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31일, 경성소리학당 여름 산공부를 시작하는 날이다. 이번 산공부는 경남 산청군에 있는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 자리를 잡았다. 어린아이들이 예절을 익히거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는 곳으로만 알고 있던 이곳에서 15일간의 여름 산공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직장을 은퇴하고 평소 좋아하던 판소리 단가 몇대목이라도 배워서 흥얼거릴 수 있다면 족하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아마추어 판소리 동호회에 입문했었다. 소리를 배우다보니 그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조용한 숲 속이 궁금해서 한발짝 두발짝 발을 내딛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너무 깊이 들어와 이제는 돌아갈래야 돌아 갈 수도 없게 되어 버린 셈이다. 소리를 향한 열정과 좀 더 심층적인 배움의 포부를 가지고 산공부를 위해 입산한 것이 이번으로 세번째가 되었다. 기존의 동호회 산공부까지 합하면 도합 여섯번째가 되는 셈이니 그 동안 적지 않은 산공부를 한 셈이다.
송재영 선생님을 모시고 하는 경성소리학당의 산공부는 전공자들을 위한 산공부이다. 15일이라는 기간도 기간이지만 소리를 전공하는 학생들부터 소리를 업으로 삼고 있는 프로들이 참가하는 산공부이다. 그러다 보니 수업의 내용이 몹시 전문적이면서도 아마추어가 소화하기에 벅찬것도 사실이다. 선생님이 내려 주시는 소리를 잘 소화해내는 프로들과는 달리 나같은 아마추어 소리꾼은 보통 50분, 많으면 1시간여를 선생님과 독대하여 소리를 받는다. 목을 최대한 높여 소리를 받고 하루종일 계곡, 혹은 혼자만의 장소에서 내 능력을 벗어나는 상청으로 선생님 소리를 따라 지른다. 그러다보면 금방 목이 쉬어 버린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하산하여서도 지속적으로 노력하면 분명히 목에 긍정적인 변화가 온다는 것을 알기에 힘든것을 감내하며 목을 내지르게 되는가 보다.
이번 산공부는 여러가지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지리산 청학동이라는 동네가 낮에도 그늘에만 들어서면 선선하고 새벽에는 이불을 덮어야 할 정도라서 올 여름 유래가 없는 더위에 피서를 온 느낌이었다. 긴 해가 지고 계곡에서 불어 오는 산바람 맞으며 몽양정 마당에서 시원한 맥주한 잔 마시던 한가로운 시간을 잊을 수 없다. 개인공부를 잠시 접고 삼성궁 입구 계곡에서 한 판 어우러져 북을 치며 소리판을 벌였던 추억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갑자기 생겨난 소리판을 구경하느라 계곡이 전석 매진(?)이 되었다. 그러한 관객들을 불러모을 수 있었던 전북도립 창극단 소속의 박 건 명창, 지금은 소리를 쉬고 사업을 하고 있지만 어릴적부터 이 일주 선생님께 소리를 오래 배웠다는 북 잘치는 김 영성 사장, 목포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신 소윤 명창, 안산의 아마추어 소리꾼 만향 김 영순님,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사람이 어우러진 즉석 소리판의 흥겨움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내친 김에 저녁 식사후 몽양정 옥상 마당에서 다시 벌어진 소리판도 내게는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되었다. 보성소리축제에서 작년에 대통령상을 수상한 박정희 명창, 이번 대전대회에서 종합대상을 수상한 천지인 소리꾼, 광주에서 열심히 전주대사습 명창부를 준비하고 있는 문 하원 명창, 낮에 같이 소리했던 전북 도립 창극단 멤버들과 함께 어우러져 달빛아래 소리 한대목 했던 추억은 오래 오래 간직하고 싶다.
이번에는 특별히 이 일주 큰 선생님이 산공부에 오셨다. 기억력이 많이 쇠퇴해지셔서 사람을 잘 못알보시지만 일단 북을 잡고 소리를 가르치시면 전혀 딴 분이 되신다. 아직도 선생님의 소리에는 날이 서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도 잘 못알아보시면서 그 어려운 판소리의 사설과 음정, 시김새는 정확히 기억을 하시나 보다. 제대로 소리를 못하면 정확히 짚어내고 교정해 주신다. 나도 큰 선생님 앞에 앉아 '주과포혜'와 '쑥대머리' 한대목 부르고 지적을 받았다. "앞으로 계속허믄 소러 허겄다" 아마추어라서 그런지 잘못했다고 혼내시지 않고 격려의 말씀만 해 주셨다. 선생님의 이 한마디로 지칠때마다 그 말씀을 기억하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저녁이면 밤하늘을 가득 채워 쏟아질 것만 같은 수많은 별들을 보고 이름모를 풀벌레 소리를 벗삼아 소맥 몇 잔에 얼큰하게 취하곤 했다. 시계를 볼것도 없이 어두운 소나무 숲위로 넌즈시 떠오르는 달님이 이제 산중의 밤도 깊었으니 내일의 공부를 위해 잠자리에 들라고 살며시 일러주곤 했다.
천진난만한 12살 나이에 산공부 들어와 콧등에 송알 송알 땀이 맺히도록 소리하던 서화, 현서도 보고 싶다. 20명 가까운 식구들 식사 챙기느라 주방에서 몹시 고생한 천지원씨, 중단했던 소리를 다시 한다하니 반갑다. 언니 고생하는것 모른채 못하고 공부하는 틈틈이 주방일 열심히 도와준 천지인 소리꾼에게 특별히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산공부 나오는 날 입산한 전북도립 창극단 김 광호, 김 성렬 소리꾼 두 분과는 내년 산공부에 만나 같이 소리하며 소맥 한 잔 할 수있기를 기약하며 아쉬움을 달래 본다. 끝까지 일정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서로 믿고 의지하는 아마추어 소리꾼 벗님 대산 박광석님, 앞을 못보는 장애를 가지고 소리에 정진하며 내년에 심청가 완창을 준비하고 있는 동문이, 한참 꿈많고 발랄한 시기에 산에 와서 공부한 여대생 가람이, 신혼의 단꿈을 미루고 산공부에 정진한 박 현숙씨, 큰 선생님 밤낮으로 모시고 소리하느라 고생하신 명진씨 모두 애쓰셨다. 이번 여름 소리에 갓 입문한 꼬맹이 재윤, 승희도 장차 큰 소리꾼이 되기를 바래 본다.
끝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임없이 소리내려주시고 모두의 식사도 세심히게 챙겨주신 송재영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선생님같은 대명창이 계시기에 우리의 소리가 끊임없이 전승되고 보급될 수 있는 것이다. 선생님 문하에서 많은 명창들이 나오고 그 명창들이 우리 소리를 널리 보급 발전시킬때 우리 전통문화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