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월 상순(10수)
하루시조121
05 01
단계암 기린 기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단계암(丹階岩) 기린(麒麟) 기고 벽오동(碧梧桐)에 봉황(鳳凰)이 논다
계화하(桂花下) 오동음(梧桐陰)에 천일주취(千日酒醉)ㅎ고 누웠으니
동자(童子)야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 오시거든 날 깨워라
동자(童子) - 사내아이.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 - 남극성(南極星). 노인성(老人星). 인간의 평화와 장수(長壽)를 관장하는 별임.
자연 속에서 오래도록 노닐고 싶은 심정을 노래했습니다. 한자어가 많이 들어가 있어 실명이라면 누구일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기린이나 봉황은 상서로운 동물로서, 붉은 단풍이 어우러진 바위에서 기린이 노닐고 봉황은 벽오동에 내린다고 하니 신선도(神仙圖)가 따로 없는 묘사입니다. 상상으로 펼친 이상적 자연환경입니다. 계수나무 꽃그늘 아래에 눕고 또 오동나무 이파리 그늘 아래에서 노닐다니 인간을 떠나 자연에 묻히는군요.
더하여 천일(千日) 동안 주취(酒醉)라니 딱 선인(仙人)입니다.
이 시조의 작자는 아마도 ‘지금의 세상은 혼탁하고 소란스러워서 일단은 벗어나고 싶다, 노인성이 나올 때까지 취해서 살아가리라,’ 이런 심정인가 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22
06 02
바위 암상에 다람쥐 기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바위 암상(岩上)에 다람쥐 기고 시내 계변(溪邊)에 가재 게로다
함박꽃에 뒤웅벌 날고 조팝남게 피죽새 운다
어디서 징덩둥 소리에 떼구름이 우즑우즑 하더라
암상(岩上) - 바위 위.
계변(溪邊) - 시냇가.
함박꽃 – 작약(芍藥). 또는 함박꽃나무의 꽃을 이르기도 한다.
뒤웅벌 – 뒤영벌. 꿀벌과 뒤영벌속의 벌을 통틀어 이르는 말. 애뒤영벌, 노랑띠뒤영벌 따위가 있다.
조팝남게 – 조팝나무에.
피죽새 - 지빠귓과 밤꾀꼬리의 하나.
징덩둥 – 풍악소리.
전원(田園)의 풍경(風景)이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등장하는 단어들이 전원에서 볼 수 있는 자연물들입니다. 만물(萬物)이 조응(照應)하는 것이지요. 초장에서 가재를 게의 하나로 본 것도 흥미롭고, 암상과 계변을 우리말로 거듭 적은 것도 이 노래를 들을 대상을 배려한 것 같네요.
종장은 드러내 놓고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풍악소리 들리니 하늘의 구름떼도 우줄우줄 춤을 춘다네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23
05 03
밭 갈아 소일하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밭 갈아 소일(消日)하고 약(藥) 캐어 봄 지나거다
유산유수처(有山有水處)에 임의(任意)러 소요(逍遙)하니
아마도 영욕(榮辱) 없는 몸은 나뿐인가 하노라
소일(消日) - 어떠한 것에 재미를 붙여 심심하지 아니하게 세월을 보냄.
유산유수처(有山有水處) - 산 있고 물 있는 곳. 자연 속.
임의(任意)러 – 마음대로.
소요(逍遙) -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
영욕(榮辱) - 영예와 치욕.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했습니다. 초장은 밭 갈고 약초 캐어 생계를 마련하는 일을, 중장에서는 전원의 여유로움을, 종장에서는 지족(知足)의 자위(自慰)를 결론으로 맺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마음껏 소요하는 일, 훌훌 털어버린 상태의 가벼움이라니, 날아갈 것만 같을 겝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24
05 04
밤비에 붉은 꽃과
무명씨(無名氏) 지음
밤비에 붉은 꽃과 아침 내에 푸른 버들
춘풍(春風)에 흥(興)을 겨워 우즐기며 넘노는고
두어라 일년일도(一年一度)니 임의(任意)대로 하리라
내 – 안개.
