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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단의 별들
향수 외 4편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카페 프랑스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
비뚜루 선 장명등,
카페 프랑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시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뻣적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늑이는 불빛
카페 프랑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비뚤어진 능금
또 한 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
“오오 패롯(앵무) 서방! 굿 이브닝!”
“굿 이브닝!” (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려!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무 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 강아지야
내발을 빨아다오.
내발을 빨아다오.
유리창 1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갈릴레아 바다
나의 가슴은
조그만 갈릴레아 바다
때없이 설레는 파도는
美한 풍경을 이룰 수 없도다.
예전에 門弟들은
잠자시는 주를 깨웠도다.
주를 다시 깨움으로
그들의 신덕은 복되도다.
돛폭은 다시 펴고
키는 방향을 찾았도다.
오늘도 나의 조그만 갈릴레아에서
주는 짐짓 잠자신 줄을 ―.
바람과 바다가 잠잠한 후에야
나의 탄식은 깨달았도다.
곡마단
소개 터
눈 위에도
춥지 않은 바람
클라리오넷이 울고
북이 울고
천막이 후두둑거리고
기가 날고
야릇이도 설고 흥청스러운 밤
말이 달리다
불 테를 뚫고 넘고
말 위에
계집아이 뒤집고
물개
나팔 불고
그네 뛰는 게 아니라
까아만 공중 눈부신 땅재주!
감람 포기처럼 싱싱한
계집아이의 다리를 보았다
역기선수 팔짱 낀 채
외발 자전거 타고
탈의실에서 애기가 울었다
초록 리본 단발머리짜리가 드나들었다
원숭이
담배에 성냥을 켜고
방한모 밑 외투 안에서
나는 사십 년 전 처량한 아이가 되어
내 열 살보다
어른인
열여섯 살 난 딸 옆에 섰다
열 길 솟대가 계집아이 발바닥 위에 돈다
솟대 꼭두에 사내 어린아이가 거꾸로 섰다
거꾸로 선 아이 발 위에 접시가 돈다
솟대가 주춤 한다
접시가 뛴다 아슬 아슬
클라리오넷이 울고
북이 울고
가죽 잠바 입은 단장이
이욧! 이욧! 격려한다
방한모 밑 외투 안에서
위태 천만 나의 마흔아홉 해가
접시 따라 돈다 나는 박수한다.
정지용의 시와 삶
이숭원(李崇源)
1. 출생과 성장
정지용은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청북도 옥천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한약방을 운영하여 처음에는 넉넉한 생활을 했으나 어느 해 여름 큰 홍수로 집과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고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지용은 9세 때인 1910년 4월에 옥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년제 과정을 마치고 1914년 3월에 졸업했는데, 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3년 12세의 나이로 결혼했다. 부인도 그와 동갑이어서 그 당시로서도 조혼이었다. 이렇게 조혼을 하게 된 것은 지용을 빨리 결혼시켜 후손을 보고자 한 부친의 뜻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지용은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었다. 「대단치 않은 이야기」(『아동문화』, 1948. 11)라는 수필에서 “소년 적 고독하고 슬프고 원통한 기억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진다.”고 말했는가 하면, 18세 때에 지면에 처음으로 발표한 소설 「삼인」(『서광』, 1919. 12)에서도 주인공이 가난한 집안에서 어머니가 고생을 하여 유학을 시키고 있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지용은 이듬해 서울로 올라와 처가의 친척 집에 기숙하면서 3년간 한문도 배우고 고학도 하여 1918년 4월 2일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의 시 「옛이야기 구절」(『신민』, 1927. 1)은 이때 고생한 내용을 소재로 삼은 것인데 가족사의 슬픔이 내포되어 있다.
집 떠나가 배운 노래를
집 찾아오는 밤
논둑길에서 불렀노라.
나가서도 고달프고
돌아와서도 고달팠노라.
열네 살부터 나가서 고달팠노라.
나가서 얻어온 이야기를
닭이 울도록,
아버지께 이르노니―
기름불은 깜박이며 듣고,
어머니는 눈에 눈물을 고이신 대로 듣고
이치대던1) 어린 누이 안긴 대로 잠들며 듣고
윗방 문설주에는 그 사람이 서서 듣고,
큰 독 안에 실린 슬픈 물같이
속살대는 이 시골 밤은
찾아온 동네사람들처럼 돌아서서 듣고,
―그러나 이것이 모두 다
그 예전부터 어떤 시원찮은 사람들이
끝 잇지 못하고 그대로 간 이야기어니
이 집 문고리나, 지붕이나,
늙으신 아버지의 착하디착한 수염이나,
활처럼 휘어다 붙인 밤하늘이나,
이것이 모두 다
그 예전부터 전하는 이야기 구절일러라.
