 케이블카 타려고 기다리는 시간만 2~3시간 걸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바로 황산 바로 밑 마을에 가서 자고 아침 일찍 케이블카를 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가서 그곳에서 숙소를 구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젊은이들은 황산시내나 황산 밑 마을이나 숙소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일단 그곳에 가서 부딪혀 보자고 해서 우리는 기차역 짐 보관소(寄存處 중국은 기차역에 대부분 짐 보관소가 있음)에 짐을 맡기고 다음 여행지인 장쟈제(張家界)역 가는 기차표만 예매하고 두 젊은이를 따라 황산 밑 마을로 갔다. 자기들이 예약해 둔 숙소로 가서 빈 방을 알아 본 후 그 숙소 주인의 소개로 다른 집을 2~3군데 알아보더니 어떻게 방을 구했다고 한다.
오! 하늘이시여! 두 젊은이를 만나게 해 주신 천지신명께 두 손 모아 감사를 드렸다.
샹하이 숙소 주인이 황산 속의 숙소는 예약해 주면서 황산 밑 마을 숙소 예약은 왜 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기는 했으나 그 분도 황산속의 숙소 잡기가 어렵지, 황산시내 숙소잡기는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산 올라가는 케이블카는 동쪽의 운곡사 케이블카, 서쪽의 옥병봉 케이블카, 북쪽의 타이핑 케이블카 등 3군데가 있는데 동쪽과 서쪽 케이블카는 이곳 ‘탕커우(湯口)’마을에서 타기가 용이하다고 했다. 저녁은 두 젊은이를 위해 우리가 한턱 쏘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2018년 샹하이 아시안게임 이야기를 잠깐 한 다음에 우리나라 프로선수인 박지성 축구선수, 김연경 배구 선수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김연경 선수는 한 때 중국에서도 활동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나는 무릎 관절이 좋지 않음으로 가장 고생을 덜하면서 오르는 방법인 동쪽 운곡사 케이블카를 타기로 하고 나머지 일행은 젊은 두 사람과 함께 황산 등반의 하이라이트인 서해 대협곡을 가기 위해 옥병봉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탕커우’ 마을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 황산문(黃山門)에서 일행과 헤어져 나는 미니버스를 타고 동쪽의 운곡사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갔다. 벌써 열 명 이상이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 황산은 운무(雲霧)가 海霧처럼 온 산을 덮고 있기 때문에 산 전체를 하나의 바다라고 생각하고 지역을 나타낼 때, 동서남북 방향에 ‘海’(하이)자를 붙여 동해(東海), 서해(西海), 북해(北海)라고 부른단다. 운곡사 케이블카는 동해(東海)지역에 있었다. 입산료 82元과, 케이블카 운임 66元을 내고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동쪽 계단이 보이고 이 계단을 일부 등산 애호가들이 걸어서 올라가고 있었다. 케이블카를 10여 분 이상 타고 내리니 큰 바위산이 나를 반겨주었다. 황산이 해발1,873m 라고 하는데 내가 케이블카에서 내리는 곳이 해발 1,000m 쯤 되는 것 같아 정상을 다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먼저 ‘베이하이(北海) 빈관’을 찾았다. 이름이 北海임으로 무조건 북쪽으로 쭉 걸어가니 바로 빈관이 보였다. 영어 잘하는 리더가 없으니 서툰 중국어로 내가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샹하이 숙소 주인장이 적어 준 쪽지를 보여주니 예약을 받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방을 구경했는데 깨끗했고 욕실이 딸린 4인실 침대 방이 1실에 180元이라했다. 요금도 비싸지 않은 것 같았다.