일년일도(一年一度) - 한 해에 한 차례.
봄날의 자연을 즐기는 자연스러운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초장만 해도 꽃과 버들의 색체 대비와, 밤비 지나고 아침 안개가 등장하는 등, 시간과 공간의 치밀한 교직(交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심상한 듯한 표현의 풍광을 바라보는 중장의 춘풍은 즐거움의 대체재(代替財)입니다. 종장에서는 그 즐기는 태도가 좀 까불거리는 듯 하더라도 한 해 한 차례일 터이니 놔둬도 좋으리라 동조(同調)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25
05 05
녹양은 자는 듯 깬 듯
무명씨(無名氏) 지음
녹양은 자는 듯 깬 듯 산마루에 해 돋는다
설멋진 농가의 아침 논 매고 나니
눈 앞에 만경옥야(萬頃沃野)는 나날이 달라가네
녹양(綠楊) - 잎이 푸르게 우거진 버드나무.
설멋진 – 충분하지 못하게 멋진. 그런대로 멋지다고 해줄 만한.
만경옥야(萬頃沃野) - 넓디넓은 기름진 들녘.
푸른 버들과 김을 맨 논 풍경이 그럴싸하게 아름답다는 전원시입니다. 이팝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지고, 배고픈 시절 허기를 눈으로나마 채웠던 옛날이야기를 전설처럼 듣습니다. 이제는 누가 모를 냈는지, 우렁 각시가 간밤에 순식간에 뚝딱 해치웠고나 싶게 기계로 혼자서 이앙(移秧)을 하니까요. 김도 안 매죠. 약을 치고, 그 약도 드론으로 칩니다.
농가의 이야기를 적은 작품들을 읽다보면 오늘날의 농촌과는 사뭇 다르기에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고, 대신 추억(追憶)에 잠기게 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26
05 06
백초를 다 심어도
무명씨(無名氏) 지음
백초(百草)를 다 심어도 대는 아니 심을 것이
젓대는 울고 살대는 가고 그리느니 붓대로다
구태여 울고 가고 그리는 대를 심을 줄이 있으랴
백초(百草) - 온갖 풀.
젓대 - ‘저’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 저 - 가로로 불게 되어 있는 관악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
살대 - 화살의 몸을 이루는 대. 화살대.
붓대 - 붓촉을 박는 가는 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손으로 잡는 부분이다.
대(竹)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라고 하는데, 목질부분이 없다나 어쩐다나. 그런 대는 우리 문명사에 있어서 휘어지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게 하는 아주 유용한 ‘나무’였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오늘날 플라스틱이 그 기능을 아주 간편하게 대신하고 있지요. 이 작품에서만 보아도 대의 유용함이 세 가지나 나오네요. 그런데 그런 대를 아니 심겠다니요. 읽고 나니 알겠습니다. 울고, 가고, 그리고. 님과의 이별이 싫은 거로군요. 억지스러운 감이 없진 않으나 피리며 화살이며 붓이 대로 만들어지고, 이별이 싫으니 대나무를 아예 없이 살겠다는 항변이 재미있습니다. 특히 붓대는 그림도 그리거니와 그리운 마음을 시(詩)로 편지(便紙)로 드러내겠다 싶으니 중의(重意)가 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27
05 07
벽오동 심은 뜻은
무명씨(無名氏) 지음
벽오동(碧梧桐) 심은 뜻은 봉황(鳳凰)을 보렸더니
내 심은 탓이런지 기다려도 아니 온다
무심(無心)한 일편명월(一片明月)이 빈 가지에 걸렸어라
벽오동(碧梧桐) - 수피(樹皮)가 푸른 오동나무. 봉황이 이 나무에 와 앉는다고 믿었다.
봉황(鳳凰) -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상상의 새. 수컷은 ‘봉’, 암컷은 ‘황’이라고 하는데, 성천자(聖天子) 하강의 징조로 나타난다고 한다.
일편명월(一片明月) - 한 조각 밝은 달.
