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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의 세상과 초도로의 눈(6)...쇼샤낙원
서로 겹쳐있는 이차원공간과 이차원공간들은 각각 그 공간에서 살고 있는 파장의 주파수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공간은 간섭을 일으키지 않고 서로 느끼지 않으면서 살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샤르별의 4차원 문명세계에서는 우주를 이차원공간들이 양파껍질처럼 겹쳐있는 다차원의 세상이라고 정의하고 있었고, 다차원의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서는 초도로머신이 필요했다. 꼭 초도로머신이 아니라도 초도로주파수를 발생시키는 장치만 있으면 이차원(異次元)현상을 체험하는 일도 가능했다.
그래서 우주를 여행하는 UFO에도 초도로주파수가 설치되어 있고, 우주를 여행하면서 이차원공간을 찾아가 새로운 세상을 구경할 수 있었다.
곧 초도로주파수는 현실의 공간과 이차원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장치였다. 초도로주파수로 다른 차원의 세상을 구경하고 체험하는 현상을 초도로현상이라고 불렀다.
초도로현상으로 생각할 때 영혼의 세계도 또 다른 하나의 이차원공간일 뿐이었다. 영혼과 육신은 서로 주파수가 다른 형태로 살고 있기 때문에 서로 느끼지 못하고 서로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초도로머신을 타고 이차원공간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초도로포털을 찾는 일이 중요했다. 초도로포털은 이차원공간이 열리는 우주관문의 이름이었다.
우주공간은 그냥 맨눈으로 바라보면 텅 빈 공간에 불과하지만, 공간에서 역동하는 에너지의 흐름은 대단했다. 이런 공간에너지의 역동성으로 우주에는 다차원의 현상들이 존재하고, 공간에너지의 산과 계곡과 강과 바다와 같은 현상 속에 우주관문의 초도로포털이 숨어 있었다.
초도로머신에는 초도로포털을 찾는 기능이 설계되어 있었고, 그러한 기능으로 현실공간에서 숨겨져 있는 이차원공간으로의 이동이 가능했다.
초도로머신과 UFO는 기능상 우주공간을 이동하는 이치는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이동하는 방법이 달랐다. UFO는 초디느라고 하는 가공에너지를 활용하고 초도로머신은 바니니라고 하는 무극에너지를 활용하는 방법이 달랐다. 무극에너지와 대칭되는 현상으로 태극에너지가 존재하고, 초디느와 같이 음양의 이치로 가공된 에너지의 총칭이 태극에너지였다.
무극에너지를 다른말로 초자연에너지라고 표현할 수 있고 우주채널링이나 파뵤시현상을 일으키는 에너지의 총칭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무극에너지로 우주를 이동하는 초도로머신은 속도의 한계가 없었다. 무극에너지의 속도는 염속과 같은 의미이고 생각과 동시에 아무리 먼 공간이라도 이동이 가능했다. 곧 초도로머신은 염속으로 우주공간과 이차원공간을 이동하는 장치였다.
이처럼 무극에너지로 움직이는 초도로머신을 타고 우주공간에서 초도로포털을 찾아내면 어떤 이차원공간으로의 이동도 가능했다.
초도로머신을 타고 방문한 이차원공간은 다양했다. 이차원공간에 펼쳐진 삶들은 현실공간에 펼쳐진 자연현상과 비슷한 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점도 있었다.
이차원공간에서도 가장 호감이 가는 세상은 바차시낙원처럼 무중력이 작용하는 세상이었다. 중력 때문에 무거운 몸으로 세상을 살지 않고 무중력 상태에서 가벼운 몸으로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며 살고 있는 세상이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무중력세상 못지않게 부러운 세상은 새나 말이나 용 같은 동물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세상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차원공간이라고 하여 모두 지구의 환경보다 나은 세상만 존재하지는 않았다. 지구의 삶은 복잡하고 혼돈하며 온갖 번뇌와 고통이 따르는 세상이라서 불편한 점도 많지만, 이치와 지혜를 이용해서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는 행운일 것이다.
그러나 이차원 공간에는 사람의 힘으로 변화가 불가한 세상도 존재했다. 한 번 정해진 운명은 사람의 힘으로 변경이 불가하고, 한 번 정해진 자연의 이치는 아무리 불편해도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현상의 세상도 존재했다.
