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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선시(禪詩)의 인불사상
누구나 다 지니고 있는 신통
“법당은 훌륭하나 부처님이 영험이 없구나[好好法堂 佛無靈驗].” 신찬(神贊) 스님이라는 상좌가 은사스님이 목욕을 할 때 등을 밀어드리면서 한 말이다. 그것도 아는 것은 없으면서 살만 잔뜩 찐 은사스님의 등짝을 불쌍하고 가엽다는 듯이 툭툭 두드리면서 말이다. 그 광경을 가만히 그림을 그려보라. 누구라도 그려지지 않는가.
그때 상좌로부터 곧바로 날아간 촌철살인의 한마디였다. 그 부처님은 정말 영험이 없었던지 그 말을 듣고도 더 이상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광명을 놓는 일은 가벼이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광명을 놓는 일. 바로 그것이다. 알고 모르고, 미련하고 영리하고는 별 문제가 아니다. 등을 두드리면 돌아볼 줄 아는 그것. 그것이 곧 부처님의 능력이며 부처님의 신통이다.
아름답고 신기한 부처님들 갖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이여, [九類同居一法界 紫羅帳裏撒眞珠] 참다운 지혜를 갖춘 훌륭한 성인은 사람을 얼마나 깊이 있게 꿰뚫어보고 바르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으로서 판단할 수 있다. 갖가지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하였지만 실은 온갖 종류의 생명이다. 그들을 불교에서는 아홉 종류의 생명들로 나눈다. 어떤 종류의 생명이든 모두가 똑같은 아름답고도 신기한 생명 부처님들이다. 그들이 함께 같은 지구, 같은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간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 신기하고 아름답다. 마치 붉은 비단 위에 빛나는 진주를 한껏 뿌려놓은 듯 눈부시기 그지없다. 요즘의 광경으로 표현하자면 밤비행기를 타고 서울 하늘에서 시내를 내려다 볼 때 갖가지의 전등불이 반짝이며 아름답게 빛을 발하는 것과도 흡사하리라. 생명의 실상을 깊이깊이 사유해 보면 왜 아니겠는가? 참다운 지혜를 갖춘 성인들은 하나같이 모든 사람 모든 생명들이 그렇게 빛나고 아름답다고 보았다. 그래서 ‘당신은 부처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부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받들어 섬겨야 하리라. 염불처럼 읊조리며 길이길이 찬탄하여야 하리라.
찾는 사람이 찾을 부처님 밤마다 밤마다 부처님을 안고 자고
부처님은 누구신가? 지금 이렇게 알고 싶어서 찾고 있는 그 사람이다. 즉 찾는 사람이 찾을 부처님이다. 그래서 밤마다 같이 자고 아침마다 같이 일어난다. 아무리 부부라 한들 태어나면서부터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날 수가 있겠는가. 앉고 일어나고, 가고 오고, 말하고 침묵하고에 늘 같이 하는 그 사람이다. 실은 모든 일에 같이 한다고 표현하지만 주객이 나누어 질 수가 없는 관계다. 관계라는 말을 쓰지만 관계도 아니다. 편의상 틀린 표현인 줄 알면서도 하는 말이다. 언어의 한계가 그런 것이다. 잠자는 사람이 부처님이다. 잠자고 일어나는 사람이 부처님이다. 일어나거나 앉는 사람이 부처님이다. 말하거나 침묵하는 사람이 부처님이다. 이와 같은 일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이 아니지만 이러한 일을 한 가지라도 하는 사람은 모두 부처님이다. 어디라도 이런 사람이 있거든 부디 부처님이라고 받들어 섬기자. 공양 공경하고 존중 찬탄하자. 가정이 화목하고 이웃이 행복하고 나라가 평화롭다. 이런 선시가 있다. “우습다. 소를 탄 자여. [可笑騎牛子 騎牛更覓牛 斫來無影樹 銷盡海中漚] 조선시대의 소요태능(逍遙太能, 1562-1649) 스님의 ‘소를 탄 사람[騎牛子]’이라는 선시다. 선가에서는 마음을 찾는 일, 또는 부처가 되는 일을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하였다. 마음의 소라 하여 심우(心牛)라고도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되는 과정인 소를 찾는 과정을 그린 심우도(尋牛圖)라는 그림이 유명하다. 소를 탄 사람, 소를 찾는 사람, 소를 먹이는 사람 등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난행과 고행을 하면서 소를 찾아 나섰지만 소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정작 자신이 타고 있다. 찾아 나설 줄 아는 일이 벌써 그 찾으려는 소가 하는 일이다. 소가 아니면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부처가 아니면 어찌 부처가 되려고 몸부림을 칠 줄 알겠는가? 사람이 본래로 부처님인 것을 어디서 다시 찾는단 말인가? 