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는 1392년(태조 원년)부터 1566년 연산군이 폭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날 때까지의 약 115년간이다. 이 기간은 처음에는 조선왕조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골육상잔에 대한 염증이 심하였으나 세종대왕의 선정으로 왕권이 확립되어 점차 조선왕조의 정치적 기반이 다져지고 한편 사회적으로는 양반사회가 성립된 시대였다. 조선조는 유교를 치국의 원리로 삼고 숭유억불(崇儒抑佛)을 하였기 때문에 불교문화는 쇠퇴(衰退)하였지만 성리학이 기반을 굳히고 유교가 발전하였다. 특히 세종조에서는 우리 민족의 고유문자인 한글이 창제(創製)되고 각종 과학기술이 발전하였다. 세조의 찬위(簒位)로 또 다시 왕실의 존엄성이 떨어지기는 하였지만 세조가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왕권이 회복되고 학문이 발전하였다.
이 무렵 관찰사공 김약채(金若采:19世)는 고려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때 문하부의 좌의사로 있으면서 조반의 옥사를 바르게 다스려서 명성을 드높였고, 우왕 14년(1388)에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때 지신사(도승지)로 있었는데 이에 항거했다 하여 외지로 유배도기도 하였다.
조선조 정종 2년(1400)에 문하부의 좌산기 상시(문하부에 속해 있던 간관)로 돌아와 그 때 대사헌이던 권근과 같이 권세가문의 사병 양성하는 폐단을 막았다. 그 해 겨울에 대사헌으로 있다가 태종 2년(1402)에 형조판서로 승진되고 3년 뒤에 충청도 도관찰출척사가 되어 부임함으로서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자리잡고 세거하게 되었으니 지금까지 유적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그의 후손들이 광산김씨의 중흥을 이룬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한편 연계 김 첨(金 瞻:18世)은 고려 말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응교(정4품) 벼슬을 역임하였는데 학문에 전심하고 경사에 밝아 제자백가로 통했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몽주와 친교가 있었다는 일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태종이 등극하자 풀려 나와 예문관 제학(종2품)까지 지냈으며 업적으로는 아악을 바로 잡아 궁중의식에 활용하는데 기여하였다. 뒤에 참지의정부사로 있을 때 태종의 처남인 민무질, 민무구 형제와 가까이 하여 왕족간에 이간을 꾀한다는 죄목으로 다시 파직되는 불운을 겪었다.
또한 김자린(金自麟:18世)은 태조 2년(1393)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습?부사(종3품)로 있을 때 관내의 농사짓는 일, 누에치는 일, 세금을 받고 인부를 부리는 일 등을 잘 처리하여 백성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태종이 왕위를 잇자 개국 초의 혼란은 가시고 정국이 차차 안정되었다. 태종이 왕위를 잇는데 역할을 한 이는 송곡 김계지(金繼志:18世)인데 태조와 태종의 양궁을 내왕하면서 태조의 뜻이 태종으로 가겠끔 하는 회천대업의 공이 있었다. 특히 김계지라는 자신의 이름까지 태조의 뜻을 태종에게 잇게 했다는 계지이고 병조판서 및 판의금부사와 오위도총부의 도총관(정2품)을 지냈다.
계지의 아들 김 재(金 滓:19世) 또한 문과에 급제하고 판군자감사를 거쳐 상호군과 수문전 직제학을 지냈다.
이 무렵에 김문발(金文發:22世)은 도평의 녹사로서 전라도 원수의 부하가 되어 남원, 보성 등지에서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돌산만호(4품)가 되었다. 순천부사와 경기, 충청, 경상도의 수군 도절제사(종2품)가 되었다가 낙향하여 부용정을 짓고 남전향약과 백녹동규를 본 받아 실행하니 광주(光州)지방의 향약좌목이 되었고 태종 17년(1417)에 황해도 관찰사로 갈 때 계지와 같이 궁온(임금이 내려 주는 술)의 은전도 받았다.
그리고 조선 태종과 사돈관계에 있던 김한로(金漢老:21世)는 양녕대군의 장인으로서 고려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의좌랑을 지냈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예문관 제학으로 명나라에 성절사로 다녀온 일도 있다. 그리고 예문관 대제학(정2품)과 병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장차 부원군이 될 뻔도 했는데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에 연루되어 청주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신원되어 좌의정(정1품)에 추증되고 광산군에 책봉되었다.
