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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인의 가슴과 서천 땅을 적시는 봉선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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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가 살았었다. 한 5년 전 쯤만 해도 밤에 한두 마리의 부엉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뉘집이라고 밝힐 수는 없지만 인근마을 어느 집 거실에 날개를 활짝 펼친 부엉이 박재가 유리관 속에 남아 있다. 주인 김모씨는 부엉바위(부엉이 바위산을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 부르고 있다), 그러니까 봉선지가 휘감아 도는 산에서 잡았다고 했다. 이 바위산이 봉선지의 명물이고 풍광을 아름답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때문에 봉선지는 몰라도 ‘부엉바위’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고 이 이름을 딴 단체들의 활동도 있다. 길게 늘어 놨지만, 봉선지를 비롯해 인근지역은 그만큼 청정했고 아직도 깨끗하다는 뜻이다. 봉선지는 2천77백99ha로 1926년, 일제감점기에 축조된 저수지이다. 지리적 환경으로는 시초면 봉선리, 후암리, 풍정리, 마산면의 이사리, 삼월리, 소야리, 신봉리를 두루 아우르고 있다. 봉선지는 지류인 길산천을 따라 기산면 월기리와 시초면 용곡리 앞을 지나 잠시 멈춰 큰 장터를 이룬 것이 지금은 사라졌지만 서천읍 삼산리 길산의 질뫼장이다. 여기서 다시 화양면과 마서면의 경계를 이루며 망월리에서 금강과 만나 서해로 흘러들어 간다. 그러니까 봉선지 물이 시초와 마산면의 경계, 기산면과 서천읍의 경계, 화양면과 마서면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봉선지는 서천에게 많은 혜택을 주어 왔고 앞으로도 커다란 자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알 될 역사가 있다. 봉선지의 축조가 물질문명의 이기를 선사하고 있는 만큼 그 속에 희생된 많은 조상들의 고달픈 노역이 있었다. 불행히 서천군에도, 농업기반 공사에도 일제치하에서 고통 받으며 봉선지 축조공사장에서 쓰러져간 사람들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일제는 우리나라 곡창지대의 곡물들을 수탈하면서 보다 많은 것을 챙기기 위해 봉선지가 필요했고 인력과 생산물들을 빼앗아 갔다. 당시의 유일한 기록이 봉선지 수문 옆 바위절벽에 새겨진 ‘鳳仙池’라고 쓰여진 문구였다. 그러나 도로공사를 하면서 무참히 파괴됐다. 봉선지의 또 다른 슬픈 흔적, 일제가 강압적으로 실시한 신사참배의 흔적이다. 부엉바위 가파른 절벽에 신사까지 오르는 계단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인근 노인들은 마산, 시초, 기산면 등 인근의 주민들이 이곳을 찾아 참배했다고 증언한다. ▶ 서천과 봉선지
아쉽게도 여름철 녹조현상이 심해 식수부적합 판정으로 수년째 상수원보호구역으로 묶여있을 뿐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예산만 낭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분명한 것은 이 때문에 봉선지지가 각종 개발에서 오는 오염으로부터 보호된 것은 사실이다. 봉선지는 서천사람들의 애환도 많다. 몇해 전에는 삼월리에서 낚시배를 타고 소야리 친구집으로 마실 다니던 노인이 익사한 일, 또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이 목숨을 던지는 일, 가끔 봉선지를 얕잡아보고 수영 솜씨를 뽐내려 뛰어들었다가 애꿎은 목숨을 잃는 일, 섬뜩하게도 올봄 카센타 화재사건의 단서가 되는 옷이 발견된 곳도 봉선지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봉선지는 인근 사람들은 물론 서천군민의 생명이다. 상수원보호구역으로 묶이면서 모든 어획 행위가 금지되었다. 하지만 조상 때부터 이곳에 나룻배를 띄우고 그물을 던져 생활하던 이들의 생계까지는 막지 못한다. 또 주말마다 붐비던 강태공들의 발길은 끊어졌지만 봉선지 참붕어를 낚아 올릴 때의 손맛을 못 잊은 몇몇 강태공들이 몰래 낚시를 즐기고 있다. 봉선지 인근 마을의 농가들은 청정한 환경과 봉선지 물을 이용해 이런 저런 농사를 짓고 있다. 마산의 수박, 딸기 등의 비닐하우스 농사, 문산과 마산 지역의 부추농사 그리고 저수지 주변에 색다른 풍경을 선사하는 밤, 단감나무들이다. 특히 마산면은 봉선지 주변과 지류를 따라 감나무 가로수 길을 조성해 가을의 풍취를 더해주고 있다. 