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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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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46년 조선 전라도 전주부 |
사망 | 1589년 조선 전라도 진안군 죽도 |
사인 | 자살 또는 암살 |
거주지 | 조선 전라도 전주부 |
별칭 | 자는 인백, 호는 죽도 |
학력 | 한학 수학 |
직업 | 정치인, 학자, 사상가 |
종교 | 유교 |
자녀 | 아들 정옥남 |
부모 | 아버지 정희증 |
친척 | 정언지(9촌), 정언신(9촌), 정인겸(14촌) |
정여립(鄭汝立, 1546년 ~ 1589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동래이이와 성혼
1570년(선조 2년) 식년 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 홍문관서인이었으나 서인을 탈당하여 동인성혼, 박순을 비판[1]하였다. 하지만 선조가 그의 이당을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1][2]하였다.
정여립은 관직을 단념하고 낙향, 지역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대동계기축옥사
정여립은 1546년 전라북도 전주부첨정과 익산군수대호군기축옥사
정여립에 관한 기록은 거의 소실되고 없기 때문에 부정확한 것이 많다.[3]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다른 설이 있어 확실하지 않은데, 현재의 전주시 인후동 근방에서 살았다는 주장과 그의 처가인 김제시 금구면 지역에 살았다는 설, 그리고 진안군 죽도의 입구인 현재의 진안읍[3]
그는 일찍이 이이이이의 다른 제자들은 정여립을 "넓게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경전[4] 이이
훗날 정여립이 이이의 문하를 다시 찾아갔을 때 그가 서인당을 왜 찾아왔는지 까닭을 묻자, 정여립은 "저는 서인[5]
한때 정여립의 재주를 아껴 총애했다던 이이는 죽기 석달 전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관직(이조판서직)의 사퇴의 상소를 선조[4] 이에 선조[4]"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이이와 선조가 정여립을 이처럼 평하고 배척하였던 데는 다른 사적인 문제도 있었을 터이지만, 이이는 당시의 상황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즉 그 때는 동인과 서인간의 대립이 점차 양극화되기 시작한 때였고, 선조는 이를 제대로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이런 때에 재주와 출세 의식, 과격한 성격을 가진 정여립은 자칫 분란의 소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이이와 선조는 경계했던 것이다.[4] 정여립이 뛰어난 재질과 대담한 용기를 가진 인물임을 한편으로 인정하면서도, 선조와 그 측신들은 정여립이 이이를 배척했다는 이유로 그를 향리로 추방하고, 결국 반역의 굴레를 씌워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4]
이이와 성혼의 문인으로 1567년(명종 22년)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0년(선조이이서인
당시 정여립의 주변에는 그의 가까운 친척으로 정언신, 정언지 그리고 먼 일가로 정유길 등 동래 정씨 첨사공파 자손들이 동인계 세력을 이루고 있었는데, 정여립은 수찬에 오른 뒤 이이를 비난하고, 이이가 싫어했던 동인들과 가까이 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선조[6]
그 뒤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서인으로서 이이와 성혼(成渾)의 후원을 받았으나, 이이 생전에 서인을 탈당하여 동인
정여립은 총명하고 논변을 잘하여 널리 이치를 탐구하는 데에만 힘썼으며, 특히 시경[5] 그는 이이의 문하만이 아니라 성혼이이와 성혼[5] 그러나 당시 이이 문하에 드나드는 선비들이 오직 서인[5]
- 정여립 : 서인만이 이 나라 사대부입니까?
- 이이 : 동인들은 늘 반대만 하거든.
- 정여립 : 그래도 그렇지, 동인에도 반드시 인물이 있을 텐데 무조건 백안시하는 건 좋지 않은데요.
- 이이 : 뭐야?
- 정여립 :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지 동인 서인 나뉘었다고 일부 선비들이 그들을 짐승 취급할 것 까지는 없잖습니까?
