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베스의 기도묵상 17. 밑창 없는 바구니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9-10)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눙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렘 32:27).
한 레스토랑 앞에 "4.99달러만 있으면 무슨 음식이든 마음껏 먹을 수 있습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한 굶주린 사람이 그걸 보고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4.99달러를 내고는 음식을 주문했다. 그는 종업원이 가져다 준 엄청난 양의 음식을 순식간에 해치워버렸다. 그리고는 한 접시 더 달라고 주문했다. 그런데 그것도 부족했는지 한 접시 더 가져오라고 주문했다.
그러자 종업원이 더 이상은 안 된다고 거절했고 그 남자는 격앙된 목소리로 지배인을 불렀다. 지배인이 나오자 그는 창문 앞에 걸려 있는 현수막을 가리키며 "4.99 달러만 있으면 마음껏 먹을 수 있다며? 그러니까 나는 더 먹을 거야. 그럴 수 있잖아!"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지배인도 만만찮았다.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그래요? 제가 손님이 4.99달러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그게 다라고 말한다면, 이제 어떡하실 건가요?"라고 말했다.
당신은 하나님도 이 지배인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넘치도록 주겠다고 약속해놓고 또 그 약속을 지킬 것처럼 해놓고서는 어느 정도가 되면 이제 그만이라고 말씀하실 것 같냐는 말이다. 정작 우리는 아직도 양이 덜 찼는데 말이다.
야베스와 함께 모험하다 보면 당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낡은 사고방식들을 버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나를 아주 조금만 복 주기 원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어떤 계획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하나님의 능력은 나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은 사용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을 상자 안에 가두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상자 안에서만 하나님이실 뿐 상자 밖에서는 아무 힘도 못 쓰신다. 결국 상자 밖은 회의와 두려움과 왜소한 기대들이 난무하게 된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하셨던 사역도 알고 보면 대부분, 하나님이 상자 안에 갇힘으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횡포를 공격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면 앞서 얘기한 "무슨 음식이든 마음껏 먹을 수 있다"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겠다. 예수님이 오천 명의 군중을 먹이신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너무 중요해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었는데,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기적은 부활 말고는 이것이 유일하다(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6장에는 경험 많고 노련한 이벤트 기획자라도 당황 할 만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먹을 거라고는 하나도 준비해오지 않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 무작정 산으로 온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데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자기들이 집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위에는 벌써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런데 먹을 거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큰 일 날판이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제자들도 속으로는 내일 아침이면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이 마지막 추종자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더불어, 예수님의 화려한 '경력' 도 끝나게 될 거라고 생각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예수님은 한 소년의 도시락으로 그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고 풍성히 남기기까지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시기까지 제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감정으로 있었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그들은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어지러웠는데, 이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또한 의심을 품고 있었는데, 이것 역시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전에 제자들이 처해 있던, 궁지에 몰린 상황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려고 할 때 계속해서 시험받게 되는 상황이다.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으며 에너지도 없고 시간도 없다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시는 일은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재원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건, 때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며 그 증거가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에게도 혹 낡은 사고방식이 있지 않은가? 내 말은, 성공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며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에 대해 잘못된 가정들을 갖고 있지 않냐는 말이다. 혹 그렇다면 그것들을 보여달라고 간구한 다음, 하나님이 원래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게 하라. 그분은 능력의 하나님이고 절대 없어서는 안 되며 한계라는 것을 모르는 분이다. 결국 하나님을 가두어놓을 수 있는 상자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 나의 야베스 기도 일기
주님, 제가 무지하거나 믿음이 없어서 당신의 능력을 제한한 적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보여주시기 원합니다. 저는 당신이 제 삶에서 진정한 하나님이 되시기 원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가?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하나님 한 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모드 로이드(Maude Royder)-
야베스의 기도묵상 18. 목적 있는 능력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9-1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러셀(Russell)은 내 절친한 친구인데, 열여섯 살 때 처음으로 자기 믿음에 대해 진지해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때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 믿음에 대해 얘기했다가 하나님의 힘이 바로 이런 거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오후, 그는 친구들과 함께 쇼핑센터 주차장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그런데 콘서트가 끝나자 한 여인이 그에게 걸어와서는 그의 신앙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러셀은 그때까지 한 번도 자기 신앙을 변호해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 보는 여인한테서 그런 질문을 받자 좀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와의 대화가 막힘없이 잘 풀려갔다.
