⑬예수는 비유에 담긴 뜻을 깨치라고 했다
사람들은 예수의 메시지를 단박에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는 비유를 들었고,
그래도 어려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예수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다그치기도 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마르코 복음서 4장 13절)
예수는 강조했다.
‘비유를 알아들어야’ 하고, ‘비유를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예수가 뿌린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으니까 말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마르코 복음서 4장 11절)
예수는 복음서를 관통하며 숱한 씨앗을 뿌린 이유를 정확하게 밝혔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 때문이다.
영어로는 ‘The secret of the kingdom of God’이다.
‘하느님 나라의 비밀’이다.
그리스어 성경에서 ‘신비’에 해당하는 단어는 ‘musterion’이다.
‘닫혀 있다, 잠겨 있다(closed-keep)’는 뜻이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닫혀 있다.
거기에는 자물쇠가 있다.
예수가 뿌린 씨앗(말씀)에도 자물쇠가 있다.
우리가 할 일은 비유에 담긴 자물쇠를 푸는 일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해야 자물쇠를 풀 수 있나?”
“그럼 예수의 씨앗을 어떻게 품어야 하나?”
“어떻게 하면 암탉이 될 수 있나.
알을 품는다는 게 정확하게 무슨 뜻인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는 오랜 세월 내려오는 ‘암탉의 전통’이 있다.
예수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숱한 수도자들이 ‘좋은 밭’이 되고자 애썼다.
그들은 광야로 떠났다.
팍팍한 사막의 동굴에서 거하며 예수가 뿌렸던 씨앗(말씀)을 품었다.
자신의 내면에서 싹을 틔우기 위해서였다.
그들을 ‘은수자(隱修者)’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우리도 암탉이 되기 위해 이스라엘의 광야로 가야만 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공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청년에게는 취업의 전쟁터에서 바쁘게 다니는 학교가 광야다.
직장인에는 아이들을 키우며 출퇴근해야 하는 바쁜 일상이 광야다.
거기서 우리는 얼마든지 ‘암탉’이 될 수 있다.
핵심은 ‘어디서’ 알을 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알을 품느냐이기 때문이다.
씨앗이 한 톨 떨어진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이다.
그 씨앗이 나의 밭에 떨어진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씨앗을 품어야 한다.
그래야 싹이 틀 테니 말이다.
그런데 씨앗에서 싹이 트는 데는 온기가 필요하다.
암탉이 달걀을 품을 때도 적정한 온도가 돼야 한다.
가슴에 알을 품고서 암탉이 웅크리고 앉아 있으면 따듯한 온기가 생겨난다.
그 온기로 알을 품어 깨운다.
예수의 말씀을 품을 때도 마찬가지다.
온기가 필요하다.
적정한 온도를 유지해야 씨앗에서 싹이 튼다.
그 온기가 뭘까.
예수의 말씀에서 싹이 트게 하는 따듯한 기운이 대체 뭘까.
그것은 다름 아닌 ‘물음’이다.
내 안으로 깊이 던지는 물음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예수님은 왜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을까?”
그렇게 물음을 던지고 나면 내 안에서 답이 올라온다.
“이웃을 사랑하면 ‘평화’가 생길 테니까.”
그 답을 물고서 다시 물음을 던진다.
“그런 평화가 왜 나에게 필요하지?”
답이 떠오른다.
“그 평화로 인해 내 삶이 평화로워질 테니까.”
다시 물음을 던진다.
“그럼 그 이웃이 누구일까?
누가 나의 이웃이지?”
다시 답이 올라온다.
“나의 하루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겠지.”
이렇게 답을 물고서 다시 물음을 던지면 된다.
“그럼 예수님은 왜 그 사람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을까?
나의 몸은 나의 몸이고,
그들의 몸은 그들의 몸인데.
왜 굳이 ‘내 몸과 같이’라고 강조하셨을까?”
이렇게 물음과 답을 던지는 가운데 ‘온기’가 생겨난다.
그 온기로 인해 물음이 깊어지고, 답은 더욱더 깊어진다.
어떤 물음은 바로 답이 올라온다.
어떤 물음은 그렇지 않다.
금방 답이 올라오지 않는다.
그럴 때는 더 깊이, 더 오래 물음을 던져야 한다.
더 절박하게 물어야 한다.
때로는 하루 만에,
때로는 일주일 만에,
때로는 한 달 만에 답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럴 때 자기 안의 우물,
즉 신의 속성을 향해 던진 두레박이 더 깊이 떨어진다.
그렇게 끊임없이 묻고 답하다
자신도 모르게 “아하!” 하고 깨닫는 순간이 온다.
예수의 씨앗이 싹트는 순간이다.
“아하, 그렇구나!
나와 이웃이 둘이 아니구나.
‘신의 속성’이라는 예수의 눈으로 보면 그게 하나의 몸이구나.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구나.
예수님 눈에는 그렇게 보이니까.
‘신의 속성’에서는 둘이 아니니까.
결국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 자체가 신의 속성을 회복하는 길이구나!”
그렇게 자물쇠가 풀린다.
굳게 잠겨 있던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내 안에서 깨어난다.
〈14편에서 계속됩니다.〉
[출처:중앙일보] 백성호-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