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4:14-30, 이 글이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24.4.28, 박홍섭 목사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주님은 갈릴리로 돌아가셔서 본격적인 메시아의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활동하셨고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뭇 사람들의 칭송을 받습니다. 인근 사방에 예수의 소문이 퍼져나갔고 그 명성을 들은 나사렛의 회당 장도 안식일에 주님에게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안식일이 되자 주님은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 61장의 첫 부분을 읽고 모인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이 읽으셨던 이사야 61:1-3을 확인해보겠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원래 3절까지가 한 단락이지만, 주님은 어디까지 읽으셨습니까? 2절의 “여호와의 은혜의 해”까지입니다. 거기까지 읽은 주님이 갑자기 가르침을 멈춥니다. 두루마리를 책을 덮어 맡은 자에게 돌려주시고 주목하고 있던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사실 그 뒤에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한다”라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왜 그 말씀은 읽지 않았을까요? 이 말씀은 초림의 주님이 아니라 재림의 주님 때 성취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님이 행하시고 앞으로 행하실 공생애의 사역은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포로 된 자를 해방하고,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 곧 영적 희년을 실현하는 구원이 핵심입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만 읽으시고 이 말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에 놀랍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요셉의 아들 예수가 이사야에 기록된 희년의 복음을 이루실 메시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22절을 다시 보실까요.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누가는 지금까지 계속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강조해 왔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알려줄 때도 네가 낳을 아이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1:35).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성부의 증언이 하늘로부터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혔습니다. 심지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만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그리스도로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완고한 영적 상태를 아십니다. 이들은 의사에게 먼저 자신을 고쳐서 증명하라고 말하는 속담처럼 주님에게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을 여기 나사렛에도 보여서 네가 메시아임을 증명해보라고 할 것입니다. 주님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은 일이 없다고 말씀하면서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를 비유해서 지금 이들의 상태를 경고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영적 타락이 가장 극심했던 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엘리야 때는 삼 년 육 개월의 가뭄과 흉년을 주셨고, 엘리사 때는 아람 왕국의 침략으로 무자비한 탄압과 고통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때 구원의 은혜가 누구에게 임했습니까?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이방 시돈의 사렙다 과부와 원수 나라의 군대 장관이었던 나아만에게 임했습니다.
지금 나사렛 사람들은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요셉의 아들이 무슨 그런 일을 이루겠냐고 비아냥거림과 불신의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이런 불 신앙이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에게 넘어가고 정작 이스라엘은 혹독한 심판의 대상이 되었던 엘리야 시대의 불행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가난과 질병과 죽음의 속박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듯이 지금 주의 은혜의 해, 희년의 복음을 맛보고 경험할 자들이 고향 나사렛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분노합니다. 극심한 분노로 예수를 동네 밖으로 쫓아내고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치고자 합니다. 그들이 거절하고 쫓아내어 죽이려고 한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단지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이사야가 예언한 희년의 은혜를 성취할 메시아입니다. 희년은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난 후 50년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들이 조건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탕감받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자신의 기업과 신분과 땅을 되찾는 해입니다. 종 되었던 자들이 자유를 찾는 은혜의 해입니다. 가난 때문에 남의 집에 종으로 팔려갔던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는 해이고, 모든 빚을 탕감받고 잃어버린 모든 것을 조건 없이 되찾을 수 있는 해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빚진 자에게, 종 되었던 자에게 기업을 잃어버린 자들이 얼마나 기다리던 해이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이 가난하지 않고 종 되지 않았고 빚진 것이 없고 잃어버린 것이 없는 자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희년은 반갑지 않은 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적 희년의 은혜, 구원을 주시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내어놓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 돈과 명예와 권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는 의로움이 없어서 심령이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자신을 내어주어 그들도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게 해주는 구원의 복음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리에서 떠나 죄와 마귀의 종이 되어 억압과 사망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던 우리에게 주의 백성 된 신분과 참된 자유를 주러 오신 분입니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아름다움인지를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 된 우리의 눈을 열어 보게 하는 그리스도입니다. 