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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리수필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갈뫼
포항 덕동마을의 형성과 경관
포항 덕동마을의 형성과 경관
김희준(金熙俊, 대동고 교사)
포항시 기북면 오덕1리에 덕동마을이 있다. 여강 이씨 동성마을인 덕동(德洞)은 문화부 지정 문화마을(1992), 국가기록원 지정 제4호 기록사랑마을(2011)이고, 산림청 선정 ‘아름다운 숲’ 대상(2006)을 받았다. 용계정(龍溪亭) 일원은 문화재청이 지정한 명승81호(2011)이고, 용계정, 사우당(정)(四友堂(亭)), 애은당(愛隱堂), 여연당(與然堂), 덕계(德溪)서당, 근대한옥 태고와(太古窩)는 문화재로 지정 되었다. 덕동민속전시관에는 이동진 옹이 평생 수집한 많은 유물이 소장되어 있어서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웅변한다.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작품이 소장된 진경생활화의 대가인 현석(玄石) 이호신 화백이 러시아·핀란드 대사를 역임한 이인호, 경주대 정병모 두 교수와 더불어 2006년 9월 16일에 용계정에 묵고 다음날 마을의 풍경과 사람을 화폭에 담기도 하였다.
송을곡(松乙谷)이라고도 하였던 덕동의 마을 이름은 침곡산(針谷山)과 자금산(紫金山, 북), 귀인봉(貴人峰)과 비학산(飛鶴山, 동), 약산(藥山, 남), 관령(官嶺, 서)으로 둘러싸인 ‘큰(德) 골(洞)’의 한자 표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성법령(省法嶺)에서 발원하여 기계천으로 유입하는 마을의 하천을 덕계, 계곡을 덕협(德峽), 늪을 덕연(德淵)이라 하였다.
마을에는 신라하대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조 비로자나불좌상이 출토된 약산 아래 사과밭의 덕인사(德仁寺)터, 관령 아래 절터골(寺基谷)의 포인사(布仁寺)터, 용계정과 막애대(邈埃臺) 사이의 수월암(水月庵)터, 불상을 모셨던 암굴인 창오봉(蒼梧峰) 불암(佛巖), 세덕사(世德祠) 창건 때 목재 공급을 위해 벌목을 했던 청운암(靑雲庵)터가 있다. 자금산의 ‘자금(紫金)’은 부처의 세계를 상징하고 덕동 팔경의 ‘약산방사(藥山訪師)’는 약산 아래의 덕인사로 가는 승려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것은 신라시대 이래로 덕동에는 사찰이 자리 잡고 불교문화가 발달했음을 보여준다. 덕동이라는 마을이름이 덕인사라는 사찰 이름에서 유래했을 수도 있다.
‘덕이 있는 사람들이 살기에’ 덕동으로 불렀다고 하는 설명은 경주 양동(良洞)에서 이강(李壃, 1621-1688)이 덕동에 들어온 이래로 유교문화가 발달하면서 덕동의 ‘덕(德)’자를 유교적인 개념으로 재해석한 결과로 보인다.
기북면 지역에 있었던 성법부곡은 조선시대에 경주부 관할 지역으로서 임진왜란 때 경주성 탈환작전에 쓴 비격진천뢰를 제조하였다고 하는 관영 수공업 단지로 철기, 도자기, 종이, 바디, 갓 등을 생산하였다. 덕동의 사우당은 성법부곡과 관령(벼슬재) 너머의 죽장부곡을 관할하는 지휘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애은당, 여연당도 부곡 관리사였다고 한다. 부곡의 형성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신라, 고려 시대에는 덕인사를 비롯한 사찰이 부곡을 경영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주정씨인 정언각(鄭彦殼, 1498-1556)이 경상감사로 재임하며 성법부곡 관할권을 인계받고 장원으로 삼았다고 한다. 정언각은 1553년 9월에 영천을 순행하며 포은 정몽주가 태어나고 자라고 공부한 우항리 부래산(浮來山) 아래에 있는 포은의 집터에 고을 사람들이 가묘와 서원을 짓는 일에 협조를 요청 받은 일이 있다. 정언각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청송부사로 재임하며 읍성을 방어하고 군량미를 조달한 정신(鄭愼, 1538-1604)이 덕동에 사우당을 짓고 가족의 피란지로 삼았다고 한다. 정신의 아들인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1565-1624)가 박래장 사건으로 화를 입고 아들 정대영(鄭大榮, 1586-1668)이 세거해온 양주(楊州)에서 진주(晉州)로 옮기며 우의를 다져온 양동의 여강이씨 인물인 이강을 셋째 사위로 삼고 덕동의 가옥과 재산을 그에게 양도했다고 한다.
