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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ndhaghra`n`a. 어원적으로는, gandhghra`n`a 는 어떤 냄새를 느낀다는 것을 뜻한다. 냄새 진동은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이다. 그들은 강도가 세냐 가볍냐에 따라, 크기의 정도에 따라 다양하다. 생명체가 죽으면, 중앙의 지배가 약해지면서 신체의 여러 부분이 주요 구조에서 떨어져 나간다. 각각의 부분이 결국 각자 원래 상태(즉, 고체, 액체, 빛, 공기, 에테르 요소)로 흡수될 때까지 여러 단계의 분리가 계속 일어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시체나 송장이 분해되고 뒤이어 부패 되는 단계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한다. 이 악취는 시체의 여러 부분이 서로 다른 quinquelemental(5원소) 요소로 흡수되어 갈 때까지 계속된다.
좋은 냄새거나 불쾌한 냄새거나 냄새 진동이 어떠하든지 간에, 인간은 냄새를 느끼는 후각의 능력과 그 강도에 따라 냄새를 받아들인다. 그 냄새가 좋은가 싫은가는 그 사람의 선천적인 반작용 힘(삼스카라)에 따른다. 생선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날생선의 냄새는 싫어해도 요리되어 역겨운 냄새가 사라지면 맛있게 먹는 사람이 있다. 익힌 생선을 싫어하는 사람은 그걸 어떻게 먹느냐고 냄새가 불쾌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반작용하는 힘(삼스카라)의 문제다. 대머리수리는 썩은 고기를 먹어치우지만, 마이너새는 그것을 못 먹는다. 비둘기도 못 먹는다. 개인의 후각이나 냄새 나디(정신 에너지 경로)의 능력에 따라 물질의 냄새를 받아들이거나 흡수하는 행위를 “gandhaghra`n`a”라 한다.
gandhagha`n`a의 또 다른 뜻은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후각이나 코를 말한다. 라틴어로 “nose” “nansal”이라는 말은 베다어 “na`sa`”와 “nastril”에서 유래한다.
Ganhacelika`. “cela”, “celi”, “celi” “celika”란 말은 문자 그대로는 끌리는 냄새나 색에 의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대상을 의미한다. 고대 뱅갈에서는 결혼식 때 젊은 신부가 시물면으로 만든 눈부신 붉은 사리를 입곤 하였다. 이 사리는 튼튼하지는 않아도 결혼식 예복의 붉은 celi는 신부를 아주 예쁘게 보이도록 한다.
gandhacelika`의 다른 뜻은 “사향노루 콧속이나 주변에 모여 있는 달콤한 향기가 나는 사향”이다. 사향노루는 추운 나라에서 살며 추해 보이나, 내분비선에서 분비된 호르몬이 점점 코로 모이고 결국 액체는 증발하고 나머지 부분이 점점 굳어져서 향기가 강하게 난다. 숫사슴은 그 향기에 취해서 미칠 듯이 그 냄새를 찾게 된다. 그 냄새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막 달리다가 기진맥진하여 죽어 넘어진다. 때때로 장사꾼이 그 시체를 모아서 코를 베어내어 가루로 부순다. 여러 약품이나 화장품이 사향으로 만들어진다. 이 약품은 시신의 열을 잠시 보존하게 해서 짧은 시간 동안 살아 있게 만든다.
