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안나푸르나 트래킹 여행기는 본인이 회원으로 있는 LG전자 사랑방산악회의 21년 전 2001년도 해외등반 코스로 11월 13일부터 8박9일간 다녀온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푼힐전망대 트래킹"의 기록입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다녀와서
LG전자 사랑방(OB)산악회의 일원으로 이번 안나푸르나 푼힐(Annapurna Poon Hill) 전망대 트레킹(trecking)에 참가키로 결정하고 나서 미지의 땅 네팔(Nepal)의 산하에 대해 궁금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서울은 초겨울의 차거운 날씨인데 과연 3,000m가 넘는 고지에는 얼마나 추울까? 카트만두는 아열대지방이라고 하니 여름옷이 필요한 것인가? 그곳의 음식이 입맛에 맞을는지… 3,000m의 고지에서 고소증 증세는 없을까? 특히 감기가 심한 상태인 나로서는 고소증이 가장 겁이 나는 일이었다. 로지(lodge)라는 곳에서 잔다고 하는데 로지는 어떤 집인가? 침낭을 가져가야 한다니 그럼 텐트 속에서 잔단 말인가? 포터가 짐을 져 준다고는 하지만 이토록 많은 짐을 포터인들 어떻게 지고 간단 말인가? 8박9일(11월13일∼21일)의 여정으로 홍콩을 거쳐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Kathmandu) 로 가서 포카라(Pokhara)라는 도시로 이동한다. 포카라 에서 버스로 두 시간을 가면 나야풀(Naya Pul) 이라는 마을이 나오고 여기서부터 4일간의 트레킹이 시작된다.트레킹 후 카트만두에서 이틀간 문화관광을 한 다음 상해를 거쳐 귀국하는 스케쥴이었다. 1년중 11월이 가장 등산하는데 좋은 시기라 한다. 이 시기엔 비가 없어 하늘이 맑아 시계가 좋기 때문이다.
TNC라는 오지산악 전문 여행사의 가이드에 따라 트레킹을 하게 될 우리 일행은 총 20명인데, 그중 6명은 이미 15일 일정으로 먼저 가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켐프까지 갔다가 고라파니(Ghorapani)라는 곳에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같이 가는 일행은 14명인 셈이다. 가이드가 두명(남,여 각 1명)이 배정되었다. 어느 해외여행보다도 긴장되는 여행이었다. 필요한 지참물을 챙기고 또 챙기고 빠뜨린 것은 없는지 체크하며 준비를 해왔다.나의 트레킹 장도를 축하하고 성원해주는 많은 친구 선배 동료들, TMC회원들에게 건강한 모습으로돌아와야 할텐데… 걱정과 긴장이 교차한다. 드디어 D데이가 다가왔다. 아침 새벽에 떠나야 하기 때문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억지로 잠을 청했다.
11월 13일(화) -카트만두는 어느나라 만두?-
인천공항으로 가기 위해서 나는 강남터미날에서 새벽 5시 반에 출발하는 리무진버스를 타기로 했다. 집사람이 승용차로 터미널까지 가서 무거운 포터색을 공항버스 타는곳 까지 같이 들어 주었다. 그곳에서 우리 일행인 원용민사장 부부를 만났다. 원사장은 60대 후반으로 당초 등산보다 사파리팀으로 신청을 했는데 사파리팀이 아무도 없어 결국 우리와 동행한다고 했다. 평소 그분의 실력을 아는지라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강남터미날에서 인천공항까지는 50분이 소요되는데 쉬는 정거장이 없이 직행이었다. 7시에 모이기로 되어 있는데 너무 일찍 왔지만 늦는 것 보다는 일찍 와서 기다리는편이 좋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았다.모두들 일찌감치 모여들었다.
비행기(대한항공 KE-704)는 예정대로 8시50분 인천을 떠나 홍콩을 향하여 날았다. 비행기는 황해(동중국해)를 지나 상해, 항주, 광주 상공을 지나 홍콩 책랍콕(Chek Lap Kok) 국제공항에 현지 시각 11시 35분경 도착하였다. 서울과는 시차가 한시간 있으므로 서울시각으로는 12시 35분이니 근 4시간을 비행한 셈이다. 홍콩에서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는 오후 4시45분에 있어서 무려 5시간이나 transfer area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우리 일행중 김선배가 보이질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질 않아 모두 그를 찾아 나섰지만 헛일이었다. 그는 좌석을 비지니스로 업그레이드해서 탔는데 우리보다 먼저 내려 transfer area로 오지 않고 그냥 출구로 나가버린 모양이었다. 밖으로 나간 김선배는 아차 싶어 대한항공을 찾아 우리 일행 있는 근처로 전 화를 걸어와 다행히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럭저럭 한시간은 갔지만 네시간이나 남아 시간 보낼 아이디어를 내었다. 희망자에 한해 홍콩까지 갔다오는 기차를 타기로 했다. 이 열차는 機場을 출발하여 靑衣,九龍,홍콩까지로 되어 있는데 시간 계산을 해보니 홍콩 까지는 좀 무리인 것 같아 九龍까지만 갔다 오기로 하고 라운드티켓을 끊었다. 九龍까지는 25분이 걸리고 왕복티켓은 홍콩달러로 90불이었다. 5시간을 보낸다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시간이 되어 네팔항공 비행기에 오르니 네팔 스튜디어스의 인상이 색달랐다. 처녀 같기도 하고 아줌마 같기도 한데 배가 펑퍼짐하게 부른 걸 보니 아줌마 같은데 이마에는 붉은점을 하나같이 찍고 있었다. 누군가 해석을 하기를, 그 붉은 점은 결혼한 사람을 표시한다고 해서우린 그런줄 알았다. 우리는 네팔에 가서야 그 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다.
홍콩과는 시차가 2시간 15분이 있어서(서울보다는 3시간 15분이 늦음) 카트만두 공항에 나오니 저녁 8시(서울 11시 15분)가 되었다. 5시간 반을 비행한 셈이다. 짐을 찾는데 가관이었다. 얼마나 짐이 많은지 상상키 어려웠다. 짐도 나이롱 천막천으로 만든 가방류가 한없이 많았다. 홍콩, 방콕, 상해, 뉴델리 등에서 오는 승객이니 보따리 짐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리라. 또 우리 처럼 여행오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짐들이 많았다. 전부 장기간 산행을 하는 여행객들이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짐 찾는데 한시간반이나 걸렸다. 가이드의 말로는 길때는 세시간도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그만 사고가 생겼다. 우리일행중 최 전회장의 짐이 없어진 것이다. 아무리 찾아보고 항공사와 얘기해도 알 길이 없었다. 홍콩에서 없어진 것인지, 인천에서 잘못 실린 것인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일반 여행객 짐도 아닌 등산짐인데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일단 내일 오는 비행기를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짐 때문에 스케쥴을 바꿀 수는 없으므로 일단은 등산복장, 양말, 배낭, 모자 등 일체를 시내에서 빌려가기로 했다..카트만두공항 밖으로 나오니 현지 가이드가 마중나와 있었다.
