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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증그니
춘마곡 추갑사. 봄에는 마곡사가 깊은 계곡과 어우러져 풍광이 수려하고 가을에는 갑사가 아늑하여 좋다고 하지요. 그렇지만 봄이나 가을에 이곳에 가게되면 사실 사람 구경만 하고 오게 됩니다. 인산인해. 물론 평일에는 고요하고 좋지만 쉽지는 않은 일이지요. 전에는 자주 갔었는데 근래에는 가보기 어렵네요. 돌아다니기 어렵네요. 쩝.
갑사는 백제 구미신왕 원년(420)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기록으로 분명한 것은 무령왕 3년에 천불전을 중창했다고 하니 백제 웅진 시대의 주요한 사찰이었다. 통일신라 때 세웠다고 짐작되는 철 당간과 고려 때의 부도는 이 절이 역사를 거쳐 오면서도 꿋꿋하게 제 면모를 지녀 왔음을 말해준다.
천년의 내력을 지켜오다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탔던 것을 뒤에 하나둘씩 새로 세웠으므로 지금의 절집들은 조선 시대 중 후반기의 것들이다. 대웅전에 1650년에 제작한 괘불이 보존되어 있어 초파일이나 중요한 재에 가면 내어 건 모습을 불 수 있다. 대적전 앞을 지나 옆으로 가다보면 자그마한 탑이 하나 있는데 공우탑이다. 절에서 짐을 져 주면 혼자서 암자로 짐을 나르던 영리한 소가 있었는데 그 소가 늙어서 죽으니 승려들이 은공을 기려 세운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은 갑사가 1579년에 정유재란으로 불탄 뒤에 자리를 옮겨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으니 1604년에 중건한 것이다. 갑사에는 중심 전각인 대웅전과 대적전말고도 강당, 응향각, 팔상전, 진해당, 적묵당, 삼성각 등이 있다.
철당간 및 지주(鐵幢竿 및 支柱. 보물 256호)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갑사 동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이 당간은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네 면에 구름무늬를 새긴 기단(基壇)위로 철당간을 높게 세우고 양 옆에 당간지주를 세워 지탱하였다. 당간은 24개의 철통을 연결한 것인데 원래는 28개였으나 고종 30년(1893) 벼락을 맞아 4개가 없어졌다고 한다. 당간을 지탱하는 두 개의 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으며 꾸밈이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기둥머리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안쪽에 구멍을 뚫어서 단단하게 고정시키고 있다.
기둥머리의 곡선과 기단부의 단순한 조각이 잘 어우러져 소박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통일신라 전기인 문무왕 20년(680)에 세워진 것이라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고, 양식상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의 양식을 갖춘 것으로 생각된다.
갑사의 철 당간은 청주 시내 용두사터의 철 당간과 함께 오랜 내력을 지닌 것으로 석조지주와 더불어 보물 제 256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름 50 cm 굵기인 철통이 24개 연결된 현재 길이는 15cm로 길다.
지주의 대석은 흙 속에 파묻힌 상태이다. 위쪽에는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공이 양쪽으로 나 있어 철제 당간의 다섯째 마디 철통을 철띠로 세 번을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장식없이 소박하나 튼실하며 바깥쪽모서리는 모를 죽이고 활 모양을 내어 장식이 없는 가운데에도 유려한 곡선을 그려 맛을 냈다. 그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의 것으로 여겨지는데 절에서는 문무왕 20년에 건립했다고도 한다.
부도(浮屠. 보물 257호)
갑사 뒤편 계룡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17년 대적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모습이며 3단의 기단(基壇)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높직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은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나뉘어지는데 특이하게도 아래층이 넓고 위층으로 갈수록 차츰 줄어든다. 아래받침돌에는 사자·구름·용을 대담하게 조각하였으며, 거의 원에 가까운 가운데받침에는 각 귀퉁이마다 꽃 모양의 장식이 튀어나와 있고, 그 사이에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을 새겨 놓았다. 탑신을 받치는 두툼한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둘러 새겼다.
탑 몸돌 4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을 새겨 놓았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기왓골을 표현하는 등 지붕 모양을 정교하게 모방하고 있다.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으며, 후에 새로 만든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조각이 힘차고 웅대하나, 윗부분으로 갈수록 조각기법이 약해졌다. 특히 지붕돌이 지나치게 작아져 전체적인 안정감과 균형을 잃고 있다. 기단부의 조각은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전체에 조각된 각종 무늬와 기법 등은 고려시대 부도탑들 중에서도 우수작으로 손꼽을 만하다.
