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듬 / 1969년 경남 진주 출생, 부산에서 성장. 2001년 《포에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 시집 『별 모양의 얼룩』『명랑하라 팜 파탈』『말할 수 없는 애인』『베를린 딜렘의 노래』『히스테리아 』『표류하는 흑발 』,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 산문집『모든 국적의 친구』『디어 슬로베니아』등.
표류하는 흑발 (외 2편)
우리들을 사랑으로부터 구하소서 —수잔 브로거
김이듬
국자에 뻐끔한 쇠옹두리가 걸린다 꽤 곤 뼈에는 터널이 있다
굴다리 아래 애 업은 여자가 뛰고 있었다 포대기에서 두상이 떨어졌다 내게 굴러왔다 무심코 발로 차 강으로 보냈다 거지 여자는 미친년이었고 여전히 뛰고 있었다
아저씨네 앞마당에서 암소가 울었다 더 짧게 교복 치마를 접어 올렸다
뼈를 보내왔다 발신자 얼굴은 모른다 배 잡고 웃었다 앙상한 다리 부풀어 오른 배 위에 뱀 무늬로 터진 피부가 있다 우는 개구리 잡아먹고 싶다 어두워지기 직전에 여름이 있다
체질이 바뀌었다 사랑하는 엔트로피 과다한
바닥과 수평이 되면 두려움이 주는 매력에 사로잡힌다 사색(死色)은 예쁜 색
갓난애는 실금 많은 혼혈아 달 무늬보다 수평선보다 멀리 금을 그었다 그 애는 우유 나는 시리얼 함께 살 수 있었을까 잠재된 푸른 눈은 발아하고 다른 형상은 차차 장대한 망각으로 가기를
병원비만 내 주세요 인터넷 거래는 쉬웠다 최소한의 지문도 찍지 않은 몸 핏기 없는 달덩이 싸매고 사라지는 젊은 부부 중요한 건 여담 아기바구니까지 차비 들 일 없다
마을의 모든 소가 구덩이를 향해 가고 구름을 보기 전에 폭우가 내리던 날 오오 보드라운 머릿결은 허벅지 사이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가 다시
목숨을 걸 만큼 재밌는 게 없을까 저건 뭘까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강 너머 흰 원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둥그런 거
간주곡
어둠이 다시 퍼지면
너는 방에서 나온다
골목에서 기다릴게
저만치 네가 걸어오는 복도 내려오는
계단 불빛이 켜졌다가 꺼지는 동안
몇 개의 건반으로 만든 무한한 음악이
너와 걸으면 내 몸에서 리듬이 분비된다
느리고 평안하게
차가워져
마치 이 세상에 다시 올 것처럼
그때는 드러내어 사랑할 수 있을 듯이
몇 줄의 소리로 온 세계에 알릴 듯이
왜 넌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거니
밤의 카페에서 책에 홀린 너를
그 둘레를 감싼 따뜻하고 투명한 막을
마치 내 몸이 내 몸인 것처럼
마치 우주를 느끼는 것처럼
소름과 시름 따위 구름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이다
썰렁하지
우리 사이에 흐르는 빙수
검은 건반 아래 새하얀 날의 살결
얼음이 녹기 전에
긁는다 숟가락은 왜
손가락이 아닌가 부딪친다
간신히 나는 희박하게 우리는 있다
스테인리스 드레스 팬시 성에 다이아몬드 결빙 만발한 정원
유리창 너머
손을 들어 흔드는 너
나는 간주된다 울리지 않는 전축
이 신음이 노래인 줄 모르고
마저 이 세상을 사랑할 것처럼
오월의 오후
너의 뒤에는 바오바브나무가 있다
배경이라고 할까
희고 조그마한 천이 새 모양으로 접혀 있다
