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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아우토반 역주행 신앙
(슥13:1~9)
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을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3. 사람이 아직도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가 예언할 때에 칼로 그를 찌르리라
4.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환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5.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6.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어찌 됨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독일 아우토반 역주행 신앙>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독일 아우토반 역주행 신앙’
오늘 우리가 읽은 13장 1절 말씀에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하는 말이 나옵니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
이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언하고 있는 것임을 우리가 알 수 있죠?
12장의 앞에서 우리 선민들이 성령의 임하심을 통하여 성령에 사로잡혀서 하게 되는 일이 우리가 하나님을 찔렀던 것을 애통하게 된다는 말이 12장 하반부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다’ 이렇게 얘기가 나와요.
자, 죄와 더러움, 우리가 어렴풋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근데 이 히브리어 원어의 뜻을 살펴보면 늘 말씀 드렸던 대로 죄라는 말이 ‘하타트라는 말인데, 표적에서 빗나가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러움은 ‘니다’라고 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인데, 방황하다 아니면‘ 딴 길로 들어서다’라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비슷하지요, 표적 위에서 빗나가다는 것과 길을 벗어나서 방황하는 것.
이러한 죄의 더러움의 낱말의 뜻을 염두에 두면,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이 죄와 더러움의 뜻에 부합하는 한 비유적인 사건이 기억이 납니다.
그게 바로 독일 아우토반 역주행 사건이에요.
있을 수가 없지요, 역주행이라니요.
아시는 대로 여러분 독일 아우토반은 속도제한이 없습니다.
BMW나 벤츠, 아우디, 폭스바겐 이 독일 차들이 아주 좋지 않습니까?
그런 차들이 180km~200km까지도 달리는 곳이 이 독일 아우토반이에요.
그리고 독일 아우토반은 특징이, 이웃나라 프랑스나 벨기에 같은 데를 들어서도 벌써 이 가로등이 있습니다, 고속도로에 가로등이 있는 곳이 많이 보이는데, 적어도 제가 다녀 본 독일 아우토반은 가로등이 없어요.
그래서 밤에는 앞에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없으면 아주 칠흑 같은 상황에서 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친구 목사님이 아프셔요.
근데 그 목사님의 조카가 서울에서 독일로 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로 마중을 나가야 되는데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이 목사님이 너무 감기몸살이 심하게 걸리셔서 운전을 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양반이 연세대학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계시는데, 제가 그 사모님과 그 목사님의 아들을 데리고, 제 79년도 폭스바겐 차를 타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나갔습니다.
처음이에요, 제가 직접 차 몰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나간 건.
밤중에 공항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V자로 길이 나눠지는 곳에서 제가 그만 공항으로 들어가는 길을 놓치고 직진을 해 버렸습니다, 하자마자 딱 깨달은 거예요.
뒤에 사모님도 ‘어, 전도사님 이거 아닌 것 같은데요’
그래서 일루 마냥 가면 도대체 어디로 돌아서 공항으로 가야 될지도 모르고 지금처럼 네비게이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섰습니다.
노견에 세웠어요, 차를, 세우고선 아 보니까 얼마 안 지났어요. 한 1km 도 안 지났습니다.
그러니까 싹 돌아서 가면 될 것 같은데, 앞으로 계속 직진하면 마냥 돌아갈 것 같고 이거 야단났어요.
그래서 내려서 한번 쓱~ 보니까 밤 시간이 되서 그런지 그게 그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비껴서 저쪽 마인츠 쪽으로 빠지는 그러한 도로인데 차가 많지가 않아요.
그래서 얼른 차를 돌렸습니다, 미쳤지요, 미쳤지요.
그래서 그 노견으로 중앙선은 중앙분리대가 있으니까 넘어가지 못하고 노견으로 역주행을 해 가지고 그 V자로 빠져 나가야 되었던 그 지점으로 역주행을 해서 가는 겁니다.
한 70~80km로, 아이고야~ 가다가 갑자기, -가로등이 없어요, 그래 새까만데- 갑자기 눈앞에 싸인 막대기가 탁 나타나면서 브레이크를 딱 밟았는데 이미 늦었지요.
도로에서 한 30cm 정도 높게 턱을 만들어 났는데 그 턱에 차가 꽝 부딪치면서. 다행히 차 바디는 안 망가지고 밑에 바퀴 있는데 축이, 바퀴가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독일 경찰이 왔어요.
