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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마가복음 4:21-4:34
제 목 : 하나님의 나라는
2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 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 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 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 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 되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1. 세상의 관점
지난 4월 16일 일어난 세월호 침몰은 우리 사회에 너무나도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습니다. 300명이 넘는 수많은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했다는 사건 자체도 큰 충격이었지만, 배가 침몰한 이후 전개된 구조과정, 그리고 그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는 수사과정이 우리를 더욱 더 침통케 하고 있고, 우리를 더욱 더 분노케 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얼마나 사람이 악한 존재인지를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 오늘로써 정확히 40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사건 자체도 제대로 수습되지 않고 있습니다. 실종자도 다 찾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세월호 사건의 후유증으로 아주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사건의 원인을 수사하는 과정 속에서 속칭 구원파라는 사이비 종교 집단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만 천하에 드러남으로써, 기독교와 더불어 기독교를 가장한 사이비 집단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관심은 아닌 것 같습니다.
국내외적으로 이와 같은 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이 계시기는 계신 것 맞습니까?’,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요?’라는 질문을 참 많이 받게 됩니다. 기독교를 믿는 신앙인은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도 이런 질문을 퍼부어대며 하나님께 원망을 돌리는 경우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특히 이번 사건의 경우 사이비 종교 집단이 연루되어 있다 보니까 이런 질문을 더욱 더 많이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여러분께서 이런 질문을 받으셨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나 지인들이 ‘하나님이 계신 것 맞아요?’,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요?’,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 맞나요?’라고 물어 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마땅한 답변이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들을 충분히 납득시킬만한 설명이 준비되어 있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흔히 하는 말, ‘글쎄요. 아마도 하나님의 뜻이 어딘가에 있겠지요!’입니다. 예. 이 표현을 정말로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께서 피해 당사자라고 했을 때 그 말을 쉽게 납득할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위로 받을 수 있을까요? 나의 아들, 나의 딸이 어딘가에 있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순교한 것이라고 넘어가 줄 수 있을까요? 아니요. 절대로 납득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위로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교회를 저주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교회로부터 돌아서게 되어 있습니다. 예. 피해를 당한 당사자들의 심정과 마음은 그렇게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아주 깊이 있게 생각해서 대답을 아주 잘 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피해자들에게 제2, 제3의 더 큰 상처를 주게 되고, 하나님의 진리,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하여 전달하는 주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세월호 사건을 우리가 과연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먼저 세월호 사건을 바라보는 세상의 관점입니다. 세상에서는 이 사건의 원인을 환경과 제도와 법률,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 탓으로 바라봅니다. 물질만능주의, 즉 돈이 최고의 가치라는 생각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오로지 자신의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다 보니까 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바라봅니다. 회사는 회사대로, 감독기관은 감독기관대로, 정부기관은 정부기관대로, 오로지 자신들의 유익과 이익만을 극대화하려다 보니까 다른 사람의 안위와 평안은 뒷전으로 밀립니다. 바로 그 원인으로 인하여 이런 사고가 일어났다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기적으로 협력 체계를 가동해서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제도가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잘못을 범한 당사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가 미약했기 때문에 사건을 더욱 더 키웠다고 분석합니다. 즉 제도와 법률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해서 오로지 자신의 유익만 추구하는 몇몇 집단과 기관들이 이 사건의 직, 간접적인 원인이라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피아니, 관피아니 하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 맞습니다. 분명히 맞는 분석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수습책도, 해결책도 모두 환경과, 제도와 법률의 개선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입니다. 예. 분석한 원인에 따라 개선책이 마련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선 이 사건과 직, 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내서 형사처벌을 합니다. 그리고 사태 수습을 원만하게 이끌지 못한 정부의 기관장들을 바꾸어 버립니다. 또한 정부 조직을 개편하고, 법률을 강화합니다. 언제나 정해진 수순에 따라 해결책을 강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렇게 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달라질까요? 사람을 처벌하고, 사람을 바꾼다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사건, 사고가 사라질까요? 제도를 바꾸고, 법률을 강화한다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행복한 세상으로 변화될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더욱 더 악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예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일어날 수도 없었던 더 악한 일이 세상 도처에서 하루가 멀다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사건, 사고가 터질 때마다 개선책은 마련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은 결코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더 악한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을 뿐입니다. 예. 세상은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세상이 갈수록 악해지니까,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험한 일들이 수시로 일어나니까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가 등장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 이번 세월호 사건도 바로 그런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음을 결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죄악 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하나님의 가치와 원리를 왜곡하는 사이비 종교 집단을 심판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월호를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더 큰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조심해!’라고 경고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런 주장에 대해 절대로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성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평소 웃으며 전도하던 성도들의 입을 통해 이런 섬뜩한 말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하나님과 연합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던 성도들의 입을 통해 이런 모진 말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저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부모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자녀가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어느 날부터인가 그릇 된 행동을 하며 부모의 속을 심하게 썩이고 있습니다. 그 때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자녀를 설득하는 일뿐입니다.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나쁜 친구들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를 부모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직접 나쁜 친구들을 찾아 나서서 그들을 징계하고 심판하는 부모는 거의 없습니다.
