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님께
날씨가 많이 차가워졌습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아이들 성적표 보니 어떠십니까? 뿌듯하신지요? 아니면 답답하신지요? 답답하신 부모님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부모님의 기대는 그리 크지 않은데 말이지요. 아이들 성적이 왜 이런지 한심하시지요? 다른 것 다해줄테니 공부만 좀 하라는데 그걸 못하고 있으니 부모님 타는 속도 이해가 갑니다. 학원에 수십만 원을 투자하고, 과외도 하고, 늦게까지 독서실도 보내고, 학교에서의 생활도 썩 나쁘지 않은데 어쩐 일인지 아이들의 성적은 전혀 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떨어지기까지 하지요. 수년간 봐와도 처음 받았던 성적이 변화하는 경우는 참 드문 것 같습니다. 학원에서도 오래 근무했지만 성적이 오르는 아이들은 드물지요.
수업을 잘 듣는다고 해서, 그 시간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해서 성적은 절대 오르지 않습니다. ‘지금 네 성적이면 서울에 있는 학교를 못 간다.’고 으름장을 놓고 협박을 해봐도 순간만 자극 받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충고를 해봐야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철없는 어른들의 잔소리로 밖에 안 들립니다. 이유는 참 간단합니다.
첫째, 요즘 아이들은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할 것이 너무 많으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무 것도 안하게 됩니다. 설거지도 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다른 집안일도 쌓여 있으면 다 하기 싫은 것과 같습니다. 깔끔하게 한다고 해도 표도 나지 않으면 다시 하기 싫지요.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저것 다 잘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것을 자신도 아니까,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하지 않는 거지요.
둘째, 우리는 공부가 탤런트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골프를 잘하거나, 피겨스케이팅을 잘 하는 것처럼 재능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노력만으로 김연아 같은 선수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부만큼은 유독 예외로 둡니다. 공부는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영재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서울대를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지요. 아이들의 탤런트를 공부에만 집중하는 순간 많은 아이들은 결국 패배자가 됩니다.
셋째, 재능이 없는 아이들에게 더 치명적인 단점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없는 거지요.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잘하려면 원동력이 되는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힘이 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 이겨낼 수 있습니다. 42.195km가 정해져 있기에 마라토너들이 뛸 수 있는 것이지요. 언제 그 기나긴 레이스가 끝날지 모르면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야할 곳도 없는데 힘을 낼 필요가 없는 건 너무 당연한 거지요.
우리 아이들은 지금 할 것이 너무나도 많고, 자신의 재능도 알지 못하며, 왜 공부를 해야 하는 지는 더더욱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3년간 밤늦게까지 학원에 아이를 맡겨 놓는다고 해서, ‘이래가지고 대학가겠냐?’고 끊임없이 잔소리 한다고 해서 아이들은 바뀌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짐을 가정에서라도 줄여주셔야 하고, 어느 곳에 재능이 있는지도 봐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기다려주셔야 합니다. 학원을 바꿨는데도 왜 성적이 오르지 않느냐고 혼내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스스로 알게끔 해줘야 합니다. 뻔한 얘기이고 너무 이상적인 얘기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궁극적인 변화를 기대할 것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중학교 3년간 열심히 학원에 다녔어도, 나름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었어도 변화가 미미했던 일들이 이를 증명해주지 않습니까?
뭐니 뭐니해도 가장 좋은 방법은 지속적인 독서입니다.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얘기를 들을 때 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그 이야기는 절대적인 시간의 부족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이야기로 들리니까요. 학원에서 내준 수학 문제도 풀어야 하고, 영어 단어도 외워야 하는데 독서할 시간을 어떻게 내냐는거죠... 마음이 아픕니다. 수학 문제 하나 더 푼다고,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운다고 성적이 오르거나 아이들의 삶이 행복해지지는 않습니다. 마음 따뜻해지는 글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시 한 편이 여유 없는 삶에 힘을 더해 줄 겁니다. 시간이 없을수록 더 많은 시간을 책 읽기에 투자해야 합니다. 자기소개서를 쓰기 위해 무슨 내용을 써야할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방대한 양의 독서로 인해 무엇을 어떻게 줄여 적을지가 고민스럽게 해야 합니다. 독서만이 궁극적인 자기주도적 학습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처음에는 쉽고 가벼운 삶에 희망과 용기를 주는 책으로 독서의 습관을 들이고, 나중에는 자기가 원하는 분야에 전문적인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들에게 자주 자주 좋은 책을 권해 주십시오.
독서 습관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가족 간의 끊임없는 대화입니다. 대화를 자주 안하셨다면 대화 시간을 늘려주시고, 대화를 자주 하고 계신다면 그 대화가 과연 진정성이 있는지 돌아봐주십시오. 꽉 닫힌 마음으로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얘기는 아닌지 봐주세요. 아이들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어떤 일로 힘들어 하는지 잘 살펴봐 주십시오. 뭐 그런 걸로 힘들어 하냐고 하지 말아주세요. 나로 미루어 아이를 보지 마시고,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의 고통이 어떤가 보시면 대화가 좀 더 나아질거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꿈을 물어봐주세요. 어떻게 사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것인지는 누구나 잘 압니다. 그러나 바쁜 일상 속에서 늘 그것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3월 자기 소개서에 직접 손으로 썼던 그 꿈들을 아이들은 평소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꿈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너무 바빠서 일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에게 성적 얘기를 하는 대신 아이들의 꿈을 자주 물어봐 주십시오. 꿈이 없다면 어떤 것이 하고 싶은지를 주기적으로 물어봐 주십시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무엇을 해나가고 있는지 물어봐 주세요. 아이들에게 잔소리로 들리는 이상 아이들의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간단히 쓰려했는데 성적을 보시고 심란해 하실 부모님들을 생각하다 보니 많이 길어졌습니다. 부디 1학년 1반 모든 학생들이 자신의 꿈을 찾아 행복하게 고등학교 생활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날씨가 갈수록 추워지는데 건강 유의하십시오.
첫댓글 아이들 성적표에 학교에서 드리는 글을 적는 곳이 있습니다. 기억나시는지요? 우리 어렸을 때 선생님께서 한 마디씩 써주셨지 않습니까? 옛날 생각이 나서 조금 적어봐야지 하다가 장문이 되었습니다. 옛날을 추억하기에 좋을 것 같아 올려봤습니다.
오... 명문이십니다. 참 요즘 부모들이 눈씻고 잘 봐야 할 글인 것 같네요.
다시 한번 꿈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글이네요.
우리 딸 꿈은 래드애플 팬클럽 회장이래요. 아님 부산 지부장. "회장이 되려면 계획을 세워야지." 책상에 앉아서 고민하더니 "회장 안하기로 했어요." 새로운 것을 생각하거나 만들거나 하는 것 자체가 잘 안되는 것 같아요. 우리 딸만이 아니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오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