이상할 거 아닙니까, 차가 왜 역주행으로 서 있으니까.
그런데도 이 사람이 내가 역주행을 했을 것으로는 상상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나마 잘하는 독일어, 말을 하면 될 텐데 떠뜸떠뜸 거리면서 일부러 더 되지도 않는 영어를 가지고 얘기를 하고 이러면서 경찰을 혼미하게 만들어 가지고 내가 역주행 했다고 하는 사실을 몰래 숨기고, 넘기고 그 경찰이 전화를 걸어서 견인하는 차를 불러주고 경찰은 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렇게 일이 진행되는 동안에 이제 어떻게 해요, 사모님하고 이 아이를?
근데 바로 그 V자가 눈앞에 보여요 V 자로 갈라지는 곳이, 거기에 삼각형으로 이렇게 노란 줄로 만들어 났는데 어느 한 차가 서 있습니다.
그래서 뛰어갔어요. 문을 두드리니까 깜짝 놀라죠, 안에 있던 아주머니가 독일 아주머니가, 그래서 사정을 얘기하고 이만저만해서 제 친구의 와이프를 공항으로 빨리 데리고 가야 되는데 내 차가 고장 났다, 그래 그 사람이 데려다 줬습니다.
그래서 무사히 조카는 데리고 기차타고 오시고, 저는 그 차를 견인해 가지고 새벽까지 난리를 치다가 그리고 혼자 왔지요.
아우토반, 지금도 생각하면 진짜 모골이 송연해 집니다.
어쩌자고 그렇게 미친 짓을 했는가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죄가 무엇이냐? 더러움이 무엇이냐?
더러움이 뭐라고요? 길을 벗어나서 방황하는 겁니다.
표적을 벗어나서 빗나가는 것이고 이렇게 역주행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더러움이고 이게 바로 죄악이라는 것이에요.
근데 신앙인 중에 우리가 이렇게 역주행 신앙이 있다는 거예요, 역주행 신앙.
정말 큰~일 나는 거예요.
아우토반에서 역주행 하는 것보다 더 큰일 날 역주행 신앙이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오늘 이 본문은 주님께서 오셔서 시작되는 교회의 시대, 성령의 시대 그리고 재림 때까지, 재림 때 완성되어질 모습, 지금 계속 예언해 나가고 있어요.
근데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을 위하여 열린다고 말씀한 뒤에, 그 다음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땅에서 우상의 이름도 없어지고 거짓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낼 것이다 얘기하시면서 3절과 4절에 보면 예언에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
‘사람이 아직도 예언할 것 같으면’ 이건 뭐 거짓 예언이다 참 예언이다 이런 단서가 없이 그냥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가 예언할 때에 칼로 그를 찌른다’고 그래요.
그리고 4절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환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다’ 그리고 5절과 6절에 보면 ‘내가 예언하는 선지자라고 하는 것조차 그 신분이 알려지는 것조차 부끄럽고 창피해서 그 신분을 숨기고 ‘나는 농사꾼이다’ 이렇게 얘기한다는 겁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여러분, 역주행 신앙을 경고하는 겁니다. 길을 벗어나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납니다.
샘물이 터져서 죄와 더러움을 씻어 줍니다.
그런데 이 죄와 더러움을 씻는 사건이 일어나는 중에 역주행 신앙들이 생겨납니다.
이 역주행 신앙이 도대체 뭐냐?
길을 벗어난다고 그랬잖아요? 길을, 길을 벗어나는 게 더러움입니다.
길이 도대체 뭐냐? 신앙인에게 있어서 길이, 더군다나 죄와 더러움이 씻김을 받은 뒤에 십자가 복음사건이 경험된 뒤에, 그 뒤에 도대체 역주행 사건이란 뭐냐? 길은 또 뭐냐?
주님께서 길이라 그랬어요.
주님이 길이시면서 길을 걸으셨습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가만히 보세요!
하늘에 계셨죠, 이 땅이 생겨나기도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시던 독생자로서 이 세상, 이 땅으로 내려오십니다. 길이 생겼어요.
벌써, 하늘에서 이 땅으로 길이 생겼고, 이 땅에서 십자가로 가십니다.
