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 비평] 훼르난 까바예로- 소설같은 삶을 산 소설가 박채연
훼르난 까바예로- 본명 세실리아 뵐 데 화베르(Cecilia Böhl de Faber) 스페인 女流 소설가
페미니즘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던 19세기 유럽의 유명 여류 작가 중에는 남성이름을 필명으로 쓴 경우가 많았다. 남장을 하고 다닌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조르쥬 상드(George Sand)-그녀의 본명은 오로라 뒤르펭(Aurora DURPIN)이었다.-가 대표적이며 영국의 소설가 조지 엘리어트(George Eliot)도 본명은 메어리 앤 에번즈(Mary Anne EVANS또는 메어리 언)이다. 훼르난 까바예로는 19세기 스페인의 사실주의 소설의 선구자로서 그녀의 본명은 세실리아 뵐 데 화베르(Cecilia Böhl de Faber)이다. 그녀가 소설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의 어머니는 “소설을 쓰고 발표하는 것은 남자의 일이지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충고한다. 따라서 세실리아는 훼르난 까바예로라는 필명을 사용하는데 그 이름은 당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곳의 지명으로 까바예로Caballero는 신사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녀들은 왜 남성의 이름을 가명으로 내세워 글을 써야 했을까? 18세기 프랑스 극작가인 몰리에르의 예를 들자면 그는 학식이 있는 여성을 싫어했으며 그녀들을 “라틴어를 지껄이는 여자들”이라며 경멸했다고 한다. 19세기 스페인의 사실주의 소설의 대가인 갈도스 역시 “여성의 매력은 무지함에 있다”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또한 “라틴어를 하는 여자는 팔자가 세다”는 스페인 속담에서 보듯이 당시 여성지식인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이 상드나 엘리어트 그리고 훼르난 까바예로로 하여금 자신들의 작품이 여성의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시당하지 않도록 남성의 이름으로 보호막을 친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녀의 필명에 얽힌 에피소드 중 하나를 소개하면 벨기에 정부는 훼르난 까바예로에게 ‘레오뽈도 교단의 십자가’ 상을 수여하고자 했으나 나중에 훼르난 까바예로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임을 안 벨기에 정부가 수상을 취소하는 일도 있었다. 훼르난 까바예로는 1796년 12월 24일, 스위스의 작은 도시인 모르게스에서 아버지 후안 니콜라스 뵐 데 화베르와 어머니 프란시스카 데 라레아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후안 니콜라스는 독일인으로 스페인에서 작가와 비평가로 이름을 알린 지성인이었고 어머니는 까디스 출신으로 적극적인 성격이며 문학 애호가였다. 그녀의 부모는 인간적인 면뿐 아니라 그녀의 문학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17세까지 독일에서 자랐으며 1814년 그녀의 가족이 스페인의 까디스에 정착하게 되면서 스페인에 왔다. 1816년 20세에 10년 연상의 안토니오 플라넬스와 결혼하면서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된다. 그녀는 포병부대 장교였던 남편이 푸에토리코로 부임하게 되어 그곳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녀의 자전적 소설인 "끌레멘시아"에서 그녀는 결혼생활의 환멸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곧 죽고 그녀는 1818년 까디스로 돌아와서 그 후 2년 동안 독일과 파리 등을 여행한다. 1822년 쎄실리아는 세비야의 귀족출신인 프란시스코 루이스 델 아르꼬 후작과 결혼하면서 그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맞는다. 그녀는 세비야에 있는 화려한 저택과 그녀의 소설에도 자주 등장하는 세비야 근교의 도스 에르마나스에 있는 별장을 오가며 이미 단편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농촌에 전해오는 전설이나 민담 등이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1835년 그녀의 남편이 콜레라로 세상을 떠나면서 12년의 행복했던 결혼 생활은 막을 내린다. 그 후 리스본, 런던, 벨기에, 파리 등을 여행하다가 1836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귀국한다. 그녀는 여행 중에 페데리코 쿠스버트라는 영국인을 열렬히 사랑하지만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녀의 소설 "끌레멘시아"에는 이 실패한 사랑에 대한 언급도 있다. 1837년 그녀는 17세 연하인 안토니오 아롬 데 아얄라와 세 번 째 결혼을 한다. 그녀의 남편은 결핵을 앓고 있었으며 엎친데 덮친격으로 전 남편의 집안과 문제가 생겨 경제적인 곤란을 겪게 되는 한편 어머니와의 관계도 악화된다. 