알고 보니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일을 하였다. 너무나 가소로운 일이었다. 그 당치도 않는 일이란 마치 토끼의 뿔과 같은 것이며, 거북의 털과 같은 일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다가 바다의 물거품을 다 태워버린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아예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찾는다는 것이 이와 같다. 부처님이 다시 부처님을 찾는다는 것이 이와 같다. 온 천지가 다 마음이며 부처님인데, 우주만유가 다 마음이며 부처님인데 무엇을 찾는다는 말인가. 진실로 가소로울 수밖에 없다. 천하에 마음을 찾는다는 나그네들은 이 말을 잘 명심해야 한다. 불교인들의 모든 신앙행위가 실은 모두 이 마음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마음을 찾는 일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다시한번 자신의 신앙행위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아야 하리라. “하루 종일 봄을 찾아 다녀도 봄을 보지 못하고 [盡日尋春不見春 芒鞋遍踏隴頭雲 歸來偶過梅花下 春在枝頭已十分] 송나라 때 어떤 비구니스님이 도를 깨닫고 나서 지었다는 오도송이다. 제목은 “봄을 찾다[尋春]”라는 시다. 겨울이 막 지나면 사람들은 봄, 봄, 봄 한다. 성미가 급해서가 아니다. 봄은 희망이자 꿈이다. 그래서 봄이 오면 자신의 인생이 무엇인가 좀 달라질 것 같은 희망이 용솟음친다. 산이나 냇가에 자꾸 눈이 간다. 논밭이나 들판에도 마음이 간다. 정원에 심어진 나무에도 저절로 끌린다. 희망과 꿈과 생기와 성장과 사랑과 기대감이 넘치고 있는 봄을 그리는 것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봄을 찾아 나섰다. 그 사람은 곧 모든 사람이다. 하루 종일 이곳저곳으로 찾아다닌다. 저 멀리 구름이 걸린 언덕배기와 넓은 들판에까지 돌고 돌았다. 그러나 봄은 볼 수 없었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 왔다. 우연히 뜰에 심어진 매화나무 밑을 지나다가 진한 매화향기를 맡았다. 고개를 들어 매화나무 가지를 올려다보니 새하얀 매화꽃이 막 피기 시작하였다. 종일토록 찾아도 찾지 못하던 봄을 집에 돌아와서 한껏 느꼈다. 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한 걸음도 옮기지 않은 자기가 늘 살고 있는 자신의 집안에 있었다. 의미가 깊은 시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봄을 찾듯이 행복을 찾아 헤맨다. 재화(財貨)나 명예를 얻으려고 하는 것도 행복을 위해서다. 사람을 맞이하는 것도 행복을 위해서고 자식을 두는 것도 행복을 위해서다. 눈을 뜨자마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매달리는 것도 행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출가수행도 행복을 위해서고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려고 하는 것도 행복을 위해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성불(成佛)이나 지극한 도[至道]나 열반이나 이 모두가 가장 이상적이며 바람직한 삶, 즉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그 진정한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시간을 많이 소비해서 얻는 것도 아니며, 노력을 많이 해야만 얻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열반경>에서는 소를 잡던 백정이 그 자리에서 칼을 내동댕이치며, “나도 부처다.”라고 외쳤단다. 이 얼마나 장쾌한 일이냐? 부처님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지금 이 순간 보고 듣고 숨 쉬고 느끼고 하는 이 사실이다. 이것이 삶의 모든 것이며 인생의 모든 가치와 의미가 다 담겨 있다. 성불도 열반도 행복도 지금 바로 이 순간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항용 지금에 존재하지 않은, 언제 어디에 있을지도 모르는 허상(虛相)에다 초점을 맞춰두고 그것을 향해 달리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이렇게 확실한 부처의 실상(實相)과 행복의 실상에는 늘 외면한다. 사람들은 대개가 집안에 있는 봄을 모르고 멀리 찾아 헤매듯이 행복이라는 봄도 부처님이라는 봄도 열반이라는 봄도 여기 이 순간의 자신을 버리고 다른 곳을 찾아 헤맨다. 우리는 누구나 이미 넘치는 행복 속에 있으면서 말이다. 봄에 대한 이 시는 곧 이 문제를 깨우치는 글이다. 부처님이란 중생들의 마음 안에 있는 부처님이다.
