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승자와 패자
심삼일
대대본부 행정반은 인원이 20여 명이다. 병장 3명에 나머지는 상병과 일병이다. 모두 대학 재학생이고 전공도 다양한 것 같다. 행정반 사무실도 우리 중대본부 막사에서 30계단 위에 있고 상급부대니까, 하급부대 서무병을 낮춰보는 건 당연하다.
“아, 씨~ 별것도 아닌 걸 꼬투리 잡고 그러네. 나 참 더러워서...”
대대본부 행정반에 결제받으러 갔던 황 일병이 서류철로 목덜미에 부채질하며 들어와 열 받은 얼굴로 책상 위에 탁, 하고 던져 놓는다.
“윤 일병님이 또 브레이크 겁니까?”
황 일병 눈치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출장 대원들 부식품을 원칙대로면 수령을 해서 싣고 가야 하지만, 몇 개월씩인데 매주 올 수도 없으니까, 현금으로 지급하여 출장지에서 구입하고 있다. 품목별 수량과 금액 등은 대략 정해져 있지만, 지역별로 차이도 있고 출장 인원과 기간도 들쭉날쭉 이다.
“박 상병 고향이 인제라서 거기서 바로 휴가 갔다가 홍천으로 귀대했는데, 장부에 이틀 치 4끼 식사가 잡혀있다고 따지네!”
황 일병 고향은 홍천 근처이고 황 일병보다 2개월 빠른 행정반 윤 일병은 원주 근처다. 황 일병이 신참으로 왔을 때 윤 일병이 같은 강원도 출신이면서 봐주기는커녕, 홍천 촌놈이라고 놀리기만 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제대만 해봐라, 내 친구들 불러서 똥 따블유 놔 버릴 테다.”
똥 따블유는 집단폭행이다. 중대 서무병 핸디캡 때문에 꾹 참아 왔는데 반년이 넘도록 결제 때마다 깐족이니까 황 일병 심사가 뒤틀릴 만도 하다.
윤 일병은 체격도 훤칠하고 태권도 공인 2단이라서 오음리 산골에서 데려오려면, 서너 명도 부족할 것 같다 싶어, 살짝 웃음을 지었다.
“심 이병, 너 태권도 유단자지! 윤 일병하고 한번 붙으면 안 되겠냐?”
키는 나보다 약간 작지만, 눈썹이 짙은 호남형으로, 턱에 ‘커크 다글라스’처럼 옴폭한 홈이 패인 황 일병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네? 제가 어떻게요... 저보다 고단자고 덩치도 훨씬 큰데요.”
사실 내무반 우물가에서 만나보는 윤 일병은 별로 말수도 없고 특별히 남을 얕잡아서 놀리거나 할 위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무도인 다운 어떤 절제력 같은 게 느껴져서, 가까이하고 싶은 친근감마저 드는 타입이다.
“야, 너 의리 없이 굴래? 사수가 핍박당하고 서러워하는데, 조수가 제 몸 단도리만 하겠다 이거지!”
“아닙니다, 황 일병님. 그기 아이고, 다짜고짜 선임한테 한판 붙읍시다,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황 일병이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바람에 당황해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 음... 좋아! 그러면 정식으로 시합이면 할 수 있는 거지?”
“정식 시합이요? 대련 말씀입니까?”
“그래! 대련 한판, 정식 시합으로 해 보는 거야. 응? 본부 행정반 대 화포수리반 대항전으로!”
웃으면서 얘기하길래 설마 그러겠나 싶어서, 농담으로라도 기분 푸시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네~ 그러시지요. 아주, 박살을 내드릴게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행정반에 황 일병과 동기인, 땅끝마을 해남 출신 배 일병이 있었다. 둥글둥글한 체격에 스마일 상인데, 한 이틀 저녁에 둘이 자주 만난다 싶더니, 일요일 아침에 황 일병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나를 내무반 앞마당으로 불러냈다.
“심 이병, 준비됐냐? 10분 후에 윤 일병하고 한판 붙는 거다!”
“네?…”
둘이서 무슨 작당 모의를 했는지, 화포수리반 도전을 본부 행정반에서 수락했다는 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여기서 워밍업 하고 있어! 금방 나올게.”
황 일병이 쪼르르 내무반으로 들어간다. 이거 뭔가 사태가 심각하다.
상황을 보니까 돌이킬 수 없고, 얼떨결에 윤 일병과 대련을 붙게 생겼다.
펼친 열 손가락에 힘을 주고 끝 마디를 꼬부린 채, 양팔을 크로스 시켜 천천히 머리 위로 뻗어 올려 큰 숨을 들이쉬었다. 머리 위에서 호흡을 멈추고 크게 원을 그려 기마자세 옆구리에 멈춘 뒤, 장풍으로 앞쪽으로 카~ 하고 내 뿜었다. 단전의 기(氣)가 전신으로 퍼지고 몸이 가벼워진다.