사람도 그렇게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러시겠냐는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시며 좋아하셨고, 사람을 지으시고는 심히 좋아하셨던 하나님께서 악한 세상 바로 잡겠다고, 사이비 종교 집단 하나 때려잡겠다고, 하나님 나라 확장하겠다고 수백 명의 생명들을, 그것도 자라나는 새싹들을 물속으로 가라앉히시겠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가정의 행복을 순식간에 빼앗아 가시겠냐는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예.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런 식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니 하나님을 믿는다는 성도들은 왜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될까요?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회생활, 종교생활은 아주 오랫동안 해왔지만 성경을 읽지 않기에, 하나님을 온전히 모르기에, 하나님의 가치와 원리를 모르기에, 그리고 성도라는 존재의 의미를 모르기에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지만 그들 마음속에는 오직 두려움과 공포의 하나님만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문제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기도뿐입니다. 당연히 금식뿐입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저주와, 징계와, 심판의 하나님이기에 당연히 기도와 금식에만 매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와 금식을 통해 정성을 보이고 간절함을 보이는 것뿐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저주와 징계에서 놓임을 받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뿐입니다. 새벽기도를 하고, 자정기도를 하고, 산상기도를 하고, 금식기도를 합니다.
그런데요? 이렇게 하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달라질까요? 아니요. 세상은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이라고 잘못 짚었기 때문이고, 당연한 결과로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내용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대하여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기도와 금식은 어쩌면 환경과 제도와 법률의 개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세상의 방식보다도 더 미련하고, 더 비겁하고, 더 한심한 방식입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만 일으킬 뿐입니다. 어떤 문제냐고요? 바로 사이비 집단, 이단 집단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이비 집단, 이단 집단 그것 별 것 아닙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오해를 하는 성도들, 특히 하나님을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성도들의 연약한 마음을 악용하여 그릇된 구원관, 그릇된 신앙관을 심어주고 오로지 자신들의 유익만을 취하는 집단, 그런 집단이 바로 사이비 집단이고, 이단 집단입니다. 지금 구원파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니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144,000명만이 구원에 이른다는 신천지의 모습이 그런 모습이 아니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분별을 잘 하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설명을 아주 잘 하셔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크나 큰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와 배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2. 기독교의 관점
그럼 세월호 사건을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바라보는 것일까요? 세월호 사건은 바로 죄로 인해 일어난 사건입니다. 세월호 침몰의 원인, 바로 죄입니다. 구조과정과 수습과정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은 원인, 바로 죄입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죄는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즉 모든 사람 각자가 스스로 기준이 되어서 오로지 자신만의 유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타인을 향한 사랑, 있을 수 없습니다. 타인을 위한 자비,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타인을 향한 배려,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타인은 오로지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만들어 내기 위한 수단과 도구일 뿐입니다. 예. 그것이 바로 죄가 꿈꾸는 세상입니다. 예. 그것이 바로 죄가 원하는 세상입니다. 사람끼리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하고,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세상, 그것이 바로 죄가 소망하는 세상입니다.