이듬해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그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 동시대 작가인 하르첸부쉬의 도움으로 훼르난 까바예로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출판한다. 그녀의 남편이 1853년 오스트레일리아 영사로 부임하면서 경제적 여건도 나아졌고 그녀는 세비야에 남아서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한다. 당시 여왕인 이사벨 2세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어 세비야 왕궁 경내에 있는 집에서 그녀가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당시 그녀의 사회적, 문학적 명성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파산하게 되고 런던에서 자살하였다. 그는 당시 정신병의 일종인 노이로제 증세가 심한 상태였다. 남편의 자살에 충격을 받은 세실리아는 수도원에 입회하고자 했으나 가족의 반대로 무산된다. 이 후 1877년 81세의 긴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그녀는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였고 명성도 얻었다. 그녀는 자신을 낭만주의자로 규정하는데 그녀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낭만주의는 프랑스식의 퇴폐적인 낭만주의도 아니고 반항적인 낭만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지역색이 짙은 향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소설에서 자신이 살았던 도스 에르마나스 사람들의 말투, 그들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그대로 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겸손하고 소박한 농촌의 일꾼들과 그들의 토속적인 관습 등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소설을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스페인에 대한 정확하고 사실적이며 진정한 생각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스페인 사회의 현재 모습과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사고 방식, 기질, 취향과 관습을 그리는 것이다. 우리는 스페인 민족의 내면의 모습과 언어, 신앙, 이야기들과 전통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다. 위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효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고 진실되게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그녀가 소설을 쓰는 방식이었다. 그녀의 작품에는 자신의 어머니의 고향인 안달루시아 지방과 그 사람들에 대한 애착이 두드러진다.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민주주의적 낭만주의 보다는 법과 질서를존중하며 왕정과 교회를 옹호하였다. 지나치게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소설에 대해서는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녀는 당시 스페인의 어느 여성보다도 더 교육을 많이 받았고 그녀의 삶이나 생각은 자유주의 자체였는데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전통과 왕정을 옹호하는 보수주의자였다는 것은 일견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점은 그녀의 성장과정을 통해 보면 그녀가 스페인의 전통과 가톨릭 종교를 옹호하는 것은 “학습된 애국심” 때문이라고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녀가 스페인에 정착한 것은 17세되던 해였으므로 그녀의 애국심은 태생적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었고 사변적 이데올로기였다. 따라서 그녀 글의 가장 큰 특징은 교훈적인 것이다. 그녀는 회의주의적인 자유주의와 반종교적인 물질주의로 인한 전통적 관습의 해이를 경계하고 스페인 전통도덕과 종교적 덕목을 고양시키고자 하였다. 그녀 작품의 이런 도덕성이 늘 작품을 위축시켰다는 지적도 있다. 즉 가톨릭 종교의 도덕으로 현실을 미화하기 위하여 현실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그녀가 그린 현실은 신비주의적인 스페인으로 그것은 당시 변화하는 스페인의 일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과거와 전통의 이상화된 모습이다. 그녀의 시야는 고정적이고 따라서 그녀가 묘사하는 현실은 정물화라는 비판이다. 