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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역설과 모순
김동원
A : 선생님 대체 역설이 무엇이죠?
공광규 : 역설(페러독스)은 상식으로는 모순되나 실질적인 진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을 흔히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정작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사상이고 이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펜이 칼보다 강한 것은 진실이 되는 것입니다(이야기가 있는 시창작 수업, 2009 화남).
A : B님. 현대시 속에 역설적 표현을 쓴 좋은 예가 있을까요?
B : 그럼요. 조지훈 시인의 「승무」가 대표적입니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 「승무」 전문
B : 3연의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이 표현이 역설입니다.
A : 그러고 보니, 고운데 어떻게 서러울 수가 있죠.
공광규 : 역설의 가장 큰 특징은 그 표현이 문법적 형태로는 옳은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일차적 의미로는 뜻이 모순되어 통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소리 없는 아우성(유치환, 「깃발」),” “찬란한 슬픔의 봄(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 등의 예입니다. 논리적으로는 문장이 모순되지만 내면적으로는 깊은 의미가 생겨나면서 시적 울림을 형성하게 됩니다.
역설과 반어는 상반된 모순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반어는 내적 의미를 반대로 표현한 것이고 역설은 내적 의미와 외적 의미의 모순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이야기가 있는 시창작 수업, 2009 화남).
A : 이번에는 분위기를 바꿔 오규원 선생님에게 반어와 역설의 어원을 배워 볼까요?
오규원 : 반어(反語) irony는 그리스 희극의 한 주인공인 에이론 Eirondmf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이론은 자기 과시적인 인물인 알라존 Alazon과 반대로 ‘자신을 은폐하는 자’입니다. 즉, 의도적으로 자신의 실상을 숨기고 보다 어리석은 체하는 것입니다. 이 에이론이 종말에 가서는 알라존을 이깁니다. 이 에이론처럼 실상 또는 진실을 안으로 숨기는 수사법이 곧 반어입니다. 반어의 어원(語源)인 에이로네이아 eironeia도 ‘은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반어는 에이론처럼, 의도적으로 실상 또는 진실을 숨기고 표면적으로는 다르게 말하는 수사법입니다. 흔히, 우리는 잘못한 사람에게 반대로 ‘잘했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가 바로 반어입니다. (현대시작법, 문학과지성사)
A : 오규원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혹시 B님, 반어적 기법을 사용한 시로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요?
B : 예, 김소월의 「진달래꽃」 마지막 연에 사용된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이 표현이 반어로 유명합니다. 실은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내는 것이 죽기보다 싫지만, 혹 붙잡으면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아, 화자는 이별의 아픔을 꾹꾹 눌러 참고 있는 셈입니다. 저는 이 장에선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속의 반어를 소개할까 합니다.
Ⅰ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Ⅱ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 전문
A : 스톱! B님. 이번에는 제가 한 번 반어를 맞춰보겠습니다. 1연에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이것이 반어적 표현 맞죠.
B : 와우! 제법인데요. 커닝했죠, A님. 만약 커닝이 아니라면, 왜 위의 시행이 반어인지 설명할 수도 있겠네요?
A : 음, 제 짐작엔 아마도 화자는 ‘그대’를 짝사랑하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그대’는 나의 짝사랑을 모르고 있겠지만요. 어쩌면 나의 사랑은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처럼 보잘 것 없는 일상 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도 끝이 날 테지만, 그 때까지라도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그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엿보입니다. 또 한편 곰곰 짚어보면 나의 사랑은 결코 ‘사소한 일’ 이 아니며, 오히려 그 사랑이 너무 간절하고 깊어서 그렇게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이겠지요.
A : 오규원 선생님. 아까 위에서 역설의 어원은 말씀 안 하셨는데요.
오규원 : “역설(逆說) pradoxdms para(넘어서)+dox(진술)이란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그 표면적인 진술 너머에서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 수사법입니다. 이와 같이, 표현된 것과 은폐하고 있는 표현의 구조가 반어와 유사하므로, 역설을 반어의 한 종류로 보기도 합니다”(현대시작법, 문학과지성사). 이성복의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 지성사, 1980) 속에 수록된 「그날」이란 시가 역설의 멋진 예입니다.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占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그날」 전문
위의 끝 행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시구가 역설입니다. 모두가 병들었다면 당연히 아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프지 않습니다. 아니, 아프다는 감각이 없습니다. 「그날」에 나오는 모든 시적 정황은 바로 아프다는 감각을 잃고 있는 우리들 삶의 한 국면을 암시적으로 열거해 놓은 것입니다. (…)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오규원) 않은 그 당시 현실 사회를 역설로 비판한 것입니다.