- 이이 :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나[5]
이이이이서인[5] 이런 이유로 정여립은 스승을 배반했다는 공격을 받게 되었고, 끝내 그 보복을 받았던 것이다.[5]
선조는 유난히 정여립을 기피하였다. 선조 16년(1583) 10월 이조판서 이이는 ‘정여립을 여러 번 천거해도 선조가 매번 낙점을 거부한다’면서 “혹 중간에 참소라도 있으신 것입니까?”라고 항의할 정도로 정여립을 아꼈다[7] 그러나 이이 사망 뒤 동인으로 돌아선 정여립은 이이를 비난했다.[7] 『부계기문』에 의하면 선조가 정여립의 면전에서 “정여립은 오늘의 형서(邢恕)로구나”라고 비판하자 정여립이 성난 눈으로 물러갔다고 전한다.[7]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의 맹장으로 활약하면서 이이·성혼·박순(朴淳)조헌, 정철 등 서인 인사의 집중적인 비판과 탄핵의 표적이 되고, 이이, 성혼
고향으로의 낙향 직후 그는 독서와 손님 방문 등으로 나날을 보냈다. 동인의 역천(力薦)에도 불구하고 선조의 눈밖에 나서 비록 중앙에서 관직을 얻지 못하였으나, 동인 사이에는 여전히 인망과 영향력이 있어 감사나 수령이 다투어 그의 집을 찾았다. 특히 전라도 일대에 그의 명망이 높았다. 이는 그의 가계가 오랫동안 전주 지역의 명문거족이었던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이와 정여립 사이에 서인과 동인에 대한 인식 차이로 약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 다 붕당에 얽매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인물들이다.[8] 이이는 평소 선조에게 붕당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건의한 바 있었고, 정여립은 이이 문하에 의외로 서인[8] 그런가 하면 정여립이 이이를 배반했다는 당시 서인[8] 오히려 이이는 정여립의 과격한 성격을 상기시켜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반대하였다.[8]
그가 서인에서 동인으로 전향, 서인을 공격하는 편에 앞장서게 된 사정은 확실하지 않으나,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동인이이를 비판한 점 때문에 성리학1623년 이후 서인과 그 후신인 노론이 대한제국
이이가 죽자 이이에 대한 동인들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그러자 이이에 대한 선조의 믿음도 점차 변하여 이른바 삼찬 사건(1583년 이이를 탄핵한 송응개, 박근원, 허봉을 유배시킨 사건으로 이들 셋을 삼찬이라 했다. 계미변란이라고도 한다.[9]) 관련자들을 용서한 일이 일어났다.[9] 이때 정여립은 이러한 선조의 마음을 헤아려 경연에서 이이를 공격하는데 앞장 선 적이 있었는데, 이 일은 궁지에 몰린 서인[9]
경연 활동 때는 임금의 뜻에 따라 탄핵의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지만, 경솔하고 과격했던 정여립은 임금의 뜻을 정확히 확인하지 않고 서둘렀던 것이며, 서인[9] 선조는 마음이 여리고 온유한 임금으로 문약한 이이와 서로 통하는 점이 많았으며, 그런 탓에 과격한 주장을 싫어했다. 이런 때에 정여립을 제거하는 일은 서인에게 있어 동인유교[9] 서인들은 선조의 이 같은 분노를 자극하여 드디어 정여립을 그 도마 위에 올리는 데 성공하였다.[9] 정여립은 스승인 이이를 배반한 변절자, 배신자로 몰려 서인[9]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가 구체적 근거가 없는 것들이었다.[9]
그가 이이를 비난한 것을 두고 배신자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여립이 이이를 배신했다는 주장은 당시 이이를 절대자요 성인으로 숭배하던 사람들, 특히 서인들의 입장에서 제기되었던 다소 과장된 이야기라고 볼 수 있겠다.[8]'는 반론도 있다. 어쨌든 그가 이이를 공격한 이유로 서인의 미움이 그에게 집중되었고, 그래서 그는 동인동인[1]
정여립은 관직을 사퇴하고 전주에 내려와서 산천을 벗삼아 유유자적하고 있는 동안에도 조정에 있는 친척 의정부우의정 정언신, 이발[6] 조정의 많은 인사들은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관직에 계속 추천하였으나, 선조[6] 그가 벼슬길을 그만두고 낙향하자, 주변 사람들이 그에 관한 소식을 듣고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심지어 감사와 수령들까지 찾아와 인사를 드렸다는 기록도 있다.[10]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이러한 인사들뿐 아니라, 무사, 무뢰한, 노비 등에서부터 승려나 산적, 도사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10]
