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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짓말을 했다. 출세에 대한 욕망이라면 숫제 공상에 가까울 정도가 아닌가. 서른 살까지 저축해서 생활 기반을 다진 다음에 사표를 내고 공부를 계속한다. 소설도 열심히 쓴다. 그래서 불후의 명작을 써서 까뮈처럼 사십대에 노벨문학상을 받고, 만약 사십대에 안 되면 십년쯤 늘려잡아 오십대까지는 기어이 노벨상을 받는다. 그처럼 내 인생은 사오십대에 승부를 걸고 있었다.
미나의 오빠를 만나다
1
미나가 붉은 입술을 내밀어 내 입술에 댔다. 나는 술내 묻은 그녀의 숨결이 싫었지만 피할 도리가 없었다. 묘한 얽힘, 최소한의 예의였다.
“세상이란 그냥 살아가는 거야.”
나는 맥살없는 말을 흘리며 침대에 누웠다. 어느새 미나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온 신경에 물기가 젖어들었다. 미나는 배고픈 짐승의 허기처럼 내 몸을 삼킬 듯 덤벼들었다. 나는 차근차근 그녀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가슴을 더듬고 하얀 목 언저리를 더듬을 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눈이 뻥 열리고 동공이 불규칙하게 움직이더니 입술이 벙그죽 열렸다.
“왜 그러죠?”
“……?”
“왜 죽이려는 거죠?”
“뭐야?”
“그건 죄악 중의 죄악이에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 목을 졸랐잖아요?”
“닥쳐!”
나는 미나를 쏘아보며 몸을 일으켰다
. 미나는 누운 채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미나가 먼저 깼다.
“당신은 지금 중환자에요. 나를 죽이고 싶어 환장했다고요.”
“하기야 무슨 대책이 있기는 있어야겠는데…….”
“당신이 차고다니는 권총 있잖아요.”
“말이 많군.”
“말이 많은 게 아녜요. 당신이 나를 싫어하는 건 이해해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잖아요.”
“왜 오빠네 회사에 안 들어가냐 그 말인가?”
“출세하기 싫으세요? 그렇게 소심한 영웅인가요? 가난한 당신한테 가장 필요한 조건 아녜요?”
“내게 필요한 건 돈이 아냐. 그건 부차적인 거라고. 그래서 내 몸을 헐값에 팔 수 없다는 거지.”
“언제 비싸게 팔랬어요? 지금도 그냥저냥 살고 있잖아?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을 테고. 그러니 밑져야 본전 아녜요?”
“기왕지사 호강이나 해봐라 그거군. 하지만 나한테는 그런 비위가 없어.”
“그래서 출신을 무시할 수 없다니까. 구차하게 자란 인간들은 구질구질한 생각밖에 모른단 말야. 밝은 세상을 어둡게만 보고.”
미나는 엉엉 울었다. 나는 그 울음을 이해는 하지만 동정할 수는 없었다. 만약 미나가 아무 말 없이 고이고이 눈물만 흘렸던들 나는 따뜻한 미소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본시 인간은 미련한 구석이 있어 인간일진대 미나가 좀 미련만 했더라면, 하고 아쉬워도 했다.
나는 이따금 무덤 속에 들어 있는 미나를 상상하곤 했다. 죽어있는 미나라면 진실하게 느끼고 사랑하리라는 공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나는 미나의 무덤 앞에서 통곡하는 내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눈시울을 붉히곤 했다.
2
박상진 회장이 다녀가고 며칠이 지나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회사를 찾아갔다. 내키지 않은 발길이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박 회장은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면서까지 내 마음을 돌려주려고 애를 썼다. 그는 내동 다정한 목소리로 환심을 사려했다.