- 「옛이야기 구절」 전문2)
1) 칭얼대며 성가시게 하던.
이 시에서 그는 집에서 나가서도 고달프고 돌아와서도 고달팠다고 자신의 처지를 직접 밝히고 있다. 열네 살부터 집을 떠나 고생한 자신의 안타까운 사연에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아내는 그 이야기를 윗방 문설주 옆에 서서 듣고 동네사람들은 돌아서서 들었다고 구체적인 상황까지 밝히고 있다. 그만큼 그의 신세가 고달프고 처량했음을 고백한 것인데, 이것이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전부터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난 일임을 밝힘으로써 자전적인 상황에 국한된다는 인상은 피하고자 했다.
그는 휘문고보에 다니면서 문학적 재능을 가진 동문들을 사귀고 문학 활동도 하면서 시인으로 성장할 기반을 다져갔다. 휘문고보는 4년제였는데 1922년에 학제 개편으로 5년제가 되면서 이해 3월에 4년제를 마치고 5학년으로 진급하였다. 이해 3월 마포강 하류 현석리에서 지용은 「풍랑몽」 (『조선지광』, 1927. 7)을 썼다. 이 작품이 실제로 지면에 발표된 것은 앞의 「옛이야기 구절」과 마찬가지로 한참 시간이 지나서였지만, 시인 자신이 밝힌 제작 연월일로 보면 최초의 작품에 해당한다.
당신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려십니까.
끝없는 울음 바다를 안으올때
포도 빛 밤이 밀려오듯이,
그 모양으로 오시려십니까.
당신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려십니까.
물 건너 외딴 섬, 은회색 거인이
바람 사나운 날, 덮쳐오듯이,
그 모양으로 오시려십니까.
당신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려십니까.
창밖에는 참새 떼 눈초리 무거웁고
창안에는 시름겨워 턱을 고일 때,
은고리 같은 새벽달
부끄럼성스런 낯가림을 벗듯이,
그 모양으로 오시려십니까.
외로운 졸음, 풍랑에 어리울 때
앞 포구에는 궂은비 자욱이 둘리고
행선 배 북이 웁니다, 북이 웁니다.
-「풍랑몽 1」 전문
2) 이하 시의 인용은 이해의 편의를 위하여 현대 맞춤법으로 교정한 현대어 정본 형식으로 제시한다.
“당신께서 오신다니/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까”라는 시구가 단락마다 반복되는 형태는 지용의 초기시인 「향수」와 유사하다. 「향수」도 1927년 3월에 발표되었지만 작품 말미에 1923년 3월에 쓴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포도 빛 밤”, “은회색 거인”, “참새 떼 눈초리 무거웁고”, “은고리 같은 새벽달” 등의 구절에서 지용의 뛰어난 언어감각과 표현상의 세련성을 느낄 수 있다. 정서를 펼쳐내는 방식이나 작품의 짜임새도 상당히 안정되어 있다. 이국정조가 부분적으로 나타나면서도 그것이 시의 전체 정서에 자연스럽게 흡수되고 있어서 서구 시의 영향도 슬기롭게 소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감상적 낭만주의 조류가 유행하던 1922년에 이런 시를 쓴 것이 사실이라면 이 시는 당대 최상의 수준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이 ‘풍랑몽’이니 지용은 풍랑이 이는 날 어떤 꿈을 그려보았던 것인데, 당신이 어떤 존재인가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당신이 오실 때의 모양을 신비롭고 놀랍고 은밀한 상태로 비유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고 당신은 현재 올 기미를 보이지 않으며 멀리 바다가 보이는 포구에서 나는 외로움에 잠겨 있다는 사실이다. 서울에 온 지 7년이 지나 학교를 마치나 했더니 다시 5학년으로 진급하여 일 년을 더 다녀야 했던 그는 착잡하게 시간이 교차하는 3월의 어느 날 마포 하류로 나와 자신의 외로움을 시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일 년 후 1923년 3월 그는 「향수」를 썼다. 이때는 휘문고보 5년제를 졸업하고 교비 장학금을 받아 동지사 대학으로의 입학을 앞둔 때였다. 이 시에서도 자아의 외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 전문
1연부터 5연에 걸쳐 고향의 정경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그것을 꿈에