불가항력의 공간을 체험할 때는 그나마 지구라고 하는 환경이 행운이고 축복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샤르별처럼 4차원 문명세계의 초월적인 삶은 누리지 못하더라도 사람들 스스로 노력해서 절망과 불운을 씻어내고 스스로 노력해서 얼마든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여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 세상이란 점에서, 지구에 태어난 운명을 너무 자조족으로 비관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차원공간에서 엄청난 중력이 작용하는 고된 환경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무엇도 스스로 노력해서 해결할 방법이 없는 불가항력의 운명으로 살고 있는 현상들이 그 자체가 형벌이요 고통이라고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불가항력의 고통스런 삶이 펼쳐진 세상에서도 역시 행복과 불행의 현상은 갈라져 있었으니 이 또한 우주의 아이러니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초도로머신을 타고 이차원공간을 방문할 때는 많은 시간이나 세월이 흘러간 느낌이 들 때가 많은데 실제로 현실의 공간으로 돌아오면 아주 짧은 시간이 소요됐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차원공간을 찾아가 몇 개월이나 몇 년을 지내고 돌아온 느낌인데, 현ㅅㄹ의 공간에서 실제로 흘러간 시간은 단 몇 시간에 지나지 않는 짧은 순간일 때가 많았다.
초도로머신으로 바차시낙원을 구경하고 돌아와서 다음에 찾아간 이차원공간은 봉화의 나라였다. 지구의 과거에 공룡시대가 있었다면 봉황의 나라에는 봉황시대가 펼져지고 있었다.
지구의 공룡시대에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 아닌지는 불분명하지만, 봉황의 나라에는 사람과 봉황이 함께 살면서 이차원공간의 신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봉황의 나라에 도착했을 때 아름답고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 봉황의 등에는 아름다운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타고 잇었다.
봉황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환했으며 무한한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봉황대신 날개 달린 말이나 사슴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그 외에도 날개 달린 짐승들의 숫자는 더 많았다.
봉황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도무지 바쁘게 움직이면서 사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땅으로 걸어 다니는 사람도 하늘에서 봉황을 타고 날아다니는 사람도 서두르는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봉황의 나라가 펼쳐져 있는 이차원공간을 쇼샤낙원이라고 불렀다. 쇼샤낙원이란 여유의 공간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 세상의 이름이었다. 쇼샤낙원에서 성장하는 식물이나 동물들은 성장속도가 매우 느리고 쇼샤낙원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도 느리다 못해 답답했다.
쇼샤낙원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 지구의 나무늘보가 사는 모습과 흡사한 것 같았다.
쇼사낙원의 백성들은 느린 행동과는 다르게 저마다 예쁘게 꾸민 집을 소유하고 살았다. 쇼샤낙원의 집들은 크지 않았고 집 안에는 복잡한 살림살이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살림살이는 없지만 아름다운 의상은 여러 벌씩 갖추어져 있고 풍류를 즐기는 악기나 도구들도 눈에 띄었다.
쇼샤낙원의 백성들이 먹고 사는 식량을 개금이라고 하는 작고 단단한 열매였다. 완두콩 크기의 개금열매는 단단한 껍질로 쌓여 있고 껍질을 벗기면 속에 검은 색의 속살이 들어 있었다. 개금 속살을 입에 넣으면 천천히 녹기 시작하고 박하 같은 화한 맛이 났다.
쇼샤낙원의 백성들은 개금을 주식량으로 해서 살고 있었고 한꺼번에 먹는 양은 많지 않았으며 몇 알 정도에 불과했다. 그 외 다른 음식을 조리해 먹는 풍습은 없었고 개금열매는 지천에 널려 있어서 따로 모아서 저장하거나 창고에 모아 둘 필요가 없었다.
개금 외에 먹는 음식으로 술이 있었는데 손으로 담궈 먹는 술이 아니라 나무에서 열리는 나무술이었다. 술나무에 열린 열매를 쪼개면 속에서 술맛이 나는 물이 나오고 그 물을 마시면 술처럼 취했다.
쇼샤낙원의 백성들은 봉황나라의 이름에 걸맞게 집집마다 봉황을 기르고 있었고, 날개 달린 말이나 사슴을 키우기도 했다. 이러한 짐승들은 사람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먹이는 짐승들 스스로 해결했다. 집주변 숲속에 들어가면 짐승들의 먹이가 풍부했고, 때가 되면 짐승들 스스로 숲으로 들어가 먹이를 구해서 배를 채운 후 돌아왔다.
