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6:1-10, 미디안의 손에 넘기시니, 23.1.18, 박홍섭 목사
사사기 6장-8장은 다섯 번째 사사 기드온의 이야기이고 그중에서 오늘 본문은 기드온이 사사로 등장하게 된 배경입니다. 그 서두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또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는 암울하지만 익숙한 기사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그냥 악을 행했다고 번역했는데 원문은 ‘그’ 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알 수 있는 매번 넘어지고 또 실패하고 걸리는 이스라엘의 고질적인 죄가 ‘그 악’이라는 표현에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고질적인 죄가 무엇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구원의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신들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의 고질적인 악입니다. 25절에 기드온의 아버지 집에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미루어볼 때 이때 이스라엘은 집마다 우상을 공공연하게 섬기고 있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만 아닙니다. 사사기 전체의 패턴을 요약하는 2:11-19 말씀에 고스란히 나타나는 죄가 바로 이스라엘의 고질병인 우상숭배입니다. 그들은 틈만 나면 여호와의 목전에서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섬겼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깁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노략자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기면 고통 가운데 부르짖고 하나님은 사사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사사가 죽으면 그들은 또다시 더 타락하여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버립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고질병인 우상숭배입니다. 이스라엘만의 문제일까요? 우리도 똑같습니다. 돌아서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조금만 편해지면 다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면서 하나님을 배신하고 욕심을 위하여 우상을 섬기거나 하나님을 우상처럼 대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십계명의 첫 번째와 두 번째를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지 말라는 말씀으로 주셨겠습니까? 우상숭배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라는 뜻도 있지만, 인간이 가장 잘 넘어질 수 있는 죄가 우상숭배이니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최악의 슬픔을 안기고 마귀에게는 최고의 기쁨을 선사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이렇게 대놓고 여호와의 목전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하나님 섬기기를 싫어하고 우상을 섬기면서까지 자기 높임을 추구합니다. 이 고질병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십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 7년을 보냅니다. 2-5을 보십시오.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사람이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 먹을 것을 남겨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고난의 기간은 다른 시기에 비해 짧았지만, 그 어떤 기간보다 미디안을 통한 고통과 고난의 강도는 크고 강했습니다. 파종 때가 되면 미디안은 메뚜기떼처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을 대동하고 올라와서 곡식과 토지 소산과 가축들을 약탈하여 쓸어갔습니다. 장막까지 치면서 땅의 소산물을 파괴했습니다. 얼마나 그 약탈이 무자비하고 심했으면 이스라엘이 산에 굴과 웅덩이와 산성을 만들어 숨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정도로 미디안의 침탈은 심각했습니다.
미디안이 누구입니까? 민 31장 7-18을 보면 미디안 족속이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거의 멸절되는 기사가 나옵니다. 남자와 사내와 여자들과 아이들 중에도 남자 아이들은 다 죽고 가축과 양떼를 다 빼앗기고 성읍이 다 불태워졌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상숭배라는 고질적인 죄에 빠진 이스라엘을 그들에게 넘겨주시자 그들이 이스라엘을 이깁니다. 역대급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이스라엘과 미디안의 위치가 완전히 역전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들입니다.
그렇게 고통이 심해지자 마침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6절이죠.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처음부터 부르짖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인간은 붙들 수 있는 수단이 있을 때 결코 하나님께 나와 부르짖지 않습니다. 굴과 웅덩이와 산성을 팔 수 있을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아직 믿는 구석이 남아 있을 때는 부르짖지 않습니다.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다 소용없다고 느낄 때, 붙잡을 지푸라기가 하나도 없다고 느낄 때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더군다나 이들의 부르짖음은 아직 우상숭배와 악행에서 돌이키는 회개의 요소를 찾아보기 힘든 그저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고통 속에서 내뱉는 신음과 탄식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들을 불쌍히 보시고 구원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이번에는 방식이 그전과는 조금 다릅니다. 바로 사사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지 않고 한 선지자를 세워 하나님의 메시지를 먼저 들려주십니다. 7-10이죠.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왜 너희들이 미디안을 통한 이런 압제와 고통을 당하는지 아느냐는 뜻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구원과 그 구원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무서운 종살이에서도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분입니다. 지금 미디안의 약탈에서도 능히 구원해주실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미디안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기 전에 먼저 왜 너희들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문제는 지금 그들이 겪고 있는 미디안이 주는 고통과 육신의 배고픔이 아닙니다. 떡은 언제든지 주실 수 있습니다. 미디안도 언제든지 쫓아내고 치워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언제나 그들의 문제는 구원의 은총을 잊어버리고 구원의 목적과 부르심의 소망을 잊어버리고 이 땅의 욕심과 더 많은 떡을 위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죄에 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고질병이며 우리의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빛이고 구원이며 생명의 능력이요 산업과 잔의 소득이며, 능력과 찬송인 하나님, 나의 요새와 반석, 나의 바위와 방패와 구원의 뿔이신 여호와 하나님, 나의 소망이며 기쁨이고 사랑이신 하나님, 나의 구속자이며 왕이요 목자이신 하나님, 나의 피난처와 영광이며 내 머리를 드시는 유일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을 세워서 섬기고 의지하는 우상숭배가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 고질병이 나에게는 없습니까?