“야~ 심 이병, 잘했어! 져도 괜찮으니까 겁먹지 말고 해.”
동네 반장 김 상병이 어깨를 치며 격려하고 몰려나온 고참들이 대견한 듯 들러리를 서준다. 하급부대의 신참이 감히 본부 행정반에 도전했으니 나를 통해 대리만족하는 것이다.
행정반에서도 배 일병이 앞장서고, 윤 일병이 마지못해 등 떠밀리듯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자~ 5분씩 3회전 하고, 1분씩 휴식합니다. 공격은... 유단자들이니까 알아서 하고, 너무 심하지 않게. 그런다고 봐주지는 말고.”
김 상병이 자청해서 심판으로 나섰다.
윤 일병도 황망한 듯 이걸 어쩌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174cm에 57kg인데, 윤 일병은 180cm에 63kg쯤 되어 보인다. 체격으로는 모든 게 불리하다.
‘1회전은 탐색만 하고 넘기자!’
맨발로 흙을 밟으니 다리에 힘이 솟는다.
주먹 쥐어 예를 갖춘 다음 가볍게 움직이며 윤 일병 허리에 시선을 꽂았다.
체격보다 움직임이 경쾌하다. 앞발을 들어 구부렸다 펴는 동작을 자주 하는 거로 보아 긴 다리를 활용할 심산인 것 같다.
“상급 병이라고 봐주지 말고 공격해, 심 이병!”
황 일병이 치열한 복수전을 펼치라고 종용한다.
“하급 병이라고 봐주지 마십시오, 윤 일병님!”
너구리 같은 배 일병이 은근히 접전을 부추긴다. 자기도 사수한테 당한 게 있겠지.
휘~익, 눈 깜빡할 사이 윤 일병 오른발이 앞 돌려차기로 내 이마를 스친다.
착지하는 순간 허리 뒤쪽이 열렸는데, 급히 피하느라 찍으러 가다 멈췄다.
“와~ 잘한다. 윤 일병, 봐주지 말고 해!”
행정반 함성이 터지고 응원 소리가 기를 죽인다.
거리감을 잡기 위해 왼발 앞차기와 오른발 옆차기로 연속공격을 했는데, 가볍게 피하고 오른발 돌려차기로 되받는다.
체격에 비해 날렵한 게 보통 수준이 아니다.
네댓 번 서로 좌우로 자세 바꿔가며 발차기 공격을 시도했다.
오른발 앞 자세로 들어오는 윤 일병에게 목차기를 시도하려는 순간, 윤 일병의 오른쪽 발꿈치가 먼저 내려찍기로, 내 왼쪽 어깨 위로 떨어진다.
본능적으로 양손 모아 제쳐 급히 피했지만, 일격에 무너질 뻔했다.
“우와~ 잘한다, 윤 일병! 끝내버려~”
함성이 터지고 누가 봐도 내가 수세에 몰리는 게 분명해 보일 것이다.
1회전이 끝나고, 엎어 놓은 양동이에 걸터앉은 내 얼굴을 황 일병이 순수건 펼쳐 부채질하며 격려한다.
“잘하고 있어 심 이병. 기죽지 말고 공격해. 괜찮아!”
“그럼, 그만하면 잘하는 거야. 아직 한 대도 안 맞았잖아!”
김 상병도 덩달아 등을 두드려주며 힘을 돋워 준다.
양쪽 고참들은 중간에 모여 담배 피워가며 내기하자고 낄낄거린다.
‘그냥 발차기로는 안 된다. 근접 전 펴거나, 주특기를 살릴 수밖에 없다.’
2회전이 시작되고 몇 번 서로 발차기 공격이 이어졌는데, 윤 일병이 연속 동작 공격이 없다.
윤 일병이 봐주는 거라면 내가 먼저 시도하는 것이 예의다.
나보다 키 큰 상대일 때는, 공중 2단 돌려차기가 내 주특기이다.
다짐하고 기회포착, 가볍게 뛰어 왼발 낮게 돌리고 힘껏 오른발 뻗어 돌려 옆머리를 가격했다.
퍽, 소리는 났는데 감촉이 머리가 아니고 손등이다.
낙법으로 굴러 방어 자세를 취하자, 윤 일병이 다리 들어 내려찍으려다 멈춘다.
“우와~ 와~ 심 이병 최고다! 이야~”
함성이 너무 컸고, 윤 일병도 이외의 공격에 피하기는 했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황 일병은 좋아서 주먹 쥔 손으로 만세 부르며 폴짝폴짝 뛰고 내무반장 정 중사까지 입이 헤벌쭉 벌어져 웃는다.