또한 삼정 김 방(金 倣:17世)은 전라도 도절제사를 지냈으며 태종의 명령을 받고 전라도 김제에 관개용 저수지인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그 공사의 책임자였으며 김제 고부간에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걸로 보아 당시의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김 문(金 問:20世)은 20세 약관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로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이듬해 요절하니 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는 17세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 되었다. 친정의 부모가 개가를 시키려하자 죽기를 맹세코 부모의 명에 따르지 않고 어린 아기를 업고 개경에서 시가가 있는 연산까지 수 백리 길을 낮에는 사람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숨어 있다가 밤에 거둥 하였는데 걸어오는 동안 호랑이가 호위하여 주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논산에 지금도 〈범 넘이 재〉가 있다. 그 때 업고 온 아이가 세종조에 사헌부감찰(정6품)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된 김철산(金鐵山:21世)이다. 허씨부인은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고 요역도 면제되었다. 그의 후손 중 고관대작과 대제학 등의 많은 유현을 배출하였으니 그의 유덕이 더욱 우러러 보인다.
한편 총제공 김 한(金 閑:20世)은 중군도총부 부총재를 지냈으며 형수인 허씨부인과 큰 집을 도왔고 배위는 완산이씨로 익안대군 방의의 따님이다.
김 열(金 閱:20世)은 관찰사를 지낸 김약채의 아들로 큰 형님 김문이 21세로 조졸하니 벼슬길을 단념하고 형수인 허씨부인과 어린 조카를 보호하며 훈육에 힘써서 종통과 가업을 이어 받도록 하였다. 열은 자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고 큰 집을 위하여 희생한 표본이며 형조도관 좌랑으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하여 호를 퇴촌이라 하였다. 학문이 고매하여 빙옥난고라는 시집이 전하고 합천에 있는 화곡사에 모셔졌다. 공의 묘소가 실전되어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1983년에 후손인 김대중(金大中:40世)의 탐수로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광음리에서 찾아 수호하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다.
건국 초기인 이 시대에 고려말에 밀직부사를 지낸 김천리의 맏아들인 김희선(金希善:18世)은 족보에는 강원도관찰사로서 백성을 다스리는데 청백하고 도량이 넓어 선정한고로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무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최근에 발췌된 자료에는 조선조 초기의 명신과 의학자로서 개국원종 공신록에 기록이 보이며 태종 2년(1393)에 전라도 안렴사로 있을 때 각 도에 의학원 설치를 조정에 건의하였다. 태조 4년(1395)에는 정조사로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호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의학에 밝아 중요한 의학서적을 저술했다. 시호는 원정(元靖)이다. 그의 아우인 김 무(金 務:18世) 또한 조봉대부로 제용감의 소감(종4품) 벼슬을 지내면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한 형제들이 있었다.
세종조에 활약한 김 췌(金 萃:20世)는 세종조 초기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지상원군사가 되었는데 이 무렵 경상도 성주고을은 아전들이 세력을 부리고 민심이 거칠어져 관청에서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였다. 임금의 특명으로 그 고을을 다스릴 사람을 구하던 중 김췌는 약관의 나이로 뽑혀 세종에게 하직 인사를 드릴 때 "저에게 생살권을 주시면 그 고을을 잘 다스리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므로 그 고을에 부임하여 포악한 무리 수명을 가려내어 처형하니 비로소 수령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아전들을 다스리는데는 흙으로 구워만든 갓끈을 매도록 하여 무거워서 고개를 저절로 굽히게 하는 등 기강을 세우니 한 달도 못되어 진압되었고 백성들도 거친 마음이 부드럽게 바뀌고 어리석음에서 착함으로 바귀었으니 이것이 모두 수령의 덕이라 칭송하게 되었고 뒤에 도승지(정3품)로 추증되었다. 이 이야기는 현지에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한편 김 소(金 遡:20世)는 태종조의 증광시에 급제하였는데 이조, 예조, 병조의 정랑과 군수를 거쳐 대호군을 지낸 뒤 성균관 사성(종3품)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세종께서는 종실의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할 기관인 종학을 설립하였다. 이 종학에서 책임자 격인 종학박사를 겸임한 대학자이고 세조조에서는 좌익공신 3등에 추록되었으며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정2품)으로 추증되었다.
