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민요연구의 개척자 이재욱을 말한다
우선 이재욱이라는 인물을 빼놓고는 우리나라 근대민요를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점을 전제하자. 민요의 등장은 국학의 태동기인 1920~30년대의 문화적 거대 자산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독 영남지역의 민요가 관심을 끌었다. 그것은 조윤제·이재욱·김소운·최상수·김사엽 등 당대의 민요 연구자들이 영남출신이었기에, 이들의 민요연구 대상을 지역의 민요에 둔 것은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우리 민요연구사에서 영남의 민요가 그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이재욱은 1930년 필사본『嶺南傳來民謠集을 바탕으로 1931년, 최초의 개별양식 민요연구인 「영남민요연구」를 경성제대 문학부 졸업논문으로 제출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민요전공자가 되었다. 1929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문학회>에서는 6개월에 걸쳐 전국적인 민요 조사를 실시했다. 이 성과는 ‘과학적 방법’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민요조사 활동으로 기록된다. 여기서 ‘과학적인 방법’이란 학문적 체계를 어느 정도 갖춘 것임을 의미한다.
‘가자(歌者)에게 가요(민요)는 비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시킬 것’
‘종래전승 그대로 가(歌)케 할 것’
‘기록할 때는 가자(歌者)가 창(唱)하는 그대로 필기만을 할 것’
‘만약 다른 말로 옮긴 경우라도 원어(原語)의 야취(野趣)는 그대로 보존함에 노력할 것’, 등을 일일이 적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민요조사의 방법론은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당연한 원칙임은 분명하다.
이재욱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재학생으로 참여를 하였으며, 이와 같은 방법으로 1930년 하기 방학을 이용하여 직접 영남지역 30개 군(郡)을 대상으로 조사하고 정리한 영남전래민요집(嶺南傳來民謠集)이란 필사본을 남겼다.
또한, 이재욱의 졸업논문 「영남민요연구」는 1931년 경성제대 출신 동인 학술지인 신흥 제6호에 발표한 「소위 산유화가와 산유해/ 미나리의 교섭」의 근간이 되었다고 본다. 이 논문은 민요사에서 단일 민요를 대상으로 한 현장답사와 문헌 조사로 이뤄진 최초의 논문이라는 것이 학계의 평가이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불리는 <산유화>가 백제 패망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전제하고, 이 노래가 백제 패망을 계기로 경상도 지역 <향랑전설>의 배경이 되어 경상도 <산유화>(어사영)로 전승되었다는 주장을 답사와 문헌 등을 통해 제시하였는데 답사의 현장이 영남전래민요집(嶺南傳來民謠集)에 고스란히 기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단행본 도서의 발간을 시도했다. 그것은 1932년 2월에 발간된 조선어문학회보에 <총서속간예고(叢書續刊豫告)-근간>이라는 제목과 함께 영남민요연구(이재욱)가 조선연극사(김재철), 조선소설사(김태준) 등과 함께 소개되었던 것이다. 그중 조선연극사와 조선소설사는 단행본으로 발간되었지만 영남민요연구는 발간되지 못했다. 그 시대에 이미 이재욱은 민요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현지 조사를 통하여 구비전승으로서의 민요를 소개하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발간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영남민요’를 학술용어로 정착시키다
영남전래민요집(嶺南傳來民謠集)은 가로 15cm 세로23cm, 원고지 총 208면, 조사 대상지역 영남 총 30개 군, 총 359편의 민요를 집대성한 자료집이지만, 식민지 시대를 거치고 한국전쟁을 견디며 80여년 만에 학술자료로 빛을 보게 된 점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문화적 가치는 첫째, 과학적 이론을 갖춘 전문가로서의 민요조사 작업은 일제강점기 아래서 이루어진 유일한 조사 결과물이고, 둘째는 이 시기에도 우리나라에서 영남지역이 대표적인 민요 전승의 요람임을 입증해 주었으며, 셋째는 한 개인의 업적을 뛰어넘어 한국 민요사로서나 영남 근대문화사의 차원에서도 이재욱의 존재를 선명하게 각인시켜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과정에서 ‘영남민요’를 학술 용어로 자리매김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아리랑 문헌인 1896년 H.B. 헐버트의 논문을 초역(抄譯) 소개하면서 ‘경북아리랑’을 특화하여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된다. 이런 면이 대구출신 팔공산인 이재욱(八空山人 李在郁)의 민요사적 업적일 것이다.
