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의 전래
미국의 각 선교단체들은 한미 수교조약 비준 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할때 까지한국 선교사업에 적극책을 쓰지 않고 있었다. 슈펠트 조약이 완결된 직후에 미국은 그 대표 사절로서 루시우스 푸트 (Lucius H.Foote)를 한국에 파송하여 서울에 주재시켰다. 고종황제는 미국 사신의 신임장을 받은 후에 중전의 친척인민영익을 수반으로하는 답례 사절단을 미국에 가는도중에 기차 안에서 발티모어에 있는 가우쳐 대학 총장이며 목사인 존 가우쳐 (John F. Goucher)박사와 동행하게 되었다. 미대륙 횡단여행 중에 가우쳐 박사와 민영익은 서로 사귀게 되었고 가우쳐 박사는 처음으로 한국의 실정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가우쳐 박사는 한국이 선교 개척지가 될 수 있는 것을 알고 1883년 11월 6일에감리교 선교사로 하여금 한국에서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도록 부탁하고 그 일을 위하여 2,000달러의 기부금까지 선교본부에 보냈다.
그러나 선교본부로부터 아무회답을 받지 못하자 그 이듬해 1월에 일본주재감리교 선교부의 대표자인 로보트 맥클래이(Robert S.Maclay) 박사에게 편지를보내어 맥클래이 박사가 직접 한국을 답사한 후에 선교사업을 착수했으면 좋겠다는 제의를 하였다. 그리하여 맥클래이는 1884년 6월 24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맥클래이는 오래전부터 일본에서 가까이 지내던 김옥균을 통하여 고종황제께 한국에서 교육사업과 병원사업의 개설을 허락해 달라는 청원서를 보냈다.
드디어 한국선교의 새로운 역사의 장은 열렸다. 1884년 7월3일 고종황제로부터교육과 의료사업을 허락하는 윤허가 내렸다. 그러므로 이것이 한국기독교 (개신교) 의 공식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다.그리고 그 이듬해인 1885년 4월5일에의사인 윌리암 스크랜톤(William B.Scranton)박사와 그의 어머니 매리 스크랜톤 (Mary.F.Scranton)과 헨리 아펜셀러 (Henry G. Appenzeller) 목사가 한국감리교회의 초대선교사로 부임하였다.
- 장로교의 전래 -
미국의 장로교회는 일본주재 선교사들을 통하여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시작하였다. 특히 한국에서 선교사업을 추진해 달라는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한국인 이수정의 간곡한 호소를 받은후 부터는 더욱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4년 봄에 의술이 훌륭하고 헌신적인 정신을 가진 젊은 의사 존 헤론 (JohnW.Heron)이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여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임명하였으나 한국에서 선교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여 우선 일본에서 한국말을 배우도록하고 그 이듬해인 1885년 6월에야 한국에 들어왔다.
그러나 중국 상해에서 의료선교사로 일하던 호레이스 알렌 (Horace N.Allen)이 한국선교의 뜻을 품고 미국의 장로교 선교부에 한국선교사로서 일할것을청원하여 허락을 받고 1884년 9월 20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이것이 장로교 선교사로는 최초의 한국 입국이된다. 한국의 선교를 관망만하고있던 미국 장로교 선교부는 드디어 호레이스 언더우드 (Horace G.Underwood)를한국의 최초 선교목사로 임명하였고 그는 1885년 4월 5일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 일행과 함께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열심히 선교하여 1886년 7월에는 알렌의 한국어 선생이었던 노도사가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887년 9월에는 우리나라에서최초로 새문안교회가 설립되었고 10월에는 정동교회가 설립되었다. 또한 1901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김창식, 김기범 두 사람이 감리교에서 목사 안수를받았다.
- 의료선교 -
알렌은 1884년 12월에 갑신정변(우정국사건)이 일어나 중상을 입은민영익을 비롯하여 많은 고관들을 치료하여 줌으로써 고종 황제의신임을 얻어 1885년 2월에 한국 최초의 서양 의술의 병원인 광혜원(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을 설립하고 그 책임자가 되었다 (광혜원은후에 제중원으로 개칭하였다).
감리교 최초의 의료 선교사 스크랜톤은 처음에 알렌과 함께 제중원에서 일하다가 1885년 9월에 정동제일병원을 세우고 의료선교에 임하였다. 1887년 감리교의 여자 의료선교사인 메타 하워드(Meta Howard)는 정동의 이화학당 구내에 부인 병원을 설립하였는데 명성황후는병원의 이름을 보구여관이라고 지어주었다.
그후 감리교와 장로교는 서울,인천,평야,원산,공주,부산,대구,선천,재령,청주,강계,전주,광주,해주,안동,군산,목포,개성,춘천,진주,성진,함흥등에 병원을 세우고 의료사업과 동시에 선교사업을 하였다.
