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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그는 휠체어에서 모든일을 해냈다>의 줄거리:
그는 휠체어에서 모든 일을 했다! 2001년 1월 10일 루즈벨트 대통령 동상제막식에서 전미 장애인 협회 회원들이 외쳤던 구호입니다. 휠체어를 탄 대통령의 모습이 동상으로 건립되기 위해선 긴 시간 동안의 논란이 있어야 했습니다. 생전의 루즈벨트는 휠체어 탄 모습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휠체어에서 모든 일을 해냈다
(마8:14-17)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그는 휠체어에서 모든 일을 해냈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그는 휠체어에서 모든 일을 해냈다’
이 말은 2001년 1월 10일에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막식에서 그 제막식에 참여한 전미장애인협회 회원들이 제막식에 참여하고 있는 중에 외쳤던 구호입니다.
‘그는 휠체어에서 모든 일을 해냈다’
여러분도 아시겠습니다마는 미국 제 32대 루즈벨트 대통령은 역사상 유일하게 3선 대통령이십니다.
2선 대통령은 많이 계시는데 3선 대통령은 이 분이 유일하다고 그래요.
그 루즈벨트 대통령의 기념관 앞에 세워지게 될 동상이 휠체어를 타고 있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39세인 1921년에 갑자기 소아마비가 찾아와서 양쪽 다리를 다 못쓰게 되십니다.
그래서 재임기간 동안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미국을 통치하고, 1929년에 미국에서 시작해서 전 세계를 다 뒤덮어버렸던 세계경제대공황을 이 휠체어에 탄 채로 뉴딜정책 등을 동원해서 극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동상이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건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협회 회원들이 ‘그는 휠체어에서 모든 걸 해냈다’고 하는 구호를 외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휠체어를 탄 모습이 처음부터 그렇게 결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 자신에 관한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사진들이 일 만여 장이 있는데 그 중에서 휠체어를 타고 있는 모습이 찍힌 것은 실제로 4장밖에 없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루즈벨트 대통령 자신은 휠체어를 타고 있는 모습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느끼기에 그 당시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장애인의 모습이 곧 루즈벨트 대통령 자신인 것으로 편견을 갖고 있었어요.
겉으로 드러나 휠체어를 타고 있다고 해서 그분의 인격이 휠체어를 타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화된 시선을 의식해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원치 않았어요.
이 기념관 측과 루즈벨트 대통령의 가족이 한 편이 되고, 그리고 장애인협회가 다른 편이 되어서 계속 루즈벨트 대통령의 동상의 모습을 놓고 싸웠습니다.
장애인들은 ‘평소의 진실대로 휠체어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동상이 건립되어야 된다, 그래서 장애인도 세계대공황을 극복하고 미국을 이끌었던 그러한 모습으로 상징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라는 것을 루즈벨트 동상을 통해 나타내야 된다고 주장을 하고,
가족과 기념관 측에서는 당사자가 늘 외투로 휠체어를 탄 아랫부분을 가려서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지 않았느냐? 그런데 굳이 대통령의 동상을 휠체어 탄 모습으로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맞섰는데, 카터 대통령이라든지 부시 대통령이라든지 이런 분들이 원래 모습, 사실대로 동상을 건립하자고 하면서 의회에서 통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격 어린 마음으로 그 제막식에 참여했던 장애인협회 회원들이 외친 구호였다는 거예요.
“그는 휠체어에서 모든 일을 해냈다”
휠체어를 탔다고 그의 인격이 휠체어를 탄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몸의 모습과 그 사람의 마음을 중심으로 한 인격은 분명히 다르다, 휠체어에 타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저 장애인이 무엇을 해낼까 하지만 그의 인격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3선 대통령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전 세계의 경제공황을 구원해내는 놀랍고 눈부신 역할을 해냈다, 몸의 모습과 인격을 분리해라!’ 라는 것이었어요.
여러분,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뒤에 베드로의 장모님 집에 들어가서 베드로 장모님께서 열병을 앓고 누워계신 모습을 보시고 열병에서 일으켜서 세워주십니다.
