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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교장급 정기 인사이동에서 근무하던 백수중의 교장이 바뀌었다. 광주 일고 교감을 역임하고, 수학과 도교육청 장학사로 오래 근무하다가 목포 청호중학교 교장을 하고 있던 분이 좌천 되어 면소재지의 학교로 부임해 왔다. 보충 수업과 관련된 비리로 투서 사건이 발생해서 좌천되었다고 했다. 학교마다 통상적인 사건으로 별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교장에게 불만을 가진 같은 학교 교사가 청와대로 투서를 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고 했다. 목포에서 근무하다가 광주시로 영전해 가는 것이 교장들의 보통 코스인데 좌천이 되었으니 억울했을 것이기에, 교장은 부임 즉시 다시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기 시작 했다. 교장은 문교부와 접촉하여, 새로운 교과서 개편과 관련한 연구학교 지정을 받아 왔었다. 1976학년도가 되면서 나를 연구주임으로 임명하고, 본격적인 연구 주제에 따른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 때는 나도 주임교사 자격을 취득하고 있어서, 무자격이 아닌 정식 자격을 갗춘 주임교사였다.
주임교사는 담임을 하지 않게 되어 있었지만, 나는 담임을 하고 싶어서, 교장에게 부탁하여 1학년 2반 담임도 겸했다. 학교의 운영이 완전히 연구주임교사 중심체제가 되었다. 문교부 장학관을 위시하여 관내의 많은 인사들이 참관한 연구발표회를 성공리에 마치기까지 부단한 노력과 수고가 자연히 뒤따랐다. 교장이 회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교장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역할을 해 주었고, 교장도 나와의 만남을 다행으로 여기는 듯했다.
교장 사택에서 몇 달간 같이 생활하기도 했다. 교장 사모님이 20년 이상을 산후풍으로 누워서 생활했는데, 교장과 함께 사택에서 살다가, 자주 병원에 가야되는 상황이 되어 광주로 옮겨가므로, 사택에 교장 혼자 남아 생활이 불편하게 되어, 아내를 설득해서, 우리가 사택으로 들어가 교장 식사를 해결해주면서,4-5개월 정도 같이 산 것이다. 아내가 아들 용만이를 출산하고 계속 광주에 1년 이상 머무르고 있었고, 나는 하숙을 하고 있으면서 주말부부로 생활하고 있었기에, 나와 합치기도 하고, 교장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되어, 극구 거절하는 아내를 설득하여 함께 살게 되었다. 백수를 떠나야할 시기가 얼마 안 남았고, 또 나의 이동에도 교장이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에 아내가 동의해 주었었다.
사실 나는 이동에 교장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라기보다, 곤란한 처지에 놓인 교장을 돕고 싶은 순수한 생각에서였지만 결과적으로 교장의 힘을 얻게 된 것은 사실이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용만이에게도 학교가 놀이터가 되어 좋았다. 사택이 학교 안에 있었고, 교실 건물과도 가까이에 있어서, 용만이는 가끔 복도와 교실로 돌아다니며 놀았고, 학생들을 만나면 학생들이 다투어 안아 주고 데리고 놀아 주기도 했다. 어떤 때는 교실에서 수업하고 있는 아빠를 발견하고 교실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재미있는 시간들이었다.
거물급이라 할 수 있는 교장을 만난 것이 나에게 행운이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그 교장을 보내주셨다는 생각을 후일에 할 수가 있었다.
1976학년도를 마지막으로 5년 근무 만기가 되어 백수중을 떠나야 할 처지였다. 그 지역이 생활 근거지인 교사들은 오래 근무 했지만, 연고가 없는 교사들은 1, 2년 근무하면 떠나는 학교에서, 나는 5년 근무 만기가 되기까지 근무 했다. 장모님이 가까이 살고 계셨기에 연고지라 할 수도 있었지만, 더 좋은 위치에 있는 학교로 옮기고 싶어 약간의 노력도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계속 근무한 것이 5년을 있게 되었던 것이다. 교장이 어느 학교로 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학교가 있고 학생이 있으면 어느 학교나 좋습니다라고 했다. 비포장도로를 따라가야 나오는 학교가 적임이 될 거라고 했다. 당시에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그 동안 내가 근무한 학교는 모두, 비포장도로를 따라가야 되는 지점에 있는 학교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곳이던 고등학교로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했다. 교장은 알겠다고 하면서, 자기에게 임지를 맡기라고 했다.