A : 공광규 선생님, 오래 기다리셨지요. 방향을 조금 돌려서 위에 인용된 역설의 예말고, 선시(禪詩), 또는 선시풍의 역설적 시가 없을까요?
공광규 : 선시에 나타난 언어의 비약과 파격의 수사법은 역설과 유사합니다. 언어당착적인 모순어법을 사용하여 깨달음의 세계를 글로 표시하기 때문입니다. 선시적 표현기법의 모법은 아무래도 역설이며 언어당착입니다. 선시는 불가능한 사실의 열거를 통해 초월적 은유를 하는 것입니다. 모순된 표현으로 서로 다른 두 세계를 동질화시키는 것이지요. 이런 어법은 시적 대상에 상상력의 자유와 초월적 인식을 보여줍니다(이야기가 있는 시창작 수업, 2009 화남).
A : 김동원 시인님, 혹시 현대시 중에 모순어법을 통해 “신비스럽고 초월적인 진리를 나타내는”(휠라이트 ‘존재론적 역설’ 시의 예가 있을까요?
김동원 : 먼저, 제가 그런 시의 예를 들기 전, 명저 톨레랑스가 필요한 기독교의 저자 이우근 선생님이 쓴 ‘역설과 모순어법’에 대해 인용해 볼까 합니다.
이우근 : “말과 글에서도 역설이나 반어의 자어상위(自語相違)로 사물의 핵심을 꿰뚫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자어상위는 불교의 인식논리학인 인명(因明學)의 사종구과(似宗九過) 중 하나로,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어법을 가리킵니다.
‘무’자화두(無字話頭) 같은 선가(禪家)의 공안(公案)들은 자어상위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물음의 띠를 비틀어 역설의 답으로 꼬아 붙인 간화선의 화두는 무한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띠와 비슷한 구조를 지닙니다. 공안들은 물음 속에 이미 답이 숨어 있고 그 답은 또다시 새로운 물음을 던지면서 직지인심(直指人心)의 문답을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펼쳐갑니다. ‘비어 있고 가득한 만공(滿空). 잠잠한 말 묵언(黙言), 색즉시공(色卽是空)’ 같은 표현들에도 자어상위의 역설이 들어 있습니다.
자어상위는 노장(老莊)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도덕경 제1장 첫머리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의 해석은 여러 가지이지만, 대체로 “도라고 일컬을 수 있는 도는 영구불변의 도가 아니요, 어떤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이름도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혹은 “길다운 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오고 간 적 없는 처음 가는 길이요. 이름다운 이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부르고 들어본 적 없는 처음 부르는 이름이다”라는 풀이도 있습니다. 처음 가는 길은 아직 길이 아니고 처음 부르는 이름도 아직 이름이 아닙니다. ‘길 아닌 길, 이름 아닌 이름’인 셈이니 이런 역설이 없습니다.
동양사상은 정연한 논리보다 역설의 모순어법에 익숙합니다. 공자는 논어 위정편(爲政編)에 “아는 것을 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르게 아는 것(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이라는 역설을 남겼고, 장자의 제물론은 “내가 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지, 나비가 내 꿈을 꾸고 있는지 분별이 되지 않는” 호접지몽(胡蝶之夢)으로 자연과 인생의 오묘한 섭리를 직관했습니다.
뫼비우스의 띠에 올라타면, 꿈은 현실이 되고 현실은 꿈이 됩니다. 그대로 장자가 말하는 ‘나비의 꿈’입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영원한 오늘의 무한세계입니다.
상극을 버리고 상생을 추구하는 동양사상은 주관과 객관, 안과 밖, 중심과 주변의 이원구조를 부정합니다. 음양도 서로를 밀어내는 갈등이 아니라 태극의 조화를 추구합니다. ‘둘로 나뉘지도 않고 하나에 집착하지도 않는 無二而 不守一’의 화엄사상은 그 자체로 거대한 뫼비우스의 띠입니다.”