근대문화 개척의 일원
이재욱은 1905년 9월 20일생으로 본관은 인천이며, 본적은 경상북도 대구 서성정 103번지(대구시 중구 서성로 1가 105번지)였다. 1928년 경북 성주 배녹점과 결혼, 1남 3녀를 두었다. 필명은 대구의 대표 격인 팔공산의 이름을 빌려 아호가八空山人이였다는 사실을 주지한다면 얼마만큼 이 지역을 아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겠다.
그는 조부인 이병학이 중추원 참의를 지낸 대구 명문가의 집안이었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대표시인으로 활동했던 고월 이장희(1900~1929)가 그의 삼촌이기도 하다. 이재욱의 생가는 곧 삼촌 이장희의 생가이며, 이장희가 자살을 한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은 헐리어 큰 건물이 들어서서 흔적이 없지만, 1929년 이장희가 음독자살하기 전후까지만 해도 이 주소지를 중심으로 많은 문인들이 드나들었다. 이는 바로 옆집이 경주 이씨 이상화의 집안인 까닭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재욱은 1905년 이 주소지에서 태어나 대구고등보통학교를 다녔으며, 삼촌인 이장희로부터 문학적인 영향을 받았던 곳이다. 그리고 해방 직전 ‘지역문화에 이바지하기 위해 경북도청 사회과로 내려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는 졸업 후 ‘사회 교화에 진력하겠다는 생각’에 총독부도서관 촉탁으로 근무, 1943년에는 부관장으로 임명되어 와병중인 관장을 대신하여 관장직무를 대행했다. 이 시기 조선총독부도서관 관보인 『文獻報國』을 비롯하여 조선도서관연구회 기관지인『朝鮮紙圖書館』등의 발간 업무와 집필 활동에 매진했고, 당시 경성제국대학 출신을 중심으로 결성된 <新興>, <朝鮮語文學會>, <震檀學會> 등의 국학분야 단체와 학술지를 통해 연구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리고 1945년 3월 ‘지방문화 발전을 위하여 여생을 바치겠다는 각오’을 다지며 고향 대구로 내려왔으나, 해방 후 국립도서관의 관장으로 또 우리나라의 도서관계의 선도자로서 새 나라의 도서관계를 이끌어 달라는, 박봉석을 비롯한 전 직원의 삼고초려로 그 해 10월 해방정국의 초대 국립도서관 관장 직을 맡았다. 그 후 1950년 7월 18일 당시 초대국립도서관 관장 재직 중 박봉석 부관장과 함께 북한군에 납북되어 끌려가다 생을 마감한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다음은 <국립중앙도서관사>가 밝힌 실종 당시의 상황으로,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8․15해방을 맞이하자 박봉석씨는 당시 15명의 한국인 직원들과 합심하여 총독부도서관의 피해 없는 완전한 도서관을 접수하면서, 곧 관장으로 이재욱씨를 추대할 것을 결심하고 교섭을 하는 한편 이러한 뜻을 문교부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수차에 걸친 교섭에도 불구하고 이재욱씨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재욱씨는 1945년 3월 총독부도서관 부관장직을 해임하고 대구에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나날이 격심해지는 전쟁으로 피하겠다는 것도 그 이유의 하나였겠지만, 1945년으로 40세가 되면서 40세까지는 중앙에서 일하고 40세 이후는 고향을 위하여 일 하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수차에 걸친 교섭을 했으나 8월 29일 상경하여 관장 직을 직접 거절하고 다시 대구로 되돌아왔다. 그러자 최후의 수단으로 직원을 대구로 보내어 상경을 간청한 바 전 관원의 요청을 못 이겨 국립도서관 관장 직을 맡기로 하였다.”
이상에서 이재욱은 고향 대구에 대한 애착과 향토문화 육성에 큰 기대를 갖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한국 민요학계, 근대 영남 인물로서의 조명 필요
하지만 이러함에도 국문학계에서나 대구 향토 사학계에서조차 이재욱의 존재를 기록물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단지 한국 근대도서관 역사에서 ‘초대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재직 중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18일 북한군에 납치되어 실종되었다’는 정도를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전쟁으로 가장 먼저 희생당한 문화인물중 한사람인 것이다. ‘납북 중 실종’이라는 비극이 ‘레드 콤플렉스’라는 냉전사고가 지배했던 사회가 이재욱을 잊혀진 인물로 만든 것이다.