덕동마을 여강이씨 입향조인 이강은 명유였던 회재 이언적의 동생인 농재(聾齋) 이언괄(李彦适, 1494-1553 )의 현손이고 향단(香壇) 이의주(李宜澍, 1566-1637)의 손자이다. 이강의 부인은 선조의 외종손녀이기도 하다. 이강을 등용하려는 의논이 있자 왕실의 인척이라는 권세로 관직에 나아간다는 혐의가 싫어서 그는 1647년경 양동에서 약 80리 북쪽의 덕동으로 와서 은거했다.
이강은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벗 삼아 아호를 사의당(四宜堂)이라 했다. 그는 1687년에 누정을 짓다가 완공을 보지 못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1698년에 손자인 성균관진사 성헌(省軒) 이시중(李時中, 1667-1738)이 완공하고 누정을 사의당이라 하였다. 창건된 지 5세대가 지난 1778년에 이정응, 이헌속 등이 주도해 사의당을 중건하였다. 중건 기문은 계옹(溪翁) 이헌속(李憲涑, 1722-1793)과 교유했던 경주 보문의 유학자 활산(活山) 남용만(南龍萬, 1709-1784)이 지었다.
1778년에 회재 이언적과 농재 이언괄의 부친으로 회재와 농재의 가학의 연원이 된 찬성공 이번(李蕃, 1463-1500)과 농재를 배향하는 묘우인 세덕사(世德祠)를 사의당 뒤에 지었다. 세덕사 현판은 시서화 삼절의 사대부 화가로 단원(檀園) 김홍도와 자하(紫霞) 신위의 스승이기도 하였던 예조판서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웅필이다. 사의당을 세덕사의 임시 강당으로 써다가 1779년에 세덕사의 문루로 삼아서 연연루(淵淵樓)로 고쳐 불렀다.
연연루 현판은 강세황과 함께 당대의 명필이었던 이조판서 송하옹(松下翁)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 썼다. 설정(雪汀) 조문수(曺文秀)의 현손이 담운(淡雲) 명교(命敎)이고, 명교의 아들이 조윤형이다. 조윤형의 장인이 백하(白下) 윤순(尹淳)이고, 조윤형의 사위가 자하 신위(申緯)이다. 이들은 모두 명필이었다.(이동국)
연연루 기문은 함창현감을 역임한 약남(藥南) 이헌락(李憲洛, 1718-1791)의 편지를 들고 간 이정응(李鼎凝, 1743-1796)의 부탁을 받고 호조참판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 1719-1791)이 1789년에 지었다. 이헌경은 이른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주로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에서 활동했으며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18세기 남인 문단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떨쳤다.
1779년 11월에 세덕사 앞에 강당인 명흥당(明興堂)과 공부방인 면수재(勉修齋)와 진덕재(進德齋), 출입문인 입덕문(入德門)을 세웠다. 목수는 최성진(崔聖眞)이었다. 세덕사의 제수를 장만하는 포사(庖舍)에서 용계정 문 사이에 무지개모양 돌다리가 있는데 통허교(通虛橋, 1826)이다.
세덕사 건립 뒤에 사의당은 연연루로 개칭했지만 계곡 가에 세워졌기에 처음부터 용계정(龍溪亭)이라고도 하였다. 영조(1694-1776) 때 경주의 명필로 안강읍 사방리 사람인 지족당(知足堂) 최석신(崔錫信)이 용계정, 사의당, 사우당 현판 글씨를 썼다.
명흥당 편액은 한성부판윤 고동(古東) 이익회(李翊會, 1767-1843)가 썼다. 그의 작품은 <오혁신도비<吳(王+奕)神道碑)>, <충무공유허비>, <삼우당문익점신도비(三憂黨文益漸神道碑)>, 성균관 수복청의 현판인 <대학당(戴學堂)> 등이 있다.
고동은 성균관 대사성, 공조 및 예조 판서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69세에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가서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과 교유했다. 고동의 벗인 자하(紫霞) 신위는 고동에게 글씨가 한결같다며 사행(使行)에서 천하를 새로이 보고 나면 왕희지의 난정을 꿰뚫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동은 연경에서 옹방강의 해서족자만을 가져왔다. 고동은 추사와 달리 변화보다는 글씨의 정수만을 남겨 담백한 멋을 담으려는 자신의 서예관을 지켰다.(해정 김세호)
그는 당대 서화예술계의 추앙을 받았으며 서예 비첩과 법첩의 소장가였다. 추사가 옹방강이 정서한 <대조선사비(大照禪師碑)> 족자에 제(題)를 쓰며 ‘고동 선생이 옹방강의 이 글씨가 근일 서법의 제일이라 여기는데 이는 천하의 정론이다.’고 하였을 만큼 그는 서예와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다. 994년 반사조(潘師朝)가 송 태종의 명령으로 모륵(摹勒)하여 돌에 새긴 <<강첩(絳帖)>> 12권, 당의 이옹(李邕)이 쓴 <이원수비(李元秀碑>(347자)를 1805년 옹방강이 수모(手摹)한 <담계정서족자(覃溪正書簇)>, 1695년에 무근전(懋勤殿)에서 모륵(摹勒)하여 돌에 새긴 이옹(李邕)의 <대조선사비>, <난정첩(蘭亭帖)> 정무비본(定武肥本)과 영정수본(穎井瘦本) 등을 그가 소장하였다.