나마스떼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현지말을 배웠다. 이 나마스떼는 산행중 계속 사용해야 하는 단어가 되었다. 오는 비행기에서 식사를 했는데 또 굳이 한식당으로 가야 한단다. 우리 시각으로 따지자면 밤 12시에 말이다. 도착한 식당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秘園으로 삼겹살이 전문이었다. 女주인(현지어로 사우니 )의 말로는 남편(남자주인: 사우지 )이 산을 좋아하는 산악인으로 남편을 따라 이곳까지 와서 식당을 경영한지 1년이 되는데 남편은 주방에서 된장찌개를 전문으로 만든다고 한다. 삼겹살, 갈매기살과 김치국 등 음식솜씨가 대단하다. 대부분 재료를 서울에서 가져와 마치 한국의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는 착각을 하게 했다. 호텔로 오는 동안 카트만두의 지형설명이 있었다.
카트만두의 주위는 모두 산이고 원래 호수이던 도시가 호수의 물을 神이 빼내서 호수가 변하여 카트만두가 되었단다. 해발 1,300m에 위치한 카트만두는 인구 50만의 네팔의 수도로 바탄, 박타풀 등 주변 고대 왕국도시까지 어우러져 세계 각국의 히말라야 등산객과 관광객이 몰려드는 관광도시였다. 누군가 우스개 소리를 했다. 카트만두 는 어느나라 만두냐? 하니까 그야 네팔만두지~!. 호텔에 들어와 우선 환전부터 했다. 이 나라의 화폐단위는 루피(Rupee)로 미화 1달러는 72루피인데 보통 상점에서는 75루피로 거래되었다. 취침하려고 시계를 보니 12시를 넘고 있었다. 서울 시각으로 계산하니 3시15분. 잠을 자야 내일 활동이 가능하다.피곤한 하루가 시작된 셈이다.
11월 14일(수) -11월의 히말라야의 벚꽃,염소와 산양들---
오늘 오후에 처음으로 등산이 시작된다. 10시50분 비행기로 포카라 라는 도시로 간다. 그러기 위해 8시에 아침식사를 했다. 공항까지는 5분도 안걸리는 가까운 곳에 호텔을 잡아 편리했다. 아침에 호텔문을 나와 길거리 구경을 했다. 나무와 꽃이 많고 새들도 많았다. 참새, 까마귀 들이 많았다. 참새를 보니 한국의 참새와 똑 같았다. 새들은 똑 같은데 사람모습은 왜 이렇게 다를까? 아열대지방의 뜨거운 햇볕 때문에? 그렇다면 네팔 참새도 까매야 할게 아닌가? 바깥온도는 15도 정도로 적당한 기온이었다. 국내선은 모두 9개 여행사가 취급하고 있었다. 공항은 마치 시골역같은 기분이었다.
공항상점에는 히말라야의 유명한 산들의 사진들과 엽서 과자류를 팔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오리온의 초코파이와 농심의 라면이 눈에 띄었다. 중국을 여행하면서 국내선의 연발을 수도 없이 겪었던 지난해의 기억이 새롭게 되살아났다. 도무지 시간이 되어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인원이 다 차야 떠난단다. 25명이 타는 경비행기로 은근히 겁도 났다. 사고는 없는지… 불과 30분을 비행하면 포카라 에 가는데 버스로 가는 방법도 있다.
버스로는 대략 8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포카라 에 도착하니 오후 2시였다. 준비한 김밥으로 점심을 먹고 3시15분경 포카라 를 떠나 버스로 나야풀 까지 갔다. 버스는 인도산으로 고물이었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 산으로 계속 오르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깊은 계곡, 녹색의 물, 농촌풍경, 멀리 보이는 높은산, 파란 하ㅡ늘, 구름, 고산의 계단식 논, 눈앞에 펼쳐지는 이색 풍경에 나의 정신은 잠시 나를 떠나 마음껏 구경을 하고 있었다.
포카라로 가는 경비행기
멀리 페와 호가 보였다. 페와 호에는 그 유명한 안나푸르나 주봉 이 호수에 그림자를 드리워서 그 절경이 기가 막힐 지경이란다. 사진을 찍어 팔고 있는데 그토록 웅장하고 아름다운 산이 물속에 담겨 있는 모습이 정말 신기하였다. 차로 산을 오르면서 희한한 광경을 많이 보았다. 벚꽃이 빨갛게 만개되어 있었다.
산사람들은 한결같이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한시간을 오른 뒤 다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털털거리는 버스에 따가운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커튼을 치고 틈새로 바깥의 색다른 풍경을 만끽하면서 내려오니 피곤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간혹 산 아이들이 길을 막으면서 노래를 하고 돈을 요구하였다. 불쌍하여 더러는 돈을 주고 가기고 하고 또 그냥 비키라면 순진한 아이들이라 금방 길을 내주곤 했다.4시45분경에 나야풀 에 도착하였다.지금부터 등산을 해야 한다.
숙소는 2시간이상 등산후 산중에 로지가 있다고 한다. 조금 가니 날이 어두 워지기 시작했다. 플래시를 준비해 왔지만 포터들이 지고 간 포터색 속에 들었으니 그 짐을 찾을 수도 없고 캄캄한 밤 중에 산길을 더듬으며 올라가기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한군데 들러 로지의 숙소를 찾았으나 방수도 적을뿐더러 이날따라 축제일이라 등산객이 많아서 빈방이 없었다.어쩔수 없이 다시 오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선두에 서서 주방장이 들고 가던 플래시를 빌려 제일 앞장서서 걸었다. 플래시가 없는 대부분의 우리 일행에게 혹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모두들 너무나 긴장한 탓에 기적같이 아무 사고도 없이 두시간을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목적지에 와서도 빈방이 몇개 없었다. 부득이 마루나, 빈곳은 무조건 침대를 깔아 잠자리를 만들어 날새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지나고 보니 이런 것도 큰 추억 거리가 되었다. 우리는 그날 밤 숙소를 마굿간이라고 불렀다.
고생스런 하룻밤이었다. 좁디 좁은 침대에 침낭을 깔고 누웠으나 화장실 가기도 힘들었다. 새벽녘에 소변보러 겨우 잠자리에서 빠져 나와 하늘을 쳐다보니 온 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나에게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북두칠성과 북극성도 또렷하게 보였다. 이토록 하늘에 별이 많은 줄은 미처 몰랐다.