1988년 8월 28일, 캘커타
Shabda Cayanika` Part 18, pp. 74-78
gandhaja. Gandhaja는 “악취에서 생긴 아주 작은 벌레.”를 뜻한다. 옛날 사람들은 마이크로바이타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 알았다면 gandhaja는 냄새 진동으로 전달된 마이크로바이타를 말한다고 했을 것이다. 냄새가 좋은가 나쁜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상대적이다. 냄새는 마음속에 있는 선천적 반작용의 힘(삼스카라)에서 생긴 호불호에 따라 “좋다”거나 “역겹다”라고 한다. 냄새의 진동은 콧구멍에 냄새로 생긴 파동이나 미세한 냄새 분자를 전달하는 능력이 있는 모든 생물체에 냄새의 느낌을 만들기 위해서 뇌의 신경세포로 전달된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냄새인가는 타고난 반작용 힘(삼스카라)과 감각기관에 전달된 냄새의 진동으로 결정된다. 냄새를 전달하는 능력은 진화하지 못한 생명체에서도 크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호랑이나 늑대는 여러 면에서 인간보다 열등하나 냄새 맡는 능력은 인간보다 낫다. 생명체는 자신의 특정한 반작용의 힘이나 기질적인 능력의 정도에 따라 어떤 향기는 좋다거나 어떤 것은 역겹다거나 하는 생각을 한다.
죽은 동물의 시신이 화장터에 버려져 있으면, 사람들은 그 장소를 피해가고, 할 수 없이 가게 되면 코를 막는다. 그러나 부패한 시체의 썩은 냄새가 대머리수리의 코에 들어가면 그 즉시 냄새나는 방향으로 날아가서 시체 옆에 편하게 앉는다. 대머리수리에게는 시체의 냄새가 역겹지 않고 그 냄새가 몸에 해롭지도 않다. 그러나 인간이 썩은 시신을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
인간 사이에도 냄새가 좋으냐 나쁘냐는 선천적인 반작용의 힘(삼스카라)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라족은 마른 생선의 냄새를 역겨워하지만, 건어물을 향기 나는 꽃다발처럼 생각하는 지방도 많이 있다. 사람마다 느낌이 다른 것은 선천적인 반작용의 힘(삼스카라)에 기인한다.
요리해서 먹으려고 죽은 동물의 살을 자르는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 대머리수리가 소의 썩은 시체 한 부분을 먹는데 소녀가 다른 부분을 칼로 잘라 내어 양동이에 담아 가는 것을 보았다. 그 썩은 고기가 가까운 호텔의 식당으로 팔려갈지를 누가 알겠는가! 대머리수리와 그 소녀의 행동에 무슨 차이가 있겠나? 나는 내 눈으로 한 손으로는 그 살을 자르면서 다른 손으로는 대머리수리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고 그 소녀는 인간이었다! 그 당시에는 소의 살이 완전히 썩지는 않았었지만, 썩은 냄새는 이미 나고 있었다
좋은 냄새냐 나쁜 냄새냐 하는 차이는 마음에 만드는 진동의 종류가 좋으냐 나쁘냐에 달려 있다. 몸을 조절하는 힘인 생명력인 바이탈 에너지, 즉 뿌라나가 약해지고, 바이탈 에너지를 조절하는 정신적 힘 또한 약해지면, 육신은 분해되고 붕괴하기 시작한다. 죽은 시신에는 생체 에너지를 조절하는 힘이 전혀 없으므로 육신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떨어지게 된다. 바이탈 에너지와 정신적 에너지가 약해지고 없어지면, 사람은 아주 빠르게 기운을 잃고 생명력이 사라진다. 우리는 그것을 바이탈 에너지가 휴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상태에서는 몸에 한 부분을 다른 부분에다 연결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한 감각기관과 다른 감각기관이 서로 연락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이같이 바이탈 에너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으나 정신적 에너지가 상당히 약해져 있으면, 바이탈 에너지는 물질적인 힘 즉 맹목적인 힘이므로, 몸의 생명력, 즉 바이탈 에너지를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바이탈 에너지를 조절하는 정신력에 의한 적절한 지침이 없이는, 육신을 조절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생명력, 바이탈 에너지는 전기의 힘과 약간 비슷하다. 전기를 조절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력이며, 그것이 없으면, 어떤 순간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그런 식으로 먼저 마음이 죽고 나서 몸이 죽거나, 몸에 생명력, 바이탈 에너지가 고갈되고 다음에 마음이 죽거나 한다. 몸과 마음이 다 같이 죽을 때라야 실제적인 죽음이 있다.