우리는과자점 테이블 앞에 마주 앉아
서로의 비밀을 말한다
나는 비밀보다 비닐에 싸인 너의 우산이 좋은데
귀띔보다 귀에 입맞춤이 좋은데
너의 뒤에는 바오바브나무가 있다
배후라고 할까
비애라고 할까
비밀을 말하고는 마음이 갓털이 되면
테이블은 영원할 것처럼 희고
바바브브브한 기분이 들겠지
비읍은 고장 난 창문 같아
금방 사라지는 것들만 창문으로 들어온다
냅킨 위의 두 개 스푼처럼
우리가 흰 침대 위에 누웠다 더 차가워져 일어났던 날
우리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고
나빴다
나의 뒤에는 바오바브나무가 없다
나는 너무 많은 페이지와 데이지들 마지막 나무까지 봐버렸다
배경으로 커다란 거울이 있고 우울한 사람들이 다디단 과자를 고르고 있겠지
네 비밀을 알고 나면
나는 더 이상 네게 발꿈치를 들지 않을까
아이스크림에 빠진 핑크색 스푼이라고 할까
머리가 크고 나쁘지
우리는 창문이 있는데도 문으로 출입한다
— 시집『표류하는 흑발』(2017. 9)에서
옷걸이
내 치마가 걸려 있다 저녁놀과 가로등 사이에
뺨에 눈물이 마르는 동안 흘러내렸나
비가 내렸고 나는 방화에서 내렸다 비비안 마이어를 읽느라 화곡과 우장산을 지나왔다
저기 내 치마가 걸려 있다* 유목민의 천막처럼 초가집 위 무지개보다 복잡하게
마리서사에 들러 읽던 책을 팔았다 골목을 돌아 나오다가 공중화장실로 끌려갔다 큰 트럭에 나를 던져 넣었다 저기 내 치마가 걸려 있다 막사와 막사 사이 산허리에 제8사단 사령부와 고요한 사원 사이에
남자 친구는 하루에 몇 번 했냐 임질이냐 너도 즐겼냐고 물었다
내 치마는 장막으로 펼쳐지고 어두운 치마 속으로 벼락 치는 칼날 총알들이 별처럼 총총 박혔다
월요일에는 기병대 화요일에는 공병대 하루도 빠짐없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군인들이 줄을 섰다 동네 한켠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덮자고 했다 촌장이 돈을 받아 왔고 원한을 품지 말라고 했다
여기 치마가 걸려 있다 암묵의 목장 새벽이슬과 밤이슬 시체들이 흘러내리는 구덩이에 빌딩이라는 축사 플래카드와 구름 사이에
나는 벌거벗은 얼개로 있다 인공관절인지 뼈에 사무치지 않는다 가랑이를 벌리고 가부좌한 후손 같다 내 목을 꼬아 머리로 퀘스천 마크를 만든다 더듬더듬 문을 두드리는 손 같다 갈고리인지
치렁치렁한 밤의 치마 아래 숲에서 내가 잠든 관으로 죽은 할머니가 힘찬 숨결을 불어 넣는다 아 뜨거, 누가 우리 가랑이를 찢어 걸어놓았나 벌건 노을의 쇠막대기에
*프리다 칼로
ㅡ시집『표류하는 흑발』(민음사, 2017)
여드름투성이 안장
셔터 내리고 있는데 누가 기어들어왔다
내 자전거와 부딪힌 승용차 주인이다
나의 안녕을 묻기 위해 퇴근길에 들렀단다
약간의 가슴 통증 외엔 괜찮다고 말하자
천만다행입니다 나를 걱정해주는 보험사 직원 같은 아버지 같은
그가 가져온 상자 백 퍼센트의 순수 원액 어쩌고저저고 올라가는 내 책상
이름이 책상이지 무릎 담요와 운동화 칫솔 따위가 있고 쭈뼛하게 사전이 있다
백 퍼센트 말이 되는 거짓말같이 다시 가슴 부위가 저려온다
여기 유방과 쇄골 사이 손바닥으로 눌러주면 조금 낫는 듯하다
교통사고와 연애는 후유증이 더 무섭다고
내일은 병원에 가보라며 남자가 아픈 데를 주물러 준다
호호 불어주다가 애도 아닌데 침을 발라대기 시작한다
한 세트의 유리병들이 위태롭게 부딪히는 소리를 내고
십이 갖니 꾸러기 수비대와 몬스터 만화책이 자빠지고