길이 생겼어요.
십자가로 가셔서 십자가에서 장사 된지, 죽어서 장사되신지 3일 만에 부활하십니다.
십자가에서 부활로 가십니다.
자, 또 길이 또 확장됩니다.
부활하시고 다시 오셨던 그 하늘로 승천해 올라가십니다, 길이 생겼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오셨고 땅에서 땅 끝이 되는 십자가로 가셨고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셨고 부활하셨다가 다시 승천하셨습니다.
이게 길이에요, 이게 신앙인이 기독교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 될 길입니다.
이 길을 벗어나는 것은 이게 더러움이 되고 죄악이 됩니다, 씻김을 받은 뒤에도 이게 더러움으로 다시 우리들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죄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길을 벗어나게 되면.
자,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죄와 더러움이 씻김 받은 지점부터 이제 길을 찾아갑니다.
이게 신앙인의 시작이에요.
십자가로 가야 되는 것, 십자가로 가서 죄 사함을 받고 씻김을 받습니다.
더러움을 씻김을 받아요.
자, 그 다음부터 어디로 갈 겁니까?
부활로 가게 되요.
우리 몸이 죽어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기 전에 이 세상에서도 사도바울이 말 한대로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사람으로 태어납니다. 부활의 길까지 걸어갑니다.
자, 새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살게 해 주셨어요. 인생의 시간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제 어디로 갈 겁니까?
여기서부터 오늘 본문대로 예언이 문제되는 그러한 길, 예언으로 대표되는 문제의 길을 걸어갑니다, 길을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죄 사함 받은 뒤에 마음들이, 우리 마음이 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다, 승천하신 주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야 되는 거예요, 이게 길입니다.
더 이상 이 땅에 대해서 신경을 쓰면 안 되는 거예요.
근데 이 땅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역주행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이 역주행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예언이라는 거예요 예언, 예언이 뭡니까?
이 땅에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이야기에요.
미래에 일어날 이야기를 미리 얘기하는 겁니다.
이 땅에 대한 관심으로 길이 놓이게 되고 그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이게 바로 독일 아우토반에서 재한 속도가 없이 달리는 BMW, 벤츠, 아우디, 폭스바겐을 마주하면서 달리는 역주행과도 같은 것이에요.
땅에 대해서 신경이 꺼져야 되요.
그렇지 않고 새 생명을 허락하신 뒤에 죄 사함을 통하여 새 생명을 허락하신 뒤에 우리가 하늘의 것을 찾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하늘에 계신 주님과 더불어 마음에 평강이 올 때까지 기도하는 생활, 말씀 듣는 생활 그리고 그 평강가운데서 하늘에 앉히운 바 된 상태에서 마음은 있고 몸이 살아있음으로 해서 성령이 임하시고 내 몸에,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임하시고 섭리가 임하시면서 내 몸이 움직여지고 살게 되는, 이 길을 벗어나면 역주행의 길을 가는 겁니다.
너무나 확연한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얘기 있어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으로 예언하는데 그 부모가 칼로 찔러 죽인다’는 겁니다.
이건 무슨 얘기냐 하면, 자식을 칼로 찔러 죽일 일이 있겠습니까?
근데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표현을 쓰게 되느냐 하면, 너~무나 확실하다 이겁니다, 길이.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예언을 하잖아요, 이 땅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이 여전히 죄 씻음을 받은 뒤에도 주님 따라 승천하지 못하고 이 땅에서 굴러다니면서 이 땅에서 이루고 싶은 일들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않습니까?
예언이라는 말이 여기서는 바로 이 땅에 대한 관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거지요.
비전을 갖고, 계획을 갖고, 이 세상에서 이런 일을 하자, 저런 일을 하자 이런 설교를 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자들을 부모가 칼로 찔러 죽인다는 얘깁니다.
왜?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들 앞에 펼쳐진 길은 명확하게 반대의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너무 명확하고 너무 노골적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이 땅 위에서 잘된다, 이 땅 위에서 미래 10년 뒤에 우리가 비전을 이루자, 이 땅 위에서 어떤 계획을 성취하자 이런 것들이 너무너무 반대의 길을 역주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서 칼로 찔러 죽인다는 얘깁니다.
그 정도로 명확하다는 얘기에요 길이.