생명을 빼앗기고 생존의 비참한 삶을 연명하기에 급급한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복된 생명 안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영적 희년의 말씀이 주님에 의해 응하여졌습니다. 누가 이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까? 주님을 믿는 자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상태가 가난하고 사망의 종 되었으며 죄에 얽매여 있고 빚진 자임을 인정하고 주님께 소망을 두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희년의 은혜가 임합니다. ‘오늘’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너희의 귀에 이 말씀이 응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읽혀지고 들려지되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의 마음과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때, 바로 그때가 우리의 귀에 주님이 임하는 시간입니다. 이천 년 전 갈릴리 나사렛의 어느 회당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듣는 바로 이 자리, 이 시간에 구원의 은혜가, 자유와 해방과 생명의 은혜가 응하여질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자신의 삶이 파산당한 자처럼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 난 인생이라고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희년의 은혜를 성취하러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을 이루신 주님이 여러분의 모든 공허함을 채워주실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 시간, 이 자리가 그런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마치 포로처럼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두려움과 불안함, 정죄감과 외로움, 낙심과 절망과 우울이 벗어버릴 수 없는 굴레처럼 항상 고통스럽게 옥죄어 오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하여 그 모든 굴레에서 해방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리에 눈 멀고, 선함과 아름다움에 무지한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다시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왜 나사렛 사람들은 이 놀라운 은혜를 받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이사야의 말씀을 읽어주시고 이 말씀이 지금 너희 귀에 응했다는 주님의 설교에 감탄하고 놀랐습니다. 그런데 왜 그 놀람을 믿음으로 연결시키지 못했을까요? 최초의 반응은 호의적이었습니다. 감동하고 놀랐고 자극도 받았습니다. 저 사람이 우리의 메시아가 아닌가? 기대도 가졌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다”라고 말하자 돌변합니다. 조금 전까지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의 마음이 바뀝니다. 요셉의 아들이라고? 그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고? 아버지 요셉이 죽자 장남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목수의 일을 하던 초라한 청년 예수가 메시아라고? 그 말을 믿기엔 지금까지 예수에 대해 보고 들었던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자기 경험, 말씀에 대한 자기 판단이 믿음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감탄하고 놀라워하다가도 자기 고집과 선입감과 편견에 부딪치면 모든 것을 바꾸어버립니다.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다가 나의 상처와 숨은 죄와 자존심을 건드리는 순간 갑자기 방어기제를 발동하여 그 말씀을 밀어냅니다.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절망적인 상황도 아니고 냉혹한 현실도 아니고 다른 사람도 아니라 자기 판단, 선입감에 사로잡힌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고 믿음을 통해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 없는 우리 자신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왜 주님이 나사렛에서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으실까요? 가버나움에서 일으켰던 놀라운 기적을 보이면 믿겠다고 하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실 만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일축하실까요? 그들의 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적을 베풀어도 믿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역사가 일어나도 거절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이 자리에서 응했다고 선포하셨던 주님의 그 말씀을 믿음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상처입니까? 자존심입니까? 분노입니까? 무엇이든지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게 그냥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은 진통제가 아닙니다. 얄팍한 위로 정도도 아닙니다. 일주일을 견디는 약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을 완전히 새롭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희년의 은혜, 그 구원의 은혜를 성취하신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피상적인 문제만 아니라 삶의 근본을 고치십니다. 눈먼 자를 보게 합니다.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합니다. 포로된 자를 해방시킵니다. 그분이 오늘 우리의 귀에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이때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응했습니다. 아멘”하고 받아들이면 여러분의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귀가 열릴 것이고 입이 열리고 영혼이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사망의 역사가 물러가고 생명의 열매들이 열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함을 얻을 것입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빛의 권세로 나아가 죄를 이기게 될 것입니다.
그 은혜를 위해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던 나사렛 사람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빛 된 말씀이 우리의 어둠을 비추어 들춰내어도 숨거나 외면하거나 분노로 대적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이 드러내는 나의 나 됨을 인정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를 내어드릴 수 있기 바랍니다. 내가 가난한 자라고, 보지 못하는 눈먼 자며, 포로 된 자라고 고백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면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고치고 새롭게 하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