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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이란 곡식을 가루 내어 찌거나 삶거나 기름으로 지져서 만든 음식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떡의 어원은 옛말의 동사 찌다가 명사가 되어 찌기 - 떼기 - 떠기 - 떡으로 변화된 것으로 본디는 찐 것이라는 뜻이다. 시루떡 · 인절미 · 송편 · 주악 · 경단 등이 모두 이에 속하며, 떡을 일컫는 한자어로는 고(餻), 이(餌), 자(瓷), 편(片, ), 병이(餠餌), 투(偸), 탁(飥) 등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병(餠)이라고 부른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1943)에 떡에 대한 설명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떡은 병이(餅餌)라 하였으며 떡이란 것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합하는 것이니 고(糕)와 이(餌), 자(瓷)와 탁(飥)이 모두 병(餠)이라 이르나, 쌀가루를 찐 것은 이(餌)라 하고, 가루를 하지 않고 쌀을 쪄서 치는 것은 자(瓷)라 하며, 기름에 지진 것은 유병(油餠)이라 한다. 또 꿀에 반죽한 것은 당궤(餹鐀)라 하고, 가루를 반죽하여서 국에 넣고 삶는 것은 박탁(餺飥)이라 하며, 찰가루를 쪄서 둥글게 만들어 가운데에 소를 넣은 것을 혼돈(餛飩)이라 한다. 쌀가루를 엿에 섞은 것은 교이(絞餌)라 하고, 꿀에 삶는 것은 탕중뢰환(湯中牢丸)이라 하며 밀가루에 술을 쳐서 끈적거리게 하여 가볍게 하는 것은 부투(餢) 또는 유어(饇)라 한다. 또한 떡을 얇게 하여서 고기를 싼 것은 담(餤)이라 하고, 밀가루를 부풀게 하여 소를 넣은 것은 만두(饅頭)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시루떡은 이(餌)의 종류요, 찹쌀인절미는 자(瓷)의 종류요, 화전은 유병(油餠)의 짝이요, 꿀떡은 당궤(餹鐀)의 남아지요. 골무떡[단자(團資)]은 혼돈의 벗이요, 떡국[탕병(湯餠)]은 박탁의 한 종류요, 원소병은 뢰한이 변한 이름이요, 증편과 상화병은 부투의 다른 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떡을 가리키는 말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중국에서는 밀가루가 보급된 한대(韓代) 이후에는 떡을 가리키는 용어가 병(餅)으로 바뀌고 있다. 결국 떡을 의미하는 한자는 쌀을 위주로 떡을 만들었을 때는 이(餌)나 자(瓷), 밀가루를 위주로 떡을 만들었을 때는 명칭의 구별 없이 떡이라고 하며 한자인 경우 주로 병(餠)으로 표현하고 고(糕, 餻)로도 쓰인다.
한편, 문헌상 떡이란 글자가 나타나는 조리서는 한글 조리서인 <규곤시의방(일명 음식디미방)>이며 여기서는 떡을 편이라 칭하고 있다. 떡이란 호칭은 <규합총서>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1) 상고시대(上古時代)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떡을 먹었을까? 우리나라의 떡은 삼국(三國 : 고구려, 신라, 백제)이 정립되기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론이 지배적이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나진초도패총에서 양쪽에 손잡이가 달리고 바닥에 구멍이 여러 개 난 시루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하는 사실로 우선 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쌀을 비롯한 피 · 기장 · 조 · 수수와 같은 곡물이 생산되고 있었고, 신석기시대의 유적지인 황해도 봉산 지탑리 유적에서 곡물의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로 빻는데 쓰는 원시적 도구인 갈판과 갈돌이 발견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우리 민족은 일찌감치 삼국시대 이전부터 곡물을 가루로 만들어 시루에 찐 음식을 만들어 먹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떡은 시루의 역사와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으며, 아울러 곡물의 가루로 찐 시루떡이나 쌀을 찐 다음 절구에 쳐서 만든 인절미, 절편 등의 도병류가 상용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주된 먹거리의 조리형태를 상용도구와 연관지어 볼 때 죽이 먼저였으며 찐떡, 찐밥, 그리고 밥의 순서로 발달되었다고 본다. 