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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적성리(동로) 전투
- 6.25, 54주년 특집 -
1951년 1월 동로 적성리 전투에서의 승전을 기념하고, 조국을 지키다가 산화하신 영령들의 명복을 빌고, 그 숭고한 애국 정신을 받들고 기리기 위하여 적성리에 전승비 및 순국 위령비가 건립되어 있다.
- 전승비 및 순국 위령비 건립 연혁 -
-제1차 일시:
장소: 문경군 동로면 노은리 156-3
면적: 398평
예산: 60만원(군비 및 주민 성금)
-제2차 일시:
장소: 문경군 동로면 적성리 산2-1, 462. 463
면적: 642평
예산: 100만원(군비)
-제3차 일시:
장소:문경시 동로면 적성리 산2-1, 462, 463
면적: 642평
예산:5,000만원(시비)
- 조형물 설명 ?
★비의 전체 높이 : 570cm
★상단 부분의 두 손이 갈라지는 모양은 받드는 두 손을 상징한다.
★중상단 부분의 검은 테두리는 순국하신 영령들의 이미지를 상징한다.
1. 전투 개요
일시:
장소: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
아군: 미 제10군단 예하 한국군 특수임무대대 병력 300여명(대대장 소령
경찰관 : 16명,
민간인(동로인):대한청년단특공대장 임환기외 41명
적군: 북괴군제10사단 예하 1개연대 병력 3,000명
전과: 적사살1,247명, 포로:군관7명, 사병72명,
소총370정, 박격포(82mm)2문
손실: 전사9명, 부상2명, 미군 부상2명,
민간인부상4명, 경찰부상2명,
특공대원 전사 7명
2. 전투 전의 개황
중공군이
이와 같은 전선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3. 전투 경과
적은 1월 13일
이 전투는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적 제10사단을 상대로 현지 사정에 밝은 대한청년단원과 경찰관 등 민.관.군이 혼연 일체가 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적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섬멸시킨 전사(戰史)에 길이 빛나는 대승리로 기록되고 있다.
적성리(동로) 전투
하정학 사진
1. 일시, 장소 및 참가 부대
가. 일시 :
나. 장소 : 문경시 동로면 동로분지(적성리, 노은리)
다. 참가 부대 및 병력
* 아군 : 미 제10군단 특별공격대대
대대장 : 소령
1중대장 : 대위
2중대장 : 중위
3중대장 : 소위
병력: 300명
* 적군 : 북공(北共) 제10사단 예하 1개 연대
병력 : 3,000명
2. 6.25 발발 시부터 적성리 전투에 이르기까지의 개황
그 후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다가 드디어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황이 반전되어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10월 1일에는 38선을 돌파하여 10월 26일 국군과 UN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당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12월 14일 흥남에서 철수하였고,
이 때 중부 전선의 국군 제3군단과 미 제10군단 사이에 구멍이 생기게 되어 이곳으로 약 2개 사단으로 추산되는 중공군과 북공군이 침투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아군은 원주(1월 8일)를 거쳐 그 일부 병력은 경북 안동까지 남하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위기를 타개하고자 미 제10군단장 아놀드(Anold) 소장은 그 당시 마산 지역에 있던 미 제1해병 사단을 안동으로 전진시켜 적의 계속적인 남하 기도를 그 선에서 저지하고 아군의 보급로(함창, 안동, 영덕)를 지키게 하였다. 또, 그는 한국군 특별공격부대로 하여금 충북 단양 쪽에서 산악지대 접근로를 이용하여 침투하는 적을 탐색, 격멸시키기 위하여 1월 11일에 탐색 명령을 발동하였다.
이리하여
3. 전투의 경과 개요
아군의 병력(300명)은 적군(3,000명)의 10분의 1에 불과하였지만 화력과 장비는 우세하였다. 한편 당시 동로 현지에는 섭씨 영하 15도를 밑도는 강추위에 약 15cm의 눈이 쌓여 있었다. 한편 지리적으로 ‘적성리’는 단양, 영주, 문경, 점촌, 예천 등을 연결하는 원주상(圓周上)의 구심점(求心點)에 위치하고 있어 특히 점촌, 안동 방면으로 진출하는 산간 기지가 된다.
