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당포
통영의 정신적 지주는 이순신 장군이다. 장군의 정신은 통영에서는 절대적이다. 통영에는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여러곳에 있다. 한산대첩과 당포해전이 있으며 이후 한산도에 제승당을 세우고 4여년을 남해안 해상방위를 했다. 이순신 사후 착량묘와 충렬사를 세워 공의 위훈을 기리고 있으며 나라가 어려울 때(1952)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남망산 공원에이순신 동상을 세우고 한산대첩 기념재전을 올해는 53회째 실시하고 있다. 또한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이배사)이란 모임을 만들어 국내 이순신 장군의 대가들이 활발히 활동하는 on, off line공간을 만들었으며 열심히 선양작업을 하고있다. 한산 해전 현장이 훤히 내려 보이는 망일봉 언덕에 이순신 공원을 조성하여 시민들의 휴식처를 제공한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물밀듯이 부산앞바다에 들어와 임진왜란이 시작 되었다. 육군의 방어 실패로 파죽지세이던 일본군은 5월 3일 선조가 도망간 한성을 점령한다. 하지만 해전에서는 다른 양상이 벌어진다. 5월 5일 전라좌수영을 출발한 이순신 함대는 5월 7일 옥포해전을 필두로 합포와 적진포에서 승리를 거두고 본진으로 귀대한다. 5월 29일 2차 출정을 떠난 함대는사천해전에서 어깨에 탄환을 맞는 부상을 당하고 연이어 당포,당항포, 율포에서도 승리를 한다. 7월 4일 3차 출정을 한 함대는 7월 8일 견내량의 적을 유인하여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을 펼쳐 수장 시킨다. 이 해전으로 도요토미는 조선 수군과의 해전을 하지 말도록 명령을 내린다. 8월 24일 4차로 출진한 이순신 함대는 29일 부산 장림포를 비롯하여 9월 1일 부산포를 공격하여 적선 135여척을 분멸 시켰다.
올해도 어김없이 통영한산대첩축제가 8월 13일 부터 17일까지 53번째 열린다. 몇해전부터 한산대첩을 재연하고 있어 이순신 공원에서 당시의 학인진을 감상하는 재미는 축제의 백미다. 망일봉 이순신 공원에 세운 이순신 동상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건립추진위원회가 하원대(한송재단 이사장)의 기부로 정욱장(울산대 미대교수) 작가가 2005.8.14 이순신 장군 탄신 460주년을 기념하여 이곳에 세웠다. 이순신 동상 중에는 가장 웅대하고 클 것이다. 남망산 공원에 있던 승전무와 통영오광대, 남해안 별신굿 통영예능전수관이 이곳으로 옮겨와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정기 공연을 하고 있다. 통영은 중요무형문화제가 많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통영오광대와 남해안 별신굿, 승전무가 있으며 이는 통제영 시절 있었던 신청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가장 통영스런운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 한다. 그 어디에도 없는 통영만의 정체성이다.
전망대에서 보는 앞바다는 거제와 통영반도를 지나는 수로이다. 이곳을 통해야 전라도로 갈 수 있는 항로이다. 과거 수많은 배들이 이곳을 통과했다. 한산도 앞바다에는 조선의 수군과 일본 수군의 영혼이 떠도는 곳이다. 422년전 견내량에서 적을 유인하여 한산 앞바다에서 학익진으로 일본 정예수군을 물리친 역사의 현장이다. 두 나라 수군과 조선 백성들의 영혼이 떠도는 이곳에 미륵도의 수륙터에서 수륙대재를 했다고 한다. 이곳은 풍수지리상 좌청룡에 해당하는 지맥으로 좌청룡의 꼬리가 바다로 뻣어있는 형국이라 한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고 그냥 보는것보다 훨씬 재미가 있다.
