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봉 김성일 선생을 향한 역사적 책임에 대한 번호
7년 조일전쟁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되던 1593년 진주성의 진중에서 한 인물이 전쟁을
지휘하다 과로로 쓰러져 죽음을 맞았고.. 그의 죽음 후 3달이 채 못되어 진주성은 10만
왜군에 맞서 싸웠지만 함락되고 말았단다.
물론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의 함락과 7만 민관군의 순절이란 비극은 기본적으로
중과부적으로 절대 열세였던 우리의 전력 때문이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지...
우리에게 불리했던 날씨의 탓도 있었고, 외부의 응원없이 철저히 고립되었던 탓도 있고
무엇보다 뼈아픈 것은 성내의 지휘권 혼란과 대립..내부분열이란 이유도 있었단다.
그 분이 살아 있었더라면..힘들겠지만 그래도 상황은 다르게 흘러갈 수 있는 가능성도
있지 않았을까.. 아빠는 그런 생각을 한번씩 해보곤 해.
학봉선생 종가(경북 안동)
아빠가 얘기한 그 분은..경북 안동 출신이고, 7년 조일전쟁을 이끌었던 전시재상,
서애 류성룡 선생과 더불어 퇴계 이황 선생의 대표적인 제자였던 분이시다.
또 7년 조일전쟁의 원인에 대한 논란과 함께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던 분이기도 하지.
아들아, 누군지 알겠느냐? 아빠가 직접 언급했던 일은 많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지.
그분은 문충공 학봉 김성일(文忠公 鶴峰 金誠一, 1538~1593)선생이었다.
아빠는 네가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10년 전..여름휴가 여행길에 엄마와 안동시내를
지나 소백산의 죽령을 넘으려고 가던 중에 우연히 학봉 김성일 선생 종택을 마주치고
또 찾게 되었단다. 깨끗하고 잘 관리되어진 전형적인 종갓집이라 할까..
아쉬운 것은 그 종택 안에 학봉 김성일 선생 유물과 서책을 모셔둔 운장각 안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거기를 못본 것이.
그런데 오래전 진주박물관에서 봤을거야..그때 본 학봉 김성일 선생이 썼다는 안경.
우리나라 최초의 안경일거다. 그것하고 학봉 김성일 선생이 전쟁 중 가족들에게 보낸
안부를 묻는 서찰을 봤던 기억도 나는구나.
학봉선생 종가(경북 안동)
아들아, 아까도 말했지만 학봉 김성일 선생은 안동출신, 퇴계 이황 선생의 수제자였던
분이니..그 학문적 경지는 말할 것도 없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선비의 한 표상이었을
사람이었다.
사헌부 장령으로 있으면서 시사를 비판하고 비리를 탄핵하는데..대상이 고관대작은
물론 종실인사도 가리지 않아 엄정하였기에 별명이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고, 후에 나주목사로 부임 하였을때도 그 엄정함으로 민폐를 바로잡는등
목민관으로서도 유능하였던 분이었지.
그리고 기축옥사 때 선조의 광기가 폭발하여 수많은 죄없는 선비들이 죽어나갈때..
그는 수우당 최영경 선생을 변호하며 선조의 부당함을 지적했고,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수우당 최영경 선생 등 수많은 선비들을 복권시키는데 기여하기도 했지.
그런데..이런 학봉 김성일 선생에게 씻지 못할 오점으로 남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단다.
1590년 선조는 심상찮은 일본 측의 사정을 자세히 알기 위해 통신사를 보냈지.
이 통신사의 정사엔 서인이었던 황윤길, 부사엔 동인인 학봉 김성일 선생이 임명되었고
1591년 2월 귀국해서 일본의 정세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인물평, 일본의 조선
침공, 그러니까 전쟁 가능성에 대한 보고를 하는데..같이 일본땅에 건너가, 같이 보고
듣고 느꼈을텐데..정사 황윤길과 부사 학봉 김성일 선생은 상반된 보고를 하였단다.
황윤길 선생은 반드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언행이 심상치 않다며 일본의 침공이
유력하니 전쟁에 대비하라 했고, 김성일 선생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두려워할만한
인물이 못되며, 감히 침공하지 못할 것이라 했지. 한바탕 조정이 시끄러워 지고..
결국 선조와 당시 조정은 김성일 선생의 의견을 받아 들이고 말았단다.
7년 조일전쟁이 발발하기 1년전의 일이었지.
그런데 서애 류성룡 선생이 따로 학봉 김성일 선생을 만나 물었다고 해.
정말로 일본이 침공하지 않을 것으로 보였는지..
그러자 학봉 김성일 선생은 그도 실제 일본이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지 못한다.
정사 황윤길의 발언이 지나쳐 민심이 크게 동요될 것을 염려해서 그랬다고 했다는구나.
그러니까..이 말은 곧, 학봉 김성일 선생도 당시 일본의 정세가 심상치 않고 어쩌면
전쟁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지.
물론 민심의 동요를 막고, 전란 대비를 조용히 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생각은 어느정도
이해는 되는데..문제는 어쨌든, 머지않아 실제로 전쟁이 터졌고, 학봉 김성일 선생이
정세를 오판해서 허위보고를 한 격이 되고 말았다는 거야.
바로 이것 때문에 학봉 김성일 선생이 그토록 오랜 세월을 논란의 한가운데 서서
당파싸움 때문에 허위보고를 해서 나라를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았고, 수많은 백성을
죽게한 소인배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으니.. 그의 생에 씻지 못할 오점을 남겼다고
해야 되겠다.
아들아, 아빠는 학봉 김성일 선생이 그래서 정말 나쁜 사람이었다 비난하려고
네게 그분 얘기를 하려는게 아니다.