세브란스병원은 1904년 9월에 남대문에 현대식 병원을 신축하고의학교와 간호학교를 설립하여 1908년에 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이 한국 최초의 의사들이었다.
- 교육 선교 -
교육을 통한 선교의 목적으로 1884년 8월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는 두명의학생을 데리고 학교를 시작하여 다음해인 1885년 6월에 감리교 선교부의 공인을얻고 고종황제로 부터 [배제학당]이란 이름을 하사 받았다. 또한 감리교 여선교사 스크랜톤은 1886년 5월에 한사람의 학생을 상대로 학교를 시작하였는데 명성황후는 그 이름을 [이화학당]이라고 하사하였다. 이 두학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현대교육을 실시하는 남학교와 여학교가 되었다.
이렇게 계속 세워진 우리나라의 기독교 학교들은 1909년 까지 장로교에서 세운학교가 605개교, 감리교에서 세운학교가 200개교등 다른교파에서 세운학교까지포함하여 기독교학교는 950여개교에 이르렀다. 1910년에는 이화학당에 대학부가설립되었고 1915년에는 연희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 문서 선교 -
선교사들은 선교의 매체로 삼기위하여 먼저 한국로 성서번역을 시도하였다.
실은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입국하기 전에 이미 만주에 있던 로스(Ross)목사 번역의 한글성서가 있었고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이 출판되었다.
성서번역을 위하여 국내에서는 1809년에 조선성서공회가 조직되고 아펜셀러와언더우드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요한복음을 한글로 출판하였다. 또한 1900년에는 [신약성서]가 간행되었고 이어서 1911년에는 [구약성서]가 완역되었다.
찬송가는 1892년 감리교의 존스(Jones) 목사가 처음으로 [찬미가]를 펴낸뒤1908년에 감리교 장로교가 함께 [합동찬송가]를 간행하였다.
1889년에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배재학당 안에 현대식의 인쇄소가 설치되어문서선교를 위한 기독교 서적들과 기독교 신문들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인쇄소에서 서재필박사가 주간하던 [독립신문] 창간호가 인쇄되었다.
기독교신문으로는 1897년 2월에 아펜셀러가 주관한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비롯해서 [그리스도 신문] (1897년) [예수교 신보] ( 1902년), [예수교 회보](1910년) 등 많은 신문들이 발행되었다.
- 일제치하에서의 기독교 --
한일합병 이후 일제의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민족의 비극적 삶에 대하여 어느누구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때부터 민족의 수난에 앞장서서싸우는 단체가 되었다.
- 해서교육총회 사건과 105인 사건 -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옆에 반드시 학교를 세워서 교육사업을 통한 구국운동을 크게 일으켰다. 일본의 통감부는 교회의 교육운동에 다른 뜻이 있음을 알아 차리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교회 지도자들을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저들은 마침내 1910년에 [해서교육총회사건]과 1911년에[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일으켰다. 이 두사건에 관련되어 검거되고 투옥된 인사는 약 700명이었으며 당시의 기독교계의 중요인물을 총망라하였다. 이 두 사건은 한국교회가일본 침략자들에게 당한 최초의 박해였다.
- 기독교와 독립운동 -
한국의 민족운동 내지 독립운동은 기독교와 불가분리의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보면 그 지도인물의 절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다.
1910년의 해서교육총회사건, 1911년 신민회 사건과 105인사건, 1914년의 국민회사건등은 기독교가 3.1운동 이전에 가졌던 민족운동 내지 독립운동이었다.
국내외에 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대규모적으로 일어났던 3.1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3.1독립운동은 종파와 계급을 초월한 거족적 독립운동이었지만 독립선언서의민족대표 33인의 종교적 분포가 기독교인 16명, 천도교인 15명, 불교인 2명으로 되어 있는 것은 3.1운동의 주도권이 기독교측에 있었음을 시사해 주거니와3.1운동의 만세시위 역시 언제 어디서나 교회가 중심이 되었었다.
또한 3.1운동에서입은 참화와 피해도 교회가 가장 컸었다. 수원 제암리 교회의 집단학살사건을 비롯해서 강서의 사천교회, 정주교회, 강계교회, 위원교회,북가도 노루바위교회, 서간도의 여러교회 학살사건등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상영원히 잊지못할 가장 가혹하고 처참한 박해였다. 3.1운동으로 말미암은 교회의 피해 상황을 보면 3월1일부터 5월 30일까지 사이에 교회의 파손은 47교회였고 1920년 3월1일 까지의 피해 상황은 교회소각이 57교회였다.
-신사참배 강요 와 교회의 탄압 -
신사참배강요는 조선총독부가 1932년 평양에서 춘기황령제에 기독교계통학교의참석을 요구한데서 부터 시작되었다. 1935년 11월에 평안남도 지사였던 일본인야스다께가 최초로 기독교학교에 신사참배할 것을 강요하였다. 드디어 1937년10월에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숭의여자중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서강제로 폐교되었고 그 후에 전국 각지에 있던 기독교학교들이 신사참배 거부로차례로 페교되었다.