도 잊을 수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가 떠올린 고향의 정경들은 어떠한 것들인가? 얼룩빼기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우는 벌판, 식은 질화로 옆에 졸음에 겨운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는 방안, 이슬에 옷자락을 휘적시며 돌아다니던 풀언덕,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일하는 들녘, 초라한 지붕 밑 흐릿한 불빛에 둘러 앉아 도란거리는 식구들. 이러한 모습을 떠올리며 그곳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였다. 서울에서의 오랜 객지 생활을 끝내고 일본 유학을 앞둔 젊은이의 뇌리에 그려진 것은 청운의 꿈이나 앞날의 포부가 아니었다. 그가 마음 편히 기대고 쉴 수 있는 고향의 정경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곳을 그리워한 것은 그의 실존 자체가 뿌리 뽑힐 듯 고독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2. 일본 유학과 문학적 출발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고향의 정경을 뒤로 하고 지용은 다시 만리타향 경도로 떠나게 되었다. 동지사대학 예과에 입학한 첫 해에는 「압천」(1923. 7) 외에는 이렇다 할 작품을 쓰지 않았다.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느라고 시를 지을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1926년 6월에 경도 유학생들의 학회지인 『학조』가 창간되는데 그 잡지에 지용은 그 동안 써 왔던 여러 편의 작품을 한꺼번에 발표하였다. 이 중에 지용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카페 프랑스」가 포함되어 있다. 지용의 시 중 현실적 국면과 관련된 비애의 정서가 드러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
비뚜루 선 장명등,
카페 프랑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시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뻣적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늑이는 불빛
카페 프랑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비뚤어진 능금
또 한 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
“오오 패롯(앵무) 서방! 굿 이브닝!”
“굿 이브닝!” (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려!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무 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 강아지야
내발을 빨아다오.
내발을 빨아다오.
- 「카페 프랑스」 전문
밤비가 뱀눈처럼 가늘게 내리는 날, 세 명의 젊은이가 카페 프랑스를 향해 달려간다. 한 명은 루바시카를 입고 또 한 명은 보헤미안 넥타이를 두르고 또 한 명은 ‘뻣적 마른’ 모습을 하고 있다. 겉으로는 멋을 꽤 냈지만 이 세 명은 모두 비뚤은 능금, 벌레 먹은 장미처럼 마음속이 어수선한 상태다. 그들은 비를 맞아 제비처럼 젖은 몸으로 빗길을 뛰어간다.
카페에 들어서니 문 앞에 앵무새가 인사를 하고 튤립이라는 칭호를 가진 아가씨는 손님이 없어서인지 커튼 밑에서 졸고 있다. 이 세 사람은 술에 취해 자신들의 비애를 토로한다. 스스로 자작의 아들도 아니고 그저 무력한 백수의 인텔리일 뿐이라고, 나라도 집도 없다고 탄식한다. 취한 데 슬픔이 북받쳐 테이블에 얼굴을 파묻자 차가운 대리석 테이블에 창백한 뺨이 닿아 더욱 처량한 기분이 든다. 마침 테이블 밑에 이국종 강아지가 도사리고 있다. 국적을 잃은 너나 나는 어쩌면 같은 처지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처지와 같은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마음을 가라앉혀 다오. 이렇게 나는 중얼거린다.
여기서 우리는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느꼈을 굴욕감과 정신의 압박감을 읽을 수 있다. 겉으로는 조선 유학생으로서 “금단추 다섯 개를 달고”(「선취」) 자랑스럽게 바다를 건너갔지만 일본에서 공부를 할수록 조선인으로서의 한계는 뚜렷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나라도 집도 없는 약소민족으로서의 비애를 시로 토로한 정지용은 슬픔을 떨쳐버리려는 듯 열심히 시를 지어 발표했다.
3. 조선 최고의 시인
1929년 6월 동지사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정지용은 9월 1일자로 모교인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귀국 후 발표한 첫 작품은 정지용의 명실상부한 대표작으로 알려진 「유리창」(『조선지광』, 1930. 1)이다. 이 작품에도 가족사의 비극이 투영되어 있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유리창 1」 전문
이 시는 시인이 자식을 폐렴으로 잃은 후 그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정지용을 가리켜 감정의 절제를 통하여 시상의 승화를 보인 시인이라고 평하는데 이 시는 그러한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작품이다.