많은 사람은 호흡이 끝나는 순간까지 명확한 육체 의식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의식 있는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그런 경우에는 바이탈 에너지가 다 소진된 후에도 얼마 동안은 마음이 활동하는 것이다. 의학적인 검사로 육체가 죽었다고 말하여진다 해도 동시에 마음이 죽는 것은 아니다. 어떤 수단으로 생명력이나 바이탈 에너지가 소생한다면,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 이처럼 누군가가 정신적으로 죽었다고 해도 동시에 바이탈 에너지가 소진하지는 않는다. 의사가 바이탈 에너지의 도움으로 잃어진 정신 에너지를 소생시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마음과 몸이 다 죽은 후라야 화장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는 보통 육체 에너지나 정신 에너지 중에서 하나만 몸을 떠나도 시신을 화장해 버린다.
몸에서 바이탈 에너지에 의한 조절이 곧바로 끝나고, 정신력도 간접적으로 없어지면, 몸의 여러 부분이 분해되면서 5원소에 흡수된다. 흡수와 분해의 과정이 끝날 때까지 몇 종류의 썩은 냄새가 계속 나온다. 전신에서 몇 부분이 떨어져 나오는 시점에서 몹시 썩은 냄새가 난다. 냄새 분자들이 콧구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냄새 분자들이 신경섬유에 동조하는 진동을 만들어 냄으로써 감각 신경인 구심신경(afferent nerves)에 전달하는 냄새를 통해 움직여 간 연후에야, 다시 말하면 신경세포에다 비슷한 진동을 만들어 낸 다음에야 사람은 썩은 냄새를 느낀다. 썩어 가는 것들을 소모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냄새의 매개물에 의해 운반되는 극도로 미세한 존재들이 네거티브 마이크로바이타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달콤하고, 좋은 냄새를 피우려고 만들어진 정묘한 존재들은 포지티브 마이크로바이타이다. 나는 이미 좋은 냄새이냐 나쁜 냄새이냐는 상대적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생명력인 바이탈 에너지와 정신력이 부족하여 썩은 냄새가 내부의 붕괴로 만들어지듯이, 좋은 냄새는 신체적 에너지와 정신력이 결합하여 둘 혹은 셋 존재가 합성될 때 생긴다. 거기에 포지티브 마이크로바이타가 온다. 때때로 둔탁하고 정체된,static 것도 붕괴의 과정에서 변화력 있는,mutative 것, 지각력이 있는,sentient 것과 연결되면 향긋한 냄새를 내기도 한다. 정체된 것,static object은 일상의 감각에 인지되는 것을 말하고, 변하는 것,mutative object은 약간의 노력으로 감각에 인지하고, 지각력 있는 것,sentient object은 긴 명상이나 짧은 명상이나 집중 후에 감각에 잡히는 것을 말한다.