조금 전 세상의 관점에서는 환경, 제도, 법률, 그리고 사람에게 모든 원인이 있는 것으로 분석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환경, 제도, 법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 제도, 법률을 올바르게 운영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조정하고, 지배하는 죄에게 모든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 주일 명동성당에서 추모 미사가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이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탓이로소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물론 남의 탓 하는 것 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죄라는 존재에 대해서 알았다면, 죄라는 존재가 모든 사태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내 탓이오, 내 탓이오’가 아니라 ‘죄 탓이오, 죄 탓이오, 죄 탓이로소이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죄라는 존재가 얼마나 간사하고 무서운 존재인지 잘 파악하셔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는 아주 교묘하게, 아주 철저하게 숨겨놓고 모든 원인을 오히려 하나님의 경고, 징계, 심판이라고 하나님께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는 존재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아주 무시무시한 존재임을 늘 기억하셔야 합니다. 죄가 얼마나 간사하고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으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죽음으로써 물리쳐 주셔야 할 정도였겠습니까? 예. 죄는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그 죄가 바로 세월호 사건의 모든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예. 세월호 사건의 원인이 죄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원인에 따라 해결책이 마련되어야 할 차례입니다. 그럼 해결책은 과연 무엇일까요? 당연히 그 해결책은 죄와 싸워서 이기는 것뿐입니다. 죄와 싸워서 승리하는 것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죄와 싸워 승리하고, 죄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배워 하나님의 가치와 원리를 이해하고, 하나님을 기준 삼아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타인을 향한 사랑과 자비와 배려가 넘치는 세상으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한 끼니 거르더라도 굶주린 이를 먹일 수 있는 세상으로, 누군가 나의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 댈 수 있는 세상으로, 누군가 내게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면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해 줄 수 있는 세상으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원수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세상으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 그것이 바로 창조 때의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세월호와 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그런 사건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준 삼아 타인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데 어떻게 그런 비극적인 일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소망하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추구하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 세상이 정말로 가능하겠습니까? 그런 세상이 과연 오기는 올까요? 어느 세월에 모든 사람이 그런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이런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예. 당연합니다. 그런 의문이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가능합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나만 변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성도로 변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예. 기독교는 내가 변하는 종교입니다. 타인이 변화되기를 기다리고, 타인이 변화되기를 소망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사야 11:8]에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는 말씀으로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떻게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아무 이상이 없을까요? 독사가 없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독사는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그 독사가 아이를 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사가 아이를 물지 않기 때문에 아이에게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바로 그 독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절대로 아이가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이를 물지 않는 독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런 존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낸 것입니다. 예. 기독교는 타인이 변화되기를 기다리고, 소망하는 종교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 말씀,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에서도 우리가 좋은 땅이라는 것만 확인하고 인정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길가 땅인지, 돌밭 땅인지, 가시떨기 땅인지 우리가 관심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진다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내가 좋은 땅이니까 그들도 좋은 땅이겠지’라고 그들의 존재를 여겨주고 인정해 주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정신이고, 기독교의 원리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십니다. 그들에 대한 관심, 이미 하나님께서 충분히 가지고 계십니다. 그들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변화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내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하나님께서 진행하시고, 하나님께서 성취하시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예.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종교입니다.
3. 등불은 등경 위에
그럼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종교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오늘 본문 말씀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셔야만 오늘 본문 말씀을 풀 수 있고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종류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즉 등불 비유, 자라나는 씨 비유, 그리고 겨자씨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등불 비유가 의미하는 것과 나머지 두 개의 비유가 의미하는 것이 서로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지 먼저 등불 비유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4:2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말, 평상, 등경, 모두 낯선 단어들이고 문장도 얼른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말을 됫박이나 그릇으로도 번역하고 있고, 평상은 침상 이나 침대로, 등경은 등잔대로 번역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단어를 사용해서 [마가복음 4:21]을 다시 읽기 쉽도록 표현해보면, ‘사람들이 등불을 가져오는 이유는 그릇 아래 또는 침대 아래에 두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등잔대 위에 두려는 것이다.’가 됩니다. 즉 이 말씀에 들어 있는 의미는 ‘등불을 밝히는 이유는 불빛을 비춰주기 위해서이다. 등불을 가져와 보이지도 않는 곳에 두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행위이다.’