11월15일(목) -마치 밀림지대에 온 듯 착각에 빠졌다--
아침이 밝아오니 멀리 마차푸차레(Macchapucchare 6,933m) 의 뽀죽한 아름다운 산 모양이 눈길을 끌어 당겼다. 미인은 어딜가도 아름답다. 마차푸차레 는 어느산과 비교해도 출중하게 아름답다. 높이야 낮지만 남성의 웅장함과 날카로움을 지닌 산으로 험준하기가 이를데 없다. 물론 위치가 다른 산보다 가까워서인지 안나푸르나 남봉(7,219m) 과 버금가는 높이의 준수한 산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아침을 일찍 먹고 7시 10분에 산행을 시작했다. 오늘 산행은 간드렁(Ghandrung) 을 거쳐 타다파니(Tadapani) 로 가는 코스이다.
멀리 안나푸르나봉 과 마차푸차레봉 을 보면서 계속되는 돌계단을 올랐다. 끝도 없는 계단이었다. 땀방울이 온몸을 적셨다. 마침 쿨맥스셔츠를 입어서 땀을 배출하는 데는 일반 런닝셔츠 와는 비교도 안되게 효과가 있었다. 더워서 차츰 옷을 벗고 결국 쿨맥스 한 겹만 입은 채로 산행이 계속되었다. 높은 산이 있으면 깊은 계곡이 있는 법. 옆 계곡에서는 맑은 물소리가 콸콸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고산에서 들리는 닭 울음소리, 곳곳에 인가가 있고 계단 논이 있었다. 이토록 높은 산이지만 곳곳에 폭포수가 있고 물이 흔했다.
10시경에 우리는 간드렁 에 도착하였다. 간드렁 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안나푸르나호텔에 자리를 잡았다. 호텔이라지만 로지나 음식점을 말한다. 보통 Hotel이라고 적은 곳은 guesthouse & restaurent이라고 적혀 있었다. 점심은 네팔음식으로 했다."달레 따까리" (감자카레)와 "달밧" (녹두죽)이었다.
전혀 거북하지 않는 음식이었다. 점심후 12시 15분부터 다시 산행이 시작되었다. 산에 높이 오를수록 인적은 없고 마치 밀림지대에 온 듯 착각에 빠졌다. 오직 들리는 것은 새소리와 물소리뿐이었다. 차츰 차츰 일행의 거리는 멀어지고 혼자서 외롭게 가고 있었다. 감기약을 계속 먹어서인지 어질어질하다. 약기운 때문인지, 감기로 인한 고소 증세인지 움직이는 것이 힘겨웠다. 혼자서 잠시 쉬면서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감기로 인한 고통이 이날이 절정인 것 같았다. 나는 이번 산행을 위해 무박2일의 지리산 천왕봉(1,915m)도 8시간에 주파하고 한주도 쉬지않고 산행을 하여 단련을 해서 자신이 있었는데 오랜 감기로 약해진 몸이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긴장과 흥분속의 산행은 힘든 것을 모두 잊게 했다.오후 4시경에 타다파니 의 우리가 묵을 로지가 나왔다.
땀으로 젖은 몸을 샤워라도 해야겠는데 마침 더운 물이 나오는 샤워장이 있었다. 50루피를 줘야 한다고 한다. 유럽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샤워 순서를 기다려 더운 물에 머리를 감고 몸을 씻고 나니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그런데 베이스캠프에서 내려오는 Y 산악회 회장팀을 이곳에서 만났다. 오늘은 우리일행이 모두 한곳에 모이게 되므로 여기서 羊을 잡는다고 예정되어 있었는데, 羊이 없어 대신 닭백숙으로 회식을 한다고 한다.모처럼 이 히말라야 산중에서 닭백숙으로 소주와 회식을 하는 그 기분은 묘한 것이었다. 산행에 지장이 있고 고산에서는 금주가 원칙이라 많은 술은 마시지 않았다.
9시에 취침에 들었다. 수염은 길어 벌써 산사람이 다 된 듯 했다. 거울도 없고 면도도 하기 힘들었다. 이곳의 높이는 2,590m라 한다. 한라산이 1,950m이니 한라산 보다 640m나 높은 위치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숙소 롯지 롯지
계단논
마차푸차레봉이 단연 시선을 끈다.
11월16일(금) -고산지대의 보행법은 마치 로버트가 한발 한발 걷듯이-
아침 8시에 등반을 시작한다고 한다. 5시반에 기상하여 7시에 아침식사를 하였다. 주방장은 물론 네팔인 이지만 한국음식을 못하는 것이 없고 네팔인으로서는 네팔 내 한국음식 전문가 중 제1인자로 꼽힌다고 소개되었다. 김치도 직접 담그고 모든 반찬이 우리 입맛에 꼭 맞았다. 그런 의미에선 외국에 나왔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도리어 현지 음식을 먹어야 하지 않느냐고 불평들이 나왔다. 우리 음식을 마음껏 먹으니 음식이 안맞아 등산에 지장이 있다는 핑계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 타다파니 산장을 출발하여 점심때 까지는 데우랄리(Deurali) 까지 가야 한다. 오늘은 합류한 TNC여행사의 산악대장인 최이사가 앞장 서서 전체 일행을 가이드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는 산악 전문인으로 대학생 시절부터 이곳 네팔 히말라야를 17년간 다녔다고 한다. 그의 고산지대 등산법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고산지대의 보행법은 마치 로봇이 한발 한발 걷듯이 천천히 걷는 것이었다.
한발짝 걷고 쉰다는 기분으로 걷는데, 대신 쉬는 시간이 없이 계속 걷기만 한다. 보통 한국의 등산은 대개 30-40분쯤 빠른 걸음으로 걷고는 과일, 과자 등을 먹으며 한참을 쉬게 되는데 그 시간이 자그만치 20-30분이나 걸린다. 그러니 로봇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도 결코 속도가 느린 것이 아니다. 고산지대에서는 빨리 걸으면 금방 고소증이 와서 문제가 생긴단다. 그래서 한발짝씩 걸으면서 숨을 쉬고 발걸음과 호흡을 맞추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걸었더니 전혀 힘든 줄을 모르겠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리가 예정한 시간 보다는 한시간이나 단축되는 결과를 보고 모두들 놀랐다. 한시간 15분쯤 지나니 반탄티(Banthanti) "Hotel Hungry Eye"라는 재미있는 로지 이름이 나왔다. 계속해서 두시간을 더 가 데우랄리 에 도착하였다. 11시 15분이라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12시까지 기다릴 수 없어 그냥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모두들 라면이 먹고 싶다고 해서 辛라면밥이 준비되었다. 라면만으로는 요기가 안되니 라면을 먹고 국물에 밥을 말아 먹으니 맛도 좋고 배도 불렀다 .