겨울방학 중에 전출내신을 할 시기가 되었을 때이다. 광주 시내에서 교장이 만나자고 했다. 나가 보았더니, 교장이 당시에 도교육청 수학과 담당 장학사를 데리고 왔었다. 셋이서 식사를 하면서, 교장이 장학사에게, 나를 전남의 4대 도시인 광주, 목포, 여수, 순천에 있는 인문고등학교 중에 빈자리를 채우라고 했다. 당돌한 부탁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장학사는 교장이 장학사 시절에 키워준 사람이었기에 교장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처지였다. 여수고등학교에 자리가 있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나의 임지가 여수고등학교로 결정이 되었다. 교장을 만나서 열심히 일한 대가가 톡톡히 주어지는 자리였다. 예상대로 여수고등학교로 발령이 나고 고등학교 교사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백수를 떠나기 직전 겨울방학 때에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했던 기록이 보관되어 있어 옮겨 본다. 당시의 형제들 상황과 시대상을 엿볼 수 있어서 옮겨 보기로 한다.
★ 1977년 1월 26일-2월 1일. 여행일지
처음부터 계획과는 달리 자꾸 빗나가는 일이 많은 이번 여행을 그런대로 대개 끝내가는 단계에서 문득 쓰고 싶은 생각이 나기에 이번 여행을 함께하지 못한 당신에게 보고서로 작성하기로 하고 pen을 들었소.
이번 여행계획은 76년 12월 연말에 혼자 광주에 있을 때 계획한 신년 계획 중 제 1번 계획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할 것 같은 용만이를 데리고 당신과 함께 한가한 시간을 가져보자는 심사에서였소. 그런데 뜻하지 않은 당신 생리의 이상으로 함께 여행하지 못한 것이 출발선에서부터 힘이 없는 김빠진 격이었으나 이번에 여행을 하지 않으면 다시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어머니를 모시고 강행한 것이요. 다시 기회가 없다는 것은 전방에 가서 상률이를 만나는 계획을 한 것 말이요. 제대하기 전 상률이와 얘기를 좀 하고 싶었고 상률이가 기형이나 정량이 같지 않게 하기위한 첫 단계 대화를 하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던 것이요. 지금 마악 상률이를 만나고 돌아와서 잠간 추위를 녹인 후 이렇게 pen을 들고 있소.
그럼 오늘까지 처음부터 될 수 있으면 자세하게 한번 적어 보겠소.
1월 25일 출발하려다가 비가 오고 당신도 함께할 수 없어 별로 신이 나지 않아 하루 연기했다가 26일 출발했지요. 집을 나서서 얼마 오다가 어머니가 교회에 전화하는 것을 잊었다고 하시기에 다시 들어가셔서 하고 오시도록 했고, 고속터미널에 도착해서는 10시 30분 전주행 표를 사 놓고 기다리던 중 문득 카메라 생각이 나서 내가 챙기지 않았기에 안 가져온 줄 알고 다시 택시를 타고 집에까지 갔다가 당신이 이미 챙겨서 가방 속에 넣어 놓은 것을 알고 무안한 얼굴로 다시 집을 나와 터미널까지 시내버스로 가서 11시발 전주행 버스를 타게 되었지요. 내가 카메라 때문에 집에 갔다 온 사이 용만이는 할머니와 터미널에 있으면서 어찌나 버스만 타자고 귀찮게 하는지 혼났다고 하시면서 서성거리고 계셨습니다. 버스에 오르니 신이 난 듯 했고 전주까지 1시간 30분 동안 고속도로를 달릴 때 처음에는 신나게 구경을 하는 듯하더니 약 1시간이 지나서부터는 잠이 들어 전주까지 내 무릎에서 자면서 갔었소.