‘즉 등불은 등잔대 위에 두는 것이고, 그 빛의 도움으로 주변을 볼 수도 있는 것이고 찾고자 하는 것을 찾아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 등불이다. 나 예수가 바로 그 등불이다. 다만 너희들이 그 등불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고, 그 불빛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마가복음 4: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쉽게 표현하면 ‘숨겼다는 것은 언젠가는 드러내기 위함이고, 감추었다는 것은 언젠가는 나타내기 위함이다.’가 됩니다. 때때로 타입캡슐을 땅 속에 묻는 뉴스를 접합니다. 왜 묻을까요? 영원히 감추기 위해 묻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언젠가는 드러나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묻는 것입니다.
즉 감추어 둔 것은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반드시 알려지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너희가 숨겨진 것, 감추어진 것을 결국은 보게 될 것이고, 알게 될 것이다.’가 됩니다. 비록 지금 너희는 모르고 있지만 내가 알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나 예수가 등불이니까 환하게 빛을 비춰주어서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마가복음 4:24-25]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알게 될 때 나타나는 결과가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도 쉽게 와 닿는 표현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 것인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잘 새겨듣기 바란다. 등불인 나를 통해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알게 됨으로써 너희는 이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기준을 잘 이해하고 적용하며 살아가면 너희는 더욱 더 풍성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적용하며 살지 못하면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 속에 담겨 있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기대와 소망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정말로 없는 자가 모든 것을 빼앗길 때까지 그들을 그대로 방치해 두실까요?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전파되고 수용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그들의 변화를 통해, 그들의 증언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기를 기대하고 소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4:33-34],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가 되는 것입니다. 예. 등불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사명과 역할, 그리고 제자들을 향한 기대와 소망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고 나서 자라나는 씨 비유와 겨자씨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려주십니다. [마가복음 4:26-29],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이라고 시작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멋지게 설명을 해 주실 것 같아 열심히 기대하며 읽어 보았는데 너무나 허무합니다. 아니, 너무 초라하기까지도 합니다. 최소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라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이 있고 사랑하는 우리 님’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면 최소한 100평 되는 맨션에 온갖 산해진미가 차려진 금으로 된 식탁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핵심 단어는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일까요? 씨일까요? 아니면 싹이나, 이삭이나, 곡식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추수 때일까요? 핵심 단어조차 찾기도 어려운 지경입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드린 단어들이 과연 하나님의 나라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 연관성도 찾아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 본문에서 핵심 단어는 전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핵심이 되는 단어는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으니까 ‘씨 뿌리는 사람이 핵심 단어가 아닐까요?’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 주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에서 씨 뿌리는 자가 하나님이라고 했으니까 여기서도 ‘씨 뿌리는 사람이 하나님일거야!’라고 쉽게 단정해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씨 뿌리는 사람은 하나님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마가복음 4: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신데 씨가 어떻게 자라나는지를 모르실 분이 아니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그저 농부일 뿐입니다.
이 본문에서 핵심 단어는 숨겨져 있지만 핵심 구절은 있습니다. 그 구절이 [마가복음 4: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아니요. 절대로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땅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이유는 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햇빛과 이른 비와 늦은 비 같은 여러 가지 조건과 상황이 충족되어야만 가능합니다.