시초면은 봉선지 주변에서부터 갖가지 색을 발하는 단풍나무 가로수를 심어 천방산에 이르는 드라이브 코스로는 그만이다. 유난히 비가 많았던 지난해 여름, 봉선리에 위치한 봉선지 무냉이(물넘이의 사투리)에 물이 넘치면서 색다른 광경이 연출됐다. 물이 넘치면서 떠내려 오는 붕어를 건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던 것이다. 봉선지는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입증된 일이다. 시원스레 쏟아지는 물과 함께 팔팔하기로 소문난 봉선지 참붕어가 떼로 쏟아질 때마다 잡는 사람이나 구경꾼이나 환호성이 터졌다. 최근 들어 처음으로 내놓고 봉선지 붕어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경우가 아니었나 싶다. 이 풍경을 지켜보던 촌로 한분이 옛날을 회상한다. “옛날엔 갯똘에서 참게도 나오고 조개도 많이 잡았는데…”. 지금 수로는 경지정리, 수로사업을 한답시고 콘크리트와 석축을 이용해 곧게 만들어 그저 옛일이 된 것이다. 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뱀의 등처럼 구불구불 기어가는 냇물과 버드나무, 냇둑의 갈꽃이 또 하나의 내를 지으며 흘렀었다. 그때는 마을에서 나오는 오수들이 나무뿌리 풀뿌리 자갈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정화됐다. 이제 다시 ‘샛강 살리기’ ‘소하천 복원’이란 명찰을 단 사업들이 눈을 들기 시작하고 있다. 역시 자연은 물길의 흐름을 막거나 변경시키면 재앙이 온다는 것을 터득한 까닭이겠다.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봉선지 지천이 주는 선물이 또 있다. 미꾸라지와 우렁이가 바로 그것이다. 봉선지 지천들은 논에 물을 대는 시기 외에는 많은 물이 많이 흘러내리지 않는다. 콘크리트로 덮이지 않은 곳에서는 부들, 미나리, 줄 등 수질정화 능력이 뛰어나다는 수생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그 풀섶에 미꾸라지며 우렁이가 서식하고 있는 것이다. 농한기에 소일거리로 이것들을 잡아 상에 올리기도 하고 장에 내다 팔기도 한다. 마산 이사리의 한 노부부, 남편은 부지런히 똘에 나가 우렁이를 잡아오면 아내는 삶아 까서는 시장에 앉아 팔곤 한다. 이렇듯 봉선지에서 나는 생물들은 민초들의 밥상을 기름지게 하고 빈 주머니를 채워 주곤 한다. 여기까지는 봉선지의 작은 혜택이다. 봉선지에 담겨있는 물의 양은 대략 1천74만3천t이, 생존해 있는 사람 중에 봉선지가 바닥을 드러낸 것을 딱 한번 겪었고 40 넘은 이들은 한 번도 못 봤다고 한다. 이 물이 서천의 널찍한 곡창을 적시고 있다. 단위 당 쌀 수확량 전국최고를 자랑하는 서천의 논농사 저력이 바로 봉선지인 것이다. 시초, 문산, 마산면의 천수답까지 봉선지 물을 끌어올려 농사를 짓고 있고 서천의 동산리, 기산의 두남리 들판까지 봉선지 물이 근원이 된다. 이것이 봉선지의 가장 큰 힘이고 서천의 저력이 된다. ▶ 봉선지는 생명이다 지금 서천은 이직 실체도 파악 되지 않는 어메니티 바람이 불고 있다. -그 뜻이 추상적이어서 아직도 와 닿는 느낌이 없지만 하도 떠들어서 어메니티가 뭔지 모른다고 하면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을 지도 모르겠다. 짐작하기는 어메니티는 요즘 ‘기분 좋은 삶’을 의미하는 웰빙의 기본이 되는 환경여건을 표현한 말로 이해된다. 한 달 정도 지나면 봉선지는 겨울철새들의 날개짓으로 붐빈다. 금강에서 봉선지까지 마실을 다니는 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이동하는 오리 떼를 자주 목격한다. 봉선지는 아직까지 생명들이 살아있고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그 개체수가 늘어가고 있다. 혹시 아나, 머지않아 부엉바위 어딘가에 숨어 지내던 수리부엉이가 다시 나타날지. 그렇게 되면 봉선지가 최상의 어메니티 자원이 된다. 봉선지는 농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서천의 생명이고 역사의 현장이다. 무엇보다 앞으로는 물이 매우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 분명해 반드시 청정하게 지켜야할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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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봉선지 부엉바위는 국민학교 시절 소풍가던 장소였는데, 그곳에 일제 신사가 있었다는것은 전혀 몰랐다.
어릴적 우리들의 소풍이 일제때 선생들이 어린 학생들을 데리고 찾았던 신사참배 행위가 무의식적으로 관습화 되어 찾는 소풍(신사참배)은 아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