여러분,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비전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제가.
비전이라는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가 생깁니다, 마음에.
그 이유가 뭘까요?
이 세상 천지에 희망, 희망이라고 하는 단어처럼 절대적으로 옳은 단어가 어디 있습니까?
옳다고 여겨지는 단어가 어디 있습니까?
절망하지 마라, 희망을 잃지 마라.
아주 어려서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듣는 이야기이고, 이 희망처럼 절대적인 가치가 라벨로 타이틀로 붙어 다니는 그런 단어가 많지 않아요.
나라사랑 같은 거 이런 것들 다.
이게 역주행이라는 겁니다, 이게 역주행이라는 거예요.
우리의 길은 미래를 향하여 뻗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 위에서 지평선 위에서 수평적으로 앞으로 달려가서 맞이해야 될 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의 미래는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나의 애인 되시고 나의 신랑 되시는 주님께서 승천해 가 계신 그 천국에서 내 미래가 위에서부터 지금 내려오고 있는 것이지 이 지상에서 지평면 상에서 앞쪽에서부터 내게로 다가오는 게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는 것이에요.
길을 잘못 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길을 잘못 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사건이 일어난 뒤에는 예언하는 자들, 이 땅 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해서 사람들, 선민들의 관심을 이 땅에 묶어두려고 하는 그런 예언,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거짓말하는 거라 이겁니다.
그래서 부모가 칼로 찌르는 사건이 벌어져도, 이상하다 하지 않을 만큼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길을 눈앞에 볼 때에 이제까지 ‘비전을 가집시다, 하나님의 능력이면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잘살 수 있습니다’라고 설교했던 모든 설교자들이 부끄러워서 자기가 설교자라는 자체를 숨기고 살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내가 그렇게 못 살지라도 여전히 땅의 관심에 묶여서 노예처럼 끌려 다닐지라도, 일단 신앙의 출발은 바른 깨달음에서 시작을 하는 겁니다.
우리 존재가 아직도 죄의 묶음 안에 있습니다.
죄 값은 사해졌지만 우리의 존재자체는 갑자기 탈 죄인이 된 게 아니에요.
하나님처럼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알고는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길이 어딘가? 길이.
그러면 이 길을 어떻게 걸어갑니까?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길이 길인데, 그 길을 벗어나면 왕창 더러워져요, 똥 밭에 구르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돈 좀 많이 벌어야 되겠다, 똥 밭에 구르고 있는 것이에요
이 세상에서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되겠다, 똥 밭에 구르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내 자식들 좀 잘 좀 키워봐야 되겠다, 똥 밭에 구르고 있는 거예요.
더러워지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이 길을 걸어갑니까?
죄 사함 받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이 끝나면 안돼요.
십자가 사건으로 죄 사함 받고 사는 것도 십자가로 살아야 길을 제대로 갈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오 감각을 통해서 마귀는 이 세상에 우리 마음의 신경을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우리 마음을 잡아당기려고 해요, 우리 마음의 신경을 세상을 향해 켜도록 만들려 합니다.
그래서 눈앞에 사건이 벌어집니다, 눈앞에 사람이 나타납니다, 귀에 들립니다.
이 모~든 보이고 들리는 것들 것들마다에서 우리의 신경을 쓸 만한 일이 시작되면 빨리 십자가를 먼저 보고 그 일에 대해 신경을 끄는 거예요.
폭풍이 일어도 폭풍 만난 배 위에서처럼 주님이 잠을 주무셨던 것처럼 폭풍이 일어도, 그 눈앞에 보이는 폭풍의 현상에 대해서 내 주변상황에 대해서 내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사건에 대해 죽어야 됩니다.
그래야 마음이 이 땅에 빠져 들어가지 않고, 하늘로 주님이 가신, 승천하신 그 길을 따라 아버지 보좌 앞까지 무사히 도달할 수가 있고 거기서 마음이 평강을 찾고 거기서 마음이 행복과 만족을 찾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매사에 길의 방향을 세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과는 반대의 역주행을 하게 됩니다.
아우토반의 역주행이에요.
아우토반,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밤에 독일 아우토반에서 역주행을 하는 겁니다.