이후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짓고 사회(射會)를 열어 강론을 펴는 등 활동을 전개하면서 인근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
호남 금구현으로 간 뒤로는 전주에 거주하기도 하고, 김제와 진안의 별장을 왕래하기도 하였다.[11] 조정에서 그가 물러가는 것을 애석히 여겨 그에게 다시 벼슬길을 열어 줄 것을 간청하는 신하들이 나타났지마, 선조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11]
정여립은 대동계라는 조직을 만들어 달마다 매월 15일이면 한 곳에 모여 활쏘기 대회를 열고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한다.[6] 이들 대동계에서는 여러 무사, 공사, 천노들로 소속되어 있었으며, 이들에게 강론하여 개혁 사상과 애국심을 심어 주고, 혹은 말타기, 활쏘기, 칼쓰기 등의 무력도 연마시켰다.[6] 대동계는 신분에 제약을 두지 않고 가입을 허가했으며 보름마다 1번씩 무술훈련을 하는 등 호남1587년[6] 당시 전주 부윤으로 있던 남언경은 서인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대동계원을 이끌고 녹도와 손죽도(損竹島)에 침범한 왜구
당시 왜구는 별로 수가 많지 않아 대동계원이 녹도에 도착하였을 때 이들은 이미 퇴각한 뒤였다.[12] 그러나 손죽도에 정박하고 있던 왜구를 발견하여 기습 공격, 미처 떠나지 못한 왜구들을 전멸시켰다. 이후 왜구들이 이들 정여립의 대동계 토벌대가 온다는 소식만 듣고도 풍비박산 도망쳐 달아날 정도로 그의 위세는 당당하였다.[10] 이에 대하여 전주부윤 남언경[10] 그 뒤 정여립은 문과 무를 겸비한 선비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 뒤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 해주(海州)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의 승려1589년 정여립 및 그와 친하게 지내던 변숭복, 박연령, 지함두, 승려 의연 등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입경하여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고변이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
대동계의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황해도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당시 황해도 관찰사[13]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고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13] 이 때문에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하고 말았다.[13]
그런데 그의 모반사건에 대해서는 무옥이라는 설과 모역이라는 양설로 나뉘어 있다. 조작설의 이유로는 그의 도피는 안악의 교생 변숭복의 급보로 이루어지는데, 그는 수사의 손길이 곧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집 안에 각종 수신(受信) 문서들을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연루자로 죽게 할 리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급보를 받고 도망간다면 연고지가 아니라 지리산 같은 심산으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며, 또 가족에게 행선지를 알려 추포의 손이 곧 미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150년 뒤에 나온 ≪동소만록 桐巢漫錄≫ 같은 야사에서는 그가 죽도에 가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 등이 달려와서 박살하고 자결했다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정여립의 음모설이 나왔을 때, 그의 음모 사실을 믿지 않는 견해도 있어 팽팽히 맞섰다. 명재 윤증(尹拯)이 ‘황신(黃愼)행장’에서 좌의정 정언신(鄭언信)이 ‘정여립을 고변한 자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듯이 고변을 사실로 믿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게다가 선전관 이용준(李用濬) 등은 ‘정여립이 자신의 서실(書室)이 있는 진안 죽도(竹島)에서 자결했다’며 아들 정옥남(鄭玉南)만을 잡아와 의혹은 증폭되었다.[7]는 주장도 있다. 훗날 남하정(南夏正:1678~1751)은 『동소만록(桐巢漫錄)』에서 “정여립이 진안 죽도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이 현감과 같이 죽이고선 자살했다고 아뢰었다.[7]”는 기록을 남겼다.