시의 첫 행은 객관적 사물에 주관적 감정이 투영된 상태로 시작된다. “유리에 찬 것이 어른거린다”는 객관적 정황의 제시에 해당하고 그것을 “슬픈 것”으로 인식한 것은 주관적 감정의 투영이다. 객관적 정황으로 보면 아이는 죽었고 죽은 아이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러나 주관적 감정의 측면에서는 아이가 금시 돌아올 것도 같고 유리창에 붙어 언 날개를 파닥거리는 것도 같고 밤하늘에 별로 떠 있는 것도 같다. 이 객관적 정황과 주관적 감정, 현실과 환상, 죽은 아이와 나 사이에 투명한 유리창이 가로놓여 있다.
화자는 유리창에 붙어 서서 입김을 불며 죽은 아이를 그리워한다. 성에가 끼어 밖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유리창 밖에 무언가가 어른거리는 것 같은데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입김을 불어 성에를 녹이고 창밖을 보면 나를 잘 아는 것처럼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유리창 밖을 보려는 노력을 계속했지만 유리창 저편으로 밀려 나갔다 다시 밀려드는 것은 새까만 밤뿐이다. 그 새까만 밤하늘 저편에 반짝 빛나는 별이 하나 보인다. 그 순간 아이의 환영이 별에 겹쳐진다. 그러자 눈가에 눈물이 번지며 별은 물 먹은 듯 부옇게 흐려져 커 보이고 그 별빛은 유리창에,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화자의 가슴에 빛나는 영상으로 들어와 박힌다. 보석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모습으로 아버지의 가슴에 자리 잡는다.
환상을 통해서나마 죽은 아이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일순 황홀하기까지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더 큰 외로움이 가슴에 밀려든다. 이 이중적 심리를 시인은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라고 표현하였다. 시인은 결국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에 몸을 떨며 마지막 탄식을 발한다. 마지막 탄식의 시행 뒤에는 홀로 남아 외로움에 떨고 있는 시인의 자아가 감추어져 있다. 이처럼 이 시는 감정의 절제를 통하여 시인이 지닌 고뇌와 안타까움을 충분히 드러내면서 한편의 시작품으로서의 구조적 완결미를 이루는 데에도 성공하였다.
1931년 『시문학』 3호에 「무제」(시집에 수록할 때 「그의 반」으로 개제)라는 가톨릭 신앙시를 발표한 이래 지용의 가톨릭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 깊어졌다. 1933년 6월에 『가톨릭청년』의 편집을 맡으면서 시의 발표는 주로 이 잡지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내용도 가톨릭 신앙에 관한 것이 많아졌다.
나의 가슴은
조그만 <갈릴레아 바다>.
때없이 설레는 파도는
美한 풍경을 이룰 수 없도다.
예전에 門弟들은
잠자시는 주를 깨웠도다.
주를 다시 깨움으로
그들의 신덕은 복되도다.
돛폭은 다시 펴고
키는 방향을 찾았도다.
오늘도 나의 조그만 <갈릴레아>에서
주는 짐짓 잠자신 줄을 ―.
바람과 바다가 잠잠한 후에야
나의 탄식은 깨달았도다.
- 「갈릴레아 바다」 전문
이 작품이 활용한 소재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갈릴리 바다의 이야기다. 「마가복음」(4:35-41)에 의하면 예수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말씀을 마친 후 제자들과 더불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갔다. 중간에 사나운 광풍이 일자 제자들은 공포에 떨었다. 그래서 잠자는 예수를 깨워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애원한다. 예수가 일어나 바람을 꾸짖어 잠잠하라 하니 바람은 그치고 바다는 잔잔해졌다. 제자들은 탄복하였지만 예수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으므로 이렇게 두려워하였다고 꾸짖는다.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도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아우성칠 만큼 믿음이 부족했던 것이다.
정지용은 복음서의 이 내용을 바탕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의 자세를 반성하였다. 내 가슴은 예수의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었던 갈릴리 바다처럼 심하게 동요하고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다. 현실에서 밀려오는 여러 가지 괴로운 사연들이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던 것이다. 이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는 방법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주 예수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마음의 동요에 고통을 받으면서도 주예수를 부를 생각을 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시에서 신앙을 통해 세상의 고통을 가라앉히려는 시인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1939년 3월 정지용 시의 새로운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 「장수산」이 『문장』 지에 발표되었다. 그는 세속적인 세계와 단절된 순결한 세계의 속성을 산에서 찾으려 했다. 정결성의 추구, 여백미의 조성, 의고적 문체 등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시인이 지키려는 정신의 경지가 아름답게 형상화된 작품이 바로 「장수산」이다.