사람들도 역시 때가 되면 숲속의 개금열매를 찾아가 깨트려서 입안에 넣고 옴질거리며 끼니를 해결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먹고 사는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하고 있었다. 기분을 내고 싶을 때는 술나무를 찾아가 술열매를 깨뜨려서 받은 나무술을 마시고 흥겹게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쇼샤낙원의 백성들이나 짐승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단조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느릿느릿 움직이며 만사태평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느림보 사람들이었지만 멋진 의상을 걸치고 풍류를 즐기는 삶은 부러운 바가 많았다.
봉황이나 날개달린 짐승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여유를 만끽하는 삶이란 급한 세상에서 급하게 움직이며 살았던 속세의 삶과 비교하여 닮고 싶은 점이 아닐 수 없었다.
초도로머신을 타고 쇼샤낙원을 주유하면서 느림보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구경하다가 깊은 산속에 큰 규모로 잘 지어진 집 하나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쇼시우시가 초도로 영상장치로 그 집을 멀리서 관찰해보니 유난히 밝은 영성의 기운이 발산하고 있었다. 그만큼 큰 영혼의 존재가 머물고 있다는 증거였다.
큰 영성이 머물고 있는 집을 방문했더니 안팎으로 이름 모를 화초들이 잘 가꾸어져 자라고 있었고 시중을 드는 느림보사람들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각자의 맡은 일에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큰 영성의 집에서도 역시 좋은 빛깔의 봉황을 기르고 있었고, 좋은 빛깔의 봉황들은 지붕 위에도 앉아 있고 뜰에서도 사람들과 어울려서 놀고 있었다.
어떤 봉황은 심부름을 맡은 사람을 태우고 멀리까지 떠났다가 돌아오는 중이기도 했다.
우리들이 초도로머신을 타고 큰 영성의 집까지 도착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고, 우리가 주파수약을 먹고 초도로머신에서 내린 후에야 사람들이 알아보고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초도로머신을 집 앞 입구에 세워두고 큰 영성의 집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들어가 큰 영성이 머물고 있는 장소까지 다가가서 뵙기를 청했다. 큰 영성은 밝은 빛에 가려 있고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이 큰 영성의 빛 앞에 도착했지만 끝까지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빛속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어서 오라! 속세의 불청객들이여…."
"허락도 없이 큰 영성을 뵙게 되어 결례가 큽니다."
쇼시우시가 대답한 말이었다.
빛 속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호탕한 말이 들려왔다.
"우리들 세상은 여유만만 기질로 살아가니 결례와 용서의 의미가 필요 없는 세상이다. 속세의 급한 기질을 다 끄고 우리들 여유만만 세상을 바라보기 전엔 보아도 보이지 않는 현상들이 많을 것이다."
큰 영성의 존재는 쇼샤낙원을 스스로 여유만만 세상이라고 칭했다. 느림보 사람들이 봉황을 타고 하늘을 다니며 살아가는 세상에 무슨 감춰진 진실이 숨겨져 있다는 뜻이었을까?
쇼시우시는 그러한 궁금증을 풀어보려는 듯 큰 영성의 존재를 향해 질문했다.
"쇼샤낙원의 느림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바라보는 마음이 답답해질 만큼 낙천적이고 무사안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느림보 사람들은 천재지변으로 난리가 나고 급박한 일들이 벌어져도 늘어터지게 행동할지도 궁금합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는 서두를 일과 여유를 가질 일이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느림보 사람들은 그러한 구분이 없이 여유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속인의 생각이 잘못 판단한 것인지 큰 영성께서 한 말씀 지적해 주십시오."
큰 영성은 한마디로 쇼시우시의 생각을 정리해 주었다.
"세상이치란 급하게 많이 움직인다고 안 될 일이 잘 풀리고 느리게 많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될 일이 안 되는 법도 없다."
"느림보 사람들은 느릿느릿 살지만 할 일은 다 하고 산다는 의미의 말씀입니까?"
"속인은 급하게 살아야 많은 일을 하고 세상의 좋은 변화를 이끌어 간다고 생각하는가?"
"부지런히 행동하면 느린 행동보다 좋은 일을 많이 이루지 않을까요? 그리고 세상의 좋은 변화도 많이 이루지 않을까요?"
"어리석은 속인의 생각이로다. 부지런히 많이 움직인고 많이 힘써야 좋은 일만 일어난다는 보장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급하게 많이 움직이면 그만큼 낭패하고 실패하는 일도 많아진다. 행동은 느려도 생각이 바르면 실패하고 낭패하는 일도 줄어든다."
"느림보 사람들은 실패와 낭패를 모르고 사는 백성들입니까?"
