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 제출한 답안지
오정순
휴대폰에 낯선 번호가 얼굴을 보이며 부르르 몸을 떤다. 마침 설거지 중이어서 고무장갑 빼는데 시간이 좀 필요했다. 모처럼 쉬려는데 귀찮다는 듯 얼른 받으라고 몸부림이다.
“여보세요”
“나여~ 나 물러?”
알듯 말듯 낯설지 않은 목소리지만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나 김**이여~ 목소리도 잊어버렸나베~ 오늘은 꼭 같이 밥 먹어야 허니께 지금 나와 ”
“어머! 정말 오랜만이에요. 전혀 예상치 못한 전화라서… 밥이야 내가 사야죠”
매주 만날 수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20여 년 가까이 얼굴을 마주치지 않은 사이여서 무슨 일인지 더 궁금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30대 초와 중반이었다. 시누이 일곱에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나를 보며 대견하다고 언니처럼 따스하게 대했던 그녀였다. 생활력이 강하고 바지런했다.
보험설계사였다가 슈퍼마켓 주인이 되더니 어느 날 식당 문을 열었다. 그런 중에 남편의 우울증까지 감당해야 했고, 큰딸의 수술을 열 두 번이나 지켜봐야 했다.
소문이 돌았다. 그녀에게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고… 병원에서 신장의 기능이 20%라는…
그렇지만 여전히 일손을 놓을 수 없었던 그녀의 처지를 안타깝게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여기저기로 돈을 꾸러 다닌다는 소문도 돌았다.
어느 날 아침, 그녀가 찾아왔다. 식당에서 쓸 고기를 사야하는데 돈이 필요하니 한 달만 빌려달라고… 수표 넉 장을 받아들고 가는 뒷모습이 참으로 쓸쓸해 보였다.
그 후 그녀는 식당 문을 닫았고 식당 대신 병원으로 출퇴근을 하더니 급기야 병원에 누워버렸다. 처음엔 병원비 때문에 배에 소변주머니를 넣고 다니더니 그게 더 악화되어 하루걸러 한 번씩 투석을 해야 했다.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몇몇이 성의를 모아 병원을 찾았지만 그건 한계가 있었다. 몇 번 그러다가 대부분 잊고 지냈다. 그녀도 가끔 교회에서 얼굴을 보였지만 날 피하는 눈치였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다가 그녀와 딱 마주쳤는데 슬쩍 눈길을 돌리더니 피하려고 했다. 얼른 그녀를 구석진 곳으로 끌었더니 당황하면서 따라왔다.
“왜 그렇게 날 피해요? 난 그 돈 받을 생각 없어요. 갚았다 생각하고 그냥 편하게 지내요”
그렇게 하고 잊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갑자기 함께 밥을 먹어야 하는지 짐작되는 게 없었다.
홈플러스에서 만나 식당까지는 50m 정도였는데 그 몸으로 한과를 한 박스 들고 서 있었다.
박스를 받아들고 그 거리를 가는 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세 번을 쉬었다.
식당에 도착해서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물론 짐작대로 밥 먹자는 것은 구실이었다.
그녀가 봉투를 내밀었다.
“딱 원금이여~ 생각해 보면 몇백만원도 되고 몇천만원, 아니 억대가 될 돈이지만…”
“이미 끝난 계산을 왜 해요? 이러지 마시고 밥이나 먹어요. 우리~”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서도, 받을 수도 없는 돈이었다. 제발 마음 좀 편하게 해 달라고 사정하기에 받아들긴 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무겁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이 미웠다.
그녀는 긴 숨을 내쉬면서 이제야 좀 편해졌다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두어 숟갈 뜨다가 말고, 30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있었던 일들로 수다를 떨다보니 두어 시간이 흘렀다. 여기서 집까지의 거리는 보통사람의 걸음으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이지만 힘들 것 같아 모셔다 드린다고 했더니, 전용 자가용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한다. 전화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차가 도착했단다. 알고 보니 장애자용 차였다. 병원도 공짜, 이 차도 언제든지 전화만 하면 이용할 수 있으니 이젠 걱정 없다며 웃었다.
집에 와서도 마음이 편치 않아 받아온 봉투를 책꽂이 위에 올려놓고 그냥 누웠다.
뇌출혈로 쓰러진 남편에 열두 번의 수술을 해도 여전히 장애로 지내는 큰딸에 본인의 몸도 저러하니 얼마나 힘들까! 게다가 생활 형편도 뻔하고…
아침에 집안 정리하려고 이리저리 꺼내놓은 짐이 방향감각을 잃고 어정쩡하게 뒹군다.
아무래도 오늘은 마음 정리부터 해야 할 것 같아 대충 쓱 밀어놓았다.
받아온 봉투를 열었다. 신사임당이 경직된 채 일열 종대로 서 있다. 마치 무언가 따지며 대들 듯한 자세다. 도둑질하다 들킨 것 같아 얼른 다시 집어넣었다. 공돈 생겼으니 근사한데 가서 밥이라도 사라는 사람들의 말을 모두 무시했다. 너무 귀한 돈이라서 함부로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신사임당은 그렇게 다시 봉투 속에서 석 달을 지냈다.