근 3,000m의 고지에서 먹는 라면맛은 감히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12시에 다시 오후 산행을 시작했다. 5분쯤 지나 고도계를 갖고 간 일행의 말로는 이곳이 3,050m라 한다. 벌써 3,000m 를 넘어서고 있었다.
저 멀리 다울라기리봉(Dhaulagiri 8,167m) 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울라기리봉도 산악인들에겐 최고로 인기 있는 명산이다. 모두들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해발 3,200m를 기점으로 다시 하산이 시작되었다. 시간은 12시 35분. 모두들 내려가는 것이 아쉬운지 야호를 연발하였다.멀리 고라파니마을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길은 모두 돌계단으로 되어 있었다. 근 40분을 하염없이 내려갔다. 물론 무릎이 아팠지만 모두들 열심히 걸었다. 오후 1시반경에 고라파니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가 묵을 로지에 도착하니 1시 40분. 예정보다 너무 일찍 왔지만 대신 오늘은 휴식시간이 많아서 좋았다. 이곳 고라파니에서 잠을 잘 것이니까. 어제 먹지 못한 양고기를 이곳에서 먹기로 했단다. 羊 두 마리를 잡는다고 구경을 하란다.현장에 가보니 羊인지 염소인지 두 마리가 묶여 있었다. 우리 눈에는 염소인 것 같아 물었더니羊이란다. 우리가 생각하는 흰털이 많은 호주산 양도 있지만 염소처럼 생긴 산양류인데 보통 양고기를 램이라고 하는데 여기서의 양은 sheep 이라고 했다. 어쨌든 양을 잡는 광경을 호기심에서 보았지만 너무 잔인한 모습에 후회가 되었다. 두 마리로 회식을 했다. 처음 먹어보는 양고기지만 맛은 아주 좋았다. 물론 요리를 아주 잘 했기 때문이겠지만.
셀파들도 양고기 파티로 술까지 곁들고 회식을 시키니 흥겨운 노래와 춤이 끝없이 나왔다. 우리 일행중 이승일 사장이 이들 포터들에게 노래와 춤의 경연대회를 열어 주었다. 노래 최고우승자에게 5불, 최고의 춤꾼에게 5불의 상금을 걸고 자기들이 채점을 하도록 해서 재미있게 놀이를 이끌어 갔다. 그들 포터들에겐 좀처럼 없는 흥겨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승일 사장은 완전히 황제(?)대접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다울라기리봉
고라파니를 앞두고 기념촬영
11월17일(토) -수많은 인파가 그 장엄한 일출광경을 보려고 모여들었으나 -
오늘은 이번 트레킹의 절정의 날이다. 아침 새벽에 오르는 푼힐(Poon Hill)전망대 는 이번 트레킹의 최종 목표점이기 때문이다. 푼힐전망대 에서 아침 일출광경도 보고 안나푸르나 남봉 , 안나푸르나 주봉(또는1봉.8,091m) , 마차푸차레 , 다울라기리 등 명산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수 있기 때문에 유명한 곳이다. 물론 일기가 화창해야지 구름이라도 낀 날씨라면 모든게 허사가 되고 만다. 아침 4시에 기상. 모든 준비를 하고 5시에 푼힐전망대 로 향하였다. 한시간 좀 넘게 플래시를 들고 한없는 계단을 밟으며 오르니 그 유명한 푼힐전망대가 나왔다. 수많은 인파가 그 장엄한 일출광경을 보려고 모여 들었다. 그러나 그토록 고대하던 일출은 심술궂은 구름의 방해로 아쉽지만 볼수가 없었다. 혹시나하고 기다렸지만 헛일이었다. 3,210m의 고지인데다 새벽이라 몹시 추웠다. 다행히 바람은 세지 않았다.
기온이 0도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아래는 내의를 입고 위에는 내피를 단 파카를 입고 털모자를 쓰고 완전무장을 한 셈이다. 날이 새기 시작했다. 멀리 유명산들의 봉우리가 구름에서 벗어나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사진을 찍어댔다. 일출 대신으로 푼힐전망대 까지 왔다는 증명사진(푼힐전망대 간판이 보이는 사진)을 찍고는 아쉽지만 하산하기 시작했다. 하산하는데도 근 한시간이 걸렸다.
오늘은 하루종일 하산하는 일정이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8시20분에 하산을 시작했다. 대략 8시간을 계속해서 하산을 한다고 스케줄에 나왔다. 하산하여 버스를 타고 근 두시간을 가야 오늘 저녁 숙소인 포카라 호텔에 도착하므로 강행군을 해야한다고 미리 선전포고를 했다. 모두들 결심이 대단했다. 내려가는 코스이므로 고소 증세 걱정은 안 해도 되므로 한국식 속보가 필요했다. 내려간다는 것도 나이 든 분들에겐 관절 때문에 여간 힘든게 아니다. 8시간을 내려 가기만 해야한다니. 두시간을 쉬지 않고 계속 하산을 하니 반탄티 라는 마을이 나왔다. 그런데 그곳에서 찬송가 비슷한 노래가 들렸다. 가까이 가보니 The Victory Church 라는 교회인데 열명이 넘는 아이들이 목사의 지도로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일행 중 교인들의 말에 의하면 한국 찬송가와는 전혀 곡조가 다르다며 이상해 했다.달러돈을 얼마간 헌금으로 내 놓는 일행(교인)도 있었다. 이 나라의 종교분포로 봐서 80%이상이 힌두교이고 또 15%가 불교이고 3%가 회교라고 하니 정말 얼마 안되는 기독교 신자들을 이 깊은 산중에서 만난 것이다.
점심때까지 내려오는 길은 끝없는 돌계단이었다. 누가 이토록 많은 돌계단을 쌓았을까 궁금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트래킹을 하는 동안 꼭 필요한 준비물 중의 하나는 산중에 사는 아이들을 만날 때 줄수 있는 사탕이나 쵸코렛 또는 볼펜이다. 나도 미리 정보를 얻었기에 볼펜 스무자루, 쵸코렛, 사탕봉지를 미리 준비했었다. 그러나 배낭속에 넣고 가느라고 미처 꺼내주지 못하고 많이 남아 있었다. 하산하는 길에 전부 호주머니에 넣고 아이들을 만날 때 꺼내주니 편리했다. 아이들은 아예 등산객을 만나면 Give me sweet Give me pen 을 연발한다. 우리도 옛날 6.25 피난시절 미군들이 지나갈 때 껌,쵸코렛을 얻어먹으려고 따라 다녔던 기억이 났다.