이는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 토기에 이어 청동기시대의 시루 및 민무늬 토기가 사용되었고, 솥은 청동기, 초기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사용되기 시작한 조리기구이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 B.C. 480-222)의 문헌인 《주례(主禮)》를 보면 '자(瓷)'와 '분자(粉瓷)'라고 하여 곡물을 쪄서 문드러지게 치는 떡과 친 떡에 콩가루를 묻힌 떡을 소개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중국과 접경을 이루고 있으므로 당시의 떡은 그들의 떡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2)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권농시책과 함께 본격적인 농경시대가 전개되면서 쌀을 중심으로 한 곡물의 생산량이 증대되어 쌀 외의 곡물을 이용한 떡도 다양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 시대 무덤인 황해도 안악의 제3호 고분 벽화에는 시루에 무엇인가를 찌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한 아낙이 오른손에 큰 주걱을 든 채 왼손의 젓가락으로 떡을 찔러서 잘 익었는지 알아보는 듯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다른 여러 고분에서도 시루가 출토되기도 했고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도 떡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 당시의 식생활에서 떡이 차지했던 비중을 짐작하게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중 <신라본기>에 유리왕 원년(298) 왕자인 유리(儒理)와 탈해(脫解)의 왕위계승과 관련된 기록이 있는데, "탈해가 유리에게 왕위는 용렬한 삶이 감당할 바 못되며,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치(齒)]가 많다고 하니 시험을 하여 결정하고자 하여 두 사람이 떡을 깨물어 본 결과 유리의 치아 수가 더 많아 왕위에 올랐다."고 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떡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밝혀진 것이 없으나 깨물어서 잇자국이 선명하게 날 정도의 떡이라면 흰떡이나 인절미, 절편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중 <열전(列傳) 백결선생(百結先生)조>에 의하면 세모에 이웃에서 떡을 찧느라 방아소리가 들리자 가난하여 떡을 치지 못하는 아내의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주기 위하여 거문고로 떡방아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여기서 백결선생이 거문고로 떡방아 소리를 내었다고 한 것은 떡메로 떡을 치는 소리인 바, 흰떡이나 인절미와 같은 절편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삼국유사(三國遺事)》중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제향을 모실 때의 차림음식이 기록되어 있는데, "조정의 뜻을 받들어 세시마다 술, 감주, 떡, 밥, 차, 과실 등 여러 가지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떡은 당시에 제사음식으로도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발해 사람들도 시루떡을 해 먹었음이 《영고탑기략(寧古搭紀略)》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張篇)> 권17 식화고(食貨考)에 언급되어 있다.
(3) 고려시대
고려 초기에는 권농정책에 힘을 기울인 결과 곡물의 생산이 크게 늘어나 떡, 죽, 밥 등의 곡물 중심의 음식이 더욱 발달되었다. 또한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최고의 번성기를 맞게 된다. 육식을 멀리하고 특히 차를 즐기는 음다풍속의 유행은 과정류와 함께 떡이 더욱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어 이 시기에는 떡의 종류와 조리법이 매우 다양해진다.
《해동역사(海東繹史), 1765년》에 고려사람들이 밤설기떡인 율고(律糕)를 잘 만든다고 칭송한 중국인의 견문이 소개되고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 원(元)의 기록인 《거가필용(居家必用)》에도 '고려율고'라는 우리의 떡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이수광의 《지봉유설, 1613》에 <송사(宋史)>를 인용하여 기록하기를 "고려에서는 상사일(上巳日, 음력 3월 3일)에 청애병(靑艾餅, 쑥떡)을 으뜸가는 음식으로 삼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당시에도 쌀가루에 쑥을 섞어 찐 쑥설기가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단자류와 전병(煎餠) 등 다양한 종류의 떡이 등장하였다. 고려 공양왕 때 목은(牧隱) 이색의 저서 《목은집(牧隱潗)》에 "유두일에는 수단(水團)을 만들었고, 찰수수로 전병을 부쳐 팥소를 싸서 만든 차전병이 매우 맛이 좋았다"고 하는 기록과 함께 점서(粘黍)라고 하는 찰기장으로 만든 송편도 등장한다.
이밖에 기주떡의 일종인 상화떡[상화병(霜花餅)]이 등장하는데, 상화떡[상화병(霜花餅)]은 밀가루를 발효시켜 팥소를 넣어 만든 것이 오늘날의 증편(蒸餅)과는 다르다. 《고려가요》에 "쌍화점에 쌍화 사러 가고 시딘/회회(回回)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이 말씀이 이 점(店) 밖을 나명들명/다로러거더러죠고맛감 삿기 광대 네 말이라 흐리라"고 하였는바, 그 내용인 즉 "쌍화점에 갔더니 회교도인이 내 손목을 쥡디다. 이 소문이 상점 밖에 퍼지면 조그마한 새끼 광대(廣大) 네가 퍼뜨린 것 인 줄 알리라"하는 말이다.
