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달을 위한 시간
물론 서정시의 특성이 자신의 주관적인 입장이나, 사물의 감각적인 형상이 있기 때문에 현재를 시제로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러나 시도 넓은 의미에서 언술의 행위라고 할 때 필요에 따라서는 과거의 시제나 미래의 시제를 쓸 수도 있다. 또한 한 작품에서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혼합하여 서술될 수도 있다.
(1)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ㅡ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신경림「갈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3)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2]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윤동주 「참회록」
인용한 (1)의 시를 보면 갈대인 그는 ‘울고 있었다’, ‘밤이었을 것이다’,‘있는 것을 알았다’,‘까맣게 몰랐다’ 등의 과거시제를 일관성 있게 서술하고 있다. 비록 과거의 시제라 하더라도 이처럼 일정한 시제와 어조를 통일성 있게 언술하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이해하기도 쉽거니와 시적 화자의 확고한 시간관을 보여주고 있어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2)의 시는 반대로 미래시제를 일관성 있게 표현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주제문을 반복하면서 마침내는 ‘말하리라’로 끝내고 있다. 이처럼 시는 시적 화자의 입장에 따라서 과고의 시제나 미래의 시제를 취하는 것이 장르의 특성상 적절한 것이기는 하지만 시인의 특별한 시간관이나 세계관 또는 시적 소재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언술의 행위라고 믿을 때는 과거와 미래도 시의 시제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시들의 특징은 시를 표현의 형식, 즉 어떤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의 형식이 아니라 어떤 사실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보고의 형식, 담화의 형식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3)의 시에서는 동일한 시제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둘째 행까지는 어느 즐거운 참회록을 써야겠다는 미래의 시제다. 셋째와 넷째 행은 그 미래에서 돌아본 과거의 내용이다. 그리고 마지막에서는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라는 현재형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다. 이는 시적 화자의 시간 의식이 미래에서 과거로, 그리고는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내용이다. 그만큼 시적 화자의 시간 의식은 과거, 현재, 미래 중 어느 한 시제에 고정되지 않고 자유로이 이동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의미상으로 이 시들을 분석해보면 (1)의 시는 과거에 대한 부정적 의식이다. 현재 이전인 과거의 주체는 울고 있는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2)의 시에서는 현재의 시간에 긍정성을 두고 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이란 말은 바로 다가오는 미래의 시간에 대한 불안이 있다. 반면 (3)의 시는 ‘내일이나 모래나 그 어느 즐거운 날’을 기대하면서 부끄러운 현재의 시간에 대한 모멸감을 지니고 있다. 거울을 보면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현재의 거울 속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윤동주의 시는 미래지향적인 세계관을 가진 시라고 할 수 있다.
첫댓글 우교수님ᆢ
참 설득력있게 적절한 예문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배움의 시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