울레리(Ulleri 2,070m) 마을을 지나 12시10분경에 퉁기퉁가 마을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가기로 되어 있었다. 이날의 점심메뉴는 수제비였다. 나이 든 사람들은 수제비를 다 좋아한다. 향수 때문일 것이다. 수제비를 배불리 먹고 오후 1시20분에 또다시 하산이 계속되었다. 이제는 돌계단의 급경사는 적고 강을 따라 경사가 완만한 하산길이었다. 감기 때문에 고생을 했지만 이제 끝이 난다는 희망 때문에 힘이 절로 솟았다. 나는 내 평소 실력이상으로 힘이 났다. 거의 뛰다시피 빠른 속도로 우리 일행의 회장인 유성삼씨와 선두에 서서 나섰다. 하산의 종점은 나야풀 이다. 우리가 등산을 시작한 곳이 나야풀 이었다. 결국은 오르는 코스와 내려오는 코스는 달라도 시작과 끝은 동일한 나야풀 이라는 곳이다.
점심후 1시간 반을 지나니 비레탄티(Birethanti) 마을이 나왔다. 비레탄티 는 제법 마을이 커서 상점도 많고 이곳에서는 석청꿀이 유명하단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건강식품이라면 사죽을 못쓴다. 석청이 좋다 하니까 한국의 방송국에서 조차 이곳의 석청에 대해 촬영을 해가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또 동충하초가 소문이 나서 여기서 동충하초를 찾는 한국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나야풀에 유회장과 선두에서 도착하니 오후 3시40분. 엄청난 강행군이었다. 시간계산을 하니 하산시간이 7시간20분. 예정보다 40분이 당겨진 셈이다. 일행이 모두 모인 것은 4시가 좀 넘어서였다.
포카라 까지 덜컹거리는 버스로 약 두시간을 타고서 그토록 기다리던 호텔에 도착했다. 이제 4일간의 그 힘든 산행은 이것으로 모두끝이 난 셈이다. 힘도 들었지만 추억거리도 많았다. 포카라 에서는 최고급호텔인 The Bluebird Hotel에 방을 배정 받고 먼저 집으로 전화를 했다.오지의 그토록 험한 산을 오른다고 걱정이 많은 집사람한테 안심을 시켜주기 위해 전화가 급했다. 그런데 호텔방에서는 전화가 안되고 호텔로비 지정된 곳에서만 통화가 되도록 해 놓았고 물론 콜렉트콜도 안되고 오직 현찰로 즉석에서 돈을 지불해야만 되었다. 집에서는 걱정이 많았는데 왜 이제야 전화를 하느냐고 하지만 산중에서 전화란 불가 하니까 이해는 되는 모양이었다. 돈을 아끼느라고 간단히 안부만 전한 시간은 2분 30초 돈으로 계산을 하니까 670루피. 약 9불로 우리돈으로는 11,500원 정도였다.
오늘 저녁은 시즐러스테이크(물소고기 스테이크)를 준비했다고 한다. 제법 큰 양식당 야외식당에서 제법 무드있게 식사를 준비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나의 생일이 이날인데 여행사측에서 나의 여권을 보고 오늘이 나의 생일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몰래 준비를 했던 모양이었다. 케잌과 샴페인을 준비하고 생일소개와 생일 축하노래까지 같이 불러주는 것이 아닌가? 난생 처음으로 외지에서 일행의 축하를 받으면서 생일을 맞아 감회가 깊었 다.여행사의 깊은 배려도 고마웠고 일행의 따뜻한 우정도 가슴에 깊이 남았다. 모처럼 호텔에 잠을 자니 몸도 편했다. 밀린 양말 빨래를 했다. 다섯켤레를 갖고 가서 매일 한 켤레를 신었지만 한번도 빨래할 기회가 없어 신었던 양말 모두를 한꺼번에 빨았다. 그러나 빨리 마르지 않아 계속 젖은 양말을 가방에 넣고 여행을 다녔다. 내일 부터는 카트만두 근교의 관광이 시작된다.역사가 깊은 나라이니 볼거리도 많을 것으로 기대가 많이 되었다.
푼힐전망대
푼힐전망대에서 유회장과 함께
LG사랑방 산악회원 일행과 함께
점심은 한국 수제비로~
11월18일(일) -아름다운 안나푸르나봉 산군이 호수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푼힐전망대 에서 일출을 보지 못해 매우 서운했었는데 오늘은 이곳 카트만두 근처의 "사랑곳"전망대(2,050m) 에서 일출을 보기로 되어 있었다. 역시 새벽 4시에 기상하여 5시 정각에 전망대로 출발하였다. 일단 차로 가서 전망대까지는 20여분 도로로 올라갔다. 많은 관광객들이 해뜨는 광경을 보러 모여 들었다. 길바닥과 상점에는 관광객들을 여러가지 토산품과 사진들을 진열해 놓고 손님들을 유인하고 있었다. 신비스런 일들이다. 붉은 해가 매일매일 떠오르고 지고. 우리는 관심없이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해가 나오면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고 해가 지면 하루를 마감하고. 언젠가부터 우리 인간은 그렇게 살아왔다. 일출광경은 역시 아름답다. 똑같은 일출이라도 이런 명소에서 그리고 높은 곳에서 남들이 자고 있을 때 일출을 일부러 보기 위해 부산을 떨고서 보면 한층 더 아름답고 위대하게 보이는 법인가 보다. 모두들 카메라 샷다를 터뜨리느라 정신이 없다.
전망대에 오는 이유에는 그냥 일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붉은 해의 일출과 이에 반사되는 여러 유명한 고봉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수 있기 때문이다. 해가 뜨기 전부터 흰눈으로 뒤덮인 높은 봉우리들이 밝은 빛을 내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햇빛을 고봉들이 먼저 받으니까 밝은 흰눈이 해가 뜨기도 전부터 비치이나보다. 일출을 보면 늘 느끼지만 엄숙하고 숙연해 지는 것은 자연의 신비함과 위대함 때문이리라. 아침 스케쥴로는 식사 전까지 페와 호로 드라이브를 하는 것이었다. 9시부터 다시 페와호에 와서 보트놀이를 한다고 한다. 아침식사는 호텔에서 아메리칸식 브렉파스트였다.