짧은 기간의 명상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것은 분명 긴 기간의 명상이나 보통의 수행을 통해서도 성취할 수가 있다. 영적 수행자가 진언을 통해 어느 정도의 정신적 집중을 개발하고 그것으로 인해 파라마 푸류샤의 지복의 느낌을 끌어오면, 그것도 또한 일종의 수행이다. 이것을 “진언”, 혹은 “japa”라 한다. 이와 비슷하게 집중된 정신력을 모두 우주적 무한자에게 굴복시키고, 소우주의 속박에서 벗어날 때 이것도 또한 일종의 수행이며 “dhya`na yoga”라 한다. 정묘한 세계로 침투해가려면, 진언, 자파 요가, 디아나 요가의 과정들을 통해 정체된 에너지는 변형되고 용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수행자는 정신적 양분을 거대한 우주적 이념으로 흠뻑 채워야 할 것이다. 일반 사람에게 이것은 통상 “자파 요가”와 “디아나 요가” 같은 용어를 통해 전달된다. 사실 “자파,japa”나 “디야나,dhy’na”같은 용어는 거대한 우주적 이념을 부분적으로뿐 아니라 완전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주적 이념이 아주 암시적인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스승이나 제자 모두 유익하지 않기 때문에 이념을 전달하는 방식은 상징적이다. 스승들은 진언의 가치를 “자파”라는 단어를 통해 확고하게 전달한다. 같은 방법으로, “디야나”란 단어는 카르마 요가, 디야나 요가. 크리야 요가, 카르마 디야나, 아누디야나. 아비다 디야나 등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우리는 여러 면의 디야나를 통틀어 “디야나”라는 보통 용어를 쓴다. 끊임없는 자아-성찰을 통해 자신을 고양하고, 자신의 고양을 지고한 영적 위치로 끌어올리고, 영적이지 않은 존재 자체를 없애는 자파 요가나 디야나 요가는 포지티브 마이크로바이타의 도움을 받아 파라마 푸류샤의 은총으로 수행된다. 그러므로 누가 얼마나 지적으로 성취했든지 간에 모든 것의 정수는 prapatti, 완전한 순종이다. 파라마 푸류샤가 원하지 않고는 나뭇잎도 움직이지 않고 초원의 풀도 자라지 못한다. 개인인 포지티브 마이크로바이타의 도움들 받아 지고한 영적 자리로 점차 승화하면 일종의 좋은 냄새가 난다. 어떤 단계에서 영적 수행자는 이 냄새를 느낀다. 그러나 냄새를 느끼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것은 우주 은총의 한 방울일 따름이다.
이렇게 유쾌한 냄새냐 불쾌한 냄새냐는 서로 상관관계를 가진다. 고대에서부터 영적 수행자가 따르는 기준은 아기나 차크라나 뇌하수체선에 집중하고, 마음을 잘 다스리려고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명상 중에 생기는 좋은 냄새는 아주 매혹적이다. 이런 종류의 요가 사다나에 진력하는 마음속에 좋은 느낌을 창조하는 냄새는 좋은 냄새이고 다른 냄새는 모두 나쁜 냄새이다.
마이크로바이툼은 네거티브거나 포지티브거나 매우 정묘한 존재이므로, 진동을 통해서 운반된다. 이 진동 중에서 가장 정묘한 것은 귀의 신경을 통해 수용되고 전달되며 공기 파동, 액체의 파동, 전자파 등과 같은 역동적인 것들에 의해 진동하는 소리이다. 소리보다 더 거친 매개체는 다른 것을 닿았을 때 느끼는 촉감 진동이다. 촉감보다 더 거친 것은 빛 파동을 통해 받아서 전달되는 형태 진동이다. 그보다 더 거친 것은 액체 진동보다는 더 묽은 맛 진동이다. 그보다 더 거친 것은 냄새 분자에 의해 전달되는 냄새 진동이다. 보통 매개체가 정묘할수록 포지티브 마이크로바이타를 나르기가 쉽고 거친 것일수록 네거티브 마이크로바이타를 나르기 쉽다.
인간을 위시하여 모든 생명체는 지고에 대한 사랑이 숨겨져 있다. 기초 신경총인 물라다라 차크라에 잠자는 신성은 파라마 푸류샤와 동일시되는 자연적인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 포지티브나 네거티브 마이크로바이타의 움직임은 다음의 원칙으로 결정된다. 가장 거친 진동인 냄새가 정묘한 것과 관련되면, 포지티브 마이크로바이타의 이상적인 운반자가 된다. 똑같은 냄새라도 조야한 것과 관련되면 결국 네거티브 마이크로바이타의 파동을 만든다. 다시 말해, 누가 “라,라,라--차,차,차,”같은 소리를 내거나 “내 노래를 따라라. 지옥으로 가게 춤추고 노래하자.”라고 노래하면 이것은 소리 진동이지만 아주 조야한 생각을 전달한다. 그러므로 소리 진동이라고 반드시 포지티브 마이크로바이타만을 나르지는 않는다. 그와 반대로 냄새 진동이라고 네거티브 마이크로바이타만을 나른다고 결코 말할 수가 없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조야한 생각과 관련되는 소리는 피하고 고귀한 생각과 관련한 소리를 택해서 흡수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고귀한 진동은 아주 크게 방사하여 영향을 주고, 우주 이념들의 거대한 물결 속에 있는 조야한 진동은 드러내지 않은 망각의 대양에 영원히 남아 있도록 용해되어 있어야 한다.