아니, 잘 풀려간 정도가 아니라 함께 있던 친구들이 러셀이 답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러셀 주변으로 모여들 정도였다. 그들은 러셀이 무슨 사절단이라도 되는 것 같다며 그렇게 유창하게 말하는 법을 어디에서 배웠냐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정작 놀란 사람은 러셀 자신이었다. 그는 그때를 떠올리며 "마치 누군가가 내 속에 들어와 내 대신 말해주고 있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내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이런 상황을 경험한 적 있냐고 물어보면, 보통 "무서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면 "그때는 잘 몰랐지만 그와 헤어지고 나니까 하나님이 저를 통해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중 하나로 대답하곤 한다.
나는 성령이 우리를 통해 말씀하시는 일이 규칙적으로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전권대사로 부름을 받았다. 그분은 우리 외에는 여간해서는 다른 수단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직장에서 혹은 학교 복도에서 우리가 들을 수 있도록 하늘 문을 열고 말씀하시는 일 같은 것도 하지 않는다. 또한 나랑 가까운 사람이 심하게 방황한다고 해서 나를 대신해 그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일 같은 것도 하지 않는다. 그분은 자기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분의 영으로 가득 차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기 바라신다.
누가복음 12장 11-12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성령님이 할 말을 주실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 약속의 말씀은 나중에도 한 번 더 나온다.
"내 이름을 인하여...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눅 21:12-15).
이 약속의 말씀이 지켜지는지 안 지켜지는지 알고 싶으면 사도행전을 보면 된다. 지금 당장 사도행전을 펼쳐보라. 그러면 베드로와 요한과 스데반과 바울이 담대하고도 효과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령님이 풍성한 수확을 가져오시는 것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의 목적을 정의해주신다. 그것은 바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이다.
성령으로 채움을 받는 것을 전력의 개념으로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여러 가지 목적으로 집에다 전선을 설치한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목적에 맞게 전기를 사용하는데 전력은 몇 번 사용해봐서 그 편리함을 알게 되면 더 많이 사용하게 된다. 영적인 능력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가 지경을 넓힐 준비가 되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더 많은 능력을 흘려보내 주신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의 세계에서 일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완전히 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우리에게 그 같은 능력을 허락해준 근원에서 절대 끊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계속해서 더 큰 결과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에 보면, 성령이 마치 액체 같이 다 쓰고 나면 다시 채워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채우다'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이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촉구했을 때도 그 의미는 성령으로 채움을 받는 것을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채움이란 우리가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영원히 거하게 되는 것과 는 다른 개념이다. 그것은 특별한 일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영의 채우심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께 우리를 채워달라고 요구하면 하나님이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의미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성령으로 채움을 받은 세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 말씀을 보며 당신도 성령으로 강하게 채워달라고 날마다 기도하라. 명심하라. 지금 우리는 어떤 느낌을 갖게 해달라고 혹은 어떤 특별한 영역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혀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어떤 획기적인 행동을 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다. 그런 것은 요구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질서 정연하고 평화롭게 처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고전 14:33). 또한 우리는 우리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지도 않다. 성령님은 우리가 자기 생각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우리 인성을 지배하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는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통해 아주 강하게 역사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당신을 채워달라고 간구해본지 오래 되었는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 기도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약속의 말씀이 여기 있다.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
* 나의 야베스 기도 일기
성령님으로 채움을 받고 싶다는 기도를 구체적이면서도 갈급하게 마지막으로 드렸던 때가 언제였는가?
구약과 신약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성령으로 채움을 받는다는 것은 섬김에 대한 말일 뿐 실제 섬김과 아무 상관없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구절은 하나도 없다. - 토레이(R. A. Torrey) -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로마서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