"우리들 여유만만 세상에서 살고 잇는 백성들은 행동은 굼뜨지만 생각은 많이 한다. 그래서 느리게 행동하면서 정곡을 찔러 실천한다. 정곡을 찌르는 실천이야말로 낭패 없는 삶을 보장할 것이다. 여유만만 세상의 백성들은 행동이 느리지만 낭패 없는 삶을 보장할 것이다. 여유만만의 세상은 낭패 없는 세상이다. 사람이 태어나 한 평생 낭패를 겪지 않고 사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행동은 적게 하고 생각을 많이 하면 정곡을 찌르는 일을 할 수 있고 그만큼 실패와 낭패의 불행도 겪지 않는다는 말씀이군요?"
"꼭 그렇지 않더라도 세상은 급하게 살 일이 아니다. 매사에 조바심을 가지고 긴장을 풀지 못하는 삶이나 항상 낙천적으로 여유 넘치는 생각으로 사는 삶이나 세월의 흐름은 일치한다. 많이 이룬다로 많이 가져가는 사람의 운명도 아니요 적게 이룬다고 적게 가져가는 사람의 운명도 아니다. 결국은 마치는 과정이 동일하다."
"이 곳 여유만만 세상에서는 사람의 행동만 느리지 않고 식물이나 동물의 성장 속도도 사람의 생ㄷㅇ을 닮아 더디고 느립니다. 화초나무에서 한 송이의 꽃을 기다리는 시간도 지루하고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는 시간을 기다리는 시간도 지루할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 더디게 성장하는 자연세계와 느림보 사람들의 행동과는 어떤 상관관계의 인자가 작용하고 있습니까?"
"그 자연의 이치가 그 자연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의 속성을 만든다. 자연세계의 변화가 급하면 급한 속성의 생명세계를 연출할 것이요, 자연세계의 변화가 여유로우면 여유로운 속성의 생명세계를 연출할 것이다. 사람의 생명도 자연의 한 구성이다. 곧 사람의 속성은 자연의 이치를 닮는다. 속인의 세상에서도 그러한 이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속성과 자연의 속성은 일치한다는 말씀이군요?"
"그 자연세계의 이치가 그 자연세계에 속한 사람을 만든다."
"우리들 자연세계의 사계는 빠릅니다. 여유만만 세상의 사계는 정지된 듯 느립니다. 그래서 여유만만 세상에서는 세월의 흐름도 더딜 것만 같습니다. 이처럼 빠른 사계와 더딘 사계에서 살아가는 삶의 이치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속인의 세상에서는 세월의 흐름이 덧없다고 자조하겠지만 우리들 여유만만 세상에서는 남는 것이 시간이라고 여유를 부린다. 그래서 급할 것도 없고 서두를 것도 없는 삶이 우리들 세상의 백성들이 지니고 있는 습성이다."
"우리들 세상에서는 시간이 아깝다고 서두를 때가 많은데 여유만만 세상에서는 시간이 넘친다고 여유를 부리는군요?"
"삶이 급하면 세월도 급하다. 삶이 여유로우면 세월도 여유를 부린다. 맘먹기에 따라서 세월은 빠르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백 년을 십 년처럼 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십 년을 백 년처럼 살기도 할 것이다. 같은 세월을 살더라도 여유로운 생이 있고 덧없는 생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속인은 똑같은 하루의 삶으로 넉넉한 순간을 즐기고 싶은가? 빠듯한 시간을 즐기고 싶은가?"
"넉넉한 순간들을 즐기고 싶습니다."
"그러면 여유로운 맘으로 여유로운 행동을 즐기며 살아라. 하루의 순간들을 넉넉하게 즐길 것이다."
"큰 영성을 뵙고 여유만만 세상의 숨겨진 삶의 진리를 깨닫게 되어 여행한 보람이 큽니다."
"급하지 않는 눈으로 여유만만 세상을 바라보면 더욱 값지게 즐길 일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말을 마치고 큰 영성은 시종을 시켜 우리들에게 봉황을 선물하고 여유만만 쇼샤낙원을 여행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빛 속에 숨어 있는 큰 영성의 모습은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각각 봉황의 등에 탄 우리 셋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쇼샤 낙원의 드넓은 세상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쇼샤 낙원은 봉황을 타고 날아가도 날아가도 끝이 없이 넓은 세상이었다. 쇼샤 낙원은 마치 둥근 천체로 이루어진 별이 아니라 평평한 땅으로만 이뤄진 세상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끝없는 초원과 평원이 펼쳐지고 잇었다. 초원과 대평원 위로 솟아 있는 산맥의 물결들은 위세 좋게 꿈틀거리며 사방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사람을 등에 태우고 하늘을 날아가는 봉황은 사람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 했다. 봉황은 높은 산도 훌훌 날아서 넘고 넓은 바다나 호수도 날개를 쭉 펴고 활강을 하는 모습으로 유유히 날며 건넜다. 봉황의 등에 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은 상쾌하고 평온했다.
