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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고치러 갔다가 불귀의 객이 되신 어머니 |
| 어느 해 추석이었어요. 카메라를 들이대면 싫다싫다 하시던 어머니께서도 그날만은 고운 한복 차림이시어서 가만히 계셨어요. 카메라를 들이댔던 내게 싱긋 웃으셔서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아 드리니 작은 장에 올려놓으시고는 "나 죽으면 이 사진을 키워서 영정을 만들라" 하셨어요.
이제 다시 보니 어딘가 여위고 나이가 들어보여 너무 싫어요. 그 사진말고 유치원 다니던 손주들과 아버님과 함께 밝게 웃으시던 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따내서 영정을 만들었어요. 고운 모습 그대로예요. 어머니께서도 그 사진이 한 장 더 있으셨는지 당신의 모습을 따서 가지고 계셨지요.
어머니, 이게 웬일입니까. 살자고 병원에 모시고 가서 열흘 만에 돌아가셔서 아버님 곁에 묻고 오늘은 삼우제였습니다.
어머니 팔장을 끼고 동네 재활의학과의원이며 정형 외과며 내과며 한달여를 함께 모시고 다녔지요. 제 걸음으로 5분이면 어머니를 뵈올 수 있는 거리에서 홀로 사시고 저는 늘 송구스럽고 아침 저녁 문안 전화만으로 안타까웠지요. 요즘 들어 하루 두 번 어머니 뵙고 병원 치레에 어머니나 저나 힘겨웠습니다. 동생들은 날마다 어머니를 뵙고 어머니의 힘이 되려 애를 써도 어머니는 매일 다르게 아파하셨지요.
동네 병원에는 다녀도 큰 병원에는 싫다 하셨어요.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고, 어머니 혼자 걸음으로 다니실 수 없었어요. 어머니께서도 잔등이며 허리가 너무 아프다하셨고 마침 텔레비전 방송에 이런 내용이 있었답니다. 말씀 드렸지요.
골다공증이 심한 경우에 노인에게는 척추에 압박 골절이 생겨 그 고통은 마치 칼로 베는 듯하여 참을 수 없을 지경이나 해당 부분에 일종의 시멘트를 주사기로 주입하면 입원한 지 이틀 만이면 고통 없이 퇴원 할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요.
집에서 먼 병원에서 치료가 된다 했습니다. 전문병원으로 가서 어머니를 치료 받게 하고 싶었습니다. 아우들은 그 동안 어머니 간병에 형이 힘들었다고 하며 제 집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모셔서 치료를 받자고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도 먼 병원은 차에 흔들려 못간다 하시며 가까운 병원으로 가시자 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셨습니다. 노인병은 길어야 두 달 동안 치료를 받으면 낫는다 하시면서 밝은 표정에 보는 자식들 마음도 기뻤습니다. 열흘 동안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는 동안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고 시간이 다르게 생명의 불을 꺼나가셨으니 그것은 아들의 책임입니다.
병원에서는 무슨 검사가 그리도 많답니까. MRI를 찍고, 무슨 물약을 넣고 다시 찍자하니 어머니께서도 노여워하셨지요. 무슨 물약을 넣고 찍을 때는 병원에서는 각서에다 보호자의 날인을 받았습니다. "잘못되어 사망에 이를 수 있다"고 했지만 MRI를 찍다가 사망을 할까 하여 검사를 받았습니다.
X레이를 찍고 폐암 증세가 보인다 하니 어느 아들이 보다 정밀한 진단을 바라고 사진을 안 찍겠습니까. 어머니께서는 기관지염이 생겼다고 아시고 계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병원에 입원하니 칼로 베는 듯한 고통은 사라졌노라며 기뻐하셨어요.
우리 삼 남매는 의사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폐암이라면 무슨 수술이라든지, 항암 치료를 받으며 어머니를 괴롭게 할 수 없으니 편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달라"하였다는 것을 어머니는 아셨을 리 없었겠지요.
무슨 생각이 들으셨던가요. 어머니께서는 제게 집에 가지고 있는 패물을 들고 오라 하셨어요. 금가락지 댓개를 어머니께서는 이것은 큰 며느리, 이것은 작은 며느리, 이것은 손주딸 누구 것 하시며 나누어주셨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하면 한 2년은 살면서 큰 아들 집에 있으시겠다며 작은 아들과 딸에게 말씀을 하시며 어머니께서는 발그레 혈색이 도시며 미소까지 제게 얼마나 반가웠는지요.
내과의사는 어머니의 폐암 종류를 알아야 치료가 가능하다며 폐 내시경 검사를 하여야 한다 했습니다. 어머니의 치료를 위해 내시경 검사를 하겠다는데 어찌 마다할 수 있었겠어요.
내시경실 의사는 내게 각서를 받아갔습니다. "염증이 생길 수 있고, 기관지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100명 중의 한 명이 죽을 수도 있으며 …"하고 내게 말했을 때 나는 나대로 물었습니다.
