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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13:1-25) 간장종지에 고추장을 담을 수 없다.
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2.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마음이 궤사한 자는 강포를 당하느니라
3.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4.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5.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 데에 이르느니라
6. 공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를 보호하고 악은 죄인을 패망하게 하느니라
7. 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8. 사람의 재물이 자기 생명의 속전일 수 있으나 가난한 자는 협박을 받을 일이 없느니라
9.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10.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11.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잠언 13장 말씀중심으로 <간장종지에 고추장을 담을 수 없다.>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간장종지에 고추장을 담을 수 없다.’
집사람이 찌개를 끓입니다. 김치찌개 고추장찌개 등 찌개는 재료를 넣으면서 이름붙이기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국이나 찌개가 없으면 밥을 못 먹고 안 먹으므로 다른 반찬은 몰라도 찌개를 하나씩 하는데 많은 경우에 돼지고기를 넣습니다. 돼지고기가 좀 냄새가 안 나고 좋은 돼지고기는 찌개 속에 들어가면 찌개 맛도 맛있게 할 뿐 아니라 돼지고기를 먹는데, 그냥 숟가락으로 떠서 먹는 게 아니라, 돼지고기만 따로 젓가락으로 건져서 먹는데 그럴 때 찾는 게 꼭 고추장이에요. 찌개속의 돼지고기를 건져서 고추장에 찍어 먹습니다. 그러면 집사람이 고추장을 꺼내올 때 미리 꺼내는 경우는 거의 없고, 제가 꼭 말을 해야 다 차려놓은 밥상 놔두고 주섬주섬 고추장 그릇을 꺼내 놓습니다.
그런데 고추장을 숟가락으로 뜨는데 항상 곤란해 합니다. 어떤 종지를 하나 가지고는 고추장을 담기에는 저 혼자 고추장을 찍어 먹어서 고추장이 종지에 발리게 되니까 숟가락을 들고 이렇게 있는데 간장종지는 거의 식탁위에 올려 있어요. 이것저것 찍어 먹기도 하고 간을 맞추기도 하고, 그런데 고추장을 떠서 어디에 놓을지를 모르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반찬그릇에는 이미 다 자기만의 반찬이 들어 있으니까, 그러면 어떨 때는 고추장을 뜬 숟가락채로 놓고 돼지고기를 찍어 먹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좀 웃기는 일이지요. 간장이 담겨있는 간장종지에 고추장이 담길 수가 없습니다. 물론 담을 수는 있지요. 간장 있는데 고추장 넣으면 그뿐이지요.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잖아요. 김치그릇에 고등어조림을 담지는 않습니다. 어떤 그릇이든지 이미 담겨져 있는 무엇이 있을 때는 다른 것이 담겨질 수가 없어요. 반찬일 경우에 특별히 더 그렇잖아요. 물건일 경우에는 서랍에 망치가 있어도 다른 화장품 빈 통을 넣을 수도 있고, 다른 물건을 넣을 수 있지만 반찬일 경우에는, 이미 담겨져 있는 것이 있으면 다른 것이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이상한 것 있어요. 1절에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합니다. 지금 계속해서 잠언 1장부터 반복해서 하는 얘기잖아요.
“아들아 아버지의 훈계를 들어라.” 또 오늘 13절에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 10절에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라고 합니다.
이상하잖아요? 우리가 왜 권면을 안 듣고 왜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지 않지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하는 말을 듣지 않는 것을 지나서, 왜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안 듣는 겁니까? 왜 안 들리는 겁니까? 이미 우리 마음의 종지에 간장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미 내 안에 답이 있습니다. 이미 답이 있어요.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말씀이 들리지 않는 이유가, 이미 마음의 종지 안에 답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간장이 담겨 있는데 하나님이 고추장을 떠서 드시고는 어디에 담아야 될지를 모르는 상태가 바로 잠언에서 반복되어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라. 교훈을 무시하지 말라. 징계를 두려워하고 피하지 마라.’라고 하는 모든 것들이 다 무엇을 얘기하고 있습니까? 이미 담겨져 있는 겁니다.
여러분! 1절에 '거만'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10절에 '교만'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기독교의 죄를 이야기할 때 핵심이에요. 여기에서부터 모든 죄악이 다 나온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도둑질, 거짓말, 살인, 간음, 음란, 사기, 수군거림, 질투, 시기, 악독 등 모든 게 다 교만에서 나옵니다.