그런 다음, 베드로의 장모님이 예수님께 수종을 들었다는 얘기가 나오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처갓집에 계시는 동안에 그 동네에 많은 귀신 들린 자와 병든 자들이 다 모여와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다 쫓아내시고 병을 고쳐주셨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특이하게 생각할 점은 이렇게 예수님의 병고치고 귀신 쫓아내신 이 사역 끝에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하신 이사야서 53장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라’ 하는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사건을 여기에 갖다 들이댑니다.
십자가 사건을 들이대면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고 얘기해요.
이게 왜 특이하다고 하는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셨다, 그리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다‘는 이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묵상을 하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셨다는 말과 연약한 우리를 강하게 해주셨다는 말과 같은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 몸에 병이 걸리면 내가 병에 걸렸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나를 고쳐주셨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이사야서의 예언과 이 예언에 따른 예수님의 사역은 어떤 것이었나 하면 내가 병에 걸리면 내 병을 나로부터 따로 분리해서 담당하시고 짊어지신다는 얘깁니다.
나의 연약함은 내가 연약한 것이 아니라 나의 연약함을 나로부터 따로 떼서 담당하신다는 얘깁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 있는 열병을 고치신 이야기와 같이 맞물려 가는 것이에요.
이 이야기가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를 알려면 열병이라는 얘기로 다시 한 번 돌아가 봅니다.
먼저 앞에서 우리가 나병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죠?
마태가 보는 시각에서, 마태는 주님의 십자가사건을 경험하고 주님이 천국으로 승천하신 것을 압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심과 함께 그 천국이 이제 우리의 삶의 현장이 되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나병이야기를 왜 했느냐 하면, 그렇게 주님의 사역을 통하여 내 눈앞에 다가온 천국을 맞이하고 있는 우리의 존재, 우리의 사람됨의 상태를 나병으로 본 겁니다.
왜냐하면 나병이 사회생활에서 제외되었으니까 삶이 죽은 자니까, 천국의 삶에서 제외된 자, 이게 바로 우리에요.
마태는 죄라는 나병에 걸린 자라고 보는 거예요,
그리고 열병은 죄의 나병이 걸린 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보고 있는 겁니다.
천국 앞에서 있는 모습이 나병환자의 모습이고 그 나병환자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열병에 걸려 있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면 열병에 걸려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마음이 몸에 묶여있고, 매여 있고 마음이 몸의 종노릇 하고 있는 상태를 열병으로 마태가 표현하고 있다는 거예요.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경쟁합니다, 사업 때문에 밤을 새웁니다, 자식을 키우느라 날마다 씨름합니다.
몸이 있기 때문에 애인을 만나서 뜨겁게 사랑한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나병이라는 죄악에 묶여서 몸의 종노릇 하는 동안에 일어나는 열병으로 이해를 한 겁니다.
다 열병이에요.
내 마음이 몸에 붙어서 거울을 보이는 육신을 가슴 치면서 ‘이게 나다’라고 하고 있는 그 동안에 나병환자이면서 그 동시에 그 몸을 ‘나’라고 생각하며 몸에 매여 종노릇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이 완전히 열병에 걸린 자들로서 동분서주하며 고군분투하고 뛰어다니며 살고 있었던 모습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아프리카에 이상한 종족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걸린 열병도 말라리아가 아니었겠나 추측을 합니다만, 말라리아는 몸에 열이 나면서 폭포수처럼 땀이 흘러 사람이 기진해버린다고 합니다.
이 종족은 열병이 걸리면 이 사람들은 이 병을 귀신이 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귀신이 내게 계속 다가온다고 여겨서 그 귀신을 피하느라 열병에 걸린 자들이 열병을 낫기 위해서 막 뛰어다닙니다.
이 열병을 가만히 있어도 땀을 많이 흘리게 되기 때문에 체력소모가 아주 극심한데 더군다나 막 뛰어 가는 겁니다, 열병을 낫게 하겠다고 마구 뛰는 겁니다.