전주에 도착하니 일어나기에 걸리다가 안았다가 어머니가 엎다가 하면서 누나 집까지 걸어갔었소. 한두 번 길을 묻기도 했지만 서점을 하고 있는 누나 집은 쉽게 찾을 수 있더군요. 전주여고 바로 앞에서 조그마하게 ‘일신서적’이란 간판을 걸고 있었고 서점 문을 열자 누나가 입을 떡 벌리고 반가운 웃음으로 따뜻하게 맞아주어서 방에 들어가 잠시 서로의 소식들을 들으며 쉬었소. 마침 도착시간이 점심때라 음식점에서 불러다 준 짬뽕과 자장면으로 점심을 먹었는데 용만이는 자장면을 잘 먹었소. 될 수 있으면 여행 중에 용만이가 과식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조금 먹이고 우리가 가지고 간 귤과 누나 집에 있는 사과를 주었더니 상당히 많이 먹은 듯 했소. 점심을 먹고 나서는 방도 비좁고 답답한데 밖은 따뜻해서 용만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더니 누나가 바로 앞에 있는 학생과학관에 다녀오라고 해서 용만이를 데리고 갔었소. 바로 앞에 과학관이 있어서 가 보았소. 과학관은 입구부터 시설이 아주 잘 되어 있었고 입장료 20원을 내고 들어갔더니 어린학생들이 흥미 있게 과학적인 원리들을 이해할 수 있는 시설들이 많이 되어 있고 실제로 조작해 볼 수 있는 스위치들이 많이 있어서 용만이에게 시범을 하나 보여 주었더니 아주 흥미 있게 거기에 있는 스위치를 모두 눌러보고 다니면서 나오려 하지를 안했소. 아마 50여개쯤 되나 싶었는데 1, 2층을 1시간 이상을 거기서 놀다가 4시가 되기에 가까스로 데리고 나와서 집으로 오는데 전주여고 앞을 지나니 학교 안으로 들어가자고 해서 학교를 한 바퀴 돌고 왔소. 출입구가 있는 곳에서는 자꾸 교실로 들어가려고 해서 못 들어가게 달래느라 혼나기도 했소.
그렇게 오후시간을 보내고 다시 책방에 들려 저녁을 먹고 TV를 보며 예기하다가 9시경 누나 안집에 들어갔습니다. 자형은 광주에 가셨다고 안 계시고 쌍둥이 조카들만 있었는데 성이는 용만이를 본 척도 안하는데 용이는 용만이를 안아보려고 하고 귀엽다는 표정을 하며 데리고 놀아보려고 했소. 그런데 별로 달갑지 않은지 용만이가 따르지를 안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은 상당시간이 흘러야 따르는 것 같았습니다. 9:30분경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이 오지 않아 11시가 넘도록 뒤치다꺼리고 있는데 용만이는 불을 끄자 곧 잠이 들어 다행이었소. 그 사이 자형이 돌아오시고 또 나를 찾는 전화가 온 것도 알았지만 일어나기가 싫어서 그냥 잠든 척 하고 누워 있었습니다. 당신이 전화를 했던 것인데 받지 않아 미안했습니다.
27일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띵하고 무거웠소. 용만이는 자다가 한두 번 낑낑거리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잘 잤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똘랑거려 다행이었습니다. 어머니도 머리가 무겁다고 하셔서 책방에 나와 누나가 박카스를 사다주기에 먹었더니 괜찮았습니다.