순직해군위령탑이 이곳에 있다. 1974년 2월 22일 해군 159기와 해경 11기 훈련병들은 충렬사에서 이충무공을 참배하고 예인선(해군 YTL 수송선)을 타고 모함으로 돌아가다가 동호동 장좌섬 앞바다에서 돌풍을 만나 전복 해군 109명과 해경 50명등 159명이 순직한 사고였다. 당시의 날짜를 음력으로 환산하면 이월 초하룻날이다(1974년 2월 22일) 음력 이월 초하룻날은 바람신인 영등 할미가 내려오는 날이다. 그날 영등 할미가 바람을 몰고오면 딸을 데리고 오는날이며(남색 치마가 하늘하늘 예쁘게 날린다) 비를 같이 몰고오면 며느리를 데리고 오는날이라 했다.(비에 젖은 남색치마가 보기 흉하다) 영등바람은 꽃샘 추위를 몰고오는 바람이다. 자연을 잘 알고있는 어부들은 2월 영등시 영등 할미가 올라갈 때(보름날)까지 조업을 멈추고 어구를 준비했다. 제주와 통영 거제에 있는 할만네의 전통은 무시할게 아니라 옛 선조들의 지혜이다. 이를 무시한 행위는 영등 할미의 노여움으로 큰 재해를 입었다. (2009년 3월 21일(음 2월 25일) 삼성조선 크레인 붕괴사고)
망일봉 정상은 6.25 사변시 통영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했을 때 김성은 장군이 이끄는 한국 해병대의 단독 상륙작전시 시내를 조망 할 수 있는 유일한 고지로써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1950년 8월 17일 용남면 장평리에 상륙한 한국 해병 2중대는 원문으로 진출하여 원문을 점령했으며 3중대는 여황산을 점령하고자 했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다. 한편 7중대는 통영 시내를 감제할 수 있는 망일봉 점령이 이번 작전의 승패를 좌우함으로 사력을 다한 끝에 적보다 5분 먼저 망일봉을 점령을 하여 통영탈환의 기초가 되었다. 망일봉은 예나 지금이나 전략상 중요한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 이순신 공원을 세웠는지도 모른다.
공원을 지나면 산길이 있다. 좁은 자연적인 산길 일때는 예쁜 길 이었는데 2012년 RCE(지속가능발전교육도시)세계대회를 개최 하면서 손님들을 이곳으로 모신다는 핑계로 포크레인으로 길을 넓혀 놓았다. 해안가 위쪽으로 난 길은 자연 생태가 살아있는 길이다. 나무와 풀만 약간 정리하면 길이 되는데... 아쉬운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정량동과 화삼리의 경계지역 바다 가운데 있는 여가 지네여(지는여.군함바우)라 칭한다. 이는 통제영 군점 수조에 참여한 진해현 소속의 군함이 좌초 되고부터 진해여라 칭했다. 산길을 넘으면 유자밭이 나온다. 유자는 한때 대학나무로 통할 만큼 고소득을 올려 주었다. 과잉생산으로 가격이 폭락하여 나무를 베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자청이 유일한 소비 방법 이었는데 다른 식품으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해안가 골짜기에 RCE 생태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RCE 자연생태공원 및 생태관은 아시아 태평양 EDS거점 교육센타로 지역과 지구를 지키는 시민들의 공간이다.2005년 10월에 통영시가 유엔대학에서 인정한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지역전문센타(RCE)로 지정된 이후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이 RCE자연생태공원도 그 사업의 일환이다. RCE의 아시아의 거점도시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해안선을 따라 걷는 길은 한산대첩의 현장을 생각하며 걸을 수 있는 좋은 길이다.
선촌마을은 용남면 화삼리의 자연마을로 조선후기 '아랫미늘', '웃미늘', 꽃개(花浦)' 등 3개의 자연마을을 합하여 삼법동이라 했다가 1914년 행장구획 및 지명 개편때 화포의 지명을 따서 화삼리花三里라 했다. 선촌은 아래미늘로 미늘이라는 지명은 여러 설이 있다. 옛날 선비들이 해변에 모여 달맞이 놀이를 할때 눈썹처럼 생긴 초승달을 보고 미월眉月이라 했거나 통제사가 달뜨는 풍경을 보고 미월美月이라 했다는 속설이 있다. 미늘은 달뜨는 아름다운 풍경을 뜻하는 이름이다. 미늘 고개에는 옻칠 미술관이 있다. 2006년 김성수 관장이 사재를 털어 만든 옻칠 미술관은 옻칠 회화란 독특한 분야를 개척하여 전수를 하고 있다. 옻칠은 수 천 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어도 변하지 않는 반영구적으며 자개, 금, 은 등을 재료를 사용하여 독특환 회화를 표현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하정선 작가의 통영 야상곡이다. 이 작품믄 통영의 야경을 옻칠과 자개를 사용하여 결합한 우수한 회회이다. 김성수 관장은 "각종 기물위에 자개와 옻칠이 결합해 만들어지는 나전칠기의 발원지가 우리나리이고 특히 지역적으로 출발지가 선사시대인 기원전 3세기경 경상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통영은 1593년 충무공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해 12공방을 설치하여 나전칠기 공예의 본고장으로 자리 잡았어요. 옻칠 고예는 독특한 우리만의 미를 갖고 있지요. 특히 살균 효과가 있으면서 인체에는 해가 없어 식기나 찻잔등 생활 공예품으로 상품화할 경우 무한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라고 했다. 미술관이 있는 마을은 웃미늘인 상삼마을이다.