정여립 반란 사건 초기에 위관이었던 정언신도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정여립과 연루되었음이 드러났다.[14] 정언신과 정언각 등은 정여립의 친척으로, 정여립에게는 9촌 아저씨가 된다. 정여립의 아버지에게는 8촌 형제간으로, 조선시대의 기준으로는 상당히 가까운 친척이었던 셈이다.
정언신이 체포되자 정언신의 아들 율이 상소를 올려, "제 아비는 여러 해 동안 정여립과 왕래가 없었습니다." 라고 무죄임을 주장하고, 성혼도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 대신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된다고 권고하므로 죄를 감해주었다.[14] 그러나 조사 결과 정여립의 문서와 서신들을 조사했을 때 정언신의 편지가 비교적 많이 들어 있었고, 정언신에게는 유배형을 내린다.
서인들은 정여립의 옥사 당시 위관은 정철이 아니라 유성룡이라고 주장했는데, 유성룡은 남인의 초대 당수였다. 남인들은 서인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비열한 정치공세로 이해하고 원한과 의혹을 한층 더 쌓게 되었다.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하고 말았다.[13] 그가 갑자기 죽자, 그의 역모설은 확인이 되지 않았는데도 사실로 여겨졌다. 이로써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동인의 정예 인사들이 제거된다.[13] 이때 숙청된 인사는 장살로 죽은 이발을 비롯하여 약 1천 명에 육박했다. 이를 기축옥사[13]
심지어 조대중(曺大中)은 당시 전라도 도사로 있으면서 관내 순찰 중 전라남도 보성[15] 사실은 마침 부안[15]
이후 선조는 사건의 형관으로 정철1590년 이듬해 추형(追刑)되었는데, 형조좌랑 김빙은 추국관(推鞫官)이 되어 추국에 참여하였는데, 원래 안질이 있는 데다가 날씨가 추워 눈물을 닦은 것이 같은 서인이었음에도 김빙
서인 강경파 정철(鄭澈)이 “역적을 체포하고 경외(京外)에 계엄을 선포하자”는 비밀 차자(箚子:약식 상소문)를 올리자 선조는 그 충절을 칭찬하고 사건 조사를 담당하는 위관(委官:국문 수사 책임자)으로 삼았다.[7] 좌의정 정언신, 부제학 이발(李潑)·이길(李길) 형제, 백유양(白惟讓)·최영경(崔永慶)·정개청[7]
이 일로 동인은 서인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고, 형문장의 참혹한 장면을 목격한 이산해 등은 서인 중 옥사를 기획했으며 국문장의 형관이기도 했던 정철인조 반정[16] 세자 건저 문제로 집권한 동인은 서인류성룡은 온건한 처벌을 말했고 이산해는 당한 만큼 갚자고 하여 이견이 생기면서 동인은 남인과 북인
그러나 정여립은 이이를 비난했다는 점과 서인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동인정여립의 옥사정인겸
정승으로 있던 9촌 아저씨인 정언지, 정언신 등도 몰락했고, 정언신
일설에는 그가 이이이이[1] 오히려 그의 직선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영수 이발의 성향과 일치했던 것이 동인에 동조하게 된 이유[1]로 보는 시각도 있다.
특히 이미 서인당인 전주 부윤이 알고 있을 정도의 조직이라면, 더욱 마음 놓고 조직을 활성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17] 그래서 정여립은 매월 공공연하게 모임을 갖고 국난을 당하여 협조했을 것이며, 만일 그가 진정 임진왜란[17]
죽음에 있어서는 자살
정치적 결사의 성격을 갖는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모반을 꾀한다는 서인의 탄핵을 받고 체포되기 직전 자결한 것으로 전해지나, 남하정의 동소만록
실제로 그가 대동계를 이용하여 혁명을 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이에 대해서는 조작설과 역모설의 양설이 있다. 일설에는 송익필이 그의 부친때 역모사건의 고변으로 면천되어 당상관까지 오른 것을 기억하고, 다시 천민으로 떨어진 자신의 신분을 면천하기 위해 정여립의 대동계를 역모사건으로 엮었다는 설도 있다. 송익필은 특히나 서인들의 정신적인 스승들이었던 이이, 성혼의 절친한 지기였고 학문적으로 많은 교류를 하였다. 게다가 동인이면서 이이의 인정을 받으며 이이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섰던 정여립이 사후에 이이를 공격한 것 때문에 서인들의 감정이 좋지 않았던 터였다.