10시가 넘어 아침을 먹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아침은 누나가 갈비를 사다가 쪄 주어서 잘 먹었기에 점심은 생략하고, 12:10발 고속버스로 자형의 전송을 받으며 서울로 향했습니다. 버스에 오르니 용만이는 또 신이 난 듯 했으나 얼마 안가 지루한 표정을 하드니 이내 잠이 들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툭 트이고 주변도 구경하면서 갈만 했지만 용만이 눈에는 똑같은 도로에 보인 것은 자동차뿐인 듯했고 앞에 가는 차, 비켜 가는 차들을 보며 뭐라고 종알대드니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고 잠이 들었습니다. 버스 안은 난방시설이 잘 되어 용만이는 땀을 흘리며 잠을 잤습니다. 중간에 휴게소에서 카스테라와 우유를 사주었더니 잘 먹더군요. 어머니가 부라보를 사 달라고 하셔서 사다 드렸더니 용만이도 먹어보라고 주니까 입을 데 보드니 차니까 안 먹는 걸 봤습니다. 가면서 버스 안에 있는 라디오를 통해 서울 날씨가 영하8도로 춥다고 해서 약간 걱정이 되기도 했으나 서울에 내리니 별로 춥지 않은 것 같아 곧 시내버스로 바꾸어 타고 큰누나 집으로 갔습니다. 누나 집에 도착하니 자형은 시골에 가서 안계시고 다른 식구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식구들이 많으니 용만이도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녁식사를 하고 한참 놀다가 낑낑거려 살펴보니 옷에다가 똥을 싸 놓고 있었습니다. 옷을 갈아입히고 나무라지 않고 뒤치다꺼리를 다 해 주고 나니까 다시 용만이는 기분 좋게 놀았습니다. 난희와 장난을 하면서 골리는 소리인지 ‘빼빼’하면서 내 주위를 빙빙 돌며 신나게 웃고 떠드는 것이 귀여워 모두 흐뭇해했습니다. 저녁9:30쯤 되어 할머니 팔을 베고 눕더니 이내 잠이 들었습니다. 누나 집에 도착해서의 인상은 반갑기는 했지만 온 가족이 힘이 없어 보였고 어딘가 맥이 빠진 분위기여서 한구석이 빈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다음 날인 28일에는 오전 10시쯤 일어나 아침을 먹고 12:00경 고모 집에 갔더니 고숙과 은숙이가 반갑게 맞아주었으나 고모는 강릉에 가시고, 은숙이 남편 박서방은 지방에 출장 갔다고 부재중이었습니다. 은숙이 방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여관이라 그런지 들락거리는 여자들이 많아 좀 거북하기도 했소. 여관에 기생하면서 몸을 파는 여자들인 듯한데 표정들은 밝았고 남자들도 거리낌 없이 자기들의 용무를 보며 들락거리는 것이 희한 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애는 은숙이의 간단한 소개로 인사도 하곤 했소.
누나는 가지고 간 뜨개질감으로 앉아서 얘기하면서도 열심히 뜨개질을 하는데 내가 실 값을 내기로 하고 내 쉐타를 절고 있었는데 은숙이가 대화 중 그 사실을 알고 즉석에서 돈 5,000원을 세어서 누나에게 주면서 오빠 옷을 자기가 해 준다는 데에는 고마우면서도 푸짐함에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순 빚으로 여관을 사서 이제 거의 다 빚도 갚았고 100여 만 원 남은 것은 새 발의 피라는 등 활기 있고 즐거운 돈 벌이로 얼마를 떠들다가 나에게도 부업을 가지라는 권유를 수차 하기에 장단을 맞추면서 돈 벌 궁리를 해 보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광주로 전화해서 당신과 간단하면서도 싱거운 대화를 하기도 했지요. 오후 4시경 점심 겸 저녁을 얻어먹고 다시 누나 집에 와서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인 29일 토요일에는 좀 일찍 서둘러서 어머니, 누나, 성모, 용만이와 전방 상률이가 군대생활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서울 마장동에서 철원의 와수리까지 직행버스를 타니 1인당 버스요금이 670원, 약 2시간쯤 지나 와수리에 낮 1시경 도착하여 곧 바로 육단리 상률이 있는 곳에 가는 완행버스를 타니 1시35분경 육단리에 도착했습니다. 상률이 부대에 가서 면회신청을 했더니 교육받으러가서 오후 늦게 부대에 돌아올 거라는 말을 듣고 상률이를 만나려면 당일 서울로 돌아오기 힘든 상황임을 알았습니다. 모두 같이 숙박을 하기에는 여의치 않아 의논 끝에 나 혼자만 남아서 상률이를 만나고 가기로 하고 다른 사람은 모두 서울로 되돌아가기로 한 것입니다. 모처럼 같이 간 발걸음이 허사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우선 점심을 먹고 다방에서 몸을 녹인 후 오후 4시경 나 외의 사람들은 서울로 되돌아가는데 어머니에게 미안했습니다. 용만이 때문에 할 수 없이 어머니도 가시라고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용만이는 몹시 추운날씨인데도 전방에서도 똘랑똘랑 했고 마스크를 씌워 놓았는데도 조금도 불편해 하지 않고 이것저것에 신기해하며 많은 질문들을 던지곤 했습니다.