이런 조건과 상황을 충족시켜주시는 분이 누구실까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예. 하나님으로 인하여 씨가 싹이 트고, 이삭이 나고, 알곡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예. 하나님으로 인하여 추수 때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계신 곳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가치와 원리가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일을 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자기가 씨를 뿌렸으니까 자기가 수고하고 자기가 애쓴 줄로 생각합니다. 곡식이 익으면 자기가 낫을 대야 하니까 자기가 결실을 수확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본문의 의도는 사람들의 이런 사고방식을 깨뜨려 주는 것입니다. ‘싹이 트고, 이삭이 나고, 곡식이 맺혀서 추수할 때까지 돌보시며 일을 하시는 존재가 있다. 그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바로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4:30-32]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행해지는 대부분의 설교는 ‘우리가 겨자씨와 같은 존재가 되자’입니다. ‘비록 씨 중에 가장 작은 씨이지만 스스로 잘 가꾸어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풍성한 결실을 거두자’라고 설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설교하면 예수님의 비유를 오해한 것입니다. 즉 옳게 해석하지 못한 상태에서 행해진 설교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도 앞서 말씀 드렸던 자라나는 씨 비유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겨자씨 하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씨가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고, 큰 가지를 내서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겨자씨 스스로가 그렇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겨자씨가 심겨진 땅이 그렇게 만들어 낸 것일까요?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겨자씨가 심겨지고, 그 겨자씨가 싹이 나고 커지게 될 때까지 돌보시는 이가 존재하고 있다. 그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함께 하시는 나라, 그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다.’라고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일
우리는 지난 주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살펴보았고, 오늘 등불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사명과 역할, 그리고 제자들을 향한 기대와 소망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었고, 어떻게든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듣게 하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길 기대하시고 소망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비유를 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나라’였습니다. 지난 주 살펴보았던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 그리고 오늘 살펴 본 자라나는 씨 비유, 겨자씨 비유 ‘모두 하나님께서 일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길가 땅, 돌밭 땅, 가시떨기 땅이 스스로 좋은 땅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요구나 권면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이기에 농부가 따로 할 일이 없었고, 겨자씨가 공중의 새가 깃들일 만큼 커지기 위해 스스로 할 일이 없었습니다. 예. 하나님의 요구, 요청, 권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이유는 이 말씀이 행해지던 시점이 복음서 시대이기 때문
입니다. 복음서 시대의 사람은 어떤 존재입니까? 모든 사람이 죄인이던 시대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모르고, 모든 사람이 죄에 사로잡혀 있던 시대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죽어있는 존재에게 말을 한다고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사람을 살려놓아야 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구원에 대해서 조금만 더 살펴보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할 때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의 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의 두 가지 측면을 함께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두 가지 측면이란 구원의 내용적인 측면과 상태적인 측면입니다.
조금 전 복음서 시대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던 시대, 즉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모르고, 모든 사람이 죄에 사로잡혀 있던 시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죄인은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모르는 존재이고, 상태적으로는 죄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바로 이 두가지 측면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즉 내용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모르는 존재를 계시라는 수단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존재로 변화시켜 주는 것이고, 상태적으로 죄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를 구속이라는 수단을 통해 죄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예. 이 두 가지가 함께 병행되어야만 온전한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속이라는 수단을 통해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켜 주는 사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은 죄에 꽁꽁 사로잡혀 있기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만 책임져 주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구속을 통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구원을 책임져 주시는 것이기에 구속의 은혜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피 흘림을 통하여,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통하여 사람은 죄에서 자유스런 존재가 되었습니다. 상태적으로 죄에 사로잡혀 있던 존재에서 죄에서 놓임 받은 존재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까지 내용적으로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제 막 죄에서 해방되었기에, 이제 막 갓 태어난 존재이기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까지도 다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떻게 해결해 주셨습니까? 바로 계시라는 수단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가치, 하나님의 원리를 이미 다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그 계시의 결정판이 성경입니다. 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즉 내용적으로 하나님을 모르던 존재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존재, 하나님을 아는 존재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구속이라는 수단을 통해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켜 주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고, 하나님께서 완성하시고,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일이지만 계시라는 수단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시는 일에는 사람 스스로의 노력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 스스로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성경을 읽고, 말씀을 배우고, 익혀서 하나님에 대해 아는 자로 변화되어야만 온전히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여기서 실패합니다. 구속의 은혜로 죄에서 해방되는 구원은 받았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가치와 원리를 온전히 알아서 그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일에는 다 실패합니다. 그 실패하는 과정이 성경에도 아주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고, 복을 주고,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을 완성하셨고, 여호수아를 통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 중에 성취되지 않은 것,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실패합니다. 가나안 땅에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데 실패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가치와 원리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렇게 열심히 그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쳤지만 막상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이르자 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각자가 제 소견에 옳은 대로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부분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구원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구속의 은혜로 구원은 받았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원리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함으로써 사이비 집단, 이단 집단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혹자는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완성하셨지만, 사람이 그 구원을 누리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실패하는 이유는 구속을 통한 죄 사함만 강조되고, 계시를 통한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소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한국 기독교가, 한국 교회가 겪는 모든 위기의 원인이 하나님을 아는 일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온전히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지난 주 말씀드렸던 좋은 땅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길가 땅, 돌밭 땅, 가시떨기 땅으로 언제든지 전락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하나님에 대해 잘 아셔서 늘 좋은 땅의 모습을 지켜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더욱 더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시는 다누림 가족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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