우리가 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마태는 보고 있는 거예요.
돈이 안 벌려요, 그러면 천국타운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면 돈 벌기를 중단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돈이 안 벌린다고 생각해서 잠도 안자고 걱정을 하지요?
그러니까 이상한 종족들처럼 돈이 안 벌린다고, 그 열병을 고치겠다고 더 열심히 뜁니다.
자식이 내 맘대로 안 되니까 더 열심히 자식과 싸웁니다.
열병을 열병으로 고치겠다고 뛰어다니는 게 바로 현실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열병에서 놓임 받은 천국타운에서 사는 모습은 뭡니까?
이 몸이 마음에 묶여서 마음이 그 몸을 움직여 가면서 ‘돈 벌고, 사업 잘 해보겠다, 성공하겠다, 공부를 잘 해보겠다, 경쟁에서 이겨보겠다’ 이렇게 사는 게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다 제쳐놓고, 몸과 연관된 모든 일을 중단하고 마음이 주님께 수종드는 게 천국타운의 삶이라는 겁니다.
돈도 안 벌고, 마음에 돈 번다는 목적이 없는 거예요.
직장을 나가도 주님께 수종든다는 맥락에서 나가는 겁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마음이 주님께 수종만 듭니다.
수종 드는 것은 섬기는 것이고, 섬기는 것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중에 주님께서 언급하신 것이 마음, 눈이에요, 섬기는 게 뭐냐 하면 마음으로 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돈을 섬긴다 할 때, 마음으로 돈을 보면서 이 몸으로 하여금 돈을 벌게끔 움직이게 하는 것이 열병이라는 겁니다.
마음으로 주님을 보는 게 섬기는 겁니다.
마음으로 자식을 봅니다, 이 몸이 난 자식을 보면서 그 자식과 씨름하면서 자식을 이끌어가려고 하는 이게 열병이라는 거예요.
자식 앞에서도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께 수종을 드는 거지요.
그러면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것을 연약함을 담당하고 병을 짊어지셨다, 이렇게 표현하신 이유를 이제 좀 짐작하실 수 있겠습니까?
자, 내가 질병에 걸려서 휠체어를 타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태가 보는 것은,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의 삶은 그 소아마비 걸린 자기의 몸을 마음이 붙잡고 있는 상태, 열병의 상태입니다, 그 열병의 상태의 연장선상에서 주님께 나와서 ‘고쳐주세요, 고쳐주세요’ 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이때는 공간적으로 예수님께서 몸을 입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몸으로 만나는 공간으로 가지 않으면 못 만났어요.
그러나 지금 마태가 느끼고 있는 예수님은 누구시냐 하면, 승천하신 주님으로서 성령을 통하여 온 세계의 모든 사람 옆에 와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 앞에서 어떻게 태도를 취하느냐의 문제이지, 주님께서 이미 와 계십니다.
그러면 이 주님께서 와계신 상태에서 열병에서 떠나 주님을 섬기는 사람의 자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는 주님의 말씀 속에서 그 자세가 드러난다는 거죠.
소아마비가 걸린, 휠체어를 탈 수밖에 없는 내 몸으로부터 내 마음이 이사야가 예언한 주님의 십자가사건을 거치면서 분리가 될 것을 마태는 지금 보고 있는 겁니다.
주님이 십자가사건을 일으키시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지만 주님과 십자가에서 연합한다는 겁니다.
주님과 내가 함께 죽었다가 연합하게 될 경우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주님이 휠체어 탄 나의 몸을 따로 담당하시고 내 마음이 그 몸에서 분리되어서 마음은 주님을 섬기는 쪽으로 갑니다, 이전까지는 몸을 섬겼어요, 몸을.
그래서 소아마비인 내 몸, 맘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에 매여가지고 하고 싶은 것을 못해서 안타깝고 고통스럽고 창피하고 이런 마음으로 살았는데, 주님의 십자가를 거치면서 어떻게 됩니까?