63년도에 내가 6개월 정도 근무한 적이 있는 지역이기에 나에게는 생소하지 않은 면도 있지만 10여년의 세월이 지났기에 새로움이 많기도 했습니다. 군복을 입고 있을 때는 군부대의 위치라든지 군대에 관한 것이 관심사였기에 지나치는 부대들을 보면서 무슨 부대였든가를 열심히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군복을 입었을 때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든지 학교가 보이면 눈에 띄면서도 전혀 생소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학교가 보이면 바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것 같아 자신의 환경과 위치에 따라 관심사도 다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머니 일행을 배웅하고 다시 다방에 들어가 관심도 없는 TV를 보면서 3시간정도를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 저녁8시10분경 부대에 가 보니 상률이가 교육장에서 마악 돌아와 있었고 9시가 지나서야 비로써 상률이를 만나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여인숙에 들어갔습니다.
여인숙 방은 따뜻했지만 외풍이 좀 있었으나 그런대로 편히 쉴 수가 있었습니다. 상률이가 방만 잡아주고 저는 가서 놀다가 오겠다는 것을 붙잡아 놓고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생활은 아주 건실하게 보였고 군대에도 대학출신들이 많아서 서로의 격려 때문에도 생활이 건실함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지성이 모인 곳에 건전한 사회풍토가 조성되기 마련임을 알았고, R.O.T.C. 제도가 그런 면에서 군에 기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대를 5개월 앞둔 생활이 나름대로 계획도 있는 듯했고 그렇게 실망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에서 만나보기를 잘했고 돌아서는 마음은 가벼웠습니다. 사실 이번 여행의 가장 주된 목적이 바로 상률이를 만나는 것이었고 상률이와의 대화 시도였기에 목적 달성이 되어서 좋았습니다. 군대는 내가 군 생활 할 때와 많이 다르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상률이를 만나기 위해 부대 앞에 있는 헌병초소에서 잠시 난로롤 쬐며 기다리고 있는데 인근 주민 3명이 술에 취해가지고 초소에 와서 땡깡을 놓아도 헌병들이 억압적으로 하지 않고 좋게 달래어 보내는 것을 보며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헌병장교로 군대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이 예사가 아니기도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늦으막이 일어나서 아침 겸 점심을 상률이와 1000원짜리 고기찌게로 시켜 먹고 와수리까지 함께 나와 1시간 정도 같이 있다가 상률이의 배웅을 받으며 버스에 올랐습니다.
상률이와의 대화에서 전방지역의 민간인들이 전쟁이 일어나도 후퇴하지 않겠다는 등의 얘기를 들었고,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산다는 것, 군대에서 군인이 민간인들과의 접촉을 가급적 막는다는 것, 민간인들에 대한 경계가 어렵다는 이야기들을 듣기도 했습니다.