님을 그리는 심정을 ‘벽오동과 봉황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빌어다 노래하고 있습니다. 노랫가락과 전설 앞머리에 자주 등장하는 상징입니다.
자기를 낮추어, 벽오동을 자기가 심어서 봉황이 안 오는갑다고 하고, 그 빈 가지에는 무심한 달빛만 걸렸다는 겁니다. 님이 곧 봉황이라고 전제하고 아직은 기다릴 뿐이라는데, 읽는 이로 하여금 ‘곧 오겠지요’ 위로를 건네게 하네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28
05 08
푸른 것은 버들이요
무명씨(無名氏) 지음
푸른 것은 버들이요 우는 것은 뻐꾸기라
치마끈 졸라매고 이 행실 잊었더니
뒷동산 궁더꿍 우는 새소리 벌릴동말동
초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초여름 시냇가 풍경인 듯합니다. 그런데 중장에서 갑자기 치마끈이며 행실 운운하네요. 급기야 종장의 새 울음소리는 ‘궁더꿍’ 비상식적으로 울고, ‘벌릴동말동’은 해석 불능입니다. 엉뚱한 어휘만 골라 연결해보면 야한 상상도 가능하고요. 하고 싶은 말을 숨길 수 있는 기능이 시조에도 있구나 싶네요.
종장 끝구의 생략은 시조 창법에 의한 것으로 ‘하여라’ 정도가 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29
05 09
보거든 꺾지 말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거든 꺾지 말고 꺾었으면 버리지 마소
보고 꺾고 꺽고 버림이 군자(君子)의 행실(行實)일까
두어라 노류장화(路柳墻花)니 누를 원망(怨望) 하리오
군자(君子) - 다음 세 가지 뜻으로 정리되어 있으나, 작품 속의 어의는 첫 번째일 듯합니다.
1) 행실이 점잖고 어질며 덕과 학식이 높은 사람.
2) 예전에, 높은 벼슬에 있던 사람을 이르던 말.
3) 예전에, 아내가 자기 남편을 이르던 말.
행실(行實) - 실지로 드러나는 행동. 여기서는 행실을 낮추어 부르는 ‘행실머리’ 정도로 읽힙니다.
노류장화(路柳墻花) -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 아무나 쉽게 꺾을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음.
누 – 누구.
신분제 사회를 살아오던 기생이나 창녀들을 쉽게 ‘노류장화’라 일컬었답니다. 성(性)인지도(認知度) 개념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이 작품 속의 주인공도 뉘를 탓하겠느냐, 노류장화인 내가 괴로울 뿐이라고 ‘원망 안 한다’하면서 짙은 원망과 회한을 드러냈습니다.
군자의 행실 곧 군자로서의 행실이 그래서야 쯧쯧 지적질이 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30
05 10
해 지면 장탄식하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해 지면 장탄식(長歎息)하고 촉백성(蜀魄聲)에 단장회(斷腸懷)라
일시(一時)나 잊자 하니 궂은비는 무슨 일고
원촌(遠村)에 일계명(一鷄鳴)하니 애 끊는 듯하여라
장탄식(長歎息) - 긴 한숨을 지으며 깊이 탄식하는 일.
촉백성(蜀魄聲) - 두견이 울음 소리.
단장회(斷腸懷) - 애가 끊어지는 정회.
일시(一時) - 한 때. 한 동안.
궂은비 - 날씨가 어두침침하게 흐리면서 오랫동안 내리는 비.
원촌(遠村) -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
조금 쉴 만하면 무시(無時)로 찾아드는 근심걱정이라는 게 님 보고픈 마음, 그리움이로군요. 그럼에도 어떻든 조금이라도 잊고자 하는데 궂은비가 또 생각을 한곳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종장의 먼데서 닭 우는 소리는 청각의 시각화 곧 공감각(共感覺) 표현으로 작품의 문학성을 높여 줍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한문투로 된 무명씨 작품도 많습니다. 먹물깨나 든 사람들이겠지요. 그렇지만 무명씨입니다. 익명이나 실명이 더 낫다고 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