과일을 사라며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행상인이 지나가고
얼떨결에 심드렁한 개처럼 남자는 내 치마 아래로 기어들어간다
삐죽삐죽 뻐드렁니가 튀어나온 안장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손잡이를 뿌리치고
오르막길을 달려간다 페달을 돌리면서 살짝살짝 음핵을 비벼주는 게 자전거 타기의 묘미다
쿠션 좋은 산악 자전거 타고 바다 위를 날아가는 꿈을 꾼 적 없다
철공소 골목 아나 자전거 대여점이 낡고 더러운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리다가 사과 꽃잎이 달려드는 동사무소 화장실에 엉덩이를 까고 앉아
젖은 신문의 펼쳐진 면을 거들떠보며 볼일을 봐야 하는 일이 생긴다
그때보다 지금 여기서 오줌을 누는 게 멋지겠다고 생각한다
싼다 정말이지 화장실이 급했다
문 여는 시각에 맞춰 병원 가려면 한시라도 빨리 출발해야 한다
지린내 나는 안장을 빤다
안장이 없는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지나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과 종탑을 아슬아슬
나는 폐수로 꽉 찬 구름의 상수관을 마구 달린다
혼돈
마당이 있는 빵 가게에서 냄새만 풍겨 나왔네 며칠째 파란 문에는 개업 준비 중 마름모꼴 종이가 붙어 있었는데 그때 왜 난 상중이라 읽어버렸을까 내부가 궁금해서 나는 자전거를 끌고 들어갔었지 두리번거렸네
보수 공사는 거의 끝난 듯했어 가루 포대 옆에 넌 반죽을 뒤집어쓴 채 쓰러져 있었지 조리 기구들은 반짝거렸고 내 마음은 눌렀다 뗀 계량기의 눈금처럼 마구 흔들거렸어 불평하고 싶었네 너도 긴 머리를 늘어트린 여자 애라니
나까지 가스에 취했었나 봐 하마터면 둘이 실비아 플라스 흉내 낼 뻔했지 뭐니 만나자마자 말이 통했어 너도 그랬니? 설명서가 필요 없는 재료들처럼 마음대로 쏟아져 반죽됐지 피아노가 그려진 커플 컵에 커피를 담아 우리가 만든 마들렌을 찍어 먹었네 아 먼 곳의 냄새
문을 열어둔 채로 어딜 간 거니? 온몸에 꿀벌 시럽을 바르고 숲으로 갔니? 프랑스에 간다더니 그게 아니었네 우리가 이내 떨어지는 밀반죽 인형 같은 거니? 이러려고 요 며칠 온갖 분말을 뒤집어쓰고 매 맞은 아이처럼 엎드려 있었구나
냄새를 잊으라고 목소리를 잊고 온몸을 잊으라고 반죽은 말라가나? 심장은 딱딱해지나? 그러나 나는 남았네 체념을 불태우기 위해 태양은 필요 없지 가스불 켜고 환풍기를 틀어 망설임의 힘으로 식빵이 부풀어 오르듯 내게 남은 약간의 온기와 빈약한 빛으로 충분하네 지금 내가 그리로 갈게
서머타임
발목은 시들어간다
걸음을 낭비했다
위세척을 하고 넌 더욱 고통스러워하고
여름이 제일 추워, 나는 없어질 거야
너는 눈물을 흘리며 웃지만
해가 뜰 때까지만 같이 있어줄게
풍선을 불어줄게
날아오르다가 터지겠지
꿀벌은 꽃잎 속에서
고양이는 나무 위에서
너는 내 무릎을 베고
아니, 널 따라하지 않아
왜 남은 날들을 신경 써야 하니
잘하려니까 심장을 멈추고 싶잖아
난 일광을 낭비할 거야 날 낭비할 거야
낮에는 커튼을 치지
많이 걷지 않고 버스에서 곧잘 자
뭘 찾으려고 넌 거기까지 갔었니
내 모닝콜은 거슈인의 자장가
내일 못 일어나도
여름은 살기 좋은 계절
여름은 죽기 좋은 계절
그럴 리 없지만
물고기는 수면 위를 날고 목화는 익어가는데
아빠는 부자 엄마는 멋쟁이
그러니 아가야 울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