돌아 올 때는 갈 때와 다른 길로 와 보았습니다. 내가 근무했던 곳을 많이 지나오는 버스를 탓더니 도로가 아직 비포장도로 옛 모습 그대로였고 지역들도 별 변화가 없는 곳이 많았습니다. 신수리의 헌병중대, 이동, 일동, 맹장수술을 받았던 3야전병원 등을 지나왔소. 일동에 양지다방도 그대로 있었소. 양지다방은 6개월 정도 나의 근무지와 같았고 그 곳에서 많은 군대 친구들과 어울렸고 은숙이와 박서방이 결합된 곳도 일동에 있을 때였지요. 한번 내려서 옛 하숙집도 들려보고 다방에도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버스 안에서 그냥 바라만 보고 왔습니다. 퇴계원에 오면 서울시내버스가 있을 줄 알고 왔는데 퇴계원에 내려 보니 버스는 없고 바람이 몹시 부는 차가운 날씨여서 곧 다음에 온 시외버스를 타고 청량리까지 왔습니다. 청량리에서 처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까지 왔습니다. 처음 타본 지하철은 깨끗하고 빨랐으며 이곳저곳에 안내도 잘 되어 있어서 조금도 어려움 없이 이용할 수가 있었습니다. 서울역에서 기차시간을 확인하고 시내버스로 삼양동 누나 집에 들어가니 오후 5시 경이였습니다. 용만이는 할머니와 상도동 외가에 가고 없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는 다시 은숙이 집에 놀러갔습니다. 전번에 갔을 때 안계시던 고모와 박서방이 있어서 함께 밤 2시까지 이야기하면서 놀다가 여관 빈방에서 자고 왔습니다. 우리 집의 여러 가지 심란한 이야기, 누나의 빚더미, 은숙이의 돈벌이 등이 화제 거리였습니다. 강릉의 은자 이야기도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가 누나에게 빚을 얻어 준 것이 두통거리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것들을 거기에서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80만원 얻어 준 것이 120만원으로 늘어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집이라도 팔아서 빨리 해결해 주어야 하지 않을 가하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커피를 타주고, 꿀물도 해주고, 맥주도 사다주고, 과일도, 오징어도, 주는 대로 많이 먹었습니다. 돈 버는 방법도 희한한 것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여관이 어떤 곳인가 새삼 새롭게 인식하게도 했습니다. 여관=인육시장이더군요. 주택가에 여관이 무슨 필요가 있을 가했는데 바로 오입장소라는 것이었습니다. 새파란 젊은이로부터 70노인까지 오입하러 찾아오는 곳이 여관이고, 20전후의 아가씨들 10여명이 몸둥이만 가지고 도사리고 앉아 있다가 몸으로 돈을 벌고, 여관 주인은 그러한 여자들을 매개로 해서 숙식비, 밥값, 심부름값 등으로 돈을 버는 곳이었습니다. 16개의 방을 가지고 10여명의 여자들을 부리면서 1년에 천여 만 원의 돈을 벌었다는 자랑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사촌형제의 돈벌이 방법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염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속이고, 장모가 사위를 속이면서도 즐거움이 있더군요. 속여 사는 사위는 그런대로 기분이 좋아 헤헤하고 모두들 자기가 주도권을 가진 양했으며 가족들이 각자 의견과 잘남이 있어가지고 내게 말하는 것들이 참 가관이었습니다. 서로 잘났고, 서로 속이고 있고, 모두가 자신이 제일이라는 식으로 구성된 분위기가 그런대로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외인은 하나도 없고 가족끼리 조바, 식모, 심부름꾼의 역할을 다 맡아서 하기 때문에 오붓한 돈벌이 이기는 했습니다. 풍성하게 돈을 쓰면서 사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런 생활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물론 나름대로 충고도 잊지 않았습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거기에 있는 여자들과도 대화를 해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는 없었습니다. 들은 바로는 20여 만 원씩 수입을 올려 가족을 돕고 저축을 하는 사람도 있고 속이 없어 버는 대로 탕진하는 여자도 있다고 했습니다.
다음날, 그러니까 31일 아침까지 얻어먹고 누나 집에 와서 짐을 챙겨 상도동을 거쳐 광주에 오려고 하는데 누나의 만류로 짐은 놔두고 하룻밤 더 자기로 하고 상도동 외가에 갔습니다.
시내버스로 1시간 이상 걸리는 먼 거리였습니다. 상도동에 들리니 외할머니와 외숙모가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용만이는 밤사이 기침을 좀 했다고 하는데 내가 갔을 때는 장난감을 가지고 잘 놀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니 큰삼촌과 숙모가 오셨습니다. 숙모는 삼촌과 재혼 후 처음 뵙는 분이었습니다. 첫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점심을 얻어먹고 잠시 쉬었다가 용만이 장난감 몇 개 얻어가지고 나와서 약수동 이모 집에 갔습니다. 삼촌 집에서 나올 때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용돈 좀 드리라고 하는데 부잣집 아들에게 계시니 안 드려도 된다고 하고 나왔는데 마음이 개운치를 안했습니다. 밖에 날씨가 차가웠으나 버스를 타려고 했더니 어머니가 자꾸 택시를 타자고 해서 택시를 탔습니다. 770원의 택시비가 아까웠습니다. 택시만 타자고 한 어머니의 심사가 정상이 아니라는 짐작도 되었습니다. 할머니에게 용돈을 드리라고 한 것을 내가 거절한 것이 미웠든 것 같았습니다.