봉황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뿐만 아니었다. 쇼샤 낙원의 하늘은 마치 느림보 사람들의 놀이터나 되는 것처럼 봉황을 타고 노는 모습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누구도 서두르거나 재촉하는 표정은 찾아볼 수 없고, 한가롭게 봉황을 타고 하늘을 떠다니며 유유자적하는 느림보 사람들의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어릴 때 시골에서 성장하면서 가을 하늘에 떠 있는 솔개를 자주 발견한 기억이 있었다. 높은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며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높은 기류에 편승해서 힘도 들이지 않고 천천히 비상하며 맴돌고 있는 소리개를 바라보면 맘속으로 부러운 생각이 많이 드렁ㅆ다. 그리고 문득 소리개의 등을 빌려 타고 높은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놀면서 한가로움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소리개의 등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지는 않지만, 소리개보다 더 크고 멋진 봉황을 타고 하늘을 비상하며 유유자적하는 기분은 세상의 근심 걱정을 모두 씻어버린 듯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봉황의 등을 타고 하늘에 떠서 맴돌며 놀고 있을 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하늘에 떠 있는 몸은 한가롭지만 생각은 이곳저곳으로 질주하며 하늘과 땅과 우주의 이치를 분석하고 궁리하느라 바빴다.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니 느림보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지만 아름다운 문명이 숨 쉬고 있었다. 행동은 느리고 낙천적이지만, 항상 일을 하는 모습보다는 놀고 있는 모습이 많이 눈에 띄는 느림보 사람들이지만, 땅 위에 이뤄 놓고 사는 문명의 모습은 소박하고 품위가 있었다.
땅을 일궈 농사를 짓고 있는 모습도 찾아볼 수 없고, 복잡한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모습도 찾아볼 수 없고, 높은 건물이 하늘로 솟아 있거나 건설하고 산업을 일으키는 장면들이 눈에 띄지는 않지만, 작고 소박하고 아름다운 집들이 낙원의 정취를 물씬 풍기며 녹음방초의 자연 속에서 수줍은 듯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느림보 사람들이 언제 놀고 언제 저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이뤄놓고 사는지 수수께끼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문득 큰 영성의 존재가 해 주던 말이 떠올랐다.
<급하고 빨리 움직이며 산다고 많은 것을 이루지는 않는다. 느리고 여유롭게 산다고 이룰 일을 이루지 못하지도 않는다. 삶의 여유로움 속에서 정곡을 찌르는 생각을 하면 많이 움직이지 않아도 마침내 큰일을 이룬다.>
결국 봉황을 타고 하늘에서 떠돌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여유만만 세상의 느림보 사람들은 그냥 할 일 없이 시간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온갖 궁리를 다 짜내고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궁리와 생각들이 지상에서 낙원을 건설하고, 느리지만 완벽하고 흐트러짐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잇는 느림보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느림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뉘우치고 반성되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그렇게 바쁘게만 서두르고 급하게만 앞을 향해 달려가고만 있었는지, 그렇다고 엄청난 삶의 업적을 쌓은 것도 아니고, 이뤄 놓은 일이라고 해야 결국은 의미도 값어치도 없는 일들이 대부분이라는 생각이 들 때, 차라리 여유만만을 즐기며 살고 있는 느림보 사람들의 삶이 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유만만의 삶을 즐기지만 이룰 것은 다 이루고 즐길 것은 다 즐기는 느림보 사람들은 남는 것이 시간이요 삶의 여유라면, 평생을 살아도 후회와 아쉬움이 없는 삶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몸은 여유를 누리지만 생각은 정곡을 찌르는 지혜를 짜내는 느림보 사람들, 그들의 삶을 스승으로 삼아 속세로 돌아갔을 때 의미있는 인생을 설계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에서 봉황의 등을 타고 유유자적하는 쇼시우시와 샤르비네와 나는 속세로 빨리 돌아갈 생각조차 지운 채 여유만만의 하늘을 날며 지상에서 펼쳐지고 있는 낙원의 모습들을 살폈다.