조선총독부가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를 마지막 으로 전국에 있는 교회를 신사에 참배케 함으로써 한국교회를 완전히 유린하였다. 그리고 이에 불복하는 지도자들을 모두 검거하여 투옥시켰다.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에 있는 외국 선교사들을모두 본국으로 추방하고 예배당 종을 강제로 공출케하여 군기제조에 사용하였다.
1942년 3월에는 일본 기독교 조선 혁신교단을 강제로 조직하게 하고 민족 사상과 내세사상이 강하게 표현된 구약성서의 모세오경과 신약성서의 요한계시록을성서에서 삭제시키고 찬송가 중에서도 여러장을 삭제 또는 개편 시켰다.
나중에는 구약성서를 부 성서로 하고 신약성서도 4복음서만을 사용하게 하는 등이루 형용할 수 없는 교회 탄압을 강행하였다. 드디어 1945년 8월 1일에 조선총독부는 한국개신교의 모든 교파를 강제로 합동시켜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을창설하여 한국교회를 완전히 일본 기독교단에 예속시켰다.
-사회 봉사 활동 -
일제의 잔악한 교회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민족의 살길을 바르게 제시하기위하여 국민의 계몽 활동과 새로운 지식의 전달, 생활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을실시하였다. 기독교 청년단체인 YMCA와 YWCA, 부녀자들을 위한 태화여자사회관등이 절제운동, 폐창운동, 물산장려운동, 여성지위 향상운동 등을 벌렸고 교회들은 힘을 합하여 맹아학교, 고아원, 양노원, 나병환자를위한 병원, 결핵요양원등을 세우고 운영하였다.
- 북한의 교회 재건 -
그렇게도 염원하던 해방의 기쁨이 이 한국 교회에 또 하나의 아픔으로 이어지게되었다. 이땅에 3.8선이 가로 놓이면서 북한에서는 교회의 탄압이 계속 되었고이를 피하여 많은 신도들이 남한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북한의 공산당들은 교회가 새롭게 재건되는 강한 힘을 느끼게 되자 1946년 11월3일이 일요일이였는데도 이날을 북한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의 날로 정하였다.
이에 교회들은 즉시 반발하고 결의문을 채택하여 북한 당국에 보냈다. 이러한항거에 부딛치자 공산당들은 이들을 투옥시키고 강제 노동으로 교회 지도자들을박해하였다. 드디어 1946년 11월 28일에는 그들의 어용 단체로 기독교연맹을조직하여 교회를 공산주의 선전에 이용하고 김일성을 절대지지하며 선거에 솔선수범한다는 결의문까지 발표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이 연맹에 가입하지 않은목사들은 투옥하거나 추방하였다.
_ 남한의 교회재건 -
남한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완전한 신앙자유를 얻었다. 일제 말엽에 강제로모든 교파의 통합이 이루어졌고 해방 후에도 그 합동교단을 그대로 존속하려는 운동이 있었다.
1945년 9월 8일에 새문안교회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목사들이 모여 교회의합동에 대한 논의를 하였으나 자파교회로의 환원에 대한 집념이 더강하여하나의 교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감리교,장로교,성결교,침례교,구세군등 각 교파는 각각 활발히 선교하여 교세를 확장하여 갔다.
- 6.25 전쟁후의 교회 -
6.25 사변을 통하여 받은 교회의 손실은 동족 상잔의 비극 그대로였다. 공산당에 의하여 북한으로 납치되어간 목사의 수와 순교자는 장로교,감리교, 성결교회만도 236명이었고 교회의 파괴와 손실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교회가267개에 달하였다.
6.25사변중에 공산당이 저지른 만행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다. 전북 옥구군원당교회는 75명의 신도중에서 73명은 공산당에 의하여 학살되었다. 이러한 슬픔과 고통과 어려움을 딛고 한국교회는 순교자의 터전위에서 날로 부흥되어 갔다.
1951년 2월에는 국군안에 군목제도를 창설하여 현대전에서의 정신적 자세를확립할 뿐 아니라 젊은 군인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선교 전위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발전은 교회안에서의 사명을 다할 뿐만 아니라 방송매체를통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1954년12월에 각교파가 힘을 모아 서울에 [기독교 중앙방속국] (HLKY)을 개국하였다.
남한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일제 말엽에 강제로모든 교파의 통합이 이루어졌고 해방후에도 그 합동교단을 그대로 존속하려는운동이 있었다.
1945년 9월 8일에 새문안교회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목사들이 모여 교회의 합동에 대한 논의를 하였으나 자파교회로의 환원에 대한 집념이 더 강하여 하나의교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등 각교파는 각각 활발히 선교하여 교세를 확장하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