교만을 한 마디로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고추장을 넣어 주시려고 하는데, 내 마음에 간장을 담고 있는 상태가 교만입니다. 먼저하나님이 답을 제시하시기 전에 내가 내 마음에 먼저 답을 갖고 있는 상태이기에 들리지 않습니다.
오늘도 반복해서 너무너무 많은 구절에 재물과 돈에 대한 경구, 잠언들이 나옵니다.
“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아무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다.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 가느니라. 선한 사람은 그 산업을 자자손손 물려주나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라고 하는데 재물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와요.
그런데 돈에 대한 얘기를 아무리 성경적으로 해도 저나 여러분이나 그 말이 들어오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그냥 목사님들이 의례 하는 말이고 성경에 의례 쓰여 있는 말로 여깁니다.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 뭐 이런 정도의 말로 흘려듣게 되는 이유가 먼저 우리 마음에 간장이 담겨 있어서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내 마음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이전에 돈에 대한 느낌이 있어요. 돈 맛을 알아요. 돈의 기능을 알아요. 내 마음이 이미 돈이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돈에 대한 얘기를 아무리 많이 해도 마이동풍이고, 스케이트타고 김연아 선수가 지나갈 때 얼마나 잘 미끄러집니까? 말씀이 그렇게 귀 앞에서 미끄러져 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간장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돈에 대한 철학과 돈 맛에 대한 느낌과 돈의 필요성에 대한 강한 확신이 이미 내 안에 들어 있어요. 이걸 깬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거의 불가능해요.
또 내 마음의 교만, 하나님이 무언가 길을 제시하고 답을 제시하고 방향을 제시하시는데,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 먼저 뭔가 들어 있는 상태가 교만인데 교만의 핵심내용은 우리 내부로부터 죄로부터 자라나오는 욕망이에요. ‘갖고 싶다. 먹고 싶다. 차지하고 싶다. 입고 싶다. 타고 싶다. 뭐뭐하고 싶다.’라고 하는 욕망의 알맹이 위에 옷을 입히는 것이 경험과 지식과 합리화 등 이런 것들로 옷을 입힐 뿐이지요. 그런데 이 욕망이 자라는 것은 내부에서 자라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외부에서 들려오는 겁니다. 그래서 무력한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무력한 거예요. 목사가 얘기해서 목사 말을 안 듣는 것을 목사가 서운해 해서는 절대 안 돼요.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안 들어요.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이 어떻게 돼요?
모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사무엘, 다윗 그리고 몇몇 사람 이스라엘 역사 동안에 살다 죽고, 살다 죽고 수없이 많은 세대와 세대를 통해서 태어났다가 죽은 사람 중에 몇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겠습니까? 몇 백만 대 일 아니겠어요. 각 대학마다 이제 비율이 나올 텐데, 경쟁률이 나올 텐데...몇 백만 대 일 아니었겠어요. 결국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무도 하나님말씀을 안 들었어요. 그리고 가나안은 애들 말로 쫑 난 겁니다. 포로로 잡혀 가 버리고 지금 이스라엘이 2,000년 동안 땅을 잃어버리게 되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안 들어오는 겁니다.
먼저 답이 있으니까. 내 욕망을 합리화로 내 지식으로 이유를 달아 가면서 삶의 어떤 원동력으로 삼아 가면서 우리가 옷을 입혀 버리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열애 중인 딸을 불러서 네가 사귀는 남자아이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조근 조근 이유를 달아서 다 설명을 합니다. 세 시간을 앉혀 놓고 얘기를 했어요. 단 한마디도 안 들어가요. 왜냐하면 이미 마음에 그 남자아이에 대한 열정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간장이 들어 있는데 고추장이 담깁니까? 담길 수가 없지요. 김치가 담겨 있는데 고등어조림이 담겨지겠습니까? 담길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김치가 담겨 있는 그릇에 아무리 고등어조림을 얘기해 봐야 담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아무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일까요?
스스로 부한 체 하는 것은, 내 의식이 부자 의식으로 내 마음이 돈을 많이 많이 먹는 겁니다. 한마디로 마음에 돈 살이 찐 것이에요. 이래도 잘 모르시겠지요? 이렇게 한 번 예를 들어 볼게요.
