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좋은 방
월세방을 옮긴 뒤 생긴 습관이 있다. 하루를 열고 닫을 때마다 창밖의 가로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입주했을 때는 이미 앙상해진 가지 사이로 대로변의 차들이 보였는데 어느덧 두 계절이 지나 푸르고 굵은 잎사귀 말고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요즘 나는 그 잎더미 사이로 비쳐오는 햇살과 나뭇잎의 흔들림으로 날씨를 짐작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10층 건물의 4층, 한달 수입의 삼분의일을 고스란히 쏟아부어야 하는 복층 오피스텔에 입성하기까지 내 방의 형태나 수준은 조금씩 변해왔다. 부엌에서 쥐와 조우해야 했던 북아현3동 골목 끝자락의 월세방에서 시작해, 쥐가 없고 창문과 욕실도 없는 신림동 고시원을 경유하여, 쥐와 창문은 없지만 어엿하게 부엌과 화장실이 있던 중곡3동 전세방까지. 끊임없이 변화와 역동을 추구하는 나다운 ‘방살이’였다.
결정적인 일은 가장 최근에 살던 중곡동에서 일어났다. 보자마자 계약을 결심한 방이었다. 정보도 의심도, 무엇보다 돈도 부족한 스물 다섯의 독거청년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던 터라 서울 시세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낮은 전세가에 금방 홀려버렸다. 그런데 알고보니 법적 안전망에서 벗어나있는 무허가주택이었다. 소위 재개발 전문 ‘꾼’이 집주인이었던 그 집은 단독주택 한 동을 네 채의 원룸으로 개조한 형태였는데, 입주자 네 가구는 모두 사회적 약자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십대 여자인 나, 폐지와 병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시던 노부부, 다리가 많이 불편한 아버지와 백수로 추정되는 청년으로 구성된 부자 가정, 일용직 노동자인 남편과 중국인 아내 부부. 모두가 나처럼 이 집의 정체를 몰랐음이 분명했다. 알았더라도, 살다 나가는 데 큰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테다. 은근히 영리한 집주인은 계약 당시부터 그 사실을 알았음이 확실하다.
집주인은 친절하고 점잖게 계약서에 서명했다. 관리비는 일절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 만큼 따로 집 관리를 하지 않았다. 세입자 중 누군가가 공과금과 각종 대소사를 처리해야 했는데 집주인은 공손한 태도로 내게 그 역할을 부탁했다. 봉사정신 투철한 나는 넙죽 요청을 받아 4년간 무수히 많은 업무와 사건들을 처리했다.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었는데, 그 모든 사건은 전세보증금 반환 소송 사태로 모두 잊혀졌다. Thanks God!
들어간 것은 내 의지였지만 나오는 것은 주인의 의지에 달려있었다. 주인은 몇 달 전부터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선포한 내게 보증금을 줄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사실 돈도 없어 보였다. 나는 무허가주택에 살았던 죄로, 주인을 잘못 만난 죄로, 그 방의 계약이 종료되면 이사가려고 했던 다른 방의 계약금을 날려먹었다. 결국엔 소를 제기해야 했다. 나만 문제인 게 아니었다. 나머지 세 가구 중 부부 세입자는 반환 받는 걸 포기하고 나갔다. 부자 세입자는 몇 년째 보증금을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어르신 부부는 이 모든 사태를 듣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귀가 좋지 못했다. 결국 사태는, 주인의 항복으로 나만 보증금 전액을 받고 나오는 것으로 10개월 만에 일단락되었다.
하여 지금의 오피스텔은 내게 각별한 방이다. 삶을 영위하는 방 이상을 의미한다. 지난한 투쟁의 결과이며 급격한 신분 상승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밤마다 창으로 나무를 바라보며 잠들 수 있는 이 호사를 앞으론 누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현재의 삶을 보장해주는 노동 조건은 이 방의 월세 계약이 만료되는 올해 말에 종료된다. 이후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나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앞으로도 계약직을 전전할 것이며 월세 혹은 전세방 아닌 선택지를 갖지 못할 것이란 사실이다. 계절을 견뎌내고 이겨내는 게 나무의 생일진대 그보다 못한 것이 한국사회 독거청년의 생이 아닐까 싶다. 절대 나아지지 않을 월세시장,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전세시장, 이미 회생 불능 상태가 되어버린 듯한 노동시장을 보며 나는, 전망(展望, outlook) 좋은 방에 사는 것은 앞으로 불가능할 것으로 전망(展望, forecast)한다.
주제어: 나무
첫 시간에 말씀하신 것이 생각나 '나무'를 주제어로 써봤습니다.
8주동안, 처음 생각만큼 열심히 해내지 못해 스스로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그래도 그동안 즐거웠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