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첫 장난감
고향에서의 어린시절에는 장난감을 갖기가 쉽지 않았다. 봄과 여름에는
오동나무를 깍아서 만든 조각배에 돛을 달아 물위에 띄우고 겨울철에는
연을 만들어서 하늘로 띄워 연놀이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내가 제대로 된 장난감을 갖게된 것은 아버지가 활어 무역선의
선장이되어, 일본에서 사온 장난감 비행기와 두사람 인형이 해딩을 하는
장난감이었다. 전 후 우리나라의 열악한 산업구조로 그런 장난감이 있지
않을 때에 시골에서 그런 좋은 장난감을 갖은 것은 큰 행운이었다.
비행기는 바닥에다 두어번 민 후에 앞으로 밀면서 놓으면, 마치 착륙하는
비행기처럼 “위왱” 소리를 내면서 앞으로 나아 갖고, 두사람이 해딩하는
장난감은, 태엽을 감은 후에 바닥에 놓으면 마주 선 2사람 인형이 앞뒤로
흔들며 서로 머리를 부딫쳐서 싸우는 장난감이었다. 그 장난감으로 나는
친구들에게 가끔 선심을 쓸 수가 있어서 참 좋았다.
특별한 새끼고양이
비행기장난감이 싫증이날 때 쯤에 일본에 다녀 온 아버지는 예쁜 새끼
고양이 한마리를 안고 왔었고 그 새끼고양이를 얻게 된 연유가 있었다.
아버지가 탄 무역선이 일본에서 활어를 내리고 귀국하려고 출항할 때에,
난데없이 배가부른 고양이 한마리가 다급히 배로 뛰어오르더니, 귀국을
하는 동안에 배안에서새끼를 여러마리를 낳았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선장인 아버지에게 가장 예쁜 새끼고양이를 주어 가져왔다고했고,
그 고양이는 우리고향에서 유일한 고양이었다. 그 고양이가 한창 재롱을
피울 때부터서 나는 말랑거리는 정구공을 실로 묶어서 방바닥 위로 빙빙
돌리며 그 귀여운 새끼고양이와 재미있게 놀기 시작했었다. 25
그때 그 작은 고양이는 완전히 나의관심과 시간을 쏟게한 재롱둥이였고,
나와 감성이 서로 통하는 너무나 예쁘고 귀여운 살아있는 장난감이었다.
그러나 내 곁에서 온갖 재롱을 떨던 그 귀여운 새끼고양이가 어느정도로
자랐을 때인 어느 날, 동사무소에서 서기일을 보던 큰 집형님이 우리집에
와서는 “이틀만 고양이를 빌려다오”라고 하도 간청하는 통에 마지못해서
빌려주었는데, 그것이 그 예쁜 고양이와의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동사무소 곡식창고에 쥐가 드나들자 쥐를 쫒기위해 고양이를 빌려갔는데,
고양이가 쥐약먹은 쥐를 물었던 까닭에 쥐약이 몸에 퍼져서 그만 죽고만
것이다. 고양이가 죽었다는 소리를 전해들은 나는, 미친 듯이 고래 고래
소리를 내지르고 온갖 욕설을하며울면서, 동사무소있던 형님을 찿아가서
죽은 고양이를 살려내라고 떼를 썼었다.
그러나 미안해서 절절매는 형님을 보고서는 어쩔 수 없이 울음을 그쳤던
나는, 이미 싸늘해진 고양이를 안고와서는 애통하는 마음으로 양지바른
언덕에다 묻어주었다. 그러나 고양이의 죽음은 나를 오랫 동안 우울하고
슬프게 만들었으며, 그 일은 내가 애완동물을 잃은 첫 경험이었다. 26