면수재, 진덕재, 입덕문 현판은 암려(巖廬) 권신추(權愼樞, 1765-1821)가 썼다. 권신추는 포항 죽장 입암마을 사람이다. 대학자 여헌(旅軒) 장현광과 입암에서 교유했던 동봉(東峯) 권극립(權克立, 1558-1637)의 7세손인 낙수당(樂壽堂) 권제홍(權濟弘)의 제3자인 권신추는 당대 조선 8대 명필에 들어간다. 그는 초서를 잘 썼는데 동고(東皐) 이준경의 <사시음(四時吟)>을 쓴 초서 병풍(1806) 작품이 전한다. 동학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의 부친으로 영남퇴계학의 정맥을 계승한 근암(近庵) 최옥(1762-1840)이 용담서사(龍潭書社)를 짓고 동생의 상을 마친 권신추에게 편지를 보내어 양동에 올 때 용담서사로 와서 현판 글씨를 써서 건물을 빛내주기를 부탁하기도 했다.
낙수당의 제4자로 26세에 요절한 권익추(權翊樞)는 병을 앓고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글씨를 썼다. 일간(日澗) 이우란(李宇蘭)은 형제의 필첩에 발문을 쓰면서 권신추는 ‘도량이 크고 점잔하면서도 자유분방하고(蘊藉而宕逸)’, 권익추는 ‘기이하고 씩씩하면서도 훤칠하다(奇壯而發越)’고 하였다. 낙수당의 제5자 낙사와(樂斯窩) 권명추(權命樞)는 안동의 유학자 호곡(壺谷) 유범휴(柳範休, 1744-1823)의 제자로 유교 경전에 정통하였고 필법도 정묘하여 형들에겐 미치지 못하나 책 제목 등의 글씨를 쓸 때에는 형들도 그를 추천했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세덕사와 부속 암자인 수월암 등의 건물은 헐리고 연연루는 사의당으로 환원되어 보존되었다. 사의당에 사의당, 용계정, 연연루 옛 현판을 걸었다.
애은당은 사의당의 제4남 덕소(德邵)에게, 여연당은 제2자인 덕령에게, 사우당은 제3자인 덕삼(德三)에게 상속됐다. 애은당의 편액은 영천의 서예가 춘암(春庵) 노재환(盧在環, 1923-2012)이 썼다. 자금산의 바위각자 ‘紫金山’은 덕동 사람 첨로(瞻魯) 이동욱(李東郁, 1909-?)의 글씨이다. 여연당 편액은 포항의 현존 서예가 허주(虛舟) 정보인(鄭普仁)이 썼다. 애은당엔 사의당의 6세손 재급(在伋)이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사우당은 사의당의 증손인 이헌순(李憲淳)의 아호이다. 그는 사계절의 매화, 대, 국화, 솔을 벗 삼아 살았다.
이덕삼을 4대 봉사하던 중 주손인 인상(麟祥)이 별세하여 차자인 구상(龜祥)이 체천위(遞遷位)하여 봉사한 별묘(別廟)를 강의재(講義齋)라 했다. 이곳에 이정원이 방 두 칸을 지었고, 그의 주손 조원(祖源)이 덕계서당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용계정에서 이동진 옹의 조부인 이석림(李錫林), 이세원(李世源)이 1908년에 교사 2명과 학생 90명 규모의 덕숭(德崇)사립학교를 설립하여 항일민족교육을 하다가 1915년에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 당했다.
1930년경에 설립된 덕동사설학술강습소(덕동사설학당)는 1950년에 폐교됐다. 이 학교의 운동장은 1974년 양어장으로 만들었다. 양어장은 풍수지리적으로 산세에 비해 약한 마을의 수세를 보강하기 위해 2008년 사의당 입향 360년을 기념하여 둘레 360미터의 연못으로 만들고 운등연에서 물을 끌어왔다. 호산지당(護山池塘)이라 부르는 이 연못에는 운동장 모임에서 구령을 하던 구령대라는 바위가 남아있다. 덕계의 물길이 섬솔밭 동서로 갈라져 합류대에서 합류했다. 섬솔밭 서쪽 물길에 늪이 형성되고 깊은 연못을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연못이 이헌경의 <연연루기>에 등장하는 용반연(龍盤淵)이고, 덕연일 것이다. 연못가 회나무 밑에 상수도 설비 전까지 물을 긷던 회정(檜井)이라는 샘이 있다.