아름다운 산야와 녹음방초의 물결은 끝이 없고 이름 모를 꽃과 열매는 지천에 널려 있으며, 숲에서 열리는 풍성한 열매들은 사람과 짐승들이 사이좋게 나눠 먹으면서 평화로운 낙원의 질서를 지켜가는 모습들이 정겹게만 느껴졌다. 호화롭거나 복잡하거나 거창한 문명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소박하면서도 아름답게 물결 짓고 있는 낙원의 문명은 호화로움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박하고 아름다운 문명의 물결은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숲과 꽃물결 속에 지어져 있는 작은 집들은 별장 같은 느낌이 들도록 멋진 경치가 어우러진 장소에 지어져 있고, 별장 같은 작은 집들은 어느 것도 똑같은 모습이거나 비슷한 구조가 아니었다. 각각 주인의 취향에 맞도록 개성이 차이가 나는 작은 집들은 마을이나 군락을 형성하지 않은 채 대자연의 아름다운 물결 속에서 띄엄띄엄 숨 쉬고 있었다.
한마디로 쇼샤 낙원의 지상에는 많은 숫자의 느림보 사람들이 신선놀음을 즐기며 살고 있지만, 어디에도 마을이나 집단이 형성된 현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만큼 느림보 사람들은 개인적인 취향대로 살고 있으며, 고유의 생존권을 보장받으며 살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느림보 사람들이 사회성이 없거나 화합과 조화가 결핍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았고, 아무리 처음 본 사이끼리도 오랜 지기처럼 친분을 과시하고 화기애애한 세상의 질서를 잘 지켜나가고 있었다.
비록 쇼샤 낙원이 현실의 공간과 파장이 다른 이차원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왠지 알 수 없는 정감이 들고 또 한편으론 아주 특별한 느낌이 들게 하는 별천지이기도 했다. 샤르별의 4차원 문명세계는 초월적이고 거창한 우주문명의 진수를 느끼는 세상이라면, 이차원세상의 쇼샤 낙원은 소박하고 아름다우면서 삶의 참 모습을 그려보는 순간들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쇼시우시와 샤르비네와 나는 쇼샤 낙원의 하늘을 날다가도 땅으로 내려가 느림보 사람들이 삶을 즐기는 모습들을 직접 살펴보기도 하고, 구경을 마치면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 바다를 건너고 높은 산을 넘어서 새롭게 펼쳐지는 세상들을 구경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널 때마다 쇼샤 낙원의 새로운 세상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느림보 사람들이 입고 있는 의상은 모두 다르고 살고 있는 풍습도 모두 달랐다. 골골마다 느림보 사람들이 살고 있고, 사는 풍습과 모습들은 다 달랐다. 그야말로 쇼샤 낙원은 천태만상의 조화가 다 펼쳐지는 세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그 천태만상의 조화 속에서 느림보 사람들은 모든 차별적 개성을 인정받고 발휘되는 세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느림보 사람들의 화기애애함과 조화로움은 어디서도 변하지 않는 사회질서의 기본이었다. 천태만상의 변화 속에서 지켜지는 이질적 조화의 질서가 이차원세상 쇼샤 낙원의 흉내낼 수 없는 매력이었다.
봉황의 등을 타고 쇼샤 낙원의 이질적 조화로움을 구경하면서 우리 셋도 다른 느림보 사람들의 행동에 익숙해져 서두르거나 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빠른 시간내에 좀 더 많은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 애쓰지도 않았고, 온 세상의 변화를 다 구경하려고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여유만만의 한가함을 즐기며 이차원세상 쇼샤 낙원의 하늘과 땅을 주유하고 있을 때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느낌이 없었다. 해가 뜨는지 달이 지는지 관심이 없었고 몇 날 며칠의 여행을 끝내고 현실의 공간으로 복귀할지 계획조차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구름에 달 가듯, 물에 뜬 가랑잎이 정처 없는 여행을 떠나듯, 바람이 부는 대로 물이 흐르는 대로 마음의 여유는 태평이기만 했다.
그렇게 세월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느림보 사람들의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을 구경할 수 없었다. 젊은이인지 늙은이인지 구분이 안 되고 어른인지 아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머리모양이든 옷차림이든 각각의 취향과 취미를 살려 몸을 가꾸고 치장을 하기 때문에 누구나 평온하고 고상한 아우라만 느림보 사람들의 표정에서 읽혀질 뿐이었다. 그러한 느림보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의 세월과 일대기를 끝내고 생을 마감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쇼샤 낙원을 주유하다가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삼아 작은 집을 짓고 있는 느림보 사람들을 발견했다. 작은 집을 짓는 자재들은 대부분 목재라든가 흙이라든가 천연소재의 천이나 장식품들이었다.