“야, 야, 시합이 끝난 것도 아닌데 왜 난리야? 계속해야지!”
행정반 고참이 나서서 윤 일병 등을 두드리며 격려한다.
어느새 차량 수리 중대 내무반 병사들까지 몰려와 구경꾼이 30~40명이나 되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이 되었고 빨리 끝내야겠다.
윤 일병도 더는 봐주지 않고 필살기로 나올 것이다.
‘분명히 돌려 찍기를 선택하겠지! 급소를 찌를까? 그건 심해서 안 돼. 차라리 비겁한 방법으로 망신을 주는 게 이 상황에선 공평하겠다.’
김 상병이 나서서 분위기 가라앉히고 다시 대련이 시작되었다.
나는 공격하는 시늉만 하면서 윤 일병의 돌려 찍기가 나오기를 유도했다.
역시나, 지금이다 싶은 순간, 몸을 돌려 내려찍는 윤 일병 오른쪽 다리를, 허리만 뒤로 제쳤다가 앞으로 밀착하며 왼팔로 오금을 받혀 잡고, 오른손 간수 찌르기로 명치 급소에서 멈췄다.
왼발만 땅에 딛고 위태롭게 뒤뚱거리는 윤 일병을 올려다보며 ‘미안합니다’ 하는 눈짓으로, 윤 일병 왼쪽 발등을 오른발로 꽈악 눌러 밟고, 잡았던 다리를 놓아 주었다.
풀려난 오른발로 땅을 짚던 윤 일병은 왼발이 밟혀있어서, 뒤로 물러서지 못하고 풀썩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우와~ 이야~ 최고다, 우리 심 이병!~”
황 일병이 달려와 나를 부둥켜 올리며 난리를 친다.
“급소 맞고 즉사했네! 케이오승이다, 완벽 승!”
수리 중대 왕 고참 병장이 큼직한 손을 들어 손뼉 치며 한마디 하자, 구경하던 수리 중대 대원들도 덩달아 좋아하며 함께 박수를 쳐준다.
배 일병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는 윤 일병의 난감한 표정이 너무 안쓰러워 민망하다.
김 상병이 눈치 빠르게 윤 일병 엉덩이 흙을 털어주며 심판 판정을 내린다.
“자~ 두 선수 모두 최선을 다해서 시합했습니다. 박수부터 보내주시고요. 에~ 심 이병이 급소공격은 좋았는데, 발등 밟아 넘어뜨린 건 좀 그러니까, 심 이병 반칙패, 윤 일병 판정승!”
“그래 맞아! 무슨 씨름도 아니고 그게 뭐냐?”
행정반 고참이 패배는 인정하는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모두들 와글와글 흩어져 들어가고 윤 일병이 다가와 악수를 청한다.
“죄송합니다, 윤 일병님..”
윤 일병이 나를 껴안으며 귓속말로 속삭인다.
“안 밟아도 되는데 그랬냐? 짜~식, 네가 이겼다.
첫댓글 반칙을 안 해도 되는데 의도적으로 발을 밟았군요. ^^
네, 그렇습니다. 시합에는 이겨도 고참한테 져주기 위해서 일부러 반칙패를 유도한 겁니다.ㅎ
흥미진진하고 촘촘하게 서사를 진행하는 솜씨가 고수입니다.
아, 네. 칭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안태영님의 시조는 상당한 수준급이라 느끼고 있습니다.
두세수를 내다본 대련이었네요..고수들의 멋진 한판 승부였습니다!
네, 그랬습니다. 그때는 어쩌면 좋을지 참 당황했더랬습니다.
지나고 나니 얘깃거리가 되네요.
저도 분명 군대 다녀왔는데 읽을 때마나 새롭네요ㆍ 무도인 이시군요ㆍ글도 좋습니다ㆍ
네, 작가님. 공군에서 편히 지내셔서 그런가 봅니다.
고교 때는 태권도, 대학 때는 검도 좀 했습니다. ㅎ
처음엔 수기로 읽었는데 점점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를 세밀하고 정확하게 재구성해 내는 능력도 상상력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면, 상상력이 아주 좋으시다고 하겠습니다.
네, 화원님. 재미를 위해 좀 과장하긴 했지만 실제 있었던 체험 소설입니다.
제가 기억력이 좀 남다른 데가 있나 봅니다. 수십년 전 일도 초롱초롱 다 기억하거든요.
[ 참고로, 핸드폰에서 '시니어문학상 이재영' 치고 뉴스 누르면 '육군 이등병' 나옵니다. 작년에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작인데 제 기억력이 돋보이는 논픽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