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의 뜻과 변천사
설은 시간적으로는 한 해가 시작되는 새해 새 달의 첫날로, 한 해의 맨 처음 명절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설날을 원일元日, 원단元旦, 원정元正, 원신元新, 원조元朝, 정조正朝, 세수歲首, 세초歲初, 연두年頭, 연수年首, 연시年始라고 하여 한 해의 첫날임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신일愼日, 달도怛忉라고 하는 것은,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는 뜻이다.
이밖에 설을 양력 1월 1일 신정新正의 상대적 개념으로 구정舊正이라고 하는데 설을 폄하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일제가 한민족의 혼과 얼을 말살시키기 위해 신정이란 말을 만들어 생기게 되었다.
‘설’이 사람의 나이를 헤아리는 단위로 정착하여 오늘날 ‘살’로 바뀌게 된 것이고, ‘설’은 “사린다 사간다”란 옛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삼가다 조심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쇠다’는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여 나쁜 기운을 쫓아낸다는 말이다.
즉 설날은 일 년 내내 탈 없이 지낼 수 있도록 행동을 조심하라는 깊은 뜻을 새기는 명절이다.
이밖에도 설이 새해 첫 달의 첫날은 아직 낯설기 때문에 ‘설다’, ‘낯설다’ 등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떡국은 희고 뽀얗게 새로이 태어나란 음식이다.
순백의 떡과 국물로 지난 해 묵은 때를 씻어버린다는 뜻이다. 즉 순백의 계절에 흰 한복을 입고 흰떡을 먹으며 묵은 것을 버리고 하얀 도화지에 한 해의 새로운 계획을 새운다는 뜻이다.
설에 대한 맨 처음 기록은 7세기에 나온 중국의 역사서에서 볼 수 있다.
『수서隋書』와 『당서唐書』을 통해서도 추정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설 명절이 역법 체계에 따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3세기에 나온 중국의 진수가 쓴 역사서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을 통해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 당시 부족 국가들이 역법을 사용했다는 추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따라서 역법을 통해 각 달을 가늠하고 세수歲首인 설이 존재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문헌에 설 명절의 연원과 관련된 기록이 보인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1, 기이紀異 사금갑射琴匣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에 대한 기록은 왕권 국가다운 설날의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다.
즉 “매년 정월 원단元旦에 서로 경하하며, 왕이 연희를 베풀고 여러 손님과 관원들이 모인다.
이 날 일월신日月神을 배례한다”는 기록은 국가 형태의 설날 관습이 분명하게 보이는 내용이다.
신라 21대 비처왕(소지왕이라고도 함) 때 궁중에서 궁주宮主와 중의 간통 사건이 있어 이들을 쏘아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후 해마다 상해上亥, 상자上子, 상오上午일에는 만사를 꺼려 근신하였다 하여 달도怛忉라 했다.
달도는 설의 이칭이기도 하므로 설의 유래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상해, 상자, 상오일은 정초 십이지일十二支日에 해당되는 날로 이때의 금기를 비롯한 풍속은 오늘날까지 그 잔재가 남아 있다.
『고려사』에는 고려 9대 속절(俗節, 명절)로 원단(元旦, 정월 초하루 설날), 상원(上元, 정월 대보름), 상사(上巳, 후에 삼짇날이 됨), 한식寒食, 단오端午, 추석秋夕), 중구重九, 팔관八關, 동지冬至가 소개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원단, 한식, 단오, 추석을 4대 명절이라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명절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민간에서는 오히려 전 시대보다 세시명절과 그 무렵에 행하는 세시풍속이 다양했다.
그런데 설이란 말이 설날 이외에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아세亞歲 곧, ‘작은설’이라 불리는 동지는 24절기의 하나면서 전통 명절로, 설날 떡국 한 그릇 먹으면 나이 한 살 먹는다고 하듯이 동짓날 팥죽 한 그릇 먹으면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이 있다.
작은설로 여기는 까닭은 중국 후한시대(22∼220)에 동지를 세수歲首로 삼았던 데에서 근거한다.
사실상 24절기 동지를 첫 기번氣番으로 하여 역曆 계산의 출발을 동지에 두었다. 그래서 흔히 열두 띠로 일컬어지는 십이지를 말할 때 첫 달인 자월子月은 정월이 아니라 음력 동짓달이 된다.
그 후 섣달은 축월丑月, 정월은 인월寅月, 2월은 묘월卯月… … 등의 순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그러든 것이 구한 말 1895년에 양력이 채택되면서 그 빛이 바래기 시작했고, 1985년 “민속의 날”로 지정. 이후 설날 명칭을 되찾아 사흘간 공휴일로 결정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1970년대 초반까지 작은설 즉 “까치 까치설날은 어제께 구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에요” 동요처럼 섣달 그믐날 묵은세배(일 년을 잘 보낸 고마움의 뜻)라 하여 조상님께 성묘하고 난 뒤 동네 어르신을 뵈옵고 덕담을 듣기도 하였는데, 농경사회가 공업화 사회로 탈바꿈함에 이르러 차츰 쇠퇴하여 지금은 작은설이란 말은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 되어 버렸다.
가난하게 살아도 서로 이웃끼리 오간 정겨운 풍습에, 인정이 넘쳐난 참다운 삶이 울 넘던 적이 새삼 그리워진다. 옆옆이 벽을 마주보고 살아도 “언제 보았느냐” 듯이 성도 이름도 모르는 삭막한 현실, 물질만능이 불러온 게 아닌가 싶어 매우 개탄스러울 뿐이다.
채홍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