“하나뿐인 내 혈육인데 자네들을 호강시켜주는 건 내 의무야. 그러니 어서 사표를 내고 우리 회사에 들어오게. 상무 자리도 좋고 전무 자리를 차지해도 좋네. 그러다가 사장이 되고 나중에는 아주 내 사업체를 맡으란 말야. 우리는 형제간인데 아까울 게 뭐있겠나. 그러니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세.”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경찰직이 생리에 맞습니다.”
나는 박 회장의 말을 다소곳이 들어주면서도 경찰직이 생리에 맞는다는 핑계로 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미나와의 부부연이 전제된다면 어떠한 행복조건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까짓 게 무슨 희망이 있는가. 더구나 자네는 말단인데 언제 출세하겠어.”
“저는 출세를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맡은 소임만 다할 뿐이죠.”
나는 거짓말을 했다
. 출세에 대한 욕망이라면 숫제 공상에 가까울 정도가 아닌가. 서른 살까지 저축해서 생활 기반을 다진 다음에 사표를 내고 공부를 계속한다. 소설도 열심히 쓴다. 그래서 불후의 명작을 써서 까뮈처럼 사십대에 노벨문학상을 받고, 만약 사십대에 안 되면 십년쯤 늘려잡아 오십대까지는 기어이 노벨상을 받는다. 그처럼 내 인생은 사오십대에 승부를 걸고 있었다.
“도저히 사표는 낼 수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저는 경찰업무가 생리에 맞거니와 나중에 제 뜻을 세울 터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경찰은 자유민주주의의 보호벽입니다.”
의미가 있건 없건, 이치에 맞건 안 맞건 그냥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지껄인 말이었다.
“자넨 내 당부를 그런 식으로 거절하는군. 미나의 말대로 자넨 역시 남이야.”
그는 손바닥으로 식탁을 탁 쳤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남의 처녀를 버려놓고 이제 책임지기 싫다?”
“죄송합니다.”
“또 죄송? 자네 누굴 약올리는 거야?”
“지금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그 말밖에 없습니다.”
“이 자식 안 되겠군.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구? 임마, 못 살겠으면 못 살 이유를 대얄 것 아냐? 뚜렷한 이유를 대야 이해를 하고, 이해를 해야 포기할 것 아니냔 말야. 그러니 조리 있게 이유를 대라구. 너희들 업무도 육하원칙에 의해서 처리하잖아, 임마!”
박 회장의 몸이 떨렸다. 나는 제발 그가 때려주기를 바랐다. 식당 밖으로 나오면서도 내동 그 생각이었다. 주먹으로 맞아 코피가 터진다면 얼마나 신선한 충격인가.
“말을 냇가로 끌고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습니다.”
“너 이제 보니 독한 놈이구나.”
“박 회장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주먹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완력을 참는 모양이었다. 그는 나를 데리고 다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왜 주먹을 참는지 아는가?”
다방에 들어와 마주앉자 박상진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모릅니다.”
“제발 그런 식으로 대답하지 말게.”
나는 정말 모른다고 재차 대답하려다 참기로 했다. 진짜 모르는 사실을 두고 왜 그런 식으로 대답하느냐고 나무라는 그의 의미 있을 성싶은 말투에 대한 성의였다.
“자네가 맘에 들어서 그래.”
박 회장은 담배를 꺼내 피웠다. 나는 그의 말이 길어질까 봐 오금이 저렸다. 그가 미나의 오빠만 아니어도 말상대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진정으로 나를 좋아하는 낯빛, 그 서글픈 듯한 낯빛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하지만 참으로 나누기 싫은 대화였다.
“자네가 왜 내 맘에 드는지 아는가? 이유는 딱 한 가지야. 자네가 통할 수 있다는 말은 게임 상대가 된다는 말이거든. 나는 미지근한 사내는 딱 질색이야.”
“형님은 저를 잘못 보신 겁니다. 저는 비열한 인간입니다. 누구와 맞붙어 대거리할 만큼 용기가 있는 사내가 못됩니다.”
나는 처음으로 형님이란 호칭을 썼다. 그 호칭은 아무 때고 취소할 수 있는 말이어서 거침없이 사용했다.
