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백두산으로
당시(서기998년) 고려는 제7대 목종이 즉위하여 모후인 천추태후가 막후에서 섭정하던 때.
문물이 치성하고 번성하는 시기이다. 발해유민을 포섭한 고려(918~1392)는 송(宋, 960~1279)나라와 사실상 동등한 형제 국으로 생각한다. 발해가 물러난 빈자리엔 거란족은 요(遼/Kara Khitan, 916~1125)를 세우고 여진족은 금(金/Aisin Gunrun, 1115~1234)을 세운다. 그리고 이들의 배후에는 몽고족이 서서히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결국은 금나라가 송을 압박하여 황하의 남쪽으로 밀어내자, 송은 임안(臨安,항쪼우)으로 천도하였고. 금이 일시적으로 만주의 강자로 군림한다 했더니 몽고부족을 통일한 징기스칸(1162~1227)이 거란과 여진을 정복한다. 승승장구를 누리는 몽고는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1215~1294)대에 송나라를 뒤엎어 원나라를 세우고 고려와 일본까지 진공한다.
이튿날부터 원정대는 원정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랴 말을 구하랴 동분서주한다. 가도치와 해왕성, 고려광은 흉노족이 기른 말 여섯 필을 샀다. 네 마리는 자기네들이 타고 두 마리는 공주와 순례자를 위한 것이라면서. 어차피 돈은 두 사람이 내기로 했으니. 두 사람이 쿠차에서 타고 온 말은 장거리 질주로 핍진한 상태라 백두산까지 갈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기에.
드디어 출발하다.
말을 달리며 먼 길을 떠난다.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는가? 그 결과는 과연 무엇이며 이 순례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의 인연은 어떻게 결론지어질 것인가?
통화에서 짐꾼 넷에 말 네 마리를 더 구하여 짐과 야영장비를 싣고 본격적인 산행에 들어간다.
푸른 산림을 가르며 황토색 흙길이 남남서 방향으로 곧게 뻗어 나간다.
‘장백산(長白山)’ 이라는 표지판을 지난다.
아침 햇살이 수풀 사이로 비쳐 든다.
나무가 귀한 중국 산천을 헤매었던 우리의 눈에 산림이 무성한 산에 들어오니 너무나 반갑다.
장백산 입구에 들어서다.
벌써 청량한 산 기운이 온몸에 전해 온다.
화산재로 검게 변한 흙길이 비에 젖어 촉촉하다.
발해와 고려국은 백두산을 자기 민족의 발상지로 여겨서 성지로 받든다.
티벳인에게 성지인 카일라스와 마나사로바가 있듯, 고려사람에게는 백두산 천지(白頭山 天池)가 있는 것이다.
화산재가 두텁게 눌러 붙어서 지표가 보이지 않는다. 떠껑이 진 화산재는 길옆 사방 천지에 널려있다. 그래도 그 화산재를 뚫고 삐져나오는 푸른 영혼의 손짓이 있으니, 길고 완만한 능선 위로 푸른 풀이 덮여 있고, 노랑, 보라, 하양, 빨강, 분홍 색색의 야생화가 수를 놓는다.
지상 선경이 바로 여기로구나.
어머니 품에 안긴 듯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즐겁다.
원정대 일행은 천지 호수 아래 편평한 초원 위에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야영할 준비를 한다.
천막을 치고 야영할 준비를 마친 후 일행은 천지를 향해 올라간다.
드디어 천지(天池), 하늘호수에 오다.
신령한 기운이 단번에 사람을 사로잡는다.
저 멀리 연봉들은 구름에 잇닿아 있어 구름과 산을 분간할 수 없구나,
다함이 없는 산수의 경계여(雲山不辯容, 無盡山水境)!
연무가 스러지는 순간 아, 천지가 눈을 뜬다.
맑고 고운 검푸른 눈동자여!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보석의 호수!
언어의 길이 끊어지니 정신이 맑아지고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기암괴석이 천지를 둘러 싸안고 있는 것이 흡사 불보살이 회상(會上)을 이룬 듯, 18나한이 소요하는 듯,
금강역사 장군봉이 기립하여 도열한 듯…
천지의 위로는 천상계가 임재(臨在)해 있고, 아래로는 역사의 시원을 비쳐 주는 시간의 거울, 마음의 거울이 있다.
그렇다!
천지는 큰 거울 같은 마음의 현현 그것이다.
이내 도리천에서 구름이 내려와 운제봉(梯雲峰, 구름사다리 봉우리)과 옥주봉(玉柱峰, 옥기둥 봉우리) 위로 내려앉는다.