또 일체 모든 부처님의 근원 자리가 곧 무명번뇌라고 하였다. 소승불교에서 그토록 혐오하는 무명번뇌가 다름 아닌 부처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발견인가? 무명과 번뇌가 바로 진정 귀중한 재산이다. 금은보화와 같은 재산 정도가 아니다. 돈과 집과 땅과 회사와 같은 재산 정도가 아니다. 바로 부처라는 재산이다. 참으로 놀랍고도 기겁을 할 일이다. 무명과 번뇌가 부처라는 큰 재산이라니 말이다. 원각도량이 어느 곳이던가? [圓覺道場何處 現今生死卽是] 이 글은 해인사 팔만대장경각 앞에 주련으로 걸려 있는 문구다. 아마도 팔만사천법문을 대표하는 뜻에서 그곳에 걸어두었을 것이다. 원각이라면 부처님이 6년 고행 끝에 큰 깨달음을 이루신 것을 말한다. 즉 성불하신 것을 말한다. 모든 불교인들의 희망이자 꿈이다. 그런데 그 꿈이 다른 곳이 있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매일 매일 뒤치다꺼리하며 살아가는 이 생사의 현장이 바로 그곳이라는 뜻이다. 울고불고 하며, 웃고 울고 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 순간의 삶의 자체가 곧 원각도량이란다. 허망하지 않는가? 한편 놀랍지 않는가? 불교 최고의 경지를 성불이니 원각이니 열반이니 견성이니 하는 온갖 말로 표현하여 참으로 까마득한 먼 곳에 그 경지가 있는 것으로 가르쳐 왔다.
이제 다시 무슨 말로 설득할 것인가? 불교 최극점에 이른 가르침이다. 불교의 완성에 다다른 가르침이다. 이제 더 이상 나아갈 데는 없다. 이것이 신대승불교며 최상승불교다. 나에게는 한 권의 경전이 있다. [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 展開無一字 常放大光明] 인간 존재의 위대성을 표현한 게송이다. 경전이라고 하면 흔히 종이와 먹으로 된 팔만사천대장경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경전은 아니다. 진짜 경전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이 경이다. 종이와 먹으로 되지 않았으니 글자가 있을 수 없다. 글자가 없으니 구구한 설명이 있을 수 없다. 참으로 간단명료하면서 언제나 살아 숨 쉬는 경전이다. 살아 숨 쉴 뿐만 아니라 항상 대광명을 놓고 있다. 대광명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글을 쓰고 글을 읽고 말을 하고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고 시기와 질투도 할 줄 아는 바로 그것이 대광명을 놓는 일이다. 신통묘용을 부리는 일이다. 이 사실 외에 더 위대한 작용이 또 있을까? 일을 해도 대광명이며, 길을 가도 대광명이며, 잠을 자도 대광명이다. 삶이 그대로 불공 곳곳이 부처님이요, [處處佛像 事事佛供] 모든 사람은 부처인 까닭에 곳곳이 부처뿐이요, 하는 일마다 부처인 사람을 위한 일이므로 그대로가 불공이다. 달리 다른 곳에 가서 부처를 찾을 필요가 없다. 법당이나 불교성지에 가서 찾는 부처는 모두가 가짜 부처다. 진짜 부처는 곳곳에 널려 있는 사람부처가 진짜 부처다. 법당에서 하는 불공도 가짜 불공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그대로 불공이다. 왜냐하면 부처인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도 가도 본래의 그 자리요, [行行本處 至至發處] ‘가도 가도’라는 그 간다는 행(行)은 사람이 걸어가는 뜻과 함께 불교에서 수행(修行)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수행하고 또 수행하더라도 수행하기 이전의 본래의 그곳이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의전지시구시인(依前祗是久時人)이라는 선가(禪家)의 말과 같이 다만 예전 그때의 그 사람일 뿐이다. 만약 별다른 사람이 있고 별다른 법이 있다면 그것은 삿된 마군의 견해[若別有人有法則 是邪魔外道見解]다.