그리고 김 청(金 廳:20世)은 태종조의 역과출신으로 중국어에 능통했다. 세종이 즉위하자 천추사의 통역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뒤에 승문원사에 임명되었는데 중국황제에게 올리는 글에 날짜를 정하지 않았다는 죄로 경상도 상주에 귀양을 가는 불운을 겪었으나 곧 풀려나서 대호군(종3품)이 되어 지신사 안승선과 더불어 압록강 중류로 흐르는 파저강에서 야인을 토벌하여 성죄하는 방문을 초하여 바쳤다. 문종조에 지중추원사(종2품)에 승진되었고 단종조에는 임금으로부터 비단 한필을 받았으며 세조조에는 좌익공신 2등 공신에 책록되었고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만사 김예몽(金禮蒙:21世)은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저작랑을 거쳐 감찰에 제수되었고 1440년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과거의 시관이 되어 많은 인재를 등용시켰다. 문종이 즉위하자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찬술에 참여하였고 지승문원사가 되었다. 세조조에는 사은정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헌겸 성균사성이 되었다. 이때 후학들에 대한 교육에 힘써 자주 시험을 보고 제술이 우수한 자에게는 반드시 포상하여 학문을 권장하였다. 그 뒤 강원관찰사를 거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1466년 발영시에 아들 성원과 함께 급제하여 한때 조야의 선망을 받았다. 이어 공조, 예조판서에 올랐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매우 뛰어나 시관이 되어 뽑은 인재가 거의 뒷날 조정의 현직을 차지하여 빙감(氷鑑)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성품이 온아하고 청렴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사부(詞賦)에도 능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예몽에게는 형으로 승훈랑을 지낸 인몽(仁蒙:21世)과 문과를 급제하고 사간원정언과 강화부사를 거쳐 이조참의를 지낸 의몽(義蒙), 그리고 아우로 봉직랑을 지낸 지몽(智蒙)과 통례원 좌통례(정3품)를 거쳐 회양 도호부사를 지낸 신몽(信蒙:21世)이 있었는데 모두가 학문이 높아서 높은 벼슬을 하였는고로 세상에서는 이들 5형제를 5몽이라 불렀다고 한다.
세종조 말년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광암 김태정(金台鼎:21世)은 재주가 특출하였으나 친상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3년 동안 수질과 요대를 벗지 않고 상을 마쳤으며 과거에는 응하지 않고 오직 학문만 강구하고 후진을 양성하였으니 점필재 김종직이 '강양(江陽:현재의 합천)의 주인'이라고 칭찬하면서 호를 광암이라 지어 주었다.
만취당 김맹권(金孟權:20世)은 세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유숙하면서 학업을 닦는 반유로 있었는데 세종대왕께서 원손인 단종을 안고 나와 후일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받았는지라 세조가 왕위를 물려받자 그 날로 고향인 충남 보령으로 내려가 종신토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토정 이지함과 천휴당 이몽규 같은 명인을 배출하였다.
김치온(金致溫:20世)은 고양현감(종6품)으로 있을 때 단종이 수양에게 선위하니 장차 큰 화가 임박하였음을 짐작하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장흥으로 내려가 사육신의 한사람인 남효온과 교우하다가 단종의 흉변을 듣고 자탄하되 단종재위시 3정승과 사육신 같이 못 죽은 것이 한이라고 몹시 슬퍼하였다.
오옹 김효종(金孝宗:20世)은 학문이 고매하여 학행으로 벼슬길에 올라 단종조에 사복시정(정3품)에 이르렀는데 수양대군이 인륜대의를 저버리고 왕위를 찬탈하자 세조로부터 국록을 받는 것을 꺼리고 곧 벼슬을 버리고 사퇴하고 고향인 부여로 은거했다가 단종이 영월에서 비명으로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운산에 들어가 움막을 짓고 해만 뜨면 궁검대에 올라가 동쪽을 향하여 3년간을 통곡하였으며 매월당 김시습과도 도의로 사권 절의신이다. 부여의 청일사에 배향되었다.
세종조에 김 호(金 瑚:21世)는 문과 급제하여 외직으로 함진도안렴사를 지냈으며 이조참판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인 김자중(金自中:22世) 또한 남평현감을 거쳐 사헌부 wq의를 지냈고 추원재에 모셔졌다.