선촌 마을을 지나면 옛 소형 조선소 자리가 있다. 이곳에서 목선을 건조 했는데 지금은 작업용 뗏목을 제작하고 있다. 독특한 것은 부력용 부이를 묶는 끈이 자동차 안전밸트용 끈이다. 폐차장에서 구해서 부이를 뎃목에 묶는데 아마 튼튼함 때문에 사용할 것이다. 해마다 바닷가에는 펜션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다. 선촌 앞바다에는 뱀섬이 있다. 일명 사도蛇島라 하는데 풍수지리상 통영을 지키는 사신사四神砂 가운데 동쪽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섬이라 한다. 통영의 사신사인 북현무는 광도면 주림리의 구도(龜島,죽도)이고 남주작은 산양면 저림리의 학림도, 동 좌청룡은 용남면 화삼리의 사도(뱁섬), 서 우백호는 인평동 국치의 호도(하항도)이다. 왜가리 번식지가 있다. 일명 학섬이라 하는데 왜가리의 집단 번식지에는 산성의 배설물로 인하여 소나무가 죽는다. 해안선을 따라 가면 간척지가 나온다. 예전 소금을 굽던 염전이 있던 곳인데 이곳에 새우양식을 하여 생 새우구이를 하여 통영 거제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다. 화삼리는 갯벌아 살아있는 곳이 있다. 물이 빠지면 각종 갯벌 생물이 다양하게 번식을 하고있어 새의 먹이가 됨으로 왜가리의 번식 적지로 꼽힌다.
구치소를 지나면 법원, 검찰청이 나온다. 법원앞 공동묘지에는 통영 삼일 독립운동 3열사중 한명인 허장완 열사가 묻혀있다. 허장완열사는 3월 9일과 12일 진평헌, 김형기, 양재원, 배익조, 모치전, 강세제, 이학이, 권남선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전개 하기로 했다. 3월 13일 오후 8시경 통영면 등사판을 가지고 산양면 사무소에 가서 그곳의 등사판과 함께 1천 2백매의 격문을 인쇄 하였다. 등사에 필요한 미농지를 일본 상인 중촌 상점에서 구입 했는데 밀고로 인하여 등사판을 갖다두러 갔다가 체포되었다.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부산 교도소에서 복역중 마산교도소로 이감되어 복역중 고문의 휴유증으로 옥사했다. 허장완 열사의 시신이 객선에 실려 통영항으로 들어 오던날 너도나도 뛰쳐나와 인산인해를 이루고 눈물로 맞아 들였다. 배가 부두에 채 닿기도 전에 전마선을 타고간 청년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온 강구안에서 만세소리가 진동하여 일본 경찰들이 해산 시킬려고 소방호스까지 드리대었으나 시장 상인들과 합세하여 만세소리가 해일을 일었다. 경찰서 유치장에는 만세꾼들로 넘쳐 났으며 이런 곡절을 겪은 열사는 8일장으로 엄수 되고 용남면에 안장 되었다.이를 계기 통영청년단이 탄생했다. 이학이, 고채주 열사는 국립묘지로 이장 했는데 허장완 열사만 고향에 있다. 삼일 동지회 허만기 회장은 "할아버지가 국립묘지에 가면 국가에서 관리를 잘 해주는데 아무도 찾지않고 잊혀질것이다. 오히려 고향인 이곳에 있으면서 후학들에게 독립운동을 고취 시키고 나라의 중요성을 몸소 알려 주는것이 훨씬 이로울것이다." 라고 이야기 한다. 묘비에는 조선 허장완묘라 세겨져 있고 뒷면은 정으로 쪼아 글자를 지웠다. 이 비석은 대구 YMCA에서 만들어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동달리는 동암동의 동자와 달포동의 달자를 조합하여 동달리라 했다. 동암 습지는 고속도로의 종점이다. 고속도로는 인간의 편리에 의하여 낸 인위적인 도로인데 습지에는 청둥오리와 각종 새들이 자유롭게 먹이활동을 하는 곳으로 묘한 조화를 이룬다. 해안도로는 잘 정비되어 산책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커브를 돌아가면 모노퍼트라는 펜션이 있는데 노출 시멘트로 지어진 우수주택으로 선정된 멋진 팬션이란다. 동암에는 지킴이 거위가 한마리 있다. 약 10여년전 어느날 이곳 동암 바닷가에 한쌍의 거위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사이 좋았던 부부 거위는 어느날 암놈이 누군가에게 해꼬지를 당해 사라지자 암컷을 찾아 온 바다를 헤메다 이곳에 정착 하게 되었다. 그 사이 어민들에게 정이 들어 동암의 마스코트로 변함없이 갯벌을 지켜주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꽥괙 거리며 위협을 한다나? 한시 바삐 새 장가를 들도록 중매를 해 달라고 주민들은 요청했다.
