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추억이 된 「다방」
가끔 「다방」이란 용어가 향수에 젖게 합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단어가 되었지만 장년 층에는 다방(茶房)의 추억을 소중하게 갖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현대판 다방의 효시(嚆矢)는 1929년 종로2가 YMCA에서 문을 연 “멕시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경미술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김용규(金龍圭)가 주인이었는데 간판으로 큰 주전자를 내걸었습니다. 당시 정육점에서는 소머리를 내걸고, 모자가게는 모자를, 장갑가게는 장갑을 내건 것을 본 딴 것입니다. 그런데 「멕시코」는 그냥 멕시코였지 다방이란 단어를 사용하진 않았습니다. 뒤이어 천재시인 이상(李箱)이 끽다점을 차려 거리에 문화의 장을 만들었고, 공예가 이순석(李順石)씨가 현재 프라자호텔 자리에 「낙랑」이라는 끽다점(喫茶店)을, 또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씨는 소공동에 「플라타누」를 열고 음악을 들려주며 커피와 홍차를 팔았는데, 역시 다방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방(茶房)이란 멋대가리 없는 용어는 1930년대 경성일보 기자였던 일본인(大藍)이 명동입구에 끽다점을 차리면서「제일다방」이라 이름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어 서울역 앞에 생긴 「돌체」는 음악다방의 원조 격이었습니다.
문화의 정취 흠씬 풍기던 사랑방들
일정시대 하면 어둡게만 느껴지지만, 한편에서는 개화기이기도 했습니다. 개화기의 다방은 모던 걸(現代女性)의 서비스를 받으며 커피라는 신식 서양음료를 맛볼 수 있는 문화시설이었습니다. 아울러 이곳을 드나드는 문인 화가 배우 음악가 등 유명 예술인과 고담준론(高談峻論)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낭만은 계속 이어져 광복 후에도 다방은 문화의 정취가 흠씬 풍기는 사랑방 구실을 했습니다.
유명 작가나 예술인을 만나려면 광화문의 「아리스」나 소공동의 「가화다방」으로 가야했습니다. 「귀거래다방」에는 유명 정치인이, 동숭동 「학림」이나 「대학다방」에는 교수 학자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장 쉽게 드나들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더욱 자리를 굳힌 다방은 숱한 사장님들의 거리의 사무실 역할도 했고, 학생들의 공부방, 또는 데이트 장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전화가 흔하지 않았던 시대 다방 메모판은 서민들이 갖가지 사연을 주고받는 애환의 게시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다방이 이젠 외진 시골의 낡은 거리에서나 간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신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것이 서양식 커피전문점들입니다. 케이크와 과자, 가벼운 간식까지 함께 취급하는 점포들이 성업 중인데 왜 그런지 옛날처럼 정감 있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시대가 변해서일까요, 문화가 달라져서일까요. 특히 장년층에게 현대식 커피전문점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문득 옛일이 떠오르고 다방이나 사랑방이 생각난 것은 최근 반취동산을 찾는 금동(금양동문)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54회가 임원회의 했고, 48회는 정모를 반취동산에서 가졌습니다. 이어 58회가 19일(토) 저녁 임원회의를 반취동산에서 했습니다.
위 사진은 54회 임원회의를 마치고. 옆은 48회 정모, 아래는 58회 임원 회의 중 기념촬영
언제부터인가 반취는 금동에게도 열린 사랑방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반취동산이 (위치로 보나 규모로 보나) 금동의 사랑방으로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경렬 회장도 같은 생각을 했었는데, 그러나 말을 하는 것은 조심스러워서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동문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려 한다는 오해가 번지면 자칫 해를 끼칠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문들의 왕래가 잦아지다보면 굳이 나서지 않아도 소식이 모아지고 또 전해지면서 훈훈한 정이 피어나는 사랑방이 될 수 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조성되고 굳어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만 하며 지냈습니다. (물론 금동의 사랑방이라 하여 여기서만 만나는 것은 아니겠지요. 어디서 가져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마음속에 중심이 되는 모임 장소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이며, 혼자든 둘이든 불쑥 들렸을 때 다른 동문을 와 있어 반갑게 만나는 기쁨이 있는, 그런 가교 같은 사랑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제금 그런 희망이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 같아 여간 기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잘못될 것 같은 일은 잘못 된다」라는 머피의 법칙이 아니라, 「내일 머리를 자르려고 작정하자 헤어스타일이 멋지다는 칭찬이 쏟아진다」는 잔과 마르타의 법칙인가요? 반취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에 내려가 살자’는 생각을 굳힌 때에 금동이 찾아주기 시작한 것이 (늘 그렇듯)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집니다.
시골에 가서 살자, 하고 마음먹은 동기는 반취동산이 있는 공덕1지구 재건축이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빠르면 1년 후, 늦어도 2년 이내에 건물이 헐리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차제에 시골에 내려가 못다 쓴 글들 정리하고 자서전이 됐든 참회록(?)이든 쓰는 것으로 소설가로서의 삶을 정리하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직은 생각 중이지만 큰 변동 없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보면 약 2년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생각을 다시 하니 2년이면 금동의 추억을 만들기에 훌륭한 기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런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동문이 하고 있는 음식점이 많은 줄 압니다. 정기총회를 했던 「송가네 감자탕」은 그런대로 정기총회 장소로 훌륭했다고 봅니다. 최병상 동문의 「M2」는 금동의 자부심이 되어 있는 것도 압니다. 그 외에도 여러 곳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큰 집은 종업원이 움직이는 집이라는 단점이 있습니다.
반취동산은 적당히 작은 집이라 반취가 직접 지키고 움직이는 집입니다. 총동문회 같은 큰 행사를 할 수 있는 장소가 못됩니다. 다만 여타 북적거리는 일반음식점 따위에서 모임을 갖는 것보다는 반취동산이 좋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장사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금동의 문화를 만들고 추억을 남기자는 말입니다.
모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고 30명 이하의 소규모 동기 모임이나 회장단 모임을 통해 진지함과 재미를 함께 즐기며, 진하고도 잔잔한 정을 나누기에 적합한 분위기를 만들어드릴 수 있는 집이기에 적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반취가 보고 듣고 참여하는 곳에 있으면, 그것은 '기록으로 정리되는 추억의 자리'로 남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반취에게는 그런 능력(재주)이 있답니다. (이미 한편에서는 기록으로 남을 금동문화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차제에 용기를 내어 금동게시판을 마당에 만들어 세울까 합니다. 금동 아마추어 화가들의 작품을 초청 전시하는 행사도 구상을 해봅니다. 아울러 잠자고 있는 동문들을 깨워 참여시키는 캠페인도 시작하고자 합니다.
금양총동문회 활동이 나날이 활력을 더해가고 있고 분위기가 뜨거워지고 있는 것은 모두 느끼실 것으로 압니다. 그 발전의 이야기를 담으면서 우애와 화합에 일조할 수 있는 반취동산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적어보았습니다.
첫댓글 사람이 자주 다니는 곳에 길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이치와 같으리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