그녀는 19세기 당시 유행하였던 실증주의 경향도 신성한 가톨릭 전통을 해칠 위험요소로 간주하여 거부한다. 따라서 그녀 소설에 나타난 사실주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렸다기 보다는 자신의 도덕적 의도에 부합하는 현실만을 이상적으로 묘사하는 좁은 의미의 사실주의이다. 그녀가 소설에서 전원생활을 예찬한 것도 도시가 아닌 전원이야말로 외국의 영향으로 사라져갈 위험이 있는 스페인 민족의 전통이 살아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이와같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비도덕적인 테마는 거부한다. 유혹과 불륜이 미화되고 종교를 무력화시키는 자살을 부추기는 당시 프랑스 식의 신문연재소설을 비난하였다. 그녀의 소설인 <태양의 딸>에서도 불륜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도덕적 교훈을 위해 이용될 뿐이다. 여주인공은 죽은 줄 알았던 애인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행위를 속죄하기 위하여 남편의 허락을 받아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렇게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불륜은 주로 여성에게 치명적이어서 늘 여주인공이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마감한다. 그녀의 대표작인 <휘파람새>의 여주인공 마리살라다와 <알바레다 가족>의 여주인공인 리따는 모두 냉정하며 쌀쌀맞고 신앙심이 없는 인물로 그려지며 소설에 나오는 불행의 원인으로 묘사된다. 마리살라다는 목소리가 아름다워서 휘파람새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처녀이다. 까디스 지방의 시골에 사는 그녀는 스타인이라는 의사에 의해 목숨을 구하게 되는데 스타인은 쫒기는 몸이었다. 스타인은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둘은 결혼한다. 그러나 마리살라다는 알만사 공작의 권유로 가수로 성공하기 위해 아버지와 남편의 만류를 뿌리치고 도시로 나가 자신의 목적도 이루고 유명한 투우사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애인은 투우 중에 죽고 모든이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이미 남편과 아버지도 죽고 없다는 줄거리이다. 다른 대표작인 "알바레다 가족"은 세비야의 시골인 도스 에르마나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루고 있다. 과부인 아나에게는 잘 생기고 늠름한 뻬리꼬라는 아들과 예쁘고 신앙심이 깊은 엘비라라는 딸이 있다. 엘비라는 어렸을 때 부터 이웃집의 벤뚜라를 사랑하였고 뻬리꼬는 사촌인 리따를 사랑하는데 리따는 차갑고 교만하며 신앙심도 없고 변덕스러운 인물로 그려진다. 엘비라와 벤뚜라의 결혼식날 프랑스와 전쟁이 나고 벤뚜라는 우발적으로 프랑스군을 죽임으로써 도망가야 하는 신세가 된다. 6년 후 전쟁도 끝나고 벤뚜라가 고생 끝에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이미 뻬리꼬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는 리따와 사랑을 하게 된다. 질투심에 뻬리꼬는 벤뚜라를 살해하고 도망치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교수형을 당하는데 그 비극적 장면을 리따가 보게된다는 이야기이다. 여주인공들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좌절과 고통을 겪고 또 마지막에 고독과 외로움에 묻히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도덕적인 교훈을 주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엘리아>라는 작품에서도 여주인공이 자신의 열정과 도덕적 의무가 대립하게 되는 상황에서 조용히 수도원으로 물러난다. 자전적 요소가 강한 <끌레멘시아>에서 여주인공도 결혼에 실패하고는 불륜에 빠지거나 자살을 하는 대신 그리스도교적 체념으로 자신의 운명을 수용한다. 그녀의 다양한 세상 경험의 결과로 교회의 조용하며 영적이고 박애주의적인 정신에 헌신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녀의 동생의 환대 속에서 그의 집에서 책과 가난한 이들에 둘러싸여 시인처럼 자연을 벗하고 수도자처럼 평화를 누리며 살았다. 이렇듯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자신의 주어진 운명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통념에 맞추어 현실을 받아들이고 순응하여 정신적인 평정상태에 이르는 것을 이상으로 여긴다. 그녀 작품의 종교적이고 국수주의적인 특징 등 오늘날 우리 눈에 보이는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훼르난 까바예로는 작중의 인물이나 사물들, 시골의 집과 마을의 세심한 묘사에 탁월한 작가로서 스페인 소설사의 한 기원을 이룩한 여류소설가임을 부인할 수 없다. .
[스페인과 중남미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