가. 1월 12일 : 정보 탐색과 전투 준비
(1) 선발대 도착과 적정 탐지
전날 안동에서 차량으로 점촌에 이동한 특별공격대대는 이날 날이 밝기 전 점촌을 출발하여 목표를 적성리에 두고 행군을 시작하였다. 2중대가 첨병(尖兵) 중대로 앞장서고 1중대, 3중대 순으로 전진하였다. 이렇다 할 적정(敵情)이 없는 가운데 작전 장교를 겸한
적성리에 아군이 도착하자 청년방위대원 3명(
(2) 방어 진지 구축과 적의 접근로 수색 탐문
12일
진지 구축은 34명의
요소요소마다 콘크리트 도치카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진지는 동로분지의 낮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서 만일 적이 서북의 높은 지점에서 공격을 감행할 경우 지극히 불리한 지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지서요원 16명과 청년방위대원 42명이 분부의 방어 정면을 담당하였는데 청년방위대원들의 장비는 미미하게도 99식 소총에다 정당 실탄 5발 미만을 휴대하고 있었다
(3) 12일 밤, 적군에 포위된 아군 진지
한편 북공(北共) 제10사단 예하의 연대 규모 병력은 벌재에서 아군의 전방 경계 부대와 만나게 되자 장터 일대에 병력이 집결되어 있음을 탐지하고 병력을 동서남북으로 기동시켜 동로분지 사방의 요부 능선을 점령하였다. 이곳에는 지난해 그들이 침공하였을 때 내무서가 동로면에 위치하면서 자체 경비를 하기 위하여 능선 주위에 구축해 두었던 교통호(交通壕)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를 이용한 적군은 쉽사리 양호한 진지를 획득하여 아군 진지를 사방에서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군 진영에서는 적의 이러한 기도를 전혀 누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 1월 13일 : 3차에 걸친 적군의 침공
(1)
섭씨 영하 18도의 혹한 속에서 거의 뜬눈으로 새우고 난 13일
아직 어둠이 깔려 있는 새벽인지라 아군은 쌓인 눈빛으로 식별할 수 있는 약 50m 근거리까지 적군을 유인하여 M1 소총과 M2 칼빈 소총으로 요격하였다. 적군은 다발총으로 요란스럽게 공격하여 왔지만 아군의 월등한 화력 앞에는 무력하였다. 결국 적의 1차 침공은
(2) 적전 긴급 작전 회의
대대장 이하 전장병은 적의 1차 침공이 끝난 후 긴급 작전회의를 하였다. 아군은 후속 지원 부대가 없는 적정 탐색 임무를 띤 부대의 성격상 많은 희생을 하면서 수적으로 우세한 적과 대치할 필요가 없으니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대대장이나 미 고문관들도 위기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대장 생각에는 탈출을 시도했다 할지라도 적군에 포위되어 있는 이상 많은 희생을 각오해야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대장은 후퇴하다가 죽을 바에야 죽던 살던 현 진지에서 지탱해 보기로 결심하고 독단적으로 진지 사수를 명령하였다.
그리고 대대장은 “날이 밝으면 증원 부대가 올 것이다”라는 말로 부하들을 격려하였다.
(3) 적군의 2차 침공과 육박전
적의 2차 공격도 역시 북방의 2중대 정면인 쇳골(적성3리) 쪽에서 시작되었다. 이미 날이 밝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아군은 조준 사격으로 적을 공격하였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적은 상당한 희생을 각오하고 파상적으로 육박하여 왔다. 결국
그러나 대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진지내에서 대금으로 육박전을 전개하였고, 방어선을 돌파한 적병들에게는 3중대 일부 병력과 인접 좌우 소대들이 M2 소총으로 집중 사격을 가함으로써 적의 돌파구를 봉쇄하고 진지를 회복하였는데 그 때 진지에 접근하였던 적병들은 모조리 격멸되었다. 이 육박 전투에서 아군의 피해는 극히 경미하였을 뿐 전 대대는 건재하였다.