풀어야 할 숙제를 뒤로 미루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뽀얗게 삶은 빨래를 툭툭 털어 널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지체했다가는 내 마음이 변할 것 같은 불안도 있었다. 서랍 바닥에 누워있던 통장과 봉투를 꺼냈다. 경직된 자세로 날카롭던 신사임당의 표정이 부드러운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날 은행에서 숙제를 풀었고 만점짜리 답안지를 제출했다.
바퀴는 구르면서 커가고 있었다
오정순
“안 돼!”
세상이 온통 하얘지며 나는 맨발로 뛰어가다 털썩 주저앉았다.
발등의 화상 치료를 받던 아들의 울음소리를 넘어 내 울부짖음은 미루나무 꼭대기의 까치집을 흔들었다. 차를 대던 남편이 잠시 멈칫한다. 일어서지도 못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딸의 이름을 부르니 다시 후진한다. 갓 돌을 지나서 아장아장 걷던 아이가 아빠를 부르며 트럭 쪽으로 갔는데 바퀴 근처에 있던 딸이 보이지 않는다. 하얀 세상을 모두 얼굴에 퍼 담고 가 보니 아이가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고 바퀴 밑에 깔려있다. 끼어있는 아이를 꺼내니 울음을 터뜨린다. 도로포장이 되지 않은 길이 질퍽해서 전날 차 바퀴가 파 놓은 곳이 얼어있었고 그 속에 아이가 들어있었는데 파인 곳보다 트럭 바퀴가 커서 공간이 생긴 것이다.
장이 파열되었을지 모른다고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근처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놀란 것 외엔 아무 이상이 없다며 청진기를 챙기던 의사는 운전사를 잡아 병원비라도 받으라고 한다.
결혼 초에 시작한 사업은 부도수표만 끌어안고 어음에 보증 서주던 친정까지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어렵게 시작한 친정 공장에서 대충 얼기설기 판자를 엮어 만든 집에 살고 있을 때였다. 쥐들은 천정을 운동장 삼아 달리기했고, 밤에는 침대 밑을 어슬렁거렸다. 남편은 사장님에서 짐을 실어다 주고 운임을 받는 짐꾼이 되었고 나는 사모님에서 더 내려갈 수 없을 만큼 내려간 초라한 아줌마가 되었다. 몇 백만원, 몇 천만원짜리 부도난 어음과 당좌수표가 봉투 속에 가득한데 아이들에게 백 원짜리 과자 한 봉지를 사 줄 수 없는…
친정 오빠가 하는 공장은 고물상에서 수집해온 알루미늄을 용광로에 넣어 재생하는 공장이었는데 빨갛게 녹은 양은 물을 틀에 부어 네모반듯한 덩어리로 만드는 곳이었다. 불순물인 떠오른 재와 가라앉은 재는 마당에 뿌려 식히곤 했는데 하얗게 마당에 뿌려놓은 그 위를 눈이 왔다고 다섯 살 아들이 뛰어들었다가 화상을 입은 것이다. 물집이 터질 때 가슴까지 터질 듯한 치료를 일주일째 하던 중이었다. 열을 식히기 위해 대야에 넣어 놓은 얼음은 아이가 뛸 때마다 곤두박질을 치곤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서야 발등에 분화구를 만든 채 통증은 멈췄다.
남편은 운전면허를 따고 한 달도 되지 않아 2.5톤 타이탄 트럭을 사서 지인의 짐을 전국으로 배달하기 위해 새벽부터 서둘렀다. 어쩌다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어오면 고단함도 잊고 또다시 새벽에 출발하기 위해 짐을 싣곤 했다. 기르던 개가 유난히 짖어대던 날, 남편의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다. 병원에 실려 가면서도 앞 유리가 깨지고 문짝이 너덜거리는 트럭을 걱정했다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가장의 무게를 실감한 날이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겼고, 나 역시 임신중독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가끔 떠오르는 이 기억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 묻어두고 싶은데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양념처럼 들춰내어 맛보곤 했다. 다만 제일 아찔했던 딸의 사건은 정작 본인은 기억에 없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미세먼지처럼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 것 같다는 그날의 기억을 감추기 위해 아들은 여름에도 좀처럼 양말을 벗지 않았다. 양말을 갈아신을 때 슬쩍 훔쳐보니 분화구의 거친 구멍이 줄어들었다. 살아온 과정을 눈치채서인지 야근을 밥 먹듯 하면서도 피곤하다는 말을 아낀다. 전공과 관계없는 직업으로 성대가 결절 되도록 강의에 열을 쏟는 딸도 부모님의 일이라면 언제나 달려오는 자상하고 든든한 친구다.
우리가 가는 길은 왜 이렇게 울퉁불퉁하냐고 구덩이가 많냐고 참지 못하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마다 우리에게는 커다란 바퀴가 있었다.
바퀴는 굴러가며 나를 깔아뭉갤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는데 구덩이보다 바퀴가 크면 나를 지켜주는 안전장치라는 생각으로 바꾼다.
비록 딸은 그때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구덩이보다 더 커다란 바퀴가 지키고 있었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바퀴는 굴러가며 커가고 있었던 것이다.
밟고 지나온 구덩이도 많았지만 앞으로 더 많은 구덩이와 수렁도 있을 수 있기에 생각의 바퀴를 더 키워야 한다. 눈덩이가 구르며 커지듯 그렇게 굴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