정여립의 사건이 정철(鄭澈) 등 서인의 주도로 사건이 조사되면서 옥사가 점점 커져 이발(李潑)·백유양(白惟讓)·최영경(崔永慶)등 동인기축옥사라 하며, 이 사건으로 동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3년 후에 발발한 임진왜란조차 기축옥사[18]
정여립의 대동계의 주요 활동 근거지가 전라도 지방이어서 전라도 유림사회가 초토화 되었다. 호남의 유림사회에서도 이 사건 이후로 관직에 미련을 버리고 은둔하는 경향들이 나타났고, 이후 조정에서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활약할 때까지 전라도를 반역향이라고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도 제한되었다.
조작설에서는 정여립의 옥사를 조작한 인물로 정철과 송익필김장생
또한, 정철의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조작한 이는 송익필(宋翼弼)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노비 출신으로 아버지 송사련은 정승 안당송익필
정여립이 모반을 꾀했다는 밀고가 조정에 들어오자 그 연루자들이 속속 잡혀오기 시작했다.[19] 선조[19] 이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사람, 유배된 사람, 벼슬이 떨어진 사람 등 1천여 명의 선비가 화를 입었다.[19] 그 중에는 안질환으로 눈물을 흘렸다 하여 살해된 사람, 형문의 참혹함에 고개를 돌렸다 하여 죄인을 동정한다는 이유로 장살당한 사람도 있다.
정여립의 반란 예비 음모죄는 그의 죽음과 함께 이미 종결이 난 사건이었다.[20] 그럼에도 선조선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을 끌어들이고 동인과 서인[20]
당시 서인[21] 이러한 참설은 국초 이래 사회가 어수선할 때 늘 떠돌던 것으로, 정여립이 역모를 계획하였다면 오히려 스스로 그러한 참설을 만들어 퍼트리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21] 이 때문에 상식적으로 판단하여도 정여립이 반란을 하기 위하여 참언을 유포시켰다는 주장은 결코 설득력이 없다.[21] 차라리 반대자들이 조작하여 이를 악용, 정여립을 역모의 주범자로 몰아 대기 위하여 이를 조작하고 악용했을 가능성이 높다.[21]
정여립의 도망건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여립이 반란을 음모하고 거사하기로 결심하였다면, 그의 역모가 드러났음을 이미 알고 있는 마당에 과격한 성격으로 보아 일전(一戰)을 벌였다든가, 아니면 우선 주변을 정리하고 서둘러 도망갔을 것이다.[21] 그런데도 그가 유유히 금구로, 진안 죽도(竹道)로 전전한 것은 도망이 아니라 유인되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21]
금구는 그의 처가가 있는 지역이고, 죽도는 그의 별장이 있는 곳으로, 누구나 그 행방을 예상할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정여립이 관군을 피해 도망쳐 갈 장소로 금구나 진안 죽도를 선택했다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 점이 있다. 또한 죽도는 현재 진안읍 가막리에서 진안군 상전면 내송리, 외송리에 뻗어 있는 산으로, 만일 정여립이 그 속에 은신할 의향이 있었다면, 그 지형으로 보아 진안현의 관군 정도로 그를 수색, 체포하기 힘든 지역이다.[21] 그럼에도 손쉽게 그를 찾아 왕명을 저하려 했다는 것도 누군가에 의해 속아서 유인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과 같은 당시로는 혁신적인 사상을 표방했다.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를 지탱하고 있던 주자학요(堯)·순(舜)·우영국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에 견주어 정여립을 '동양
당시 정여립과 관련하여 참언이 무성하였는데, 호남 전주[17]