사실, 이스라엘은 7년이 아니라 더 두들겨 맞고 비참해져도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제대로 회개하는 마음도 없지 않습니까? 이들의 부르짖음은 자신의 본질과 악한 모습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힘들어서 울었습니다. 이 어려움에서 제발 건져달라는 부르짖음입니다. 이스라엘은 줄넘기처럼 늘 제자리를 반복합니다. 줄넘기하면 제자리에서 올라가고 내려가고 뛰는 것을 반복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렇습니다. 환경이 좋으면 믿음도 감정도 고양되었다가 고통스러우면 떨어지고 곤두박질하는 것을 반복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의미와 형통함의 목적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순경이든, 역경이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생각하고 힘들지만 계단을 걸어서 다음 단계로 올라가려고 하지 않고 늘 줄넘기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7년의 고통을 통해 너무 힘들고 아프다고 부르짖는 이들을 불쌍히 보시고 한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주시고 구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들이 진심으로 기도해서 이런 응답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이 이런 은혜를 받을 만해서가 아닙니다. 이들의 부르짖음과 기도는 여전히 세속적이고 자기 고통과 아픔밖에 모르는 수준이지만 이런 이스라엘을 긍휼히 보시는 하나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이제 앞으로 기드온을 불러 사사로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이유도 오직 하나,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입니다. 기도 응답의 근거는 우리의 경건이나 우리의 애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자비와 긍휼하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고질병인 우상숭배의 죄와 탐심이 언제 치료될 수 있습니까? 고통과 고난이 아닙니다.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붙들어야 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비가 어디 있습니까? 아직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못하는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고 있음에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미디안이 물러가지 않았다고 하나님의 은혜가 어디 있냐고 불평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스라엘처럼 가나안의 풍요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죽은 신으로 취급하고 아모리 사람의 신들을 더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말씀을 떠나서 하나님 없는 안락함과 평안함을 추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압제로 인한 쓰디쓴 고통으로 다시 찾으려 하십니다. 아니 그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다시 돌려세우려고 합니다.
자기 백성에게 고통을 허락하실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늘 줄넘기하는 수준의 이스라엘, 아니 제자리 정도가 아니라 갈수록 부패와 타락의 수준이 깊어지는 이스라엘이지만, 고난의 기간보다 평화의 시간을 훨씬 더 길고 오래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십시오. 첫 사사 옷니엘 때는 고통 받는 기간이 8년, 평안의 시간이 40년이었습니다. 에훗 때에는 고통의 시간 18년, 평온한 기간이 80년입니다. 드보라와 바락의 때에는 고통 20년, 평안의 시간 40년입니다. 지금 기드온 때도 고통의 시간 7년, 나중에 주시는 평안의 기간은 40년입니다. 한결같이 평안의 기간이 더 깁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고통의 시간보다 평안의 기간을 통해 그들을 인도하고 다스리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깨닫지 못하고 고질적인 우상숭배의 죄로 스스로 하나님의 징계와 고통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바로 이스라엘과 그들이 대변하는 우리입니다.
우리의 죄와 불신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가 이토록 깊고 넓고 높고 깁니다. 성령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런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는 끝없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오래 참으심과 긍휼하심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하시고 고난으로도 잘 치료되지 않는 탐심과 우상숭배라는 고질적인 죄가 치료되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저녁에 그 은혜를 소망하면서 기도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