덕동에는 3기(奇), 8경(景), 9곡(曲)이 있다. 용계정 뒤의 세덕사 터에 있던 반송, 누운 향나무, 연어대의 석천(石泉)이 3기이다. 8경은 자금산의 장대 구름, 귀인봉의 달, 응봉의 반사된 낙조, 천제당의 기우제, 오봉(五峯)의 돌아가는 돛배 모양, 약산의 덕인사를 방문하는 스님, 벼슬재의 목동 피리 소리, 돌빼기 들판의 노동요이다. 주자의 무이구곡에서 유래하는 9곡은 2가지가 있다. 이헌속이 명명한 덕계(德溪)구곡은 수통연(水通淵), 막애아(莫碍阿, 막애대), 수월암(水月庵), 계정(溪亭; 용계정), 도서송(島西松, 섬솔밭), 합류대(合流臺), 운등연(雲騰淵), 용방연(龍房淵, 龍防沼, 와룡암), 모산(茅山; 자금산)이다. 덕연(德淵)구곡은 수통연, 막애대, 서천(西川)폭포, 섬솔밭(島松), 연어대, 합류대, 운등연, 와룡암(臥龍巖), 가래못(鍤淵)이다. 용계정 맞은편 연어대 암벽에 새겨진 ‘鳶魚臺(연어대)’ 글씨는 1842년에 새겼으며, <<시경>> 대아(大雅) <한록(旱鹿)>의 ‘솔개는 하늘 위에서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네(鳶飛戾天 魚躍于淵)’가 출전이다.
덕동에는 300년 전통의 송계가 있어서 마을의 솔숲을 관리해오고 있다. 마을 입구의 송계(松契)숲, 자금산에 있는 사의당의 4대손인 덕계(德溪) 이정원(李鼎元)의 묘에서 보이는 덕계의 물을 가리기 위한 수구(水口)막이 풍수비보(風水裨補)숲인 섬솔밭, 연어대의 정계(亭契)숲이다. 세덕사터와 용계정 뒤쪽에는 심은 연도가 전하는 노거수로 암수 한 쌍의 은행나무(1803), 배롱나무(1806), 향나무(1837)가 있다.
-<<老巨樹>>제26집(노거수회, 2019)(增補 2019. 9. 18.)
<이호신, 포항 침곡산 덕동마을, 한지에 수묵담채, 87x139cm, 2006>
<이호신, 덕동민속전시관장 이동진·이옥주 부부, 염색 한지에 수묵, 45x58cm, 2006>
<덕인사터 출토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이호신, 덕동마을 소나무숲, 한지에 수묵담채, 87x139cm, 2006>
<이호신, 보호수인 누운 향나무, 한지에 수묵담채, 24.5x33cm, 2006>
<이호신 그림, 이희국 씨·이원돌 씨·애은당 안주인 이복림 씨·용계정 유사 이희섭 씨, 2006>
<이호신, 가을 들녘과 소나무, 한지에 수묵담채, 70x47cm, 2006>
호산지당(용반연, 덕연), 섬솔밭
<이호신, 늪지(호산지당)의 노랑어리연꽃, 한지에 수묵담채, 24.5x33cm, 2006>
<호산지당, 온고(溫古) 이영원(李榮源)이 지은 시>
산세는 강하고 수세가 약하여 이 연못을 축조하니,
골의 풍광이 다시 아름다워졌네.
오랜 세월 경영하여 묵은 뜻을 이루었으니,
장래에 경사가 응당 있을 것이네.
회정
은행나무 암수
합류대
연어대
<애은당, 춘암 노재환 글씨>
<이호신, 애은당의 초가, 한지에 수묵담채, 24.5x33cm, 2006>
여연당
덕계서당, 강의재
사우당, 지족당 최석신 글씨
四時光景與誰同 사계절 풍경 누구와 함께할까,
愛玩亭前花樹中 정자 앞 꽃과 나무 가운데서 감상하네.
欣欣向榮無世態 생기발랄한 초목에 세상 때가 없으니,
莫如爲友坐春風 봄바람 벗하여 앉아 있음만 못하리.
-사우당 원운(原韻)
태고와
와룡암(용방연, 용방소)
<용계정, 지족당 최석신 글씨>
<사의당, 지족당 최석신 글씨>
<연연루, 송하옹 조윤형 글씨>
이헌경, 연연루기 현판
<이호신, 용계정, 한지에 수묵, 24.5x33cm, 2006>
통허교
<세덕사, 표암 강세황 글씨>
<세덕사 명흥당, 고동 이익회 글씨>
칸옥션 제6회 미술품경매도록(2018)
<세덕사 입덕문, 암려 권신추 글씨>
세덕사 서각
첫댓글 덕동문화마을에 대한
귀중한 자료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