식사후 잠시 휴식을 한뒤 9시부터 다시 관광스케쥴이 시작되었다. 식전에 왔던 페와(Fewa) 호로 와서3개팀으로 나뉘어 보트를 탔다. 5∼6명씩 나뉘어 보트를 타고 선원이 노를 저어 호수 가운데에 있는작은 섬으로 갔다. 섬에는 TALBARAHI MANDIR사원이 있었다. 이 섬에는 많은 관광객과 예식복 차림의 신혼부부들이 많았다.네팔에서의 결혼은 대부분 부모의 중매로 결혼하는 케이스가 대부분이지만, 연애결혼한 경우도 있는데 특히 부모의 반대 때문에 친구 몇 명을 증인으로 하여 이곳 사원에서 예식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섬에서 나와 보트로 약 한시간을 호수의 물길을 따라 가면서 구경을 했다. 건너편에는 제일 높은 곳에 사원이 있었는데 힌두교사원으로 일본인 소유라고 했다. 이 페와 호에는 바닥이 진녹색으로 물위의 물체가 거울처럼 반사되어 비치고 있었다. 그래서 호수에는 안나푸르나봉등 아름다운 산들이 호수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으로 만들어 팔고 있었다. 불과 100루피(1달라:75루피)면 살 수 있었다.
가이드의 네팔문화와 지난번 왕가 일가족 자살사건에 대해 설명을 듣다 보니 페와호 유람시간이 끝나고 있었다.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 체크아웃을 하고 포카라 국내공항으로갔다. 오후 1시35분에 카투만두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이다. 점심은 한국식당에서 준비했다는 김밥을 공항2층 식당에서 먹었다. 우리를 태울 비행기는 경비행기로 22명이 정원이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탑승을 하니까 귀마개용 솜과 사탕을 주었다. 솜은 비행중 소음 때문에 귀를 막으라는 것이다. 비행을 하는 동안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산하와 구름을 감상하면서 30분 정도 날으니 벌써 카투만두 공항에 도착하였다. 이곳의 짐체크는 무조건 수작업으로 직접 가방을 열기 때문에 자기 짐은 자기가 관리해야 했다.
3시반경 우리가 묵을 Royal Singi Hotel에 체크인을 마치고 휴식을 취했다. 카트만두의 호텔에서도 콜렉트콜은 되지 않았다. 집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부재중이라는 멧시지만 남고 통화가 되지 않아 하릴없이 헛돈만 날렸다. 저녁식사는 한국식당인 비원에서 있었다. 이날은 이제 모든 등산일정은 마치고 시내관광만 남았으므로 모두들 술을 많이 마셨다. 양주를 다 마시고 종이팩 진로소주를 마셨다.소주값이 양주 반병 값이란다. 250루피로 우리돈으로는 5,000원 가까운 돈이다. 비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가져간 소주 종이팩은 다 떨어졌으니 비싸게 사 먹을 수 밖에.
사랑곳전망대에서 본 히말라야
사랑곳 전망대의 일출
페와호의 보트놀이
11월19일(월) -위용을 자랑하는 고봉들의 현란한 모습에 넋을 잃고-
오늘 스케쥴을 보니 오전엔 카트만두 옆 고대 왕국도시 바탄 시를, 오후엔 박타풀 시를 나갈콧트 전망대 로 가서 일몰풍경을 보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아침 관광을 나서기 전에 트레킹을 하는 동안 우리의 짐을 지고 다니던 포터들이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다. 불과 며칠새이지만 정이 들었다. 특히 가장 나이어린 주방의 귀염둥이 소년은 영리하고 붙임성이 좋아 모두들 좋아했다. 우리는 각기 10불씩 거둔 돈을 그들 급료에 보태 쓰라고 주었다. 여행사에 물어보니 그들의 일당은 대개 6∼10불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지고 간 헌 옷가지들을 모아서 포터 대표에게 주었다. 어떤 이는 미처 준비를 못했다고 자기가 입던 옷들도 벗어 주었다.그들에겐 큰 선물인 셈이다. 포터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면서 시내관광을 나섰다. 버스로 다니는 동안 현지 가이드의 네팔에 관한 안내가 이어졌다. 네팔은 147,100㎢로 14개 도시와 75개 군으로 되어 있다. 인구는 2,250만명으로 무려 68개의 민족과 언어(공식적)가 있다고 한다. 네팔의 주요종족은 북부의 부티아족, 서부의 마가르족, 중부의 네와르족과 구르카족,동부의 렙챠족 및 힘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포타로 일하고 있는 대부분은 셀파족으로 몽골인종의 티베트계 종족이다
네팔의 지배게급인 구르카족은 인도의 라지푸트계의 종족으로 16세기 이후 네팔의 지배 종족으로 군림해 왔다. 카트만두와 바탄, 박타풀은 대부분 네와르족이다. 뉴스도 17개 국어로 사용한다 하니 복잡하기 이를데 없다. 이 도시들은 300년전만 하더라도 3개의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한다. 문자가 아랍쪽과 비슷했는데 인도말과 네와르 말이 다르지만 문자는 같다고 한다. 이 문자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왔다고 한다.불경의 어려운 단어들이 모두 산스크리트이다. 히말라야의 히 는 눈이라는 뜻이고 말레는 집이라는 의미로 히말레 는 눈집을 의미한다. 네팔의 인종을 크게 대별하면 몽골계과 인도 아리아계 인종으로 나눌수 있는데 인도족 중에서 브라만족이 우수하여 네팔을 지배해 왔다.그들은 힌두교를 중심으로 타 문화와 언어를 말살하여 장기적으로 집권해 왔다.
네팔의 주 종족은 네와르족 으로 이들의 종교는 힌두교가 80%나 되며, 불교가 15%, 이스람교가 3%,기독교 등 기타가 2%로 구성되어 있다. 바탄 시는 카트만두에 인접해 있으며 차로 10분거리 밖에 되지 않았다. 바탄 시는 대략 2000년전의 도시왕국이다. 힌두교에는 모든 것이 신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신이 많다. 43,000개의 신이 있다고 한다. 창조의 신인 브라마 , 양육의 신을 뜻하는 비슈나 , 죽음의 상징인 시바 , 이들을 기리는 사원이 브라마사원 , 비슈나사원 ,시바사원 이다. 모든 사원을 관람할 때 이런 내용들을 알고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 네팔인에게는 종교와 문화가 절대적이다. 그래서 과거 타 민족이 왕정을 세워 지 배할 때도 이들 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였기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란다. 지금의 왕정도 약 300년전 인도에서 들어와 여타 왕국을 차례로 흡수하여 통일된 왕정 국가를 건설하였다. 바탄 이나 박타풀 도 몰락하여 흡수된 것이다. 지난 6월초 자살사건으로 왕, 왕비, 왕세자 등 일가 10명이 몰살된 네팔의 비렌드라 국왕이 11대로 같이 죽은 디펜드라 왕자가 12대, 그리고 지금의 갸넨드라 국왕은 전왕의 동생으로 13대째이다. 네팔국민들은 자살사건으로 보도된 왕족 대형 피살사건을 사실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그리고 전 국민들은 죽은 왕을 평소 존경하고 위대한 인물로 생각하여 지금도 호텔, 공항, 일반 사무실 모든 곳에 전 왕의 사진을 걸어두고 있었다.