“형님이라 불러줘 고맙네. 그리고 자네는 비열한 게 아냐. 그런 척할 뿐이지.”
“그래서 용기가 없다는 겁니다. 야비한 거죠.”
“야비? 그건 야비가 아니고 기교야. 하지만 그 기교가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편리한 수법이기 땜에 부도덕한 거지.”
박 회장은 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깨닫게 되자 또 오금이 저렸다. 마치 후려치기위해 쓰러진 상대를 다시 일으켜 세우듯 박 회장은 결국 무책임이란 말로 공격하기 위해 나 스스로 자조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나는 함정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냥 쉬운 말로, 너는 어째서 내 동생을 애정이 없다는 사치스런 유희를 핑계 삼아 내동댕이치느냐고 따지지 않고 나 스스로 내 약점을 내보이도록 유도한 그 수법이 두려웠다.
“난 원래 긴 말을 싫어하는 사람이야.”
박 회장은 한마디를 보태고 나서 금방 돌아섰다. 그 싸늘한 말투에는 분명 계산된 저의가 숨겨져 있었다. 다름 아닌 압력이었다.
3
시내버스에서 튕겨져 나온 내 복장은 푸르뎅뎅한 제대복 차림이었다.
“무슨 군인 복장이 이래? 그러고저러고 군인이면 공짜로 타라는 법 있어?”
차장 아가씨의 돌가루 같은 목소리가 귀에 멍멍했다. 버스비를 아끼려고 그냥 내린 내게 차장이 짜증을 냈던 것이다. 나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오는 데도 여비를 아끼기 위해 군용열차를 타야했다. 끼니도 어제 저녁밥까지는 부대에서 때웠지만 당장 아침 걱정이 어깨를 눌렀다.
바다 쪽에서 한겨울의 찬바람이 몰려왔다
. 그 바람은 살아갈 길이 막막한 내 마음을 더욱 황량하게 얼렸다. 바지 주머니에 쑤셔넣은 손끝에 지폐 조각 몇 닢이 매달리며 바르르 떨었다. 제대비였다. 의가사제대이기 때문에 그나마 반액도 안되는 650원이다. 파고다 한 갑이 35원이니 담배 스무 갑 값도 안 되는 돈이다. 지난 여름에 실시한 화폐개혁 이전의 환으로 치면 6,500환인 셈이었다.
초량역 앞 포장마차에서 국수로 요기하고 과일가게에서 사과와 배를 샀다. 수정3동 가파른 언덕에는 판잣집이 즐비했다. 이골목 저골목을 뒤지다가 헌무의 셋방을 찾았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나와 동기생인 헌무는 수송대에 근무하면서 군용 휘발유를 좀도둑질한 돈으로 애인과 동거하고 있었다.
“기어이 제대했네예. 참 장하니더.”
미스 진은 내 의가사제대를 대단한 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나는 과일 꾸러미를 앞세워 방으로 들어갔다. 좁다란 방안에는 여인의 향기가 은은했다.
“친구는 근무 중이겠군요.”
“아니더, 곧 올게니더. 용해 씨가 제대해 올끼라고 이틀 품을 먼점 메웠지라예.”
미스 진이 말한 이틀 품이란 이틀 장사, 즉 이틀 분의 도둑질을 미리 앞당겼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말이 창피하다는 듯 보조개에 수줍은 미소를 담았다. 나는 그녀의 자닝스런 미소를 피해 옷걸이가 걸린 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헌무의 공군복 한 벌이 걸려 있었다. 빳빳이 다려진 그 푸른 제복은 헌무의 외출복인 셈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도 입고 다니던 제복이었다.
내가 헌무와 친하게 된 동기는 항공병학교 시절 헌무의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글을 써주면 헌무는 자기 필적으로 정서하곤 했다. 그래서 헌무의 주먹은 늘 내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입대하기 전 부산에서 밀수업에 종사한 헌무의 주먹은 오달지기로 소문나 있었다.