아무리 노견이라도 용납이 안돼요, 큰일 납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아보자 역주행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잘 살고 못사는 거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나보다 비교가 안 될 만큼 능력과 지혜가 있으신 내 아버지께서 결정하시면 됩니다.
자, 내 마음이 주님 승천하신 길을 따라 끝까지 하늘까지 올라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 품에서 만족을 느낄 때, 그때 남아있는 이 몸에 성령님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임하시고 섭리가 임하시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 질 것이에요.
하늘에서 정해진 뜻이 어떤 사람에게 땅에서도 내려와 이루어지는지 아십니까?
마음이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끝까지 승천해서 아버지 품에 안겨서 마음이 만족하고 있는 사람의 생애를 위해서만 정해진 하늘의 뜻은 땅에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관심은 이 땅에서 잘사는 뭐 이런 거 아니에요, 애초에.
죄 씻음 받은 다음에는 날마다 어떻게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가느냐라는 것이 우리의 관심이지, 잘살고 못사는 뭐 이런 거는 돈이 좀 있게 되고 없게 되고, 건강하게 되고 오래 살게 되고, 덜 살게 되고 빨리 죽고 이런 모든 거는 아버지의 일이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겁니다.
목회를 하는 목사님이십니까?
누가 오느냐 마느냐 하는 것, 이거 신경 쓰지 마요 목사님의 일이 아닙니다.
에이~ 이게 목사 일이 아니야? 목사님의 일이 아닙니다.
그건 다시 똥 밭에 구르는 거예요, 길이 아니에요.
날마다 목사님이 하실 일은 그 예배당 안에서, 그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교인들의 세계 속에서, 주님의 길을 걸어가서 날마다 마음이 승천해서, 왜 날마다? 이 세상의 관심거리들에 의해서 나도 모르게 자꾸 끄집어 내려지니까, 날마다 십자가 붙잡고 올라가서 거기서 완전히 만족한 상태에서 교인들에게 보내지는 겁니다.
그게 다예요, 보내져서 할 말은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에요.
예언이 거짓말이 됩니다.
이제는 이 세상에서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에 대해서 얘기하는 예언, 이거 다 정말 부모가 칼로 찔러 죽여야 될 정도로 잘못된 상태라 이겁니다.
그게, 그 정도로 잘못 되었다는 것이 교회 안에 좀 인식이 팽배해져야 되요.
여전히 우리의 상태, 우리의 존재는 죄에 묶여서 이 세상 것이 달콤하고 이 세상 것이 좋고, 이 세상 것에 끌려가더라도, 우리의 깨달음이라도, ‘아! 이건 지금 내가 더러움에서 뒹굴고 있는 것이다’라는 걸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좀 해보자는 생각, 독일 아우토반을 깜깜한 밤에 역주행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예, 관심도 없어도 되요, 관심도 없어도 되요, 이 땅에 대해서 왜?
100% 아버지가 관심하고 계시니까.
단지 우리의 갈 길은 십자가를 기준으로 해서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해서 새 생명을 허락 받은 시간만큼 하늘을 향해서만 아버지를 더 많이 느끼고 주님을 더 많이 느끼면서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그 무한하신 사랑과 무한하신 인격 안으로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느끼고 아버지 되심을 실감할 것인가에 총력을 기울이면 이 땅의 일은, 약속드리죠.
아버지 뜻대로 진행 될 것입니다.
역주행, 중단하십시다!
십자가를 기점으로 이제는 위로 가야 됩니다, 위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독일 아우토반의 역주행 경험, 누군가는 반드시 이거보다 더 끔찍한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역주행한 결과, 십자가가 이 땅에 있게 된 이유는 우리 마음을 하늘의 길로 달려오라고 허락하신 것이오니, 아버지 하나님 이제 주님 가신 그 길을 고대로 따라가는 복된 선민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안.젼.놀.ㅇㅣ.ㅌㅓ. 추.천.합.니다.
Z. M. M. 6 .9 닸.켬 (추,천,인 1234)
회,원ㄱㅏ입ㅅㅣ 3000원ㅈㅣ급, ㅁㅐ일 첫.충.전5%추ㄱㅏㅈㅣ급.
올킬, 올ㄷㅏ이, ㅇㅣ벤.트.중입ㄴㅣㄷㅏ. 단/폴 ( 50 ) 모ㅂㅏ~일ㄱㅏ~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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