"이 병원에서는 사망이 얼마였나요"하니 "10년 동안 한 건 밖에 없었지요"하는 말을 믿지 말아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내시경 검사를 받으시고는 증세가 눈에 뜨이게 나빠지셨습니다.
당신이 직접 걸어서 다니시던 화장실 출입을 휠체어를 타고 가시며 다시 침대에서 용변 하시더니 몸에 관을 끼고 용변을 보게 되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간호사들은 수시로 드나들며 체온과 혈압을 재도 늘 정상이더니 내시경 검사 뒤로는 열이 오르기 시작하시며 앓는 소리를 내시며 숨가뻐하시어 산소 마스크로 호흡을 하셨습니다. 막내 아들이 간병원과 함께 밤을 지켜 어머니를 돌보았습니다. 형인 저는 한 낮에 어머니를 지켰습니다.
아들이 곁에 있어도 보이지 않으시는지 당신 곁에 있는 큰 며느리를 보며 "아들이 보고 싶어. 아들이 보고 싶어"하시면 저는 당신의 손을 잡고 "어머니, 제가 여기 있습니다"하면 어머니의 표정이 밝아지셨지요.
병원에서는 링거주사 줄에 퍼붓듯이 항생제를 밀어넣었습니다. X레이 기계가 어머니 병상까지 와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숨쉬기 너무 힘들어 하셔서 어머니의 잔등에 침을 박아 한 번에 1000씨씨의 물을 빼서야 숨을 돌리셨습니다. 어제 그제 16일 아침에 저는 아내가 끓여준 미음을 어머니께 드시게 했습니다. 점심도 그 미음을 드셨고요.
그 날 아침에 담당 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4시부터 어머니는 의식을 잃으셨어요. 다 기억하시지요. 어머니께서 의식이 없다 하시나 또 어머니의 혼령은 당신의 모습과 우리 자식들의 모습을 지켜 보셨을 거예요.
어머니의 손이 되고 발이 되었던 누이는 어머니의 모습을 가슴 아파서 도저히 못 본다며 문밖에 나가 있고 또한 당신이 그토록 귀엽고 키웠던 막내 아들도 마침 자리에 없었고, 저와 당신의 사위가 지켜 볼 때 어머니 그때였나요. 깜박 제가 한 눈 팔 때였나요.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었어요.
간호사들의 표정이 달라져서 휴지 한 장을 저는 어머니의 코에 대니 휴지는 침묵을 지켰지만 어머니의 이마는 따뜻했습니다. 어머니의 이마에 제 입술을 대던 일을 어머니는 기억하시나요. 전날부터 어머니의 발은 부어 오르며, 어머니께서 숨이 있기 전에 이미 발은 차가웠고, 손은 그냥 힘없이 떨어졌으며 , 어머니의 눈은 어디 먼 데 보시며 어머니 어머니 하고 불러도 오냐 한 마디 없으셨어요.
어머니, 허리 아픈 병 치료하고 우리 집에 가시자 하고서는 이게 어쩐 일이랍니까. 어머니를 동네 병원에 모시고 진통제를 사드리고 주사를 맞으며 보냈던들 이런 황당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약하디 약한 당신 몸에 무슨 검사를 그리도 하겠다는 각서에 저는 제 이름 쓰고 지장을 찍었으니 그게 바로 당신을 죽이는 사형 집행서였으니, 이를 어쩝니까. 가슴을 치고 또 치며 어디를 가도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머니 당신을 화장터에서 한 줌 뼈를 만드는 동안 아우는 울고 아우를 달래던 저는 눈물이 목을 메워 앉을 수도 설 수도 없어 그냥 눕고 말았습니다.
오늘 삼우제였습니다. 어제 오늘 온 비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합장 묘에 심어놓은 떼가 물을 먹었습니다. 어머니의 영정을 현인능 근처의 작은 절에 모시고 왔습니다.
집에 와서 책꽂이에 세워 놓았던 어머니 당신의 사진을 차마 마주 볼 수 없어 안 보이는 곳에 치워놓았습니다. 어머니의 고통을 덜어드리려 병원에 갔다가 어머니를 죽게 한 아들이 어찌 어머니와 눈을 마주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노인의 긴병에 효자 없고 어머니께서 그나마 고통을 덜 겪고 돌아가시니 당신에게도 다행이라 하지만 단 하루, 단 하루 만이라도 내 집에서 당신을 모시지 못하고 먼 길을 떠나 보냈으니 이 한을 어찌합니까.
당신을 내 집에서 멀리 모시고 있었다면 우리집에서 머무셨던 날들이 있었을 것을. 아들의 숨결이 가까운 곳에 모시어 내 집에서 하룻밤도 주무시지 못하시고 가셨으니 어머니 어쩌나요.
때로 어머니를 제 가슴에 안았을 때 "네게서 아기 냄새가 나" 그 말씀도 이제 제게는 눈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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