삼백만원의 월급을 두 사람이 받았습니다. a양과 b양이. 그런데 a양은 삼백만원 월급을 받아서 이백만 원짜리 바바리코트를 사고 백만 원짜리 명품가방을 하나 샀습니다. 그리고 바바리코트를 입고 명품가방을 들고 나가니까 다 부자인 줄로 압니다. 그런데 그 달 월급이 남은 게 하나도 없어요.
또 한 아가씨는 지하철역 노상에서 파는 가방을 오만 원 주고 샀습니다. 그리고 세일하는 곳에서 이름도 없는 회사의 바바리코트를 오만 원 주고 사서 다려서 입었습니다. 다른 아가씨들이 보니까 입고 다니는 게 걸치고 다니는 게 한심해요. 그런데 그 아가씨의 주머니에는 이백오십만 원 넘게 돈이 남아 있는 거예요. 이 상태를 말해요.
그 언젠가 제가 스모선수 얘기 했지요. 내 마음에 돈을 백만 원 벌건, 천만 원 벌건, 일억을 벌건 내 마음이 돈을 다 먹어버려요. 나를 위해서 다 먹어 버려요. 스모선수처럼. 내 마음에 돈 살이 이렇게 찌는 거예요. 일억을 벌면 뭐해요? 일억 짜리 차를 사버렸는데. 천만 원 번 사람이 오백만 원 짜리 차를 사면 오백만원이 남잖아요. 그런데 일억 버는 사람이 일억 짜리 차를 샀어요. 그러니까 오백만원도 없는 것인데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얘기는 뭐예요? ‘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가난한 자가 있고’라는 말은 예를 들어서 큰 회사를 경영해서 장사가 잘 되는 바람에 흑자가 많이 남아서 백억을 벌었어요. 그런데 내 마음의 욕심이 커져서 이백 억을 투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빚쟁이가 되는 거예요.
저 같은 경우는 단 돈 몇 푼을 받았는데도 빚을 지지 않고 살아요. 그런데 일억, 삼억, 수출이 천억이 되는 회사에서 빚을 지고 살아요. 경계하는 겁니다. 그런데 안 되는 겁니다. 왜 안 됩니까? 돈을 더 벌어야 되겠다는 욕망이 생기기 때문에 이미 교만한 상태가 됐어요.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아무리 하셔도 들리지 않을 만큼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향한 열정을 갖고 있는 것처럼 돈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됐어요. 그러므로 아무소리가 안 들리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교만의 본성이라는 겁니다. 속에서부터 자란 욕망이 그 욕망의 이론으로 붙이고 옷을 입히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방식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선악과가 문제인 것이 뭡니까? 하나님이 내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시기 이전에 이미 내가 답을 알고 있는 거예요. 답을 어떻게 알고 있어요? 너무너무 매일 아침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듯이 ‘이건 안 된다. 이 사람 틀렸네. 이 상황은 개선되어야지. 그래 그게 좋았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좋은지 어떻게 알아요? 그 일에 뒤 이어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좋아해요. 그런데 우리가 답을 알고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교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답을 알고 있어요? 하나님은 지금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기를 바라십니다. 뭘 드시고? 답을 드시고. 집사람이 고추장을 퍼서 숟가락에 들고 있듯이 우리에게 답을 주시려고 오시는데 빈 그릇이 되어야 답을 담을 텐데, 간장이 담겨 있고 하나님이 답으로 고등어조림을 갖고 오시는데 우리는 김치를 담고 있고 안 된다는 거지요.
여러분! 이 돈 문제라든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이성문제라든지, 이 모든 것들이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서 우리 마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이 들리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 이런 얘기해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라고 하는데 이것처럼 넌센스가 없어요. 뜻을 알고 싶다고 말할 때 그 마음상태를 보면 백발백중 어떤 상태입니까? ‘돈은 벌어야 돼.’라는 답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버느냐를 하나님께 물으며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달라는 거예요.
‘난 어느 대학을 들어가야 돼. 서울 대학을 들어가야 돼.’ 라는 답이 있어요. 이미. 그러면 서울대학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거예요. 아니지요.
돈을 벌어야 되는 게 아니고, 돈이 많아야 되는 게 아니고, 어느 대학을 내가 반드시 들어가야 되는 게 아니고, 반드시 내가 결혼해야 되는 게 아닙니다. 그걸 누가 정해줬어요? 바울의 말처럼 혼자 살게 될 수도 있잖아요. 스스로 된 고자도 있고 하늘나라를 위하여 자기가 자청한 고자가 있고 몸이 고자라서 결혼을 못할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해야 된다고 정해 놓은 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찾는 거예요.