월간중앙 7월호에서 이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취재하여 특집으로 보도된 바 있지만, 결혼문제에 얽힌 왕세자의 반항과 불화, 왕실내부의 권력다툼, 외부세력 개입설 등 세가지로 압축되고 있는 이 전대미문의 대 사건은 아직도 진상이 모호하며,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밝혀지리라 생각된다.
네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여자들 이마에 빨간 티카 를 붙이고 다닌는 것과 여자들의 긴 옷인 싸라 이다. 티카는 원래 승리를 기원하는 표시로 붙인 것인데 결혼하는 여자에게 이 티카 를 찍어주며, 명절 때나 행사시에도 티카 를 발라준다.여자들의 의상인 싸라 는 원단으로 5m나 되는 천을 몸에 두르고 다닌다. 이곳 여자들은 배꼽은 나와도 되지만 다리를 내보여서는 안된다. 꼭 가리고 다닌다. 이곳의 젊은이들은 주로 같은 계급끼리 결혼하는데 연애결혼은 거의 없다고 한다. 사원에서 브라만의 기도하에 결혼이 이루어진다. 네팔은 사방이 육지로 바다가 없는 나라이다. 그래서 인도를 통해야 바다로 나갈수 있다. 춈손지방은 사막뿐으로 이상하게도 산에 소금이 생산된다. 이는 원래 인도와 대륙사이에 바다가 있었는데 두 대륙이 가까이 접하면서 충돌하고 가운데가 솟아 히말라야가 된 것인데 따라서 바다부분이 산이 되 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산은 8,848m로, 시간이 흐를수록 높아지고~ 현재 높이는 8,850m라고 한다. 2m가 상승한 것이다.
바탄 시는 세계문화 유적지로 지정된 유명한 고대도시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었 것은 일반 시민의 생활이 그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서 관리가 너무나 소홀한 것 같았다. 어떤 의미에서 자연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 같아 관광객이 더 많은지도 모르겠다.
바탄 시를 걸어서 관광한 후, 11시 반경 우리일행은 박타풀 시로 들어갔다. 이곳 박타풀 은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어린애때부터 영어를 가르킨다고 한다. 네팔인들은 한국에 돈을 벌기 위해 노동자로 들어온 경우도 있는데 한국의 눈구경과 바다 구경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낮 온도는 무척 더웠다. 현재의 기온을 보니 섭씨25도나 되었다. 그러나 밤 온도는 6-7도로 서늘해 진다. 겨울에는 0도까지 내려간다. 박타풀 의 사원을 구경하는 중에 사원 내에 있는 식당에서 우리는 네팔식 음식인 "치킨커레"와 "달"을 맛있게 먹었다. 모두들 네팔 전통음식을 먹기를 원했다.
박타풀 도 오랜 전통을 가진 왕국도시로 사원을 비롯한 300년된 건축물을 관광객들에게 보이고 있었다.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신기한 것은 섹스장면이 건축물 기둥이나 벽면에 많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눈살을 찌푸리게하는 광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신기하기도 하였다.
4시가 되자 일몰광경을 보기 위해 차에 올랐다.이곳에서 약 20km 떨어진 나갈곳트 전망대로 가기 위해서다. 버스로 한시간 정도 걸린다. 오르막 비탈길인데 위험하여 천천히 오른다고 한다. 한쪽은 해가 지는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기에 담느라고 정신이 없고 반대쪽으로는 랑탕, 강쳉푸, 돌채락파 등 위용을 자랑하는 고봉들의 현란한 모습에 넋을 잃고 있었다.
나갈곳트 전망대에는 5색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는데 트레킹을 하는 도중 산간 마을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이 5색 깃발이 무엇인지 궁금하였다.이 깃발은 라마불교를 믿는 곳이라고 한다. 흰색, 청색,녹색, 황색, 적색의 다섯가지 색깔의 깃발에는 자세히 보니 글자가 가득 적혀 있었다. 티벹경전이라고 한다.
오후 5시 10분에 정확히 해가 떨어졌다. 한국의 서해안의 일몰구경도 가지만 멀리 이국 땅 네팔까지 와서 똑같은 해가 이곳에서 지는 것을 보면서 신비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7시에 도착하니 호텔에는 한 무리의 한국인들이 있었다. 에베레스트 트레킹팀이란다. 오늘 밤엔 같이 식사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전통있는 네팔식당으로 안내되었다. 입구에서 아가씨들이 티카 를 찍어주었다. 모두들 붉은 티카 를 보면서 신기한 듯 웃고 떠들었다. 전통 민속춤과 전통음식이 나왔다. 그곳의 술인 록시 를 마셨는데 마치 도수가 조금 약한 안동소주 같았다. 이곳 네팔에서도 우리나라 막걸리와 비슷한 창 이라는 술이 있는데 기장을 발효해서 만든다고 한다. 9시반까지 극장식 식당의 흥겨운 춤과 노래를 듣고 호텔로 돌아왔다. 내일이면 떠나는 날이다. 인간은 귀소동물이라고 한다. 불과 열흘도 안됐는데 벌써 집이 그리우니 어서 빨리 가고 싶은 생각뿐이다.
포타들과 헤어지며~
고대 유적도시 바탄시의 세계문화유산이 너무나 허술하게 보존되는 느낌이다.
11월20일/21일 - 과연 내가 해 냈구나 하는 뿌듯한 자신감과 함께-
오전시간은 자유시간이었다. 원래는 비행기로 에베레스트 옵션관광을 하는 시간인데 아무도 희망자가 없어 그냥 자유시간이 되었다. 120불을 내고 약 50분간 에베레스트 주변의 산들을 보는 관광인데 날씨 때문에 볼수 있는 확률이 50%라고 한다. 어쨌든 나도 희망자가 있으면 같이 비행기관광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모두 지쳐서인지 자유 시간을 원하는 것 같았다. 아침 늦잠을 자고 룸메이트인 양인철사장과 같이 걸어서 시내관광을 나갔다.시장거리로 유명한 타멜거리로 갔다. 카트만두 시내는 제법 북적 댔지만 질서가 없고 어지러워 도저히 오래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자동차도 많고 자전거가 많았다.