(4) 적군의 3차 침공과 연패
적군은 두 번째 시도한 파상 공격이 막대한 희생자만 내고 실패하자 이번에는 3중대 정면인 서쪽과 남쪽에서 공격을 가해 왔다. 이곳은 장자동(壯者洞)에서 평지 방면을 말한다. 이 때 이미 적군은 노래이 뒤에서 무라이로 가는 바우재까지 완전 장악하여 아군의 퇴로도 차단할 계획으로 있었으며, 멀리는 현 솔받모래이 허공다리 천주동 뒤 우두고개(牛頭峙)까지 완전 포위망 안에 넣고 있었던 것이 뒤에 알려진 전황이었다.
그러나 그 정면은 적이 공격하기에는 매우 불리한 조건의 지형이었다. 왜냐하면 서남쪽에서 접근 하려면 적군은 완전 노출된 밭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었던 바 대대의 고정된 화력을 차폐(遮蔽; 가려 막고 덮음)할 엄폐물(掩蔽物)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군은 1,2차 공격에서 실패한 것을 만회라도 해보려는 듯이 일격에 눈앞에 있는 아군을 전멸시키려고 무리하게 다발총을 휘두르며 공격하여 왔다. 그러나 아군 진지 전방 50m를 넘지 못하고 많은 전사자만 남긴 채 퇴각하고 말았다.
(5) 첫날(13일) 세 차례 침공 이후의 상황
1월 13일 하루 동안 3차에 걸쳐 시도된 공세에 실패한 적은 주간에는 더 이상 공격전을 단념하고 간헐적인 사격과 10여 발의 박격포 사격을 하였으나 불발탄이 많아 큰 피해는 없었다. 적군의 화력이 부실하고 취약했던 것은 아군으로서는 하늘이 도운 것이었다. 한편 대대에 파견된 미 고문관들의 본대와의 연락은 오후가 되어서야 교신이 이루어져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다. 1월 14일 : 전폭기 지원 및 공수 보급 지원
(1)
13일 밤이 되자 꽹과리와 북을 치면서 부분적인 공격으로 아군을 괴롭히던 적은 14일
공격을 계속하였다. 교전은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아군은 시종 침착하게 진지를 굳게 지킴으로써 적은 아군 진지 앞에 많은 시체를 남겼을 뿐 그들의 기도는 완전 좌절되었다.
(2) 전폭기의 지원 폭격과 탄약과 양식의 공수 보급
전폭기들이 돌아간 후 헬리콥터가 날아와서 탄약과 야전식량을 동로초등학교 교정에 내려 주었다. 적은 보급품이 쌓여 있는 학교를 목표로 박격포를 쏘았고 그 중 1발이 교사에 적중하여 교실 한 칸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아군과 청년방위대원들은 적의 집중 사격을 받으면서도 희생을 무릅쓰고 결사적으로 이 보급품을 대대본부인 지서로 옮기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제2차로 F-5 전폭기 4대가 지원차 적진을 강타함으로써 적세를 침묵시켰다. 한편 아군들은 식량과 탄약을 보급받고 사기가 올라가 전의가 더욱 굳어졌다.
(3) 장갑기동부대의 피격
한편 미 제10군단 본부에서는 특별공격대대가 적에게 전면 포위된 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포위망을 뚫기 위해 장갑기동부대를 급파하였다. 장갑부대가 적성리를 향하여 전진 도중 간송2리 송평리(솝들)를 지나 허공다리의 좁은 길목(왼쪽은 절벽, 오른쪽은 냇물)에 이르렀을 때 적이 이미 예상하고 매설해 놓은 대전차 지뢰에 의하여 선도차가 전복 파괴되어 길을 가로막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장갑차 및 보급 차량 등 70여 대가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였다.