설사 어떤 피나는 수행을 해서 어디에 이르렀다 손치더라도 처음 수행하기 전의 그곳이다. 지지발처(至至發處)다. 즉 사람으로서의 본래 그 자리다. 본래의 그 자리인 부처자리보다 높은 곳은 없기 때문이다. 본래 하나님자리인 그 자리보다 높은 곳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부터 이렇게 위대하고 훌륭한 존재다. 사람을 떠나서 다시 다른 경지를 기대하지 말라. 잘못하면 전도된 사람이 되고 미친 사람이 된다. 필자는 동진 출가하여 지금은 전설이 된 큰스님들을 많이 보아 왔다. 당대에 선지식 복은 내가 제일이 아닐까 싶다. 처음 범어사에서 60년대 초에 동산 스님, 지효 스님을 모시고 살았다. 그 후 해인사에 가서 지월 스님, 일타 스님을 모시고 살았다. 강원을 졸업하고 제방 선원으로 행각하면서 동화사에서 효봉 스님과 구산 스님을 함께 모시고 살았다. 그리고 경봉 스님, 향곡 스님, 춘성 스님, 전강 스님, 관응 스님, 운허 스님, 탄허 스님, 성철 스님, 지선 스님, 범룡 스님, 서옹 스님, 서암 스님, 월산 스님, 벽안 스님, 월하 스님 등 많은 스님 밑에서 한 철 또는 두세 철씩 모시고 살았다. 그야말로 지금은 전설이 되고도 남는 기라성 같은 큰스님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천만다행으로 그들은 모두 변함없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처음도 사람이고, 중간도 사람이고, 나중도 사람이었다. 결코 다른 존재가 아니었다. 그 얼마나 다행인가.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가셨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가도 가도 본래의 그 자리요, 도착하고 도착해도 출발한 그 자리더라[行行本處 至至發處].”
전단향 나무로 중생의 형상을 만들고
이 게송은 불상이나 보살상, 또는 나한상과 같은 성인의 상을 조각하거나 그림을 그려서 법당에 모시고 점안의식(點眼儀式)을 할 때 그 의식문 서두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거나 경전을 보지도 않고 그냥 염불만 하면서 사는 사람들도 잘 아는 법문이다. 전단향 나무로써 온갖 형상을 다 만들어서 그 얼굴이 각각 다르더라도 그 조각상에서 나는 향기는 모두가 똑같은 전단향의 향기다. 왜냐하면 재료가 전단향 나무이기 때문이다. 사람 사람이 다 각각 달라도 우리는 그 재료가 부처이기 때문에 모두가 부처노릇을 하고 산다. 그 부처노릇이란 보고 듣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그 일이 곧 부처노릇이다. 흔히 말하기를, 부처라면 부처노릇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 외에는 달리 특별한 부처노릇은 없다. 소승적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사람을 떠나서 따로 부처가 있다는 엉뚱한 환상에 젖어 있어서 무슨 특별한 부처노릇을 상상하지만 그들이 상상하는 부처노릇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사람부처가 살아가는 일상사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등 온갖 일이 모두 그것이다. |
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 無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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