부패해 가는 동물과 식물이 분해되고 붕괴가 될 때 퍼지는 악취는 네거티브 마이크로바이타를 끌어 모이게 한다. 이 네거티브 마이크로바이타는 새로운 탄소 원자와 다른 원자를 생성하게 한다. 이 분자들이 원형질 세포를 만들고 때로 어디에선가 다세포 생명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런 존재들의 기원이나 존재와 소멸은 네거티브 마이크로바이타에 뿌리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승화의 질서에는 여러 요소와 이데아를 위한 지고한 통합,supreme synthesis의 길, 즉 상위의 영적 수행의 길이 있다. 이것은 모든 논리의 영역을 초월하는 최상급 직관의 세계와 지혜의 세계에서 생긴다. 이것이 인간이 택해야 할 길인 것이다.
통합의 길을 택한 사람은 일종의 영적 향기를 즐기게 되어 있다. 이 신성한 향기는 어떤 세상의 냄새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이 신성한 향기는 참팍이나 마그놀리아 꽃향기와 약간 비슷하다. 아니 “약간 비슷하다”는 표현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영적 수행자가 영적 스승에게서 배운 바대로 마음을 사하스라 차크라나 아지나 차크라에 집중하고 부지런히 명상을 수행하면, 신성한 향기의 거대한 창고에서 각기 다른 층에 놓여 있는 달콤함을 즐길 수가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영적 수행은 신성한 냄새와 접촉하기 위해서 한다기보다는 파라마 푸류샤를 성취하기 위해서 행하여야 한다. 이상적인 수행자는 한 푼의 의미도 없는 초능력을 구하지 말고 초능력을 통치하는 분만을 바라야 한다.
사하스라 차크라와 아기나 차크라를 더 설명하자면 상위 세계나 상대적으로 하위 세계에서 오는 영적 경험은 모두 사하스라 차크라나 아기나 차크라에서 오는 뇌하수체선과 송과선에서 분비되는 신성한 감로수를 통해 얻어진다고 할 수가 있다.
일부 사람들은 최상 단계의 깨달음은 여성의 신체는 결함이 있으므로 여성은 성취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 점에서 지금 여기서 논의할 일은 아니지만, 확실히 여성과 남성의 몸은 조야한 육체적 성향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내가 그런 성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기회를 얻는다면 좀 더 자세하게 나중에 이 문제를 얘기하겠다.(P.R. Sarkar가 쓰신 요가 사이칼리지 참조)
하위 분비선이나 부분비선에서 여성과 남성은 차이가 있고 성향의 수도 다르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위 분비선을 직접 다스리는 점으로 사하스라라와 아기나 차크라도 약간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한 바대로 그것은 오직 대상이나 개인에 대한 애착심의 성향, 즉 친구는 가깝고 적은 죽어야 하는 곳과 같은 물질적 경향성에 관해서일 뿐이다. 영적인 영역이나, psycho-spiritual 영역이나, supra-mental 영역에 있어서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남성에게 가능한 최고의 영적 깨달음은 여자에게도 가능하다. 어떤 이유로도 여성의 가장 최고의 영적 경험을 빼앗을 수 없고, 영적 진보를 방해할 수 없다. 오직 남성만이 해방이나 구원에 이를 자격이 있고 여성은 남성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는 것은 완전히 엉터리다. 이런 종류의 말은 남성의 숨겨진 착취를 폭로하는 것이고 그들 개인과 집단의 이기적인 이해관계를 조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1988년 9월, 캘커타
Shabda Cayanika` Part 18, pp.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