정여립은 군주에게 절대 복종하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심을 부정했는데, 그 예로 중국 춘추 전국 시대 제나라의 충신 왕촉[22] 왕촉은 제나라가 망할 때 연나라의 대장 악의[22] 그러나 정여립은 이러한 왕촉의 자살 행위를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였으며, 왕촉의 언행은 죽음에 임하여 일시적인 감정으로 한 말이지 성현의 통론(通論)은 아니라고 보았다.[22]
그는 역성혁명론을 주장하고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다면 그런 임금에게 충성을 바칠 이유가 없다고 했다. 당시 유자혜는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한 사람이고, 맹자는 제 선왕과 양 혜왕[22]
정여립은 왕위의 세습을 부정하였다.[22] 창업주와 어떤 군주를 제외하고는 일가를 통솔할 능력도 되지 않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왕위는 능력에 따라 왕으로서 재목감이 되는 인물을 골라 앉히는 것이지, 혈통에 맞추어 억지로 무능한 군주를 내세워 대를 이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22] 정여립은 말하기를 "중국 사마온공의 '자치통감'에서는 삼국중 조위(조조의 위나라)를 후한 다음 왕조의 정통으로 인정하여 위나라의 기년으로 삼았으나, 주자는 소열제 유비를 후한 헌제[22]"면서, 사마온공의 주장을 직필(直筆)이라 하고 주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하늘의 뜻과 사람들의 마음이 이미 주나라 왕실을 떠났는데 주나라 왕실을 존중하는 것(尊周)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민중과 토지가 조조와 사마 의에게 돌아갔는데, 구구일우(區區一隅)한 유현덕의 정통이 다 무엇이냐?"라고 하면서 주자[23]
이어서 그는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정해진 임금이 있겠는가? 요 임금, 순 임금, 우 임금은 서로 자손이 아닌 자에게 왕위를 전하였지만, 이들은 모두 성인이 아니었던가?" 하면서, 중국[23] 정여립의 이러한 주장은 그의 문도들의 표현을 따른다면 진정 앞선 성현들이 생각지 못했던 선구적인 발상이었다.[23]
그는 천하의 만물은 공물(공공의 것)이며 임금과 귀족들만의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를 두고 신채호[23]'고 하였다. 당시 조정에서 사용하고 있던 종묘사직[23]
정여립이 내놓은 이 같은 제한 군주주의 사상 또는 공화주의적 이론은 그 뒤의 실학자[23]
단재 신채호는 정여립의 공화주의적 사상을 두고 “동양의 위인”이라 칭송하였고, 역사학자 이이화
단재 신채호는 자신의 '조선혁명선언[22] 물론 정여립의 개혁 이론과 사상은 극히 단편적으로 전할 뿐이며, 그를 반역자로 몰아붙인 세력들에 의하여 소개되었기 때문에 다소 과격하게 그려졌을 가능성은 있다.[22] 그러나 신채호[22]
정여립은 옹골차고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10] 기백이 있고 말솜씨가 좋아서 입을 열기만 하면 그 말이 옳고 그른 것은 불문하고 좌석에 있는 이들이 칭찬하고 탄복하였고, 비록 임금의 앞이라 할 지라도 자신의 주장과 고집을 쉽사리 꺾지 않고 유난히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10] 이런 성품 때문에 주변에 적도 많았지만, 그를 따르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10]
그러나 그의 강직하고 어찌 보면 불온한 성품은 당대 지배 권력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위협적이고 불편한 것이었다.[10]
정여립의 형과 사돈관계였던 백유양도 정여립의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자신의 세 아들과 함께 옥사했는데, 서인인 그의 사촌동생 백유함은 사촌형을 구원하려 하기 보다는 매일 사헌부에 들어가 동인을 탄핵할 정도로 당파의 골은 깊게 패이고 있었다.[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