약수동의 이모 집은 산위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당신도 아버지와 함께 들린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마중 나온 이모와 함께 들어가니 이숙은 집에 계셨습니다. 이모 이숙과 시작된 이야기는 잠간 들려보겠다는 것으로는 안 되었고 신웅이 결혼얘기부터 옛 이야기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오랜만의 대화는 결국 저녁까지 얻어먹고 와야 했습니다. 내가 잊지 않은 것은 한국신학대학에 다닐 때 학용품과 용돈을 얻어 쓴 것이 항상 고마웠고 어려운 중에서 주었던 도움이었기에 생각 날 때 마다 감사한 마음입니다. 어두워져서 이모 집을 나와 시내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왠 처녀가 내 옆에 와서 택시를 잡아 달라고 하기에 마침 용만이 손을 잡고 있어서 거절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 옆에 왠 남자가 서서 여자에게 치근 데는 것 같았고, 그 남자가 무섭다고 얘기를 하다가 피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자가 가는 곳을 보니 옆 상점으로 피해 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뒤가 게름 직했습니다.
2월 1일 아침에 일어나 11:10 출발 열차로 내려올려다가 아침에 춥고 일찍 서두르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다음열차인 12:10 출발 열차를 이용하기로 하고 누나 집을 나섰습니다. 시내버스로 오다가 동대문에서 내려 지하철을 이요해서 서울역까지 왔습니다. 어머니가 지하철을 안 타 보셨기에 바꾸어 탄 것입니다. 열차에 올라 1시간 정도는 용만이가 구경하면서 잘 오더니 이내 잠이 들더군요. 1시간 반쯤 자게 두었다가 깨웠습니다. 어머니가 그냥 자게 두라고 하셨지만 자는 것 보다는 구경시키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깨웠더니 송정리에 도착할 때까지 잘 놀았습니다. 곤히 자는 것을 깨웠지만 울지도 않고 곧 명랑해지는 용만이의 성격이 참 좋았습니다. 송정리에서 내려 정량이 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가난한 티가 흐르는 정량이 집은 제수의 복장에서부터 역역했으나 방안에 들어가서는 백수 우리 집보다 살림이 더 좋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녁식사는 쇠고기를 사다가 찌게를 해 주었는데 어머니와 나 그리고 은희 세 사람에게만 주었습니다. 정량이가 자기도 달라고 하니까 아무 말이 없었고 나중에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참 했습니다 정량이가 물을 더 부어서라도 전부 먹게 하지 그랬다고 짜증을 부리기도 하는데 재치 없는 제수가 약간 얄밉기도 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곧 나와서 시내버스를 탓습니다. 가까운데서 버스를 탈 수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이렇게 6박 7일의 여행을 마쳤습니다. 추운 겨울인데도 무사히 여행을 마친 것을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린애까지 데리고 추운 겨울에 다니는 것이 심란했을지 모르나 나는 용만이의 모습이 대견스럽기만 했고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대로 찾아간 집마다 환영도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3만원의 예산이 약간 초과되었지만(3315원 초과) 대체로 충분한 여행이었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당신도 함께 하도록 합시다.
여행은 즐거운 것, 역시 배울 것이 많지요. 이번 여행에서 돈의 가치라든가, 돈 버는 방법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 셈이고, 군대사회의 변모, 형제들의 생활형편, 추위가 두렵지 않은 것, 그리고 우리 용만이의 대견스런 모습들은 아마 좋은 추억들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같이 가지 못한 당신이 인내로 기다려 주었고 기도로 염려해 준 것이 이번 여행을 무사하게 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느낌이 많았기에 빠진 것도 많은 듯합니다. 빠진 것은 또 얘기로 하기로 합시다. 그만 쓸게요. 수고 많이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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