김맹윤(金孟胤:24世)은 벼슬이 한성부참군(정7품)으로 있을 때 단종이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병을 핑계삼아 벼슬을 버리고 시골 산과 물 좋은 자연을 벗삼아 평생동안 시를 읊으며 방랑을 하니 안평대군의 잔당으로 몰려 영종도에 귀양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이 무렵에 율재 김덕원(金德源:22世)은 세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영천군수에서 이조정랑을 거쳐 춘추관 기주관으로 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사헌부 정령을 거쳐 예문관 직제학(정3품)에 으르렀으며 세조조에 좌익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세조의 정치는 왕권강화에 기여한 면은 있으나 문치와 대화정치를 멀리하고 힘을 앞세우는 무단 강권정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저급한 수준을 보였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이시애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이를 적개공신이라 부르는데 우리 광산김씨에서 2등 공신으로 3명이 책록되었다. 서석 김국광(金國光:22世)은 세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벼슬길에 올라 우찬성으로 있을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병조판서와 적개공신이 되었다. 세종 때 명재상이던 방촌 황희가 일찍 사람됨을 인정하여 손서로 삼았으니 젊어서부터 출중하였음이 짐작된다. 국광은 세조가 거국적인 지력을 동원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할 때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바 그 업적이 뛰어나므로 임금이 "국광에게 힘입어 배운 바 크다"고 칭찬하면서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는 글을 써 주고 밥까지 떠 먹여 주었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예종조에 우의정, 성종조에 좌의정을 거치고 사은사로 명나라에도 다녀와 좌리공신 1등에 녹선되었으며 광산부원군에 봉해지고 부조(나라의 큰 공을 세운 사람으로서 영구히 사당에 모시고 매년 제사를 올리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의 은전을 받았다.
국광의 아우 서정 김겸광(金謙光:22世)은 단종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로 벼슬길에 올랐는데 세조 6년(1460)에 체찰사 신숙주를 따라 건주의 북방 오랑캐 침입을 막는데 공을 세워 군기감정에 임명되었다. 그 후 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에 이르니 형인 국광은 호조판서로 세조의 은총이 두터웠는데 겸광을 보고 세조가 직접 모자를 벗기고 꽃을 꽂아 주며 "그대가 비록 벼슬은 형보다 낮으나 현량한 것은 형 보다 낫다"고 칭찬하면서 술을 구 할 정도로 형제가 모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어서 예조판서겸 오위도총관(정2품)이 되었고 성종 즉위에 보필한 공로로 좌리공신에 녹훈되고 광성군에 책봉되었으니 청백리에 녹선되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다.
겸광의 아우 김정광(金廷光:22世) 또한 벼슬이 제용감 첨정으로 출사하였고 김경광(金景光:22世)은 위로 3형제가 모두 벼슬길에 나감으로 인해 할머니인 허씨부인과 어머니인 안동김씨의 양대 정경부인의 봉양과 거상을 마치고서야 53세가 되어 겨우 집안 일을 벗어버리고 성종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니 벼슬은 통정대부 군기시정겸 교서관 판교(정3품)를 제수받고 봉직하였으나 연만하였기로 웅지도 펴보지도 못하고 한성 임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김백겸(金伯謙:21世)은 세조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있으면서 북방의 오랑캐를 소탕하는데 여러번 공을 세워 승진하였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앞장서서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광원군에 봉해졌으며 절충장군(정3품)에 제수되었다. 황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의 연임 요청을 받아 명성을 얻었고 시호는 양호(襄胡)이다.
김달전(金達全:21世)는 강화도호부사로 재임시 임소에서 병이 위독하자 임금이 의원과 약을 보냈으나 운명하니 특명으로 부물을 하사하였다. 아들인 충목공의 귀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심재 김여석(金礪石:23世)은 수의 아들로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고 세조조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니 세조가 영재라 칭찬하고 동궁에게 장차 좋은 보필자가 될 것이라 하였으며 최항을 시켜서 욕심부리지 말고 술을 즐겨 마시지 말며, 교만하지 말라고 '무기욕(毋嗜慾), 무기음(毋嗜飮), 무교긍(毋驕矜), 아홉 자를 쓰게 하고 옥쇄를 눌러 주었다. 벼슬은 검열, 경연관을 역임하고 군자감주부에 올랐으며 성종 10년(1479)에 사예로 있을 때 원수인 윤필상의 종사관이 되어 건주위의 야인을 토벌하였고 도승지 관직을 거쳐 말년에는 형조판서에 승진되었고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김 면(金 沔:22世)은 통례원 판관을 지냈고 이시애의 난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광천군에 책봉되고 경원부사를 지냈다. 시호는 장도(莊悼)이다.