김동원 : 저는 윗글의 ‘역설과 모순어법’에 대한 명쾌한 설명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울러 194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96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단에 데뷔한 신대철의 시,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를 그 유사한 예로 들까 합니다.
죽은 사람이 살다 간 南向을 묻기 위해
사람들은 앞산에 모여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소년들은 잎 피는 소리에 취해 山 아래로 천 개의 시냇물을 띄웁니다. 아롱아롱 山울림에 실리어 떠가는 물빛, 흰나비를 잡으로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저 아래 개나리꽃을 피우며 활짝 핀 누가 사는지?
조금씩 햇빛은 물살에 깎이어 갑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리도 깎이어 물 밑바닥에 밀리는 흰 모래알로 부서집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흰 모래 사이 피라미는 거슬러 오르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그대를 위해 사람들은 앞산 양지쪽에 모여 있습니다.
―신대철,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전문
모순어법은 시의 분위기를 아주 기묘하게 비틀어 처음과 끝을 꼬아 붙여놓아, 그 시의 해석은 보는 이마다 듣는 자마다 천변만화입니다. 신대철의 독창적 재기가 번뜩인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는, 시 제목부터가 삶과 죽음이 갈마들며 이룬 ‘뫼비우스의 띠’처럼 신비합니다.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이 어떻게 흰나비로 날아와 앉을 수 있을까요. 시 행간을 너무 비약하여 일상적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 시의 모순어법을 나는 존재론적 역설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모순의 행간을 한 만 년쯤 잡아보았습니다.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이 죽어서 흰나비로 다시 환생해 날아와 서로 몸이 바뀐 채 앉을 수 있다는 그 얼토당토 안한 모순성을 진실로 믿으며, ‘소년’이 곧 ‘흰나비’요, ‘흰나비’가 곧 ‘소년’임을 불경의 윤회 세계와 접목해 생각해 본 것입니다.
1연의 “죽은 사람이 살다 간 南向을 묻기 위해/사람들은 앞산에 모여 있습니다”에서 ‘죽은 사람을 남향에 묻다’란 능동을 쓸 법 한 되, 시인은 죽은 사람을 묻지 않고 ‘죽은 사람이 살다 간 南向을 묻기 위해’라는 기찬 피동을 썼습니다. 즉, ‘남향’은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한 공간이자 둘이 다름이 아님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기존 시법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시적 화자의 타자적 관점에서 본 모순의 극치입니다. 또 왜 시인은 2연에서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소년들은 잎 피는 소리에 취해 山 아래로 천 개의 시냇물을 띄”운다고 했을까요. 이 시행 역시 ‘죽은 사람’의 경직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면서 ‘소년’들이 띄우는 ‘천 개의 시냇물’이 주는 생기발랄한 이미지와 대응시킴으로써, 삶이야말로 죽음을 뚫고 나온 새 촉임을 모순 미학으로 형상화한 셈입니다.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의 고봉이자, ‘무한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띠와 비슷한’ 시의 구조를 죽음의 긍정과 소년의 밝음 속에 꿴 멋진 시행이 2연의 끝 행입니다. “아롱아롱 山울림에 실리어 떠가는 물빛,”의 청각의 시각적 리듬도 좋지만, “흰나비를 잡으로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는다는 이 ‘낯섬’의 모순어법이야말로 장자가 무릎을 치겠습니다. 그런 연후 화자가 “저 아래 개나리꽃을 피우며 활짝 핀 누가 사는지?” 라고 생뚱맞게 툭 던진 설의법의 능청은, 그야말로 ‘물음 속에 답이 숨어 있고 그 답은 또다시 새로운 물음을 던’진 간화선의 경지이겠습니다.
3연의 “조금씩 햇빛은 물살에 깎이어” 간다는 이미지 또한 신선합니다. 대게 ‘햇빛이 물살에 튄다’ 정도로 쓸 법한데, ‘햇빛이 물살에 깎’인다는 표현은 기존 서정시의 시어의 피부를 한 꺼풀 더 벗겨낸 촉각적 섬세함이 돋보입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흰 모래 사이 피라미는 거슬러 오르고/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그대를 위해 사람들은 앞산 양지쪽에 모여 있”다는 이 인간 삶의 유한성에 대한 반복과 ‘양지’를 통한 시적 화자의 긍정적 인생관은, 시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가 지향하고 있는 시선이, 죽음과 생이 한 통로임을 명지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