伐木丁丁이랬거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뫼ㅅ새도 울지 않어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판에 여섯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兀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 ―
―「장수산 1」 전문
첫 구절에 나오는 “伐木丁丁”은 『시경』에 나오는 구절로 나무를 베면 쩡쩡 하는 소리가 난다는 뜻이다. 한 아름이나 되는 소나무들이 빽빽한데 그 나무들이 베어진다면 골이 크게 울릴 정도로 메아리 소리가 쩡쩡하게 울려올 것도 같다. 그러나 사실은 어떠한 움직임도 소리도 없이 고요만이 감돌고 있다. 다람쥐도 돌아다니지 않고 산새도 울지 않는 절대 고요의 공간이 화자의 주위를 감싸고 있다. 여기서 화자는 깊은 산 고요가 뼈를 저리게 한다고 말했다. 시인이 처한 고요한 산은 인간사·세속사의 모든 것을 떨쳐버린 신비로운 공간이다. 이러한 극한적인 고요함 또한 추위처럼 견디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시인은 추위에 뼈가 저린 것이 아니라 차라리 고요에 뼈가 저리다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고요가 뼈를 저리게 할 정도로 주위를 압도하고 있는데 눈 덮인 산을 달이 희게 비춘다. 종이보다 희게 비치는 월야의 설경은 깊은 산의 고요를 한층 더 강화해 준다. 이 백색의 순수 공간에 함께하기 위해 달도 보름을 기다려 비로소 흰빛을 드러내는 것처럼 사람도 여기 동참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러나 이 정결한 공간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은 “웃절 중” 정도다. 그는 여섯 판 장기에 여섯 번을 지고도 웃음을 짓는 여유를 지니고 있다. 시인은 산과 하나가 된 사람이 풍기는 정신의 기미를 좇으며 순수한 자연에 동화되려는 생각을 한다.
이때 마음속에 동요가 일어나고 산의 순결성에 동화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걱정이 생긴다. 바람도 불지 않는 고요 속에 시름이 심하게 요동하는 것이다. 시인은 마음에 일어나는 심한 고뇌를 감지하면서도 순수에 대한 지향성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장수산 겨울 한밤의 고요를 견뎌내겠다는 다짐은 어떤 고통을 치르더라도 결국 그 순수의 세계에 동참하겠다는 뜻이다. 그 동화의 의지를 시인은 “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라고 표현하였다.
‘차고 우뚝하게’라는 말은 겨울산의 모습을 그대로 형용한 것이다. 겨울산의 깊은 고요에 동화되기 위해서는 겨울산처럼 차고 우뚝한 모습을 스스로 가져야 할 것이다. 슬픔이나 꿈은 모두 인간사 · 세속사에 관련된 정서적 반응이다. 겨울산의 절대 고요에 동화되기 위해서는 슬픔이나 꿈도 버려야 한다. 현실적 비애는 물론이고 미래의 이상까지도 떨쳐버릴 때 비로소 겨울산의 얼어붙은 정적, 그 순백의 무욕의 공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 이후 지용은 일 년이 넘게 침묵을 지키다가 1941년 1월 『문장』지에 「조찬」, 「인동차」, 「예장」, 「호랑나비」, 「나비」 등 열편의 작품을 한꺼번에 발표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일제 말 암흑기를 휘황하게 비춘 한국 현대시의 장관이었다. 『문장』이 폐간된 후 정지용은 서둘러 두 번째 시집 『백록담』(1941. 9)을 간행하였다. 시작품은 25 편밖에 되지 않아서 시집 한 권의 분량으로는 조금 부족했지만 여기에 산문 여덟 편을 더하여 한 권의 시집으로 엮은 것이다. 지용은 해방 후의 회고에서 이 시집을 발간할 무렵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무척 피로해 있을 때라고 고백한 바 있다.