부도의 모습은 일반적인 팔각원당형으로 특히 기단의 사자 조각은 마우 입체적이어서 부도 전체가 크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퍽 힘있는 느낌을 준다. 그 위로 꿈틀거리는 구름무늬 조각위에 천인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천상세계가 되는 팔각 몸돌의 네 면에는 사리를 보호하는 의미로 문 양쪽에 사천왕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기왓장 무늬가 섬세하게 새겨져 있으나 처마가 깊지 않아 기단에 견주어 섬약한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위쪽이 빈약해 보이는데 상륜부에 꽃잎이 살짝 벌어지기 시작한 연봉오리가 어느 정도 보완해 준다.
삼신불괘불탱(三身佛掛佛幀. 국보 298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와 노사나불 등 삼신불이 진리를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던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길이 12.47m, 폭 9.48m의 크기로 전체적으로 상·중·하 3단 구도를 이루고 있다. 맨 윗부분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 제자상, 금강역사상 등이 배치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비로자나불, 석가, 노사나불 등 삼신불을, 맨 아래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상, 사천왕상, 사리불 등이 묘사되어 있다.
가운데부분의 비로자나불은 등뒤로 광배를 가지고 있으며 둥근 얼굴에 두 어깨를 감싼 옷을 걸치고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싼 지권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큰 얼굴과 큼직한 손에 비해 몸은 다소 왜소하며 어깨에 비해 무릎 폭이 넓은 모습이다. 비로자나불의 왼쪽에 있는 노사나불은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두 손을 어깨까지 들어올려 설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오른쪽의 석가불은 악귀를 물리친다는 뜻의 손모양인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비로자나불과 석가불은 기둥처럼 솟은 특이한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맨윗부분은 붉은 색의 두광을 가진 관음·세지보살과 십방제불, 나한 등이 화려한 빛깔의 구름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천상세계를 만들고 있다. 비교적으로 단순한 구성을 보이고 있는 맨아래부분은 사천왕과 문수보살·보현보살, 사리불이 배치되어 있다. 채색은 녹색, 홍색, 황색과 같은 중간 색조와 금으로 채색하여 화면전체를 밝고 화려하게 나타내었다.
이 괘불은 효종 원년(1650)에 제작되었는데 중단의 삼신불을 크게 강조한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또한 그림에 괘불 조성에 필요한 많은 물품의 시주자를 적어놓고 있어 17세기 중반의 생활상과 사찰의 재정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선조2년간 월인석보 판목(宣祖二年刊 月印釋譜 板木. 보물 582호)
『월인석보』를 새겨 책으로 찍어내던 판각으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 중 유일한 판목이다.『월인석보』는『월인천강지곡』과『석보상절』을 합하여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대장경이다. 석보는 석가모니불의 연보 즉 그의 일대기라는 뜻이다.『석보상절』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후의 세조)이 불교서적을 참고하여 지은 것이고,『월인천강지곡』은 세종 29년(1447)에 세종이『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은 것이다.
『월인석보』는 본래 57매 233장으로 모두 24권이었으나 현재는 21권 46매만 남아있다. 이 판목은 선조 2년(1569)충청도 한산에 사는 백개만(白介萬)이 시주하여 활자를 새기고, 충남 논산 불명산 쌍계사에 보관하였다. 현재 갑사에 소장되어 있는데 70여 년 전에 입수하였다고 한다. 계수나무에 돋을새김으로 새겼고, 판목의 오른쪽 아래에 시주자의 이름과 새긴 이의 이름이 있다. 내용표기에 있어서는 방점과 글자획이 닳아 없어져 변모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불교대장경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15세기 당시의 글자와 말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국어변천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강당(講堂. 충남 유형문화재 95호)
해탈문과 대웅전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강당은 승려들이 법문을 강론하던 건물로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뒤로 다시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의 옆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단순한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의 기둥 위에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를 짰는데,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다. 단청은 완전히 퇴색되어 무늬의 흔적만 남아 있으며, 문짝은 많이 변형되어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절도사 홍재의가 쓴 ‘계룡갑사(鷄龍甲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전체적으로 기교를 부리지 않은 조선시대 후기의 웅장한 건축물이다.
좋은 사진=문화재청, 션찮은 사진=머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