옥병봉 케이블카를 타고 西海 협곡으로 간 일행은 빨리 와도 3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나는 밖으로 나와 3面이 벼랑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비래석(飛來石 해발 1,730m)을 보았다. 하늘에서 떨어져 꽂힌 모양 같다 해서 이 괴석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참 만에 서해 협곡으로 간 일행이 돌아왔는데 땀을 많이 흘린 모습이었으나 얼굴은 모두 밝아 보였다. 우리를 도와주었던 젊은이들은 산행을 계속 한다면서 북쪽으로 갔다고 한다. 정말 고마운 젊은이들! 산행 중 무탈하기를 바랄뿐이다.
저녁을 먹은 후 서해 협곡에서 찍어온 사진을 보여 주면서 서해 협곡의 아름다움을 나에게 한마디씩 이야기 해 주었다. 절벽에 선반처럼 아슬아슬하게 만들어 놓은 계단, 두 절벽 사이를 연결한 잔교(棧橋), 절벽에서 내려다 본 협곡의 아찔한 모습, 바위 틈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의 기교한 모습과 끈질긴 생명력, 길이 좁아 한 줄로 기어오르는 여행객들의 모습, 협곡을 온통 뒤덮은 雲霧 등 일생에 다시는 보기 어려운 절경이었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고 한다. 다만 내가 동행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고 한다. 고마운 말이지만 나는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나를 배려해 준 친구들의 마음씨가 고맙다고 했다.
웃으게 소리로 절벽 길을 갈 때는 위험하니까 ‘가면서 보지 말고 보면서 가지 말라’고 했는데 무서우니까 옆에 볼 여유가 없어서 그런 말이 필요 없더라고 --ㅎㅎㅎ
여행은 가슴이 뛸 때 가고 발이 떨릴 때는 가지 말라고 했는데 이제 부터는 여행은 가되 발이 떨릴 때는 절벽에 설치한 계단 길만은 가지 말아야겠다고 -- ㅎㅎㅎ
다음날 아침 해돋이를 보기 위해 숙소에서 멀지 않은 청랑대(淸凉臺)를 갔는데 구름이 잔뜩 끼어 日出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 숙소 주인 말에 의하면 이 산은 1년에 220일 이상은 구름에 가려 일출 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아침에 보니 雲霧가 잔뜩 끼었는데 그 운무 위로 산봉우리들이 솟아 보였다. 雲霧는 바다 같고 산봉우리들은 바다위에 우뚝 솟아있는 섬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地域을 나타낼 때 동해. 서해 하고 ‘海’ 자를 붙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산에는 높이가 1,500m가 넘는 봉우리들이 30개가 넘는다고 하고 최고봉인 연화봉이 1,873m 라고 한다. 나는 여기서 이곳 산 이름을 왜 黃山이라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중국 사람들이 황금과 황금색을 좋아하기 때문일까?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72개나 되는 산이니 ‘峰林山’ 雲霧가 많이 끼는 산이니 雲霧山이라 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 보았다.
오후가 되면 내려가려고 케이블카 타려는 사람이 몰려든다고 해서 오후 1시경에 출발해서 산을 내려와 ‘탕코우’ 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황산시내로 나와 시내 구경을 했다. 주판(籌板) 박물관이 있어 들어가 보니 주판을 이곳 출신이 발명했기 때문에 이곳에 박물관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일의 자리 籌板알이 5개 였다가 다음에 4개로 줄였다는 것을 쉽게 알아 볼 수 있게 전시해 놓았다. ‘황산 特茶’ 가게에 들려 차를 마셨다. 찻잎에 보송보송하게 하얀 털이 나 있는 게 특이 했다. 여행하면서 마시려고 조금 사가지고 왔다. 오늘 하루 무탈하게 여행을 마쳐서 고맙게 생각했다.
4. 장쟈제(張家界 Zhangjiajie)
후난(湖南)省 북서쪽에 우링위안(武陵源 무릉원)풍경구가 있다. ‘武陵源’은 행복을 누리고 살 수 있는 理想鄕, 영어로 Utopia를 의미하는데 얼마나 좋은 곳이면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이곳은 1982년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삼림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고, 1992년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인데 이 풍경구 안에 산봉우리를 3,000개나 지닌 중국 10대 관광지 중 하나인 장쟈제(張家界)가 있다.