항구도시 여수로 이사하다. 1960년 여수항
내가 국민학교 4학년2학기가되자 우리가족은 항구도시 여수로 이사를했다.
그래서 그 때부터 나는 전깃불과 자동차가 있는 도시의 문화생활을 접하게
되었고 열심히 공부를 해야함을 깨달았었다.
또한 그림도 열심히 그렸고 방과 후에는 동내아이들과 어울려서 공차기,
제기차기, 구슬치기, 팽이 돌리기, 연날리기, 딱지치기, 굴렁쇠 돌리기를
즐겼고 처음으로 ‘엄마찿아 3만리’ ‘두통이’등 만화책도 빌려다 봤었다.
또한 뜨거운 여름에는 바닷가에 나가서 수영과 낚시질과 게잡기를 했고,
맑고 서늘한 가을에는 동네 앞 저수지에서 붕어를 낚고 작은 돗단 배를
만들어서 띄웠으며, 추운 겨울이 되면 얼어붙은 논바닥과 저수지 위에서
손수 만든 썰매를 지치기도 했고, 따뜻한 주말에는 구봉산 계곡 양지에
가서 동네아이들과 우유깡통에 밥을 지어서 호호거리며 먹기도 했다.
그랬지만 나는 학교시간과 저녁시간에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도 했다.
그 당시 내가 전학했던 여수서국민학교는 학생수가 5천명이 넘는 매우 큰
국민학교였고, 해방 된지 2년후에 태어 난 1947년생 우리학년은 900명이
넘어서 15반까지 있었다.
4학년 2학기를 2부수업을 받으면서 도시생활에 적응하랴, 새 친구 사귀랴,
수준따라 공부하느라 바쁘게 보냈다. 그러나 학년말에 받았던 성적표에는
수(秀)가 겨우4개 뿐이라 자존심이 상했던 나는, 성적표를그냥 찢어버렸고
전해주던 반장 민병태는 깜짝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도시로 전학해서 4학년 2학기에 좋지않은 성적을 받은 나는, 5학년이
되어서는 교무실 바로옆에 붙은 가장 큰교실에서105 명 많은 반원들과 함께
꽉찬 교실에서 서로 경쟁하 듯 열심히 공부를 했었다.
또한 미화부장, 도서부장 등 책임을맡았고 특별활동시간에는 미술반에 가서
크레온과 크레파스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런 덕분에 그 해 가을에는 여수주재 신문기자단이 주최한 여수시 초, 중,
고등학생 미술실기대회에서, 나는 크래파스로 이끼가 낀 기와건물( 전 시립
도서관)을 멋있게 그려서 초,중, 고등학생 한명씩에 주던 최고상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같이 그림을 배웠던 미술반의 친구들과 급우들을 놀라게했고
큰 부러움을 받았으며, 학교이름을 빛냈던 탓에 학교에서 널리 알려졌었다.
그런까닭에 담임선생님을 통해서 부탁하는 저학년 반에 불려가서,수업까지
빠지면서 교실미화를 도우면서 유명세를 단단히 지불하는 경험도 했으며,
“촌놈 참 출세했다”라는 부러움섞인 농담도 급우들로부터 들었다.
또한 5학년을 마칠 때는 전교생 앞에서 재학생 우등상 수상자들을 대표해서
우등상을 받았던 탓에, 시골뜨기였던 나는 6학년이 되어서는 반원들이 뽑던
어린이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회의진행 경험이 전혀 없던 탓에
매우 어렵게 어린이회를 이끌어야만 했었다 . 27

수학여행때 화엄사에서 (뒷줄 맨좌측)
그 후 6학년 가을에는 학교의 요청을 받은 나는, 며칠동안 구봉산기슭 한산사를
오르내리면서 “ 단풍이 덮인 가을 산사”를 대형화판에 그려서 학교에 기념으로
남겼다. (그 그림은 졸업 한지 10년이 지났을 때도 교무실 벽에 걸려 있었으며,
얼마 전에 동창이던 전남대 민병태교수로 부터 “크레파쓰로 그렇게 환상적인
단풍그림을 그릴 수가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라는 찬사를 들었다.)
그러나 도시생활 2년째들면서 우리 집에는 예기치 못한 어려움들이 닥치기
시작했었다. 그 원인은 6.25동란때 아버지와 같이 지원입대해서 장교가 되어
교관을 했던 작은아버지가, 전역을한 후 우리가족과 함께 살면서, 아버지의
허락없이 집문서로 친구 빚을 보증을 해 준 까닭에, 우리 가족은 하루아침에
살던 집에서 쫒겨나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더구나 3.15 부정선거때 여수에서 발생한 선거관련 살인사건의 주동인물이
활어를 싣고 일본으로 출항하는 아버지 배에 몰래? 승선해서 도피한 까닭에
그 일로 인해서 선장이었던 아버지는 본의 아니게 범인도피 공조및 은익죄를
짖는 결과가 되어서 귀국길이 막혔다.
더구나 5.16 군사혁명 후에는 밀수근절 기치아래 활어선을 탔던 선원이면
모두를 밀수조직범로 몰아부쳐 가차없이 잡아들이던 당시 사회의살벌했던
분위기가 아버지의 귀국길을 오랫 동안 막게 되었다. 28

꿈을 갖다 6.25 탓에 2~3살 나이차의 반원들과
아버지가 오래 집을 비우자 집안의 경제사정은 극도로 어려워지고 말았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나는 여수중학교에 입학을 했었고 1학년 때인 어느 날
오후에, 학교에서 내 준 공작숙제로 진흙으로 기와집과 초가집을 빚으면서,
“나는 커서 건축가가 되어야지……” 라는 소중한 꿈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꿈을 가진 몇개월 후에 나는 학교수업료를 제때 내지를 못해
안타깝게도 학교를 자퇴해야만 했다.
그 때 같은 처지였던 누나가 중학교 졸업을 불과 6개월을 남겨 놓고서 나를
위해서 먼저 자퇴하고말았다. 일본에계시던 아버지로부터 오랫만에 인편으로 부쳐온 적은액수 돈으로는 한사람의 수업료를 내기에도 모자랐기 때문이고,
남동생의 공부가 더 중요하다고생각한 어린누나의 헌신적인 결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누나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2학년이 되자, 결국은 나 역시
등록금재촉에 매일 시달리다, 곧 잘하던 공부를 포기하고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학교를 중퇴했었다. 그런 후 나는 하소연 할 곳이 없어 답답하고 쓰린마음으로,
나날을 목적없이바닷가를 배회하고 낚시질하면서, 차오르는 답답함과 울분을 속으로 삭여야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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