지구 사람들이 그렇게 작은 집들을 지으려면 아마도 서두르면 사흘이요 늦어야 열흘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런데 느림보 사람들이 작은 집을 한 채 짓는 시간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길었다.
느림보 사람이 새로 지으려는 집은 정자처럼 생긴 아름답고 작은 집이었다. 집을 짓기 전에 이미 조감도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지붕이 아름답고 기둥에는 아름다운 조각들이 새겨지고 처마 끝에는 아름다운 장식이 매달리며 바닥은 천연보석이 깔리도록 설계된 집이었다.
이 외에도 기둥이나 서까래로 사용하는 목재는 모두 향기가 나는 향목으로 사용하며 벽이나 천정에 칠하는 물감들은 귀한 꽃과 열매와 나뭇잎에서 얻은 재료를 사용하며 벽을 쌓는 흙이나 돌 같은 소재들은 모두 보석의 알맹이나 가루를 사용하도록 설계의 재료 구성이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설계도에 의해서 느림보 사람이 집을 짓고 있는 현장을 찾아가보니 느림보 사람 몇몇이서 집을 짓고 있는 모습은 노는 것인지 일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될 만큼 답답했다.
새로 짓는 작은 집은 이제 겨우 주춧돌 위에 기둥이 세워져 있고, 지붕의 틀만 겨우 갖추어져 서까래를 까는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집을 짓는 한 인부는 기둥에 조각을 새기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고 정교한 조각을 새기고 있었는데 행동은 느리지만 이미 새겨진 조각의 섬세함은 극찬할 만했다.
조각을 새기고 있는 인부에게 내가 질문했다.
"기둥 하나를 조각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소요됩니까?"
조각하는 인부는 내 얼굴은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일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건성으로 대답했다.
"10년이면 족하지…."
나는 다시 지붕에 서까래 까는 작업을 하는 인부에게 질분했다.
"지붕을 완성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립니까?"
서까래 까는 인부는 일에 몰두하면서 똑같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30년이면 족하지…."
나는 다시 바닥 재료로 사용할 보석돌을 다듬고 있는 인부에게 질문했다.
"보석을 갈아서 바닥을 모두 완성하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립니까?"
바닥 작업을 하는 인부도 똑같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50년이면 족하지…."
이 외에도 다른 작업을 하는 인부에게 물어도 역시 비슷비슷한 대답들이 들려왔다. 결국 작은 집 한 채를 완성하는 시간이 100년은 족히 걸린다는 인부들의 대답이었다.
답답하리만치 느리고 굼뜬 행동으로 일을 하고 있는 인부들의 모습은 조금도 일에 쫓기거나 서두르는 표정들이 없었다. 일을 하면서도 인부들끼리 잡담을 나누다 장난을 치기도 하고 일하기 지루해지면 일손을 놓은 채 봉황을 타고 하늘로 훌쩍 날아올라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놀면서 여행하면서 만들어지는 작은 집이지만 그 견고함과 아름다움은 놀랄 만 했다.
다른 장소에서도 역시 새집을 짓고 있는 장면들을 더 목격했지만 어떤 집짓는 현장에서나 벌어지는 인부들의 일하는 태도는 비슷했다. 그렇지만 100년이 넘게 걸려 완성한 작은 집의 모습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훌륭한 작품들이었다.
느림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들을 방문할 때 어느 집에서는 '딸그락 딸그락' 베틀소리가 들려왔다. 그 집에서는 아름다운 직녀가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있었다. 아주 가는 실을 이용해서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베를 짜느라 직녀가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틀은 계속 움직이지 않았고 멈추었다 움직이고 멈추었다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베틀이 움직이는 시간보다 멈추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직녀는 베를 짜면서 놀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술을 마시면서 친구들이 찾아오면 잡담을 나누면서 일삼아 베를 짜지 않고 놀기 삼아 베를 짜고 있었다.
"베 한 필 짜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나요?"
샤르비네가 그 직녀에게 물었다.
"3년이면 족하답니다."
직녀는 수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옷 한 벌을 만드는데 몇 필의 베가 필요하나요?"
샤르비네가 묻자 직녀는 다시 수줍게 대답했다.
"옷 한 벌을 지으려면 세 필의 베가 필요하답니다."
샤르비네가 곰곰이 생각하다 다시 물었다.