※ (후난(湖南)성과 후베이(湖北)성 사이에 長江의 물이 흘러들어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둥팅(洞庭)이라는 커다란 湖水가 있는데 이 호수를 중심으로 남쪽을 후난(湖南), 북쪽을 후베이(湖北)라고 부른다).
난 장쟈제를 5~6년 전에 다른 모임에서 다녀갔는데 이번에 다시 오게 되어서 이곳 지리에 좀 밝은 편이라 장쟈제(張家界)市 북쪽의 장쟈제 마을에 짐을 풀었다. 다음날 아침 우링위안(武陵源) 입구에서 입장권을 산 후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카르스트지형에서 침식되고 남은 바위기둥이 눈앞에 나타나는데 모양도 각기 다양한데다가 바위기둥에서도 나무가 자라는 것이 특이했다. 걸어가면서 바위기둥을 보니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다르게 보인다. 케이블카를 타고 텐즈산(天子山 1,160m)으로 올라가는데 케이블카가 바위기둥 사이를 요리조리 비켜가면서 지나가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중국에서는 “텐즈산(天子山)을 본 사람은 다른 산은 볼 필요가 없다” 는 말이 있을 정도로 텐즈산이 아름답다고 한단다.
원쟈제(袁家界)지역은 험준해서 개발이 용이한 장쟈제(張家界)지역만 우선 개발해서 개방했는데 관광객은 많은데 지역이 비좁아 할 수 없이 뒤늦게나마 원쟈제(袁家界)와 양쟈제(揚家界)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원쟈제(袁家界)에서는 쭉쭉 뻗은 바위기둥, 높은 절벽, 험준한 봉우리가 좋은 볼거리였는데 특히 자연석으로 두 개의 절벽이 만나서 자연 교각을 이룬 ‘天下第一橋’는 일품이었다. 원쟈제에서도 케이블카를 탔는데 그 절경이 끝내주었다.
絶境을 관광객이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절벽에 만든 Viewpoint인 棧道를 보고 감탄했다. 만들 때 얼마나 고생 하셨을까 를 생각하니 그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이렇게 험난한 절벽에 棧道를 만드는 일은 중국이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들 것이다. 황산에서도 보았듯이 절벽에 길 만드는 일은 중국 사람들이 끝내주는 것 같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정부나 지방 정부에서 하는 일을 ‘환경보전’ 이라는 이름으로 반대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장쟈제(張家界)와 텐즈산(天子山) 중간 지점인 바위 절벽에 한 번에 50명씩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3대 설치되어 5분 간격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엘리베이터(높이 326m)라고 중국이 자랑하고 있는데 이름도 ‘하얀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白龍天梯)라고 예쁘게 지어 놓았다. 관광객이 매일 이렇게 많이 몰려드니 후난성의 관광 수입이 엄청날 것 같았다. 남의 나라지만 부러운 느낌이 들었다.
후난성의 省都인 창사(長沙 장사)는 1937년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이곳에 옮겨와 1년 정도 항일투쟁을 했던 곳이고 이곳에 있는 후난(湖南)대학교는 광주에 있는 호남대학교와 校名이 같은 인연으로 결연을 맺어 학생과 교수를 서로 교류하면서 우의를 다져오고 있다. 長沙는 이름 그대로 큰 모래사장이 있다고 하는데 가보지는 못했다.
이곳은 1893년 마오쩌둥(毛澤東)이 태어났고 1927년에 돌아와 잠간 살았던 곳으로 옛집을 복원해 놓았는데 인민해방군이 지키고 있어 일반인 출입은 제한되고 있었다.
우리 임시정부가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이곳 주민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다음 ③은 : 우한(武漢), 이창(宜昌), 長江 크루즈, 충칭(重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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