홀연 하늘이 갈라지고 햇빛이 쏟아져 천지 호면(湖面)에 비쳐 온다.
문득 저 깊은 천지의 마음속에서 큰 소리가 울려 나오듯 한 소식이 순례자의 마음을 때린다.
발해유민들은 ‘고토회복(故土回復), 옛 땅을 되찾아라!’로 들리고,
순례자에게는 ‘수연환본(隨緣還本), 인연을 쫓아 본래로 돌아가라’고 들린다.
물위로 제비가 가벼이 날아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어느새 물이 구름을 끌어당겨 수면 위로 구름이 스며든다.
마치 백의관음(흰 옷 입은 관세음보살)이 비단 옷자락을 날리며 물위로 내려오시어 수면을 밟고 걸어가시는 듯,
때로는 구름이 제 그림자를 수면 위로 늘어뜨려 짙은 색조의 무늬를 그린다.
구름이 흘러 움직이면 물위의 그림자도 벽록(碧綠)에서 황록(黃綠)으로 변하는 것이 마니보주(摩尼寶珠)가 저절로 돌아가면서 영상이 바뀌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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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고려인들의 단군조선을 역사의 시원으로 생각한다. 단군(檀君)은 환인천제(桓仁天帝)의 아들인 환웅천왕(桓雄天王)과 웅녀(熊女) 사이에 태어난 천손(天孫)이다. 환인천제는 다름 아닌 제석천왕(Saka Deva Indra)이며 도리천왕(忉利天王)이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제석천왕의 자손, 즉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민족적인 자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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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연히 천지가 운무에 휩싸이고 하늘 문이 닫힌다.
중생에게 다시 사바세계(娑婆世界)로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신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을 달린다. 길옆에 핀 들꽃이 푸른 비단 위에 오색수를 놓은 듯 마음이 황홀해진다.
37. 장수천녀의 유혹
짐꾼들이 장만한 저녁을 먹고 두 사람은 야영지에서 빠져나와 천지를 향해 걸어갔다. 두 사람은 호수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어떤 계시가 나타날지 궁금했다.
운무에 휘감긴 천지를 굽어보면서 감회에 빠져 있는데, 홀연히 거대한 황금까마귀(Golden Raven)가 구름 속에서 ‘휘이이익’ 나타난다. 두 사람을 향해 날아온다. 아주 면전까지 와서는 거대한 날개를 접지도 않고 그대로 가만히 펴고 있다. 만약 그것이 날개를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날개가 일으키는 바람에 두 사람은 종이처럼 날아가 버릴 것이다. 화등잔만한 눈을 한 번 깜박이더니 텔레파시로 뜻을 전한다. ‘내가 너희를 하늘나라로 데려가리라. 너희는 높으신 분의 부름을 받았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한 사람 씩 움켜쥔다. 가운데 한 발은 자기 가슴 쪽으로 오그려 붙인다. 아, 세 발 달린 황금 까마귀, 삼족오(三足烏)로구나.
날아오른다, 구름위로 높이 솟아 하늘 높이 아득히. 13층 황금탑이 구름 속에 나타난다. 날개를 한번 치니 눈 깜박할 새에 황금탑에 다가왔다. 13층 꼭대기 위에 둘을 살며시 내려놓는다. 그리고 인사하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라진다. 하늘 높이 사라져 간다. 누각의 난간에 의지하여 아래를 내려다보니, 끝없이 펼쳐진 푸른 과수원, 옥색 구름이 탑 중간으로 스르르 흘러간다. 미묘한 향기가 실바람 타고 공간을 흐른다. 싱그러운 새소리 그리고 탑 층층마다 처마에 매달린 풍경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에 귀가 간지럽다. 우리는 난간에서 실내로 들어온다. 큰 방이 나타난다. 벽 위에는 ‘반도비원(蟠桃秘苑)’ ‘여의천년(如意千年)’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황금색으로 글자가 새겨져 있어 광이 난다. 실내가 온통 비취빛 옥으로 되어 있다.
두 사람은 널찍한 의자에 몸을 누이고 몽롱한 기분에 취한다. 어디선가 홀연히 선녀가 날아 들어와 두 사람 앞에 선다.
‘저는 장수천녀예요. 당신들의 하늘나라 방문을 축하드려요. 여기는 도리천(忉利天)이라는 하늘나라죠. 이곳은 금단의 구역이라 아무나 올 수 없는 곳이죠. 당신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예요. 이곳에 계실 동안 제가 안내를 맡았어요.’