이들 증원 및 보급 차량들이 허공다리에서 이와 같은 사고가 있었다는 것을 한국군 특별공격대대에서는 다음 날 전투가 끝나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밤이 되면서 적은 역시 전일의 공격 방법대로 공격해 왔다. 아군은 적의 공격 방법과 전술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10여m 앞까지 유인하여 적정 거리가 되면 수류탄으로 결판을 내고, 잔적은 칼빈 M2로 처리하여 수많은 적을 사살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철통 같은 전면 방어 형태의 전술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라. 1월 15일 : 최후의 승리와 전과
날이 밝으면서 적의 공격은 중지되었다. 적으로서는 그간 막대한 손실로 인하여 더 이상 공격을 지속할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적은 극히 소수 병력의 엄호 부대를 남겨 둔 채 단양 방면으로 퇴각하고,
적병들이 사방의 능선을 타고 북방으로 퇴각하는 것을 목격한 아군 장병들은 3일만에 호 밖으로 나와 각 중대 정면에 대하여 탐색 활동을 전개하였던 바 아군이 거둔 총 전과는 다음과 같다.
? 전 과
* 적 사살 : 1,247명
* 포로 : 군관 7명, 사병 72명
* 각종 소총 : 370정
* 박격포 : 82mm 2문
? 손 실
* 전사 : 국군 9명, 청년방위대원 7명(
* 부상 : 국군 2명, 미군 2명, 경찰 2명, 민간인 4명
4. 대승 후의 개황
전투가 끝나고 전과(戰果)가 거의 확인되었을 때 증원 부대가 도착하였다. 특별공격대대의 단장인 하이네스(Haynes) 중령은 우선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전과 앞에 경탄을 하였고, 그의 참모들도 자신들의 전과를 직접 확인하고서도 믿으려 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와 같은 대승리의 보고에 접한 미 제10군단장 알몬드(Almond) 소장은 헬리콥터 편으로 참모들을 대동하고 현지에 도착하여 대대장
1월 16일 특별공격대대는 적 제10사단의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완전 섬멸시키고, 이날 미 제10군단의 명에 의하여 충북의 충주 방면으로 진격해 갔다.
★ 상 훈 ★
다음은 적성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특별공격대대에 보낸 미 제10군단장의 표창 내용이다.
미 제10군단사령부
특별공격대대장 귀하
① 미 제10군단에 의한 북공군 제2군단 격멸에 있어서 특별공격부대가 성공적인 역할을 하였으므로 자에 그 공적을 찬양하는 바입니다.
② 특별공격부대는 그보다 수배나 되는 큰 부대가 담당하여야 할 지역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기동성과 탁월한 지휘 정신으로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 번 수적으로 2∼3배나 되는 적을 타격하였으며, 비교적 적은 손해로 적의 대다수를 격멸하였습니다. 또한 작전 지역은 험한 산악지대로서 동기 혹한기였으며 장병들에게 극심한 곤란을 주었던 것입니다.
③ 본관은 특별공격부대가 맡은 바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성공적이었음을 치하하는 바입니다.
미 제10군단장 육군 소장 Edward M. Almond
◈ 참고 자료 : 국방부 저사감실 자료 ‘적성리 전투’
첫댓글 어려서 듯기는 했다 전쟁이 있어다고 시체가 여기저기 많았다고 ㅡ이글을읽고 이런 소설같은일이 있었는지는 몰랏다 옛날 우리집 문턱에도 시체가 늘려있어다고 어머니께서 말씀 하셨다 나는동네터 새마라는곳에서 자랏다 이글을 읽고나니 치열해던 그때가 숨이 막혀오네요 오늘은 정말 공부 많이하고갑니다 이글을 쓰신 분께 감사드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