물론, 그의 오판에 대해서 애써 변호하려는 마음도 없다.
하지만, 아들아..이게 전부라면 학봉 김성일 선생이 살았던 삶을 돌이켜 볼때
그도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겠느냐..
한때의 잘못으로 그 모든 삶이 매도된다면.. 그에게도 억울한 것이 있지 않겠느냐?
학봉 김성일 선생이 정말로 그렇게나 큰 죄인이었는지, 아니면 그도 재평가 받아야 할
그런 면이 있지 않은지 한번 따져볼 필요는 있지 않겠느냐?
그 얘기를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사실 학봉 김성일 선생도 그렇고 동인들도, 서인들도..그리고 선조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믿고 싶었겠지만, 일본의 침공 가능성은 충분히 알고 있었지.
그래서 장수를 뽑아 남쪽으로 보내 대비하고 성도 고쳐쌓고 했지.
학봉 김성일 선생의 보고 때문에 전쟁에 대비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
뿐만아니라..정세판단에 대한 최종책임은 그 누구도 아닌 국왕인 선조의 몫이지.
그리고 당시의 조선은 이미 병역 등 국방체제가 많이 붕괴한 상황이었고, 전쟁에
뒤늦게 대비한다 해도 주어진 시간 1년은 너무나 짧은 것이었어.
그런데도 그 모든 책임을 그에게 물어야 하겠느냐?
古 진주성도
1592년 4월, 실제로 7년 조일전쟁이 발발했고, 선조에게 잘못된 진언을 올린게 죄가
되어 그는 죽을 위기에 몰렸지만, 서애 류성룡 선생이 힘써 변호해서 살 수 있었단다.
대신에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그는 진주로 내려와 일본과의 전쟁 최일선에 서게
되었지.
이때부터 학봉 김성일 선생은 그 과오를 씻기 위해 눈물겨운 싸움을 시작해.
먼저 흔들리는 민심을 다독이고, 일본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했어.
진주는 경상우도의 중심이자, 남명학파의 중심인데 학봉 김성일 선생은 경상좌도
안동출신에 퇴계학파의 수제자라..한마디로 말해 라이벌, 껄끄러운 관계가 된다.
그럼에도 그가 경상우도 초유사로 와서 큰 잡음없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경상우도의 남명학파 출신 선비들이 그를 인정하고 협조한 것이 컸단다.
그가 목숨걸고 변호해서 복권시킨 수우당 최영경 선생이 바로 남명 조식 선생의
수제자였던 사람이었거든. 그래서 남명학파의 강골 선비들이 학봉 김성일 선생은
신뢰했던 것 같아.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 선생은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과 군비를 갖추는데 진력하고
경상우도 지역의 민심을 수습하는데 온힘을 다했단다.
그리고 유명한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선생이 경상도 관찰사 김수와 심각한 불화를
일으켰고, 김수가 망우당 곽재우 선생을 참소하여 곽재우 선생이 처벌받을 위기에
몰리자 이들 사이의 불화를 중재하고 곽재우 의병장을 변호하여 그를 살렸지.
또 진주목사 이경이 피신했다가 병사하자 진주판관이었던 김시민 장군을 불러들여
목사직을 대신하게 하고 진주의 군비를 갖추고 전쟁을 수행하면서 공을 세우게 했다.
1592년 10월 진주대첩 때도 최고위 지휘관은 학봉 김성일 선생이었다고 해야겠지만,
군사지휘를 무관인 김시민 장군에게 일임하고, 그를 지원하는데 주력해서 큰 승리를
이루는데 일조했다 할 것이야.
그렇게 그는 전심전력을 다해서 전쟁을 준비하고, 지휘하고, 또 중재하면서 그렇게
침식을 잊고 싸우다 무리해서 과로로 진중에서 순직하게 된 것이란다.
아들아, 학봉 김성일 선생이 진주에 내려와 그가 했던 일..
그의 생에서 마지막 1,2년은 우리가 어떻게 평가하는 것이 온당하겠느냐.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선생을 변호하고, 의병을 모으고 지원했던 일,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을 발탁하고 또 진주대첩에 기여했던 일은..
그가 위기에 처한 나라를 되살리고, 또 수많은 인명을 구하였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조정에서 내려온 최고위직이란 직위, 진주와 경상우도 백성들의 신뢰, 공적에서 오는
그의 권위가 바로 그가 최고의 조정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만약 학봉 김성일 선생이 순직하지 않고 살아있었더라면 적어도 진주성 내 본군과
호남출신 의병, 지휘장수간의 대립과 알력은 없었을 것이고, 있었다해도 그의 권위하에
충분히 조정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빠가 만약에 학봉 김성일 선생이 살아 있었더라면 1593년, 계사년 진주성
전투의 비극은 그 양상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정세를 오판하여 큰 실책을 범하여 그에 따른 책임을 묻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책임을 온전히 학봉 김성일 선생에게 묻는다면 그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진주에 와서 보였던 헌신과 그 공로도 평가해야 하지.
아빠는 그가 그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그 사람의 삶을 평가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의 생 전체를 두고 봐야하고, 그의 행위에
대해서도 그 의도를 살펴야하지. 그리고 그의 마지막은 어떠했던가를 잘봐야 한다.
그래서..말이다.
아빠는 학봉 김성일 선생에 대한 세상의 비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그가 살아온 평생의 삶을 살펴보고 그의 인품을 보면..그가 당파 때문에 허위보고할
그런 정도로 그릇이 작은 인물이 아니라 확신하고, 또 그가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참작해서..세상이 그를 재평가할 여지가 많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