앞에 설명한 좌의정을 지냈던 국광에게는 아들 5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맏아들인 김극뉵(金克?:23世)은 세조조에 문과 급제하여 대사간(정3품)을 지냈고 광원군으로 봉해졌다. 공의 묘소가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있는데, 이 터가 한국의 8대 명당의 하나로 산세의 웅장한 기세에 전후좌우, 청룡백호와 현무주작이 기세 등등하게 일대 명기를 이루어 세칭 만대 발복지지로 일화가 있다. 이 묘를 쓴 후 대제학 7분, 상신 3분, 유현 2분, 종묘배향 3분, 왕비가 1분이 나고, 고관대작과 명유석학이 대를 이어 나와 광김이 해동명벌로 지칭되었으니 모두가 대사간 묘 음기의 여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둘째인 김극니(金克?:23世)는 한성좌윤을 지냈으나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직언으로 논박하다가 강화유수로 좌천되었다가 후에 이현의 파당으로 연좌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셋째인 김극수(金克羞:23世)는 충훈부의 경력(經歷:종4품)으로 있었는데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지나치게 애통하다가 3년 상도 다 못 치르고 임종하였고, 긴극괴(金克愧:23世)는 그 인품이 뛰어나 숙부인 공안공이 장재라고 추천하여 성종의 부름을 받고 입궐하니 손을 잡아 맞으면서 도총부 도사를 임명받고 물러 나와 그 손을 비단으로 싸서 국은을 잊지 않은 이로 유명하였으며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도임하여 적병을 토평하고 돌아와 3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김성원(金性源:22世)은 단종조의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승지로 있을 때 야은 길재의 증직을 탄원하여 허락을 받았고 세조 12년(1466)에는 정2품 이하의 대소 신료들에게 탁영시라는 시험을 보였는데 공이 좋은 성적을 얻은지라 임금이 술과 풍악을 하사하여 격려하였다. 성종조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는데 이 때 김성원은 수찬관으로 있었으며 춘추관 편수관으로 세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김순성(金順誠:21世)은 세종조에 벼슬길에 오랐는데 세조조에 사헌부 감찰이 되고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와서 훈련원 판관으로 있을 때 성종의 왕명으로 경국대전을 고쳐 편찬하는데 공선되어서 그 일에 참여하였고 아들인 김 석(金 석:22世)은 성종조에 분과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냈고, 그의 동생인 김 굉(金 ?:22世)은 연산조에 문과 급제하여 정언 벼슬에 들어섰으나 중종조에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되어 명나라의 사신으로 두 번이나 다녀왔고 암행어사로도 함경도를 시찰하고 돌아와 기민구제책을 건의하였고 중종 11년(1516)에는 성균관 대사성에 버금가는 사예로 조광조와 같이 간택되기도 하였다. 사간원의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공정한 처벌과 관기를 바로 잡는데 힘썼고 경상, 충청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김현뢰(金賢賚:19世)는 세조조에 사헌부 감찰을 거쳤는데 성종 2년(1471)에 평장동 유허서를 지어 후세에 전함으로서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그 곳을 성역화 하는데 일조하였다.
육행당 김처겸(金處謙:23世)은 성종조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공부는 하지 않고 효도하고 우애하며 화목하고 정이 넘치며 믿음이 있고 이웃을 돕는다는 효(孝), 우(友), 목(睦), 인(?), 임(任), 휼(恤)의 여섯 가지를 논하고 실천하여 담양지방의 향약으로 정립되어 덕망이 드높아 가문을 빛내었으며 호도 육행당(六行堂)이라 불리었다.
김 감(金?:28世)은 연산조에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정자 병마절도사, 좌찬성에 이르렀다. 지월당 김극기(金克己:23世)는 중종조에 무과로 급제하여 전라우후를 지낸 후 제주목사로 승진되었으나 스스로 퇴임하고 귀향하여 지월당이란 집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여 경현사에 위패가 모셔졌고 그의 종손자인 양정헌 김 정(金 禎:25世) 또한 의주교수를 지냈으나 육학시경에 전념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후학지도를 하였고, 또한 그의 아들들로 전하여져서 청원정 김언우(金彦瑀:26世)도 도학에 고명하여 성리학 효경독서에 전심하여 청심정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였으며 언우의 동생인 칠계 김언거(金彦?:26世) 또한 중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사헌부장령을 지냈으나 물러나 풍영정을 짓고 후학을 대를 이어 지도하였으니 문장가의 집으로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