교만하다는 게 뭐예요? 똑같이 하나님이 돼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택받은 사람들이 그 많은 은혜와 그 많은 역사를 보고도 아무도 하나님말씀을 지킨 자가 없었어요. 이게 바로 현실이었고, 이런 현실 가운데 일어난 폭탄적인 사건이 주님의 십자가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내부에 들어오셔서 욕망을 깨부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탄식하지 않습니까? 뭐라고 탄식해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다." 왜 그래요?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합니다. 나는 선을 행하고 싶고 선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쪽으로 가고 싶은데, 내 마음은 자꾸 악으로 죄로 끌려간다는 겁니다.
율법이 있어요. 율법을 알아요. 그런데 안 되는 것은 이미 율법이라고 하는 김치가 담겨지기 전에 이미 내 안에는 고등어조림이라고 하는 욕망이 생겨 버린 겁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한. 그래서 김치가 담겨질 수가 없는 상태가 돼 버리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가 하시는 일이 뭡니까? 김치그릇을 다 엎어 버리는 겁니다. 고등어조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김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고등어조림 그릇을 엎어버리는 겁니다. 간장을 엎어버리고 씻어 버리는 것이에요. 그래서 주홍 같은 붉은 죄를 흰 눈 같이 씻는다는 얘기가 왜 나오는 겁니까? 간장종지에 간장이 시커멓게 묻어 있습니다. 다 비우고 놔도. 그런데 깨끗하게 물로 씻어내듯이, 주님의 십자가가 그 일을 하는데 이 일을 사도바울이 날마다 했다는 겁니다. 구약에서 상번제를 드리듯이.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교훈과 징계의 말씀을 받아드리려면, 내 마음에 이미 담겨 있는 간장이 내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 백퍼센트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비워야 되는데 비울 방법이 없어요. 오늘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비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비워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나를 움직여 가십니다. 오늘 지나면 또 그래요. 또 욕망은 자라나는 겁니다. 또 욕망은 자라나요. 또 비워야 된다는 겁니다. 쉴 새 없이 쉬지 않고 여기서 펑크가 나면 하나님말씀이 막혀 버리는 겁니다. 내 마음의 그릇에 뭔가가 먼저 있어서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겁니다.
예를 들어 집안이 파탄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면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말씀이 들리지 않아요. 뭔가 마음에 먼저 담겨 있기 때문에. 걱정과 근심이 담겨 있는 것도 먼저 담겨 있는 거예요. 다 교만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게 다 교만입니다. 다 교만이에요.
결국 교만한 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행복할 수가 없어요. 오늘도 날 보면 하나님이 고추장을 떠서 내게 답으로 주기를 원하시는데 지금 내 마음의 종지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는가? 한 번 보세요.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뭔가가 담겨지면 안 될 것들이, 내 마음의 종지에 이미 하나님의 답과 하나님자신이 들어오시기 전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뭔가가 지금 상황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든지 어떤 사람에 대한 어떤 관계 때문에, 내 마음의 상처가 있든지 무엇을 담고 있든지, 하여간 갖고 싶은 것이 있든지 외제차를 꿈꾸고 있든지 무엇이든지 마음에 담고 있는 것들이 있어서, 내가 교만해졌고 교만해졌기에 행복이 없고 하나님말씀이 들리지 않는 겁니다.
내 마음이 간장종지라면 하나님의 정답인 고추장은 담겨질 수가 없지요. 주님의 십자가로 내 마음의 종지를 깨끗하게 씻어버리는 아침 되셔서, 하나님이 오늘 이 아침에도 여러분의 삶을 향하여 들고 오시는 정답들을 하나님과 더불어 깨끗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종지를 준비하시며 하루를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내 마음이 간장종지인데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답인 고추장이 어떻게 담길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만을 의지합니다. 내가 내 안에서 솟아 올라오는 욕망을 이길 수 없고, 그 욕망을 극복할 수 없고 욕망을 누를 수 없어서, 의지할 것 없는 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향하오니, 주님의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깨 주시고, 하나님의 정답이 들릴 수 있는 귀를 열어 주시옵소서. 어찌하든지 손과 발이 움직일 때 교만한 자의 손과 발이 되지 않게 해 주셔서, 하나님의 장갑으로 살아가는 하루가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깨끗이 비워지는 우리의 마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