“용해에게 손대는 놈 있으모 이빨을 왕창 빼뿌릴 끼라. 알갔제?”
당시 우리 내무반에는 서울 역전에서 놀다가 입대한 서울파와 부산 역전에서 놀던 헌무의 부산파가 각축을 벌이고 있었는데 헌무와 친하게 지낸 나는 자연히 서울파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서울파 두목은 내게 종종 압력을 넣었다.
“너는 서울서 학교 다녔는데 부산놈과 어울리냐? 그렇게 배알이 없어?”
“학교로 따지자면 부산에서도 중학교를 다녔거든.”
“부산? 충청도놈이 더럽게 많이 쏴다녔네.”
“너 애인 있니? 애인 있으면 너한테도 연애편지를 대필해 줄게.”
“알겠다. 너하고 친해지려면 애인이 있어야겠구나.”
그날 밤이었다. 취침점호를 마치고 막 침대에 누우려는데 서울파 두목이 나를 살며시 밖으로 불러냈다. 그의 손에는 종이쪽지와 플래시가 들려 있었다. 내무반 밖으로 빠져나온 그는 눈에 띄지 않도록 나를 콘센트 구석으로 데려갔다.
“이것 좀 읽어봐.”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두목이 내게 편지지를 내주며 플래시 불을 켜댔다. 주위는 조용했다. 나는 접힌 편지지를 펴 읽었다.
사랑하는 복금 씨. 세월은 유수와도 같이 흘러 어느덧 춘삼월이 지나고…….
“야, 이런 글은 안 돼. 이런 글은 부모님전상서에나 맞는 투라고. 젊은 깔치한테 보내는 편진데 산뜻해야지. 그리고 입대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세월이 유수처럼 흘렀냐.”
“그럼, 어떻게 써야 산뜻한 거지?”
“그걸 말로 설명할 순 없고, 내가 초안을 잡아줄 테니 네 글씨로 다시 써봐.”
“고맙다, 암튼 헌무가 실속 있는 놈야. 너하고 일찍 사귀었으니 얻어들은 게 많을 거라고.”
“원래 밀수쟁이라 눈치가 빠르지.”
“서울놈은 겉만 약지 속은 맹하거든.”
서울두목은 연방 주절거리며 내게 다정히 손을 내밀었다. 그 이튿날부터 헌무와 서울파도 친하게 지냈다.
항공병학교 시절에 잊지 못할 추억이 또하나 있었다. 입교하고 한 달쯤 지나서였다. 일과를 마친 생도들이 저녁을 먹고 내무반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조명탄이 터지고 스피커로 비상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환한 조명탄 불빛에 연병장은 대낮 같이 밝았다.
“남침을 자행한 북괴군은 서울을 정복하고 어느새 유성을 지나 만두고지까지 접근하고 있다. 여러분들은 비록 훈령병이지만 위난에 처한 조국을 위하여 용감히 전투에 참가해주기를 바란다. 앞으로 영점오초(0.5초) 내로 연병장 집합!」
전 훈령병들은 무장을 갖추고 선착순으로 연병장에 집합했다. 진짜 이삼 분 동안이었다. 완전무장을 갖춘 집합으로서는 눈부신 동작이었다.
활주로 건너편 A지구 쪽에서도 조명탄이 작렬했다. 적이 벌써 만두고지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훈련병들은 두렵긴커녕 이제 구국전선에 뛰어든다는 강렬한 모험심이 치솟아 가슴이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참으로 지루하던 내무반 생활이 아니었던가. 만날 엎드려뻗쳐 기합에다 청소와 관물함 정리에 진저리를 쳐온 생활이었는데 전쟁터에 나가 싸운다니 사뭇 어깨에 힘이 솟았다. 자랑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전투는 군인의 멋. 나는 입을 꽉 다문 채 출전에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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