동암마을에는 굴 박신장이 모여있다. 겨울철에는 많은 인력이 박신작업을 한다.(굴 껍데기와 알을 분리하는 작업,굴까기) 굴을 까고난 껍데기는 오목한 껍데기는 나중에 채묘용으로 한곳에 모아두고 나머지는 분쇄하여 비료나 매립지로 간다. 바다에서 자라던 굴은 각종 해조류가 부착되어 썩는 냄새가 난다. 이 냄새는 어민들의 돈냄새요 바다의 우유를 생산하는 고마운 냄새다. 많은 부분을 기계화 하였으나 굴을 까는 것은 기계화를 못하여 인력으로 까고 있다. 굴을 잘 까는 사람들은 하루에 2~30만원 벌이는 한다 하니 달인 수준이다. 해마다 한려수도 굴 축제를 하는데 굴까기 대회도 하고 있다. 지금은 각굴이나 하프셀을 선호하여 인건비를 줄이고 있다. 그래도 알굴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박신장을 지나면 넙치 육상 축양장이 나온다. 넙치는 일명 광어라고 하는데 육상에서 치어를 입식하여 육성을 하는 양어장이다. 광어는 고급어종으로 과거에는 전량 일본 수출을 했던 생선이다. 기술이 발달하여 알을 밴 어미를 채광으로 조절하여 조기 산란 시켜 부화와 먹이 순치 과정을 거쳐 육상이나 가두리에서 육성 시킨다.
이 길에는 김용익 묘소가 있다. 국내보다 외국에서 더 알려진 작가로써 초대 외무부 장관인 가형 김용식은 "나는 가난한 신생국의 대변인인데 반해 내 동생 김용익은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정서를 세계무대에 소개하여 훗날 나보다 내 동생을 더 알아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우리가 학교에서 알퐁스 도데의 '별', '마지막 수업' 를 교과서로 배울 때 그가 쓴 주옥 같은 단편을 미국, 영국, 오스트리아, 덴마크, 이태리의 청소년들이 배웠다고 한다. 그의 첫 작품 꽃신은 미국의 하프스 바자에 기재된 이후 '가장 아른다운 소설'로 선정되어 세계 각국에 19번이나 소개 되었으며 TV, 영화, 발레 작품으로 소개 되었다. 그외 단편은 해녀, 종자돈, 변천, 막걸리 등이 있으며 단행본으로 한국의 달, 행복의 계절, 겨울의사랑, 양산골에서온 신발 등이 있다. 마술의 펜이라는 칭호를 얻고 노벨 문학상 후보까지 오른 김용익은 창작외는 자유인이었다. 작품으로는 인정을 받았지만 인생 특히 가정의 범주에는 회한도 남는다고 했다. 작품은 외로워서 썼고 외로워야 쓸 수 있다고 한다. "문학이란 바람이나 공기와 같다. 고정적인 형태가 없는 것이어서 그에 대한 정의를 내릴려면 벌써 자유로운 창작 분위기는훼손된다"고 했다. 소설가 김용익은 외국에서 많이 알려진 소설가지만 국내에서는 덜 알려지고 고향에서 조차 조명되지 못하여 안타까웠다. 통영예술의향기에서 묘소 찾기와 추모제등을 꾸준히 실시하여 선양 작업에 힘쓴 결과 생가터를 기부채납 받아 기념관을 꾸미고 김용익 문학상도 제정하게 되었으며 묘소가는 길도 깨끗하게 정비를 했다. 꽃신의 단행본은 절판되어 구 할 수 없으나 유족들과 협의하여 곧 출판할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묘소에서 보는 바다는 시심이 절로 나며 아름다운 풍경에 작품구상에는 최적의 장소이다.