휠체어 탄 내 몸은 주님이 당신의 수중으로 빼앗아 가시고, 이전까지는 내 마음이 그걸 움직였었는데, 내 마음은 따로 분리돼서 몸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쪽으로 바뀌어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우린 이렇게 착각합니다.
병이 나면 병든 몸을 이끌고 주님께 나와서 주님께 ‘내 병든 몸을 고쳐주세요’ 기도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태가 승천하신 주님,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볼 때에 바라보고 있는 관점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을 통과한다는 것은 병든 몸으로라도 내 병든 몸을 먼저 앞세우는 게 아니라 당연히 주님과 연합하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와 연합하게 될 경우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병든 내 몸이 내 마음이 낫게 해달라고 얘기하고 기도하게 되는 상태, 내 마음이 내 몸을 주관하는 상태, 내 마음이 내 몸을 섬기는 상태에서 분리되는 것, 그리고 내 몸이 주님의 손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지요?
내가 병들었을 때 주님께 나와서 ‘병 고쳐주세요’ 하는 것은 아직도 열병 상태에 있다는 겁니다, 내 마음이 아직도 내 몸을 섬기고 있고, 내 마음이 내 몸에 매여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열병에서 낫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이고, 열병에서 낫는다는 것은 내 마음이 몸으로부터 독립한다는 얘깁니다.
이 말을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신을 따르는 자와 성령을 따르는 자’라고 얘기를 해요.
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좁은 길과 넓은 길을 어떻게 얘기했습니까?
세상과 마음 사이의 관문인 몸에 매여서 몸의 오감관으로 들어오는 재료에 복종하는 것, 마음이 끌려가는 것이 넓은 길이라고 말했어요.
마태가 바로 그걸 보고 있는 겁니다.
열병이 무엇이냐?
마음이 몸에 묶여서 몸의 상태가 곧 나의 상태인 줄 알고 살아가고 몸으로써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 난리법석을 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승천하신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바라보는 쪽으로 빠져나가고, 대신에 내 몸은 이제까지는 내 마음이 붙들고 있었고 내 마음이 몸을 위해 봉사했지만 이제는 주님께서 내 몸을 장악하시고 질병이 있는 몸이던, 귀신이 자기 집으로 사는 몸이건 주님께서 그 몸을 담당하시고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휠체어에 앉아서도 모든 걸 할 수 있고 주님께서 휠체어에서 일으키실 수도 있고 그건 주님의 소원에 따른다는 겁니다.
천국에 들어가 사는 사람은 십자가를 통과하기 때문에 내 몸이 아프다고 내 몸에 대한 나의 소원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마태는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이 일으키신 이 기적들을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병든 몸으로서 병든 몸을 고쳐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에서 온전히 주님과 연합해서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럴 때 마음과 몸이 분리되면서 마음은 주님을 섬기게 되고 주님만 바라보게 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보좌만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타운에 사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그럴 때 병든 나의 몸, 이 몸은 주님께서 맡으셔서 낫게 하시려면 낫게 하실 것이고, 사도바울처럼 육체에 가시가 박힌 상태로도 로마를 뒤집어엎는 복음의 사역을 일으키시려면 일으키실 수도 있는 것이고, 그리고 수많은 장애인들이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밝게 누구보다도 큰일을 하면서 살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휠체어에 앉아서도 나라와 세계를 구할 수도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짊어지심, 하나님의 담당하심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병이 들잖아요?
그러면 득달 같이 병원에 가시기 전에, 그렇게 급한 건 아니잖아요?
한 시간, 두 시간, 하루 이틀 기도 못합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십자가에 매어달려 함께 연합해서 죽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십자가를 거쳐서 천국으로 들어가서 병든 몸으로부터 내 마음이 자유로워집니다, 십자가에서 죽으니까.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연약한 몸, 병든 몸에 대해서 죽는 거예요.
이 몸의 상태가 곧 ‘나’가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키가 작다고 못할 일이 없고, 휠체어에 앉았다고 못할 일이 없고 지금 병에 걸렸다고 못할 일이 없어요.