시장은 온통 등산장비, 전통관광상품, 양털로 만든 목도리, 수건, 침구류, 방석류 등과 이곳 염소털로 만든 캐시미어,파시미어 등 원단류가 많았고, 돌이나 야크뼈로 만들었다는 코끼리상, 섬세한 조각을 한 주전자나 그릇류, 쇠붙이에 힌두교의 조각이 된 종, 네팔을 상징하는 칼,우리나라 탈과 비슷한 탈종류들, 피혁제품들, 토파즈 보석류 등으로 세계도처에서 모여든 산악관광객들을 유인하고 있었다. 특히 등산용품은 유명한 세계적인 브랜드가 다 모여 있었다. 노스페이스는 마치 이곳이 원산지인 것처럼 보이는 가게마다 노스페이스 일색이었다. 알고보니 모두 가짜라고 한다. 그러나 전혀 표가 나지 않는다. 가격은 얼마나 싼지 기가 막힐 지경이다. 방수의 노스페이스 상의쟈켓을 양사장은 단 12불에 샀고,또 다른이는 30불에 샀다고 한다. 방수가 되는 고아텍스 하의도 10여불에 구입했다고 하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후시간에는 파슈파티나트(Pashupatinath temple) 사원으로 갔다. 이 사원은 화장터로 유명하다. 힌두교식의 화장은 인도에서만 볼수 있는줄 알았는데 네팔에서도 화장하는 광경을 관광코스로 볼수 있었다. 이 사원에는 하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하천둑에 화장을 하는 장소가 여럿 길게 자리하고 있었다. 씨발레 라고 하는 기도집이 화장장소 바로 옆에 있었다.
씨발레 는 씨바 와 알레 의 합성어라는데 씨바의 집 즉 기도집이라고 한다.인간이 죽으면 이곳 화장터로 유가족이 시신을 갖고 와서 기도를 한후 長子가 나무단 위에 시신을 얹고 불을 짚어 화장을 하는데 보통 3-4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이때 여자들은 절대 참석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울음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완전히 타고 난 시신은 가루가 되어 강물에 흘려 보내진다. 집에서 13일간 기도를 하는데 이는 우리의 49제 의식과 비슷했다. 영혼이 13일간 머물면서 떠나지 않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정을 떼기 위해 옷가지도 침대도,평소 사용하던 모든 물건들을 이 기간중에 태워서 버린다고 한다.
기도하는 씨바 의 흉내를 내면서 맨몸의 더러운 차림으로 길가에서 동냥을 구걸하는 싸두 가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관광객들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손짓을 한다. 사진을 찍고 대가로 돈을 요구한다. 이들은 맨몸으로 밑만 가리고 있는데 겨울에도 옷없이 견딘다. 나무열매를 목에 걸고 있었는데 이 열매에서 나는 열로 견딘다고 한다.
파슈파티나트사원 건너편은 시바 신의 상징인 링카(남근상) 를 모셔둔 수십개의 탑들이 늘어서 있었다. 파슈파티나트사원 을 나와 또 다른 불교사원인 스와이얌부나트 사원 으로 갔다. 카투만두의 서쪽 언덕위에 있는 이 사원은 원숭이들이 많아 몽키템플 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이곳 불교에서 특이하게 볼수 있는 것은 두개의 눈과 ?표시 이다. 두개의 눈은 자비와 지혜를 의미하며 ? 는 하나(1)라는 뜻으로 집중(Concenturation)의 의미라고 한다.
이 불교사원에는 힌두교사원과 공존하고 있어 특이했다. 이 사원의 언덕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면 카트만두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원에는 마네 라는 종이 수백개가 달려 있는데 신자들이 이 종들을 손으로 스치면 종이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이 종에는 옴마니반메홈 이 종 표면에 각인되어 있다. 스님의 가사(걸친 옷)는 한국과는 달리 붉은 색이었고 신발도 고무신이 아닌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 이곳의 불교도 선(禪)을 하는데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좋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욬(Yok 요가)이라고 부른다. 힌두교는 신이 너무 많아 이루 헤아릴수 없다. 재미있는 말이 있다. 사람보다 신이 많고 신보다 사원이 더 많다 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파슈파티나트 사원 화장터
스와이얌부나트 사원
저녁식사는 한국의 대표산악인인 박영석씨가 운영하는 빌라 에베레스트 에서 있었다. 네팔에 온 한국 등산객은 꼭 한번 들리는 곳이었다. 식사전 두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모두들 인근 타멜거리로 쇼핑겸 나들이를 나섰다. 주로 등산복과 등산용품에 관심이 많았다. 빌라에베레스트 식당에는 우리나라의 산악인들의 히말라야 등정 사진과 유명 산악인의 사인들이 걸려 있었다. 네팔에 있는 1,000개가 넘는 많은 산 중에서도 140개만이 입산이 허가가 되어 있다고 한다. 가장 멋있게 보이는 마차푸차레 도 네팔 당국이 허가를 하지않아 미답의 신비로운 산으로 남아 있다. 셀파들조차 신성시하여 등산을 반대한다고 한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공항으로 갔다. 상해로 가서 다시 인천으로 가는 아시아나로 갈아 타야 한다.밤 11시 50분발의 Royal Nepal Airlines편으로 시간 40분이 걸려 상해공항에 도착하였다.
두시간 15분의 시차가 있어 상해 현지시간으로는 오전 6시 45분이었다. 상해에서 인천으로 가는 아시아나항공은 12시30분에 출발. 환승하는 데 또 무려 5시간 반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면세점을 구경하면서 무료하게 긴 시간을 공항내에서 보냈다.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울과 상해는 시차가 한시간이어서 인천에 도착한 한국시간은 오후 3시.기다리던 조국 산하가 시야에 들어왔다. 복작거리는 서울에 빨리 가고 싶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일행들은 피곤함도 잊은채 짐들을 챙기느라 부산하였다. 모두들 개선장군처럼 무사히 히말라야 트레킹을 마치고 왔다는 들뜬 기분으로 얼굴들이 상기되어 있었다. 아흐레간의 생사를 같이 했던 전우들처럼 힘찬 악수를 나누며 한달후 12월 모임때 만나자고 약속을 하면서 각자 짐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나도 짐을 챙겨서 강남터미날행 리무진버스를 탔다. 불과 50분만에 강남터미날에 도착하였다. 택시를 타니 운전기사가 이상한 짐과 등산복장을 보고 어딜 갔다 오느냐고 묻는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온다고 했더니 나이도 연만하신 분이 대단하시다 라고 했지만, 칭찬인지 아니면 나이답지 않은 무슨 무모한 짓이냐 하는 표정이었다. 어째든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힘든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마친 소감은 과연 잘 해냈구나 하는 뿌듯한 자신감과 자랑스러움이다. 인간은 도전의 동물이라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도전의 마음이 약해진다. 이제 내년이면 나도 60대에 접어든다. 좀더 강한 도전의 유혹을 느끼며 내년도에도 그 이듬해에도 반드시 해외 트레킹에 참여할 것임을 다짐해 본다. <大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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