사실 이 노래는 고려의 수도인 개성 부근에 유행되던 속요로서, 당시 고려에 와 있었던 아라비아
상인과 고려 여인과의 관계를 노래한 것이나, 그 내용에 있어 쌍화점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당시에도 떡이 상품화되어 일반에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4) 조선시대
전반적으로 농업기술과 음식의 조리 및 가공기술이 발달하여 식생활 문화가 향상되었고, 국시(國示)로 내걸었던 유교가 사회 깊숙이 뿌리를 내리면서 관혼상제 등의 의례와 세시행사가 관습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조과류와 함께 다양한 떡이 전통음식으로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떡은 혼례 · 빈례 · 제례 등 각종 행사와 대 · 소 연회에 필수적인 음식으로 자리잡았으며, 이 같은 습속은 지금까지도 전통과 관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초기의 단순하게 곡물가루를 쪄서 익혀 만드는 방법에서 벗어나 점차 다른 곡물을 배합하거나 부재료로 쓰는 소와 고물의 재료로 꽃이나 열매 · 뿌리 · 향신료를 이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곡류는 물론이고 채소 · 과일 · 야생초 · 한약재 · 해조류 등을 주재료로 이용하였으며, 감미료로 조청 · 꿀 · 설탕 · 엿기름 등이 소와 고물로는 참깨 · 팥 · 밤 · 대추 · 계피 등이 이용되었으며, 치자 · 수리취 · 승검초 · 송기 · 쑥 · 연지 · 오미자 등이 착색소로 이용되면서 떡은 한층 화려해지고 모양도 다양해졌으며 맛 또한 독특해졌다.
조선시대의 떡을 기록한 문헌으로 《도문대작(屠門大爵), 1611》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다양한 조리서 즉 《음식디미방》 · 《음식보》 · 《증보산림경제》 · 《규합총서》 · 《임원십육지》 · 《동국세시기》 · 《음식방문》 · 《시의전서》 · 《부인필지》 · 《음식 만드는 법》 · 《군학회동》 · 《옹희잡지》 · 《주방문》 · 《술 빚는 법》 · 《요록》 ·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 《조선요리제법》 · 《시의방》 · 《조선세시기》 · 《간편조선요리제법》 · 《조선요리》 · 《우리나라 음식 만드는 법》 · 《이조궁중음식연회고》 · 《규곤요람》 · 《조선상식》 · 《성호사설》 · 《열양세시기》 · 《음식법》 등이 발간되어 떡 등의 음식 조리기술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떡을 만드는 기술이 얼마나 발달하였던지, 《규합총서(閨閤叢書), 1815》에 '석탄병(惜呑餠)'의 유래에 대해 적고 있는데, "맛이 차마 삼키기 안타까운 고로 석탄병이라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석탄병은 감설기떡으로 멥쌀가루에 감가루 · 설탕 · 밤 · 대추 · 잣 · 꿀 · 녹두 · 수시(水枾) ·
계피 · 귤병을 섞어 고물을 얹어 찐 시루떡이다.
떡은 궁중과 반가를 중심으로 더욱 사치스럽게 발전하여 조선시대 음식관련 조리서에 등장하는 떡의 종류만 해도 무려 198가지에 이르고, 떡을 만드는 데 사용된 재료의 가지 수도 95가지나 된다.
특히 궁중에서는 사치의 정도가 더욱 심하여 각색메시루떡, 각색차시루떡, 각색조악, 화전, 각색단자 등을 높이 1자 8치로 높게 고여서 연회에 사용하였다고 하는 기록을 볼 수 있어 당시 조선 후기를 휩쓸었던 사치 풍조가 떡에도 반영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대표적인 문헌으로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1670》에는 석이편법 · 밤설기법 · 전화법 · 빈잡법 · 잡과법 · 상화법 · 증편법 · 섭산산법 등 8가지 떡 만드는 방법이 수록되어 있고, 《규합총서, 1815》에는 석탄병 · 백설기 · 혼돈병 · 복령조화고 · 도행병 · 무떡 · 신과병 · 토란병 · 송기떡 · 서여향병 · 석이병 · 상화 · 밤조악 · 대추조악 등 27종의 떡 이름과 만드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 근대 조리서 중 가장 많은 떡이 기록된 조리서는 1924년 출판된 《조상무쌍신식요리제법》이다. 떡의 종류 중 찌는 떡이 37종, 치는 떡이 19종, 삶는 떡이 7종, 지지는 떡이 16종, 떡 곰팡이 안 나는 법 등으로 약 80여 종에 이른다.
(5) 근대 이후
19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성, 토착적 성격을 간직해 오던 우리나라의 떡은 한일합병과 이후 36년 간의 일제 강점기 그리고 6·25전쟁 등 급격한 사회변화와 함께 물밀듯이 밀려들어온 서양의 빵에 의해 밀려나기도 했지만 그 문화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지금은 생활환경의 변화로 떡은 집에서 만들기 보다는 떡집이나 떡방앗간 같은 전문업소에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다양하게 만들던 떡의 종류가 전문업소에서 주로 생산되는 몇 가지로 축소되고 있으니 여간 염려스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