‘여기에서는 칼이나 무기는 불상지물(不祥之物, 흉한 물건)이니 소용이 없어요. 이곳에는 미움이나 원한, 시기질투나 폭력적인 감정이 일어나지 않거든요. 여기는 불살생 평화주의이죠. 그러니 두 분이 차고 있는 칼은 여기에 내려놓으세요.’
‘그런데 이곳에 계시려면 몸이 날아다닐 만큼 가벼워져야 해요. 여기에 태어난 사람들은 다 날아다니는 신통을 갖고 있는데 인간세계에서 오신 분들이 여기서 지내려면 모두 불로장생 반도 복숭아를 먹어야 해요. 반도복숭아를 먹어야 날 수 있게 되죠.’
‘불로장생하는 복숭아라고요?’ 칼라무드라가 진지한 마음으로 되묻는다.
‘녜, 천년동안 늙지 않고 살 수 있어요. 그리고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도 얻게 되죠.’
‘우리도 먹고 싶어요. 주세요.’ 월광공주는 불로장생이란 말에 혹해서 사막의 아들을 바라본다.
‘칼라다나, 제가 천년 동안 동안과 젊음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겠어요.’
공주는 천년동안 동안과 청춘을 유지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차서 눈이 반짝반짝 거린다.
공주는 칼라다나가 정표로 준 보물과 천년동안 불노장생을 보장한다는 복숭아와 맞바꾸려한다. 이것은 여자의 선택이다. 남여가 사랑에 빠지면 여자는 영원을 꿈꾸고 남자는 자유를 꿈꾼다. 영원한 사랑, 지속적인 관계를 꿈꾸는 칼라무드라. 장수천녀의 유혹에 빠진다.
마음의 보물을 건네주고 복숭아 두 개를 얻는다. 반갑게 손을 내밀어 복숭아를 받아 한 개는 사막의 아들에게 주고 한 개는 자기가 먹는다. 달고 시원하다. 감미롭다. 온 몸이 다 녹아들 듯, 더위에 지친 몸속으로 얼음보숭이(아이스크림)가 퍼지듯 축복의 물결이 몸의 세포까지 퍼진다. 몸이 무중력 상태 가 된 것처럼 가벼워지고 투명해지는 것 같다. 날을 것 같다. 피부가 빛이 난다. 칼라무드라는 선녀처럼 아름다워졌다. 몸의 세포가 완전히 바꾸어 진 것 같다. 노화가 사라졌다. 청춘의 샘물을 마신 것인가, 몸과 마음이 극도로 맑아지고 가벼워져서 구름을 탄 것 같고, 5월 봄날 첫 사랑에 빠진 소년소녀처럼 기분이 몽롱하고 아늑해졌다. 다 먹으니 졸음이 밀려와 한 잠을 잔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옥침상에서 낮잠을 잤나보다.
깨어보니 ‘몽답천만리(夢踏千萬里) 교래월만루(覺來月滿樓)’라-‘꿈속에 천만리를 다녔는데, 깨어보니 누각에 달빛만 가득하구나!’ 라는 시적인 상황이다.
코끝에 날아오는 향기, 눈에 가득한 꽃과 정원,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져 눈에나 귀에나 기분에 거슬리는 것이 일체 없다. 침상에서 내려와 땅을 밟는다. 부드러운 촉감이 나는 땅. 미세한 모래가 섞인 황금빛 나는 황토이다. 손가락 끝으로 살짝 만져보니 청옥 황옥 벽옥 백옥 들이 마모되어 깔린 모래이다. 옥모래, 옥사(玉沙)이다.
야, 기가 막히는군,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더니 여기 거기일세. 이러고 있으니 장수천 선녀가 나타난다.
‘우리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으니 유람이나 할까요?’
유혹적인 음성에 우아한 몸짓으로 안부를 묻는다. 두 사람은 장수천녀 따라 도리천 유람을 나선다.
먼저 도리천의 구조를 알려준다. 동서남북 각 방향에 여덟 개의 하늘나라가 벌려있으니, 사 팔 삼십이, 서른 두 개의 하늘나라에다가 중앙에 있는 제석천을 합치면 서른셋의 하늘나라가 된다. 그래서 도리천이라 한다. 한 쪽 방향의 하늘나라를 다 둘러보는데 이틀이 걸린다니까, 동 서 남 북 네 방향을 돌면 여드레가 걸린다. 중앙에 있는 제석천궁에는 들어갈 수 없고 밖에서 구경만 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