그의 학문관이나 업적은 동시대 국학자들의 일반적 세계관인 민족주의적 이념을 기저로 한 것이 아니라 정체성 확립의 한 방안으로 자신의 향토인 영남을 대상으로 하여 나름의 흔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의 참화에 희생되어 단명함으로써, 아쉽게도 접근이 차단된 비운의 인물로 역사는 그 안타까움을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이재욱의 존재를 필자는 박사과정에서 접하게 되었고, 결국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로써 ‘영남민요’와 ‘경북아리랑’의 위상을 확인하고 그의 생애와 업적이 재평가 되는 계기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이재욱, 우리는 그를 영남지역 민요 조사 기록물의 저자로서,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로서, 그동안 조명을 받지 못한 사실과 영남지역 문화 인물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1930년대의 영남지역 민요 조사를 비롯한 민요연구 활동, 1940년대 <진단학회> 활동 등 국학단체 태동에 기여한 사실, 그리고 해방직후 국립도서관장 재직 등의 활동상을 통하여 우리 국학계와 도서관 발전사 측면에서의 업적을 확인하는 작업은 이 시대인의 사명이 되었다. 또한 영남전래민요집 등을 통하여 민요사적 위상과 아리랑 역사에 주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이재욱은 영남 민요사의 정점에 놓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자료집은 한사람의 일관된 신념으로 영남민요를 조사 정리하여, 이를 통해 비교적 민속적 전승체계가 유지되었던 1920년대의 대표적인 영남민요를 반추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후 조사 자료와의 대비를 통해 전승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을 주목한다.
또한 오늘날 대표적인 창민요(통속민요)인 <쾌지나칭칭나네>나 <옹헤야> 등에 대한 출처를 구체화하였고, 아울러 <진도아리랑>이나 <밀양아리랑>의 형성내지 성창 이전의 1920년대 영남지역의 아리랑 상황을 알게 하여 우리나라의 ‘아리랑사’에도 중요한 논점을 제공해 준 점은 큰 수확일 것이다. 그 내용을 몇 가지로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30개 군 중 13개 군에서 직접적인 <아리랑>이 17번 조사되어 있어 1930년 전후 영남지역의 아리랑 유행상과 전승 분포를 알 수 있다.
둘째는 곡명이나 후렴에서 ‘아리랑’의 음가가 ‘아르랑’(김천), ‘어러렁’(예천), ‘어리랑’(예천), ‘어렁링’(예천), ‘아랑렁’(예천) 등으로 나타나고 있어, 1930년 전후 ‘아리랑’으로의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는 1930년에도 <정선진아랑렁이>을 수록하여 곡명에 ‘정선’의 지역명을 특화하여 사용하였고, 진’(긴)과 ‘자진’으로 구분하여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넷째는 <문경새재아리랑>의 경우, 상주지역의 <이앙가>등 영남지역의 논농사 일노래로도 불렸다는 점에서 사설의 적층성을 알 수 있다.
다섯째는 상주와 의성지역의 아리랑 주요 사설 ‘문경새재····’의 존재로 영남지역의 <아리랑>에 이 <문경새재아리랑>이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사항은 영남 지역의 아리랑 상황 뿐 아니라 동시대 아리랑 전체를 관조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아리랑 역사에서 이재욱을 재평가해야 되는 이유는 아리랑(A-ra-rung)의 최초 서양 오선보로 채보, 수록한 <Korean vocal music>을 초역(抄譯)하여 소개했다는 사실이다. 이 논문은 1896년 선교사 헐버트(H. B. Hulbert)가 The Korea Repository』2월호에 발표한 것인데, 이를 이재욱이 1932년 <조선어문학회보> 5호에 <si-jo·a-ra-ru ng etc>로 소개 한 것이다. 주목되는 논점은 ‘문경새재···’를 대표 사설로 불리는 아리랑을 ‘경북아리랑’이 아닌가 한다’라고 한 대목이다. <경북아리랑>은 학위논문에서 <문경새재아리랑>이라고 밝힌 바, 헐버트는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쌀과 같으며 1883년에도 널리 불리어 진다’고 함으로써 경복궁 중수 후에 전국적으로 확산 된 아리랑의 정체성을 오늘의 <문경새재아리랑>임을 알려 준다는 중요한 논점을 제시해 준 것이다.
한국전쟁의 희생자라는 비운의 인물, 레드 콤플렉스 사회에서 ‘납북자’라는 이유로 그 이름이 변색된 인물로 우리는 이재욱과 만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그의 자료집이 발굴되어 학술자료화 되고, 박사학위 논문을 통해 1930년을 전후한 우리 민요 연구사에서 일획을 긋는 활동을 한 인물임이 밝혀져 생애와 업적이 재구성 되었다. 이는 60여 년만의 존재확인이며 명예회복으로 재평가가 이뤄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민요사의 복원이며 아리랑사의 맥박을 공명(共鳴)케 하는 주요 인물의 부활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