이곳이 한때 세상을 떠들썩 했던 곳이다. 동달리와 장평리를 연결하여 매립을 할려 했었다. 노건평씨는 통영시 장평지구를 매립하려는 S해양산업의 사업자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통영시장을 만나 협조를 부탁한 것이다. 이 청탁의 대가로 S업체의 지분을 사돈을 통해 넘겨받아 9억4000만원을 챙겼다. 한때 밀가루 사업으로 매립공사를 하다가 물살이 쌔어 중간 수문이 무너지고 석축이 무너진채로 방치 되었다. 썰물 일때는 바닷가를 건널 수 있다. 밀물이면 매립지 뚝방길을 가다 산으로 오르면 오디농장이 나오는데 농장 입구까지 가서 위쪽 공동묘지 가는 길로 오르면 건너갈 수 있다. 매립지 갈대밭 있는 곳은 삼화 두레마을이다. 두레마을에서 온신 아주머니는 자연산 굴을 주워 까고 계신다. 두레마을에서 오셨다는데 마을의 유래가 제방둑을 ,둘,두리,두레라고 한다. 왜정시대 개논을 막았는데 한쪽은 돌이고 한쪽은 흙으로 쌓았는데 몇년전 태풍에 둑이 터져 큰 곤욕을 치렀다고한다. 장평언長坪堰 영의 동쪽 15리 유방의 경계에 있다. 옛적 전라 경상 양도가 합동으로 수조를 할때 수조에 참여한 군졸들이 흙을 메워 방죽을 막고 영의 염전으로 사용 하였다. 중년에 투송에소금 굽는 사람을 바꿈으로 해서 이를 폐지하고 군창에 속하는 둔전을 설치했다.(통영지)
한산대첩의 시발점 딴간섬(해간도)이다. "7일에는 동풍이 크게 불어 항해하기 어려웠는데 고성땅 당포에 이르자 날이 저물기로 나무하고 물 긷는 일을 하고 있는데 피난하여 산으로 올랐던 목동 김천손이 신 등의 함대를 바라보고 급히 달려와서 고하는 내용이 <적의 대중소선을 합하여 70여척이 오늘 하오 2시쯤 영등포 앞바다로부터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머늘고 있습니다.>하였으므로 다시금 여러 장수에게 지시하고 8일 이른 아침에 적선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배를 뛰웠습니다. (중략) 위 견내량의 지형이 좁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은 부딪치게 될 것 같아 싸우기 곤란 할 뿐 아니라 적은 만약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끌어내어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견내량파왜병장에서- 해간도는 한산해전의 현장에서 묵묵히 그 광경을 목격하고 기억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해간도의 신목인 소나무는 둘레가 약 4.34m인 거목으로 최소 500년을 되었으며 그렇게 큰 소나무는 처음보았다. 연기미역(견내량 미역). 이곳에는 나라에 공물로 바치는 미역밭이 있다. 견내량 해협의 빠른 물살로 인하여 미역이 쫄깃하여 풀어지질 않고 맛이 있다. 특히 조선시대 임금 진상품으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언급될 만큼 명성을 얻었다. 미역 채취는 옛날 방식으로 막대기로 수확을 한다. 그 막대기를 트릿대라고 하며 나무 장대 끝부분에 구멍을 뚫어 막대를 열 십자로 꽂아 사용하며 위에는 대나무 막대를 묶어 수심 5~8m 정도 되게 사용한다. 대나무 끝에는 펼쳐진 니은자 처럼 생긴 나무를 묶어 미역이 있는 해저에 담그고 돌려서 미역을 수확하는 전통 방식을 사용하고있다. 작년(2013)에는 수확이 많았으나 올해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수확량이 급감하여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연기 마을을 뭍간섬이라고 했으며 해간도를 따로 떨어져 있다하여 딴간섬이라 불리우고 음력 정월 한시 때 뭍간섬과 딴간섬이 연결되었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는 논이 있어 논농사를 할 만큼 넓은 토지와 물이 있었으며 학교까지 있었던 섬이다.
인간의 주거 공간은 집이다. 만약 집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또한 길이 없어진다면 어디를 어떻게 다닐까? 오늘 걸은 길에는 갯벌이 많았다. 그 갯벌은 다양한 생물들의 보금자리요 길이다. 집과 길을 망가트리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한산대첩이란 이름은 언제 누가 했을까? 이순신 장군의 장계인 임진장초에는 견내량파왜병장이라 기록되어있다.(만력 20년(1952) 7월 17일) 조선왕조실록 선조 30권, 25년(1952 임진 / 명 만력 20년 9월 19일(병자) 6번째기사 "비변사가 공을 세운 이정암에 대해 한산대첩의 예로 상을 주자고 청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1.8km (이순신공원-해간도)
201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