또, 건강하다고 할 일이 없어요.
키가 크다고 할 일이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십자가를 거치면서 건강한 몸이건 병든 몸이건 다 분리되는 겁니다.
이지선 양이 그렇게 예뻤던 얼굴이 흉한 모습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밝게 살 수 있는 것은 마음이 몸으로부터 분리되니까 가능한 거예요, 십자가를 통해서.
이렇게 제로원이라고 하는 명확한 원리를 통해 된 건지, 아니면 그분이 어떤 모습인지 모르지만 이 십자가의 의미는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그 몸을 나라고 생각해서는 살 수가 없지요.
주님의 십자가는 이 몸으로부터 마음을 분리시켜 줍니다, 해방시켜 줍니다.
그리고 몸의 종노릇 하던 이 마음은 주님을 섬기는 자리로 바꿔줍니다, 열병에서 깨어나게 합니다.
그러면 내 몸은 주님께서 장악하셔서 필요하면 낫게 하시고, 또 장애인으로 살게 되더라도-주님 뜻이 그럴 수도 있죠- 장애인이기 때문에 못할 일은 이 세상천지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몸이 건강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도 착각이고, 장애인이기 때문에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도 착각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셨다, ‘연약한 우리를 강하게 하셨다’가 아니라 ‘연약함을 담당하셨다’ 그 연약함은 마음의 연약함이 아니고 몸의 연약함 아닙니까?
그리고 병을 짊어지셨다, 나를 짊어지신 게 아니에요.
내가 주님을 짊어집니다, 주님께 수종을 드니까 내가 주님을 짊어집니다.
그런데 내 병을 주님이 짊어지십니다.
여러분, 병들면 ‘나와서 주님께 기도하자’ ‘병 고침을 얻기 위해 기도하자’
그 전에 주님의 십자가를 먼저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온전히 통과하게 되면 내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가 안 나와요.
주님이 짊어지시고 담당하신다는 것은 내가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자는 게 아니죠.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를 거치지 못한 상태, 자연인의 상태로서 있는 자들이 주님께 나와 고침을 받는 모든 사건들을 거기서 복음적 의미를 찾아 해석을 해나가는 것이 이 마태복음과 4복음 전체의 내용입니다.
그냥 병을 달랑 고치는 것, 이거 아니에요.
아직도 내가 병든 몸을 갖고 나와서 예수님께 내 몸을 낫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열병을 앓고 있는 구조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예요.
꼭 기억하세요!
먼저 십자가를 제대로 거친다면, 죽는 역사가 올바르게 일어나면 반드시 마음은 열병의 상태에서 빠져나와서 몸으로부터 분리됩니다.
마음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쫓아가고,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 따라 하늘로 승천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는 몸은 고쳐주시든 장애인으로 살게 하시든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장중에 매여서 주님께서 짊어지시고 주님께서 담당해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장애인의 몸이라도 그것이 주님의 몸이 되고 주님께서 짊어지시는 주님의 부담이 되고, 죽거나 말거나 이 몸은 우리의 부담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우리 인격이 하늘나라 가면 되는 거예요.
이 몸은 어차피 몇 년 살다가 죽을 거예요.
죽을 때까지 주님께서 담당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다는 얘기는 근본적인 얘기로 우리 몸을, 우리 육체를 주님께서 담당하시고 주님께서 짊어지신다는 얘깁니다.
우리 마음은 몸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그는 휠체어에서 모든 일을 해냈다’ 이 구호가 내가 나를 향해 할 수 있는 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육체의 연약함과 질병이 발생할지라도 먼저 주님의 십자가를 통과하게 됨으로써 이 몸이 병원에 가서 낫든지, 식이요법으로 낫든지, 어떻게 되든지 그 모든 것들이 다 주님이 우리 몸을 이끌어 가시고 짊어지시는 한 방편으로서만 나타나게 하여 주시고 우리 마음은 몸에서 열병에서 떠나 오직 마음으로 승천하신 주님 곁에 가있는 것으로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