4. 해방공간의 비극
지용은 해방을 맞으면서 16년 간 근무하던 휘문고보를 떠나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해방 이후의 혼란 속에 1946년 10월부터 정지용은 경향신문의 주간직을 맡게 되었다. 주간으로 일하면서 그는 이 땅의 사회와 역사를 보는 눈을 넓히고 현실 정세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갖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백록담』 시편 같은 현실 단절의 시는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 당시 한 줄의 시도 쓰지 못했다. 그가 쓴 논설문이 극우계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반발을 사게 되어 좌파라는 오해까지 받으면서 1947년 8월 경향신문사 주간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몇 대학에 강의를 나가고 녹번리의 초당에서 서예를 즐기면서 소일하였다. 겉으로는 한가한 전원생활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의 내면은 허탈감과 번민에 가득했을 것이다.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1)의 서문에서 그는 “才操도 탕진하고 용기도 상실하고 8·15 이후에 나는 부당하게도 늙어간다”고 탄식하였다. 일제시대에 친일도 배일도 하지 않았던 그는 이 시기에 우익도 좌익도 아닌 중도파 지식인으로서 고뇌를 거듭했던 것이다.
동면하는 곰처럼 웅크리고 지내던 그가 1950년 2월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는데 그것이 지용이 이 땅에 최후로 남기고 간 시 「곡마단」이다.
소개 터
눈 위에도
춥지 않은 바람
클라리오넷이 울고
북이 울고
천막이 후두둑거리고
기가 날고
야릇이도 설고 흥청스러운 밤
말이 달리다
불 테를 뚫고 넘고
말 위에
계집아이 뒤집고
물개
나팔 불고
그네 뛰는 게 아니라
까아만 공중 눈부신 땅재주!
감람 포기처럼 싱싱한
계집아이의 다리를 보았다
역기선수 팔짱 낀 채
외발 자전거 타고
탈의실에서 애기가 울었다
초록 리본 단발머리짜리3)가 드나들었다
원숭이
담배에 성냥을 켜고
나는 사십 년 전 처량한 아이가 되어
내 열 살보다
어른인
열여섯 살 난 딸 옆에 섰다
열 길 솟대가 계집아이 발바닥 위에 돈다
솟대 꼭두에 사내 어린아이가 거꾸로 섰다
거꾸로 선 아이 발 위에 접시가 돈다
솟대가 주춤 한다
접시가 뛴다 아슬 아슬
클라리오넷이 울고
북이 울고
가죽 잠바 입은 단장이
이욧! 이욧! 격려한다
방한모 밑 외투 안에서
위태 천만 나의 마흔아홉 해가
접시 따라 돈다 나는 박수한다.
-「곡마단」 전문
3) 단발머리 차림의 사람.
이 작품은 곡마단의 묘기를 바라보는 시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시인의 처지를 그대로 드러냈다.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실제 나이 마흔 아홉을 그대로 말하고 있다. 이 시가 마흔 아홉 되는 해 2월에 발표된 것으로 보아 시를 쓴 것은 1월경일 것이다. 그에게는 해방 이후 몇 년의 세월이 원숭이가 재주를 부리고 어린 아이가 재주를 부리는 곡마단의 재주놀음처럼 비쳤을 것이다. 그 곡예는 거꾸로 선 아이의 발위에서 접시를 돌리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일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그 곡예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바보처럼 박수를 치고 있다.
이 시에는 마흔 아홉 살 새해를 맞는 시인의 착잡한 심정이 응결되어 있다. 몇 년 동안 한편의 시도 쓰지 않다가 불혹의 나이가 끝나는 시점에 쓴 이 시를 시인은 서둘러 발표하였다. 이 시에는 어지러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어처구니없이 희생당한 한 인간의 비애가 응축되어 있다. 빙글빙글 도는 접시를 보며 박수치고 돌아가는 곡예의 삶은 비단 그만의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우리 민족 모두의 것이기도 했다. 그가 이 곡예와 같은 허황한 삶을 시로 표현한 때로부터 다섯 달이 지나서 6·25 전쟁이 터졌다. 그리하여 한국 민족은 또 다시 위태 천만한 곡예의 어지러움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정지용은 위태로운 6·25의 소용돌이 속에 행방불명되었다.
누가 무어라 해도 그는 1930년대 이래 한국 최고의 시인이었고 행방불명의 그 순간까지 우리 시단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이었다. 전화의 포연 속에 무덤조차 남기지 못하고 그는 사라졌지만, 그의 시의 광휘는 저 먼 후세에까지 영원토록 전해질 것이다.
이숭원 (李崇源)
1986년 『한국문학』평론으로 등단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현 : 서울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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