"옷 한 벌을 만드는데 10년의 시간이 필요하군요?"
직녀는 다시 수줍게 대답했다.
"10년 동안 베를 짜서 옷 한 벌을 완성하려면 다시 3년은 걸린답니다."
결국 베를 짜서 옷 한 벌을 지어 입는 시간이 13년은 걸린다는 직녀의 대답이었다.
직녀의 대답을 다 듣고 나서 샤르비네가 다시 물었다.
"13년 걸려서 지은 옷으로 몇 년을 입을 수 있습니까?"
"100년을 입어도 닳지 않고 1,000년을 입어도 줄지 않는답니다."
이말을 마치고 직녀는 친구가 찾아오자 봉황을 타고 하늘을 날아서 어다론가 여행을 떠났다. 직녀와 그녀 친구가 봉황을 타고가면서 떠드는 웃음소리가 '까르르….' 하고 멀리까지 들려왔다.
다시 어느 집 앞을 지나려는데 마당에서 화단을 가꾸는 느림보 사람이 있었다. 화단의 부드러운 흙을 잘 손질한 후 꽃씨를 뿌리고 있는 중이었다.
꽃씨를 뿌리는 느림보 사람에게 내가 물었다.
"꽃씨를 뿌려서 꽃을 보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립니까?"
느림보 사람은 손을 천천히 움직이면서 대답했다.
"싹이 트는 시간이 3년이요, 싹이 튼 화초가 자라는 시간이 3년이요, 다 자란 화초에서 꽃이 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3년이요, 꽃이 만개하는 시간이 1년입니다."
나는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꽃이 만개하여 꽃가지에 매달려 있는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만개한 꽃이 꽃가지에 매달려 있는 시간은 3년이요."
"꽃나무가 자라서 꽃을 피웠다 지면 그 꽃나무는 바로 시들게 됩니까?"
"꽃나무의 일생은 100년이요. 100년 동안 꽃을 피우고 지기를 반복하다가 그 꽃나무의 일생은 끝나는 것이오."
느림보 사람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작은 집의 주변을 살펴보니 이름 모를 화초들이 만개하여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잇고, 숲처럼 우거진 울타리에는 온갖 종류의 나무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단 채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중에는 느림보 사람들의 식량이 되는 열매도 섞여 있었다.
느림보 사람은 그 중의 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오더니 단단한 껍질을 벗긴 후 우리들에게 열매의 속살을 먹으라고 권했다.
단단한 껍질 속의 열매 속살을 입에 넣자 고소한 향기가 몸 속으로 퍼지며 많은 기운이 솟귀는 느낌이 들고 기분도 좋아졌다. 느림보 사람은 다시 술나무에서 딴 열매에서 술을 짜내더니 우리에게 마시라고 권했다.
술나무 열매의 술을 마시니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며 기분은 더욱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느림보 사람이 대접해주는 특별한 식사를 대접받고 나서 내가 다시 질문했다.
"열매가 달린 나무들은 그 수명이 얼마나 됩니까?"
느림보 사람은 깊은 생각도 없이 대답했다.
"열매를 달고 있는 나무들은 그 수명이 3천 년이오."
"3천 년 동안 열리는 나무 열매를 사람의 식량으로도 사용하고 짐승의 먹이로도 사용한다는 뜻이군요?"
"우리들 세상의 사람과 짐승들은 3천 년 동안 열리는 나무 열매를 함께 식량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식량 때문에 서로 싸우거나 다투는 일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느림보 사람의 친구가 찾아왔다. 느림보 사람의 친구들은 남자와 여자가 섞여 있었다. 모두 아름다운 의상을 차려 입은 미남과 미녀들이었다.
느림보 사람은 친구들에게 열매술을 대접했고 그들은 곧 술기운에 취해갔다. 열매술에 취한 그들은 즉석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르 부르기도 하며 신선놀음에 빠져갔다. 느림보 사람들은 우리들 셋이 곁에 있는지 마는지 관심도 없는 표정들이었다. 우리들 셋은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를 떠서 다시 다른 장소를 찾아 봉황을 타고 이동했다.
참으로 낙천적이고 근심걱정이라고는 모르고 사는 여유만만의 이차원세상 쇼샤 낙원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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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구인들이 쇼샤낙원에 적응하는데는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네요^^
시간을 모르는 낙원이야 말로 끝 없는 낙원일것 같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낙원에 실수라는 것이 있긴 할지 모르겠지만
실수라는 것이 전혀 없을 것 같기도 할 만큼 완벽한 곳이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