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암벽이 끝없이 이어지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 가장자리.
먼지바람을 뚫고 마침내 마주한 쿠차의 키질석굴은 거대한 침묵 속에서 나를 맞이했다.
'키질(Kizil)'이란 위구르어로 '붉은색'이라는 뜻이다. 이름부터가 이미 경고이자 예언이었다.
차가운 무잘트 강 물줄기가 유유히 흐르는 밍우타그 산의 절벽.
그 척박하고 거친 황색 바위에 벌집처럼 뚫린 석굴들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면서도 뜨거워지는 묘한 전율이 일었다.
이곳이 바로 고대 구즈국(龜茲國)의 찬란한 불교문화를 품었던,
실크로드의 가장 뜨겁고도 외로웠던 중심지였구나.
어디에도 팻말 하나 요란하지 않았다.
설명이 필요 없는 곳이었다. 절벽 자체가 이미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었으므로.
이 거대한 벌집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1세기 무렵 실크로드를 통해 불교가 이 땅에 처음 발을 디딘 후, 석굴을 파기 시작한 것은 3세기 말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후 약 6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세대에서 세대로 망치와 정이 절벽을 두드리며 굴들이 하나씩 태어났다.
돈황 막고굴보다 무려 300년이나 앞선, 현존하는 중국 불교 석굴 중 가장 이른 역사를 가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 년의 세월을 품은 키질석굴의 역사는 인간의 뜨거운 신앙이
어떻게 예술로 피어났다가 고요히 저무는지를 보여주는 장엄한 대서사시와 같다.
3세기 말, 인도 불교 양식이 소박한 모습으로 이식되던 초창기를 지나 4세기 중엽에 접어들면,
중심주굴 양식이 자리를 잡고 페르시아와 헬레니즘의 미감이 융합되는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다.
주실 중앙에 굵은 기둥을 남겨두고 그 주위를 돌며 삶과 죽음의 도리를 묵상하던 중심주굴과
수도승들의 고요한 수행처였던 비하라굴이 바위산을 가득 채울 무렵,
키질은 구즈국의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며 번영의 정점에 도달한다.
현존 석굴의 절반 이상이 조성된 6~7세기에 이르러,
동굴 벽면을 가득 채운 라피스 라줄리의 푸른 빛은 쿠차만의
독창적인 예술혼으로 승화되어 신앙의 도가니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망치 소리도 8세기 이후 이슬람화의 거센 파고 앞에 서서히 몸을 낮추며 잦아들었으니,
이제는 적막만이 감도는 석굴의 잔해 속에서 한때 세상을 환히 비추던 구법(求法)의 열망만이 아스라이 전해질 뿐이다.
승려들의 생활 공간. 작은 석실들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부엌 등 생활시설을 갖춘 곳도 있다.
수만 명의 승려가 이 절벽 안에서 먹고 자며 수행했다는 증거다.
주실 천장을 빽빽이 채운 마름모꼴 무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마름모꼴 하나하나가 부처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을 담은 독립된 그림이었고,
그것이 모여 천장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우주가 되었다.
혹자는 그것이 수미산을 상징한다 하고, 혹자는 보리수의 잎을 닮았다 한다.
어느 해석이 맞든, 그 장대함 앞에서는 말문이 막히는 것이 먼저다.
석굴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바깥의 황량한 더위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어둠에 눈이 익어갈 때쯤, 사방을 가득 채운 벽화들이 말을 걸어왔다.
키질석굴을 지배하는 색은 단연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 즉 청금석에서 추출한 푸른빛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의 깊은 광산에서부터 이 험난한 사막을 건너왔을 그 푸른 밤하늘 같은 색감은,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고하리만치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푸른빛을 내기 위해 고대의 화공들은 얼마나 많은 모래바람을 견디며 이 어두운 굴속에서 붓을 들었을까."
인도와 페르시아, 그리고 중원의 문화가 이 좁은 석굴 안에서 격렬하게 부딪히고 융합되어
오직 '쿠차'만의 예술로 피어났다.
경계가 충돌하는 곳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찬란한 예술의 흔적을 쫓아 들어선 석굴 안에서 나를 맞
이한 것은 경이로움 이전에 가슴 먹먹한 비명이었다.
벽면 가득한 부처와 보살들은 하나같이 눈이 멀어 있거나 얼굴이 문질러져 형체를 잃은 채,
그들이 견뎌온 모진 수난의 역사를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10세기 이슬람화의 거센 물결 속에 '우상'이라 낙인찍혀 칼끝에 신성한 눈이 도려내졌고,
추위를 피하려던 유목민의 모닥불 연기와 금을 쫓는 무지한 손길에 안료가 긁혀 나갔으며,
급기야 20세기 초 제국주의 탐험대들의 차가운 칼날 아래 사각형의 흉터만 남긴 채
타국으로 실려 가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사방에 가득한 약탈과 훼손의 흔적은 역설적이게도 이 석굴이 견뎌낸
가장 진실한 시간의 기록이자 지워지지 않는 역사의 문장으로 다가온다.
매끄럽게 보존된 완벽함보다,
살점이 뜯겨 나간 듯한 그 처절한 상처들이 전하는 울림이 훨씬 더 묵직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그 속에 인고의 세월을 버텨낸 숭고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석굴을 나와 광장으로 내려오니,
오후 햇살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그곳에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스님의 청동상이 홀로 앉아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그 실루엣 너머로 스쳐 지나갈 때,
나는 이 척박한 땅에서 태어나 문명의 새벽을 깨웠던 한 인간의 깊은 고독과 마주했다.
어머니 지바(Jīva)는 구마라집을 임신한 뒤 갑자기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여러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세상에 나오자 그 신묘한 능력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훗날 사람들은 말했다. 위대한 번역가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이미 세상의 언어를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그는 인도 카슈미르의 명문 귀족 집안 아버지와 구자국 왕의 누이동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야말로 동서 문명의 교차로에서 빚어진 존재였다.
일곱 살에 어머니를 따라 출가한 그는 이 키질석굴에서 원시 경전과 아비달마 불교를 처음 배웠다.
그 어두운 굴 속에서 어린 구마라집이 글자를 익히던 모습을 떠올리니,
석굴의 벽화들이 문득 그의 첫 교과서처럼 느껴졌다.
이후 카슈미르로 건너가 소승과 대승을 두루 섭렵한 그의 명성은 사막의 오아시스를 타고 중원까지 퍼져 나갔다.
아라한 한 명이 그를 보고 이렇게 예언했다고 전해진다.
"이 아이가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 파계하지 않으면 우바급다와 같은 대성인이 될 것이고,
파계를 하더라도 매우 뛰어난 법사가 될 것이다." 운명은 잔인하게도 그 두 번째 길을 택하게 만들었다.
동서의 경계에서 태어난 구마라집의 생애는
찬란한 천재성이 어떻게 비극의 도가니 속에서 단련되어
위대한 유산으로 승화되는지를 보여주는 한 편의 장엄한 서사시와 같다.
칠 세의 어린 나이에 키질석굴에서 출가하여 서역 전체에 명성을 떨쳤으나,
그 명성은 오히려 독이 되어 조국 구자국을 불태우고 그를 칠만 대군의 포로로 만드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양주에서의 굴욕적인 십팔 년,
달리는 말에서 떨어지는 모욕과 강제된 혼인이라는 원망스러운 세월 속에서
그는 슬픔을 삭이는 대신 중원의 언어를 갈고 닦으며 훗날의 위대한 번역을 고요히 잉태했다.
쉰여덟의 황혼에야 비로소 장안에 입성하여 삼백여 권의 경전을 펴낸
그의 붓끝은 단순한 언어의 옮김을 넘어 유려한 한자의 미학으로 동아시아 불교의 사상적 토대를 새로이 세웠다.
세속의 강요로 계율을 더럽혀야 했던 통한의 삶 속에서도 진리를 향한 그의 서원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으니,
화장장의 불길 속에서도 타지 않고 붉고 영롱하게 남았던 그의 혀는 자신이 전한 문장에
단 한 점의 거짓도 없었음을 증명하는 가장 뜨겁고도 아름다운 유언이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보되 그 진흙은 묻지 말아라"라는 구마라집의 당부는,
파계를 강요받던 비극적 운명 앞에서 그가 길어 올린 가장 숭고한 역설의 언어였다.
인도의 전통 불교가 번뇌를 멀리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것과 달리,
그는 오히려 "온갖 번뇌가 곧 깨달음의 도량"이라 역설하며 삶의 가장 비루하고 고통스러운 순간마저
수행의 과정으로 기꺼이 껴안았다.
포로로 끌려가고 이국의 땅에서 계율을 꺾어야 했던 굴욕의 세월은 그에게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진리의 정수를 인간의 언어로 빚어내기 위해 스스로를 녹여낸 처절한 연단의 시간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오늘날 일상처럼 읊조리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저 짧고도 완벽한 문장 또한,
결국 그가 온몸으로 통과해온 고통이라는 진흙 속에서 피어난 가장 눈부신 언어의 연꽃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오전 햇살에 키질석굴의 붉은 암벽이 더 짙은 핏빛으로 물들 때,
나는 구마라집의 동상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600년에 걸쳐 이름 모를 석공들이 하나씩 뚫어 낸 저 굴들,
그 어두운 굴 속에서 청금석 가루를 갈고 붓을 들었던 화공들.
고향을 잃고, 포로가 되고, 파계를 거듭해야 했던 잔혹한 운명 앞에서도 그가 끝내 지켜낸 것은 오직 '진실한 언어'였다.
문명은 사라지고 사람은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푸른빛의 열정과 진리의 문장들은 여전히 이 척박한 절벽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은 천 년 전 화공들이 벽면에 칠했던,
그리고 구마라집 스님이 고독하게 바라보았을 그 깊고 푸른 라피스 라줄리의 색을 닮아 있었다.
온몸이 진흙에 물들지언정 끝내 푸른 연꽃을 피워내고자 했던 한 승려의 뜨거운 숨결이,
그리고 붉은 대지와 상처투성이 푸른 벽화의 대비가 내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다.
돌아서는 길, 내